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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 태종2 외척과 공신 숙청

구름위 2013. 6. 18. 15:20

왕에게 동지는 없다, 신하만 있을 뿐

 

 

1402년(태종 2년) 3월 7일. 태종은 성균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 권씨를 ‘어진 행위가 있다는 이유로’ 후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혼인을 주관하는 가례색(嘉禮色)까지 설치했으나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가 태종의 옷을 잡으며 “제가 상감과 어려움과 화란(禍亂)을 함께 겪어 국가를 차지한 것인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라고 거칠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환관과 궁녀를 시켜 권씨를 쓸쓸히 별궁(別宮)으로 안내해야 했다.

『태종실록』은 “상이 며칠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즉위 직후에도 “중궁의 투기 때문에 경연청(經筵廳)에 나와 10여 일 동안 거처하였다”고 『정종실록』이 적고 있는 대로 민씨의 투기는 처음이 아니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의 취첩(取妾)은 왕실의 안녕을 위한 합법적 제도였다. 궁중의 모든 여성은 내명부(內命婦)에 소속된 여관(女官)으로 왕비의 지휘를 받았다. 후궁에게는 정1품 빈(嬪)부터 종4품 숙원(淑媛)까지 주어졌고, 정5품 상궁 아래는 궁녀였다. 왕비에게 궁중의 여인들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통솔의 대상이었다. 태종이 더욱 심각하게 여긴 것은 ‘내가 상감과 어려움과 화란을 함께 겪어 국가를 차지했다’는 말이었다. 여흥(驪興) 민씨(閔氏)와 공동 왕권이란 뜻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숙번의 안성 이씨와 조영무의 한양 조씨도 지분을 요구할 수 있었다.

태종의 즉위 과정을 되짚어 보면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민씨는 고려 충선왕 때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 15가문에 들 정도로 명가였다. 게다가 제1차 왕자의 난을 처음 기획한 인물은 민씨 부인과 동생 민무질이었다. 『태조실록』은 먼저 민무질과 상의한 부인 민씨가 종 소근(小斤)을 급히 궁으로 보내 방원을 불렀고, ‘셋이 비밀리에 한참 이야기’한 후 거사에 나섰다고 전한다. 환수령이 내려진 무기를 몰래 감추었다가 내놓은 인물도 부인 민씨였다.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 때도 “부인이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권했다”고 『정종실록』은 전한다. 제1, 2차 왕자의 난 모두 처남 민무구·무질이 선봉에 서서 칼을 휘둘렀고 두 처남은 공신에 책봉되었다. 부인 민씨가 태종의 왕위를 두 가문의 것으로 생각한 것은 일견 당연했다.

 

그러나 태종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즉위를 천명(天命)의 결과로 보았다. 처남들은 천명을 따른 것으로서 그 대가로 왕권의 분할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즉위한 이상 처남들은 동지가 아니라 신하였다. 국왕과 동지인 공신이 존재한다면 법치(法治)는 무너지고 인치(人治)가 횡행할 것이었다. 그러면 국가는 특정 세력의 사적 이익에 종사하는 기관으로 전락할 것이었다.

태종의 이런 우려를 무시한 채 민씨 형제들은 즉위 초부터 세력 확장에 나섰다. 태종이 원년(1401) 정월 초하루 강안전(康安殿) 터에 거둥하여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데, 상장군(上將軍) 이응(李膺)이 차서(次序)를 잃었다고 사헌부에서 탄핵했다. 태종은 “민무구가 사헌부를 사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응이 민무구 등에 대한 총애가 너무 극진하다며 “억압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제거하기 위해 탄핵했다는 뜻이었다. 태종이 권력 배분을 거부하자 형제는 스스로 세력을 키우는 한편 세자에게 접근했다. 태종에게 이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종 7년(1407)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화 등이 민씨 형제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공세의 시작이었다. 이화는 태조의 이복동생이자 태종의 숙부라는 점에서 사전 교감에 의한 상소였을 것이다.

지난 해(1406) 재변(災變)이 끊기지 않는다며 태종이 양위를 선언했을 때 모든 신하가 명의 환수를 극력 요청했으나 형제는 은근히 선위(禪位)를 바랐다는 혐의였다. ‘태종이 선위 계획을 발표했을 때 모든 신민은 애통해했으나 민무구 형제는 화색을 띠었다’는 심증뿐인 공격이었지만 어린 세자를 끼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였으므로 죄는 위중했다. 두 형제가 강하게 반발하자 이조참의 윤향(尹向)이 ‘태종이 양위하려고 할 때 민씨 형제가 비밀리에 내재추(內宰樞)를 선정했다’고 폭로했다. ‘내재추’는 고려 말기 5, 6명의 대신이 전권을 행사함으로써 왕권을 약화시켰던 기구였다. 이런 공격이 잇따르면서 두 형제는 태종 8년(1408) 10월 지방으로 쫓겨나야 했다. 태종은 이때 처남들을 내쫓는 교서를 발표해 ‘임금이 아들이 많으면 형세가 심히 불편하다’며 세자 외의 다른 왕자들을 제거해 ‘왕실을 약하게 만들려 했고’ ‘양인(良人) 수백 구(口)를 사천(私賤·노비)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태종 9년(1409) 우정승(右政丞) 이무(李茂)가 민씨 형제를 옹호했다는 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하면서 형제의 처지는 더욱 궁박해졌다.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에서 공격을 재개해 “자고로 난역(亂逆)하는 신하는 먼저 당(黨)을 만든 연후에 악한 짓을 감행하기 때문에 『춘추(春秋)』에서 그 당(黨)을 엄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면서 전 계림부윤(鷄林府尹) 이은(李殷) 등 13명을 ‘간인(奸人:민무구 등)에 아부한 죄’로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민씨 형제는 태종 10년(1410) 3월 제주 유배지에서 자진(自盡·스스로 목숨을 끊음)해야 했다.

5년 후인 태종 15년(1415)에는 남은 처남 민무휼·무회 형제까지 옥사(獄事)에 연루되었다. 노비 소송에 패한 전 황주(黃州)목사 염치용이 ‘태종의 후궁 혜선옹주(惠善翁主) 홍씨와 영의정 하륜 등이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패소했다면서 민무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무회는 충녕(忠寧·세종)에게 이를 알렸다. 충녕에게서 송사 이야기를 들은 태종은 “한낱 노비 소송에 임금을 연루시키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이 때문에 두 형제도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잇따른 비위 사건으로 처지가 불안했던 세자 양녕이 ‘작년(1414) 무휼·무회 형제가 두 형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했다’고 공격에 가세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게다가 태종 15년 겨울 ‘왕자 이비(이비)의 참고(慘苦)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태종은 6~7년 전 잠시 입궐했던 민씨 친정의 여종을 임신시켰는데 이 사실을 안 원경왕후가 겨울 12월에 산통(産痛)을 시작한 여종과 갓난아이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한 사건이었다. 자신의 혈육 이비와 그 모친을 죽이려 했던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민무회 형제 사건을 재조사시켰고 그 결과 세자에게 “무구·무질 형은 모반죄로 죽었으나 사실은 무죄입니다”고 옹호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두 형처럼 사약을 마셔야 했다.

외척뿐이 아니라 측근 이숙번도 제거 대상에 올랐다. 태종 16년(1416) 이숙번은 박은(朴誾)이 우의정이 된 데 불만을 품고 가뭄으로 모두가 근신하는데 입궐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숙번 역시 사형 위기에 몰렸으나 과거 태종에게 “신은 크게 우매하니 나중에 설령 죄를 지어도 성명을 보존케 하여 주소서(『태종실록』 17년 3월 4일)”라고 요청했었고 태종이 “종사(宗社)에 관계되지 않으면 어찌 보존해 주지 않겠는가”라고 답했었기 때문에 겨우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태종은 “전의 말은 종사와 관계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만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며 살아생전 도성(都城·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훗날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민무구의 옥사’에서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한 것은 무슨 죄에 연루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역적죄를 범했다면 여기에서 그칠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네 처남은 혐의는 뚜렷하지 않아서 많은 의혹을 낳았다. 사적(私的) 관점에서는 태종의 행위는 배은(背恩)일지 모르지만 이런 피의 숙청을 통해 왕권은 안정되어 갔다. 국왕과 동지적 관계라고 생각하는 신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 법 아래 복종했다. 현재도 우리 사회의 고질인, 최고위층과의 사적 친분에 의한 권력의 사적 점유를 태종은 확실히 단절시켰다. 이렇게 조선은 정상적인 왕조가 되어 갔고, 이런 왕조를 물려주기 위해 태종은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민무질 묘. 태종의 처남 4형제 중 유일하게 묘가 전한다. 민무구·민무휼·민무회의 묘들은 실전이라고 한다. 민무질은 제주도에서 자진하여 문종 때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민무질 묘 앞에 있는 민무질 신도비. 사진 권태균

 

호랑이가 새끼 키우듯, 후계자는 엄하게 키워라

 

 

태종은 재위 5년(1405) 세자 이제(이제·양녕대군)에게 고대 은(殷)나라의 걸(桀)과 주(周)나라의 주(紂)왕이 백성에게 버림받은 독부(獨夫)가 된 이유를 물었다. 세자가 “인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답하자 “나와 네가 인심을 잃으면 하루아침도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이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고 훈계했다. 피의 숙청으로 태종은 공신의 원망은 샀지만 태종우 고사가 말해 주듯 백성의 인심을 얻었다. 권력은 칼로 창출하지만 유지는 책으로 한다고 생각한 태종은 독서가였다.

『태종실록』2년(1402) 6월조는 “상이 매일 청심정(淸心亭·개경 수창궁 후원)에 나가서 독서하는데, 덥거나 비가 오거나 그치지 않았다”고 적고 있고, 3년 9월조는 “상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독서하는 엄한 과정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태종은 특히 역사서와 경서(經書)를 열독했다. 역사서에는 현실에 응용 가능한 사례들이, 경서에는 유교국가의 통치 철학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왕(嗣王·후계 임금)도 독서가여야 한다고 생각한 태종은 재위 2년(1402) 아홉 살의 원자 이제를 교육시키는 경승부(敬承府)를 설치했다. 그러나 성현(成俔)이『용재총화(용齋叢話)』에서 “세자는 성색(聲色·노래와 여자)에 빠져 학업에 힘쓰지 않았다”고 쓴 것이 정확했다.

태종은 재위 7년(1407) 열네 살의 세자를 숙빈(淑嬪) 김씨와 혼인시키며 그 장인 김한로(金漢老)에게 “경(卿)은 멀리는 심효생(沈孝生·방석의 장인)을 본받지 말고 가까이는 민씨(閔氏)를 경계하여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면서 “나는 호랑이가 새끼를 키우는 것처럼 세자를 엄하게 키우려 한다”고 경계했다. 태종은 재위 3년 시강(侍講) 김첨(金瞻)이 수(隋) 양제가 망한 원인이 성색 때문이었다고 하자 “그렇다! 성색은 실로 천하를 망치는 근본”이라고 동조했다.

태종도 후궁을 두었지만 말년에 총애하던 숙공궁주(淑恭宮主)의 부친 김점(金漸)이 평안도 관찰사 시절 수뢰 혐의로 수사를 받자 “탐오(貪汚)한 사람의 딸을 궁중에 둘 수 없다”면서 출궁시킨 후 다시는 들이지 않았다. 태종은 재위 15년(1415) 세자와 어울리는 기생 초궁장(楚宮粧)이 상왕 정종의 옛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쫓았다. 그러나 세자는 그후에도 구종수(具宗秀)의 사가까지 쫓아다니며 초궁장과 어울렸다. 세자 시강원의 깐깐한 스승 이래(李來)가 사냥용 매(鷹)나 악공(樂工·악사) 때문에 세자와 다툰 일화는 숱하다. 태종은 재위 15년 세자전(世子殿)에 잡인들이 들락거린다는 말을 듣고 세자의 사부 이래와 변계량(卞季良) 등을 불러 “경 등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무엇을 꺼려 세자를 바른 길로 보도하지 못하는가”라고 꾸짖었다. 이래는 세자에게 가서 “전하의 아들이 저하(邸下)뿐인 줄 압니까”(『태종실록』 15년 1월 28일)라며 흐느꼈다. 세자는 몰랐지만 이래는 태종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 문제는 더 심각했다. 전라도 적성(積城·순창)현에 살던 어리는 친족을 보러 상경해 곽선의 양자인 전 판관(判官) 이승(李昇)의 집에 머물렀다. 악공 이오방(李五方)으로부터 어리의 미모와 재예(才藝)가 빼어나다고 들은 세자는 어리를 세자궁으로 납치했다. 축첩(蓄妾)이 합법인 조선에서 어리는 유부녀였다. 양부의 첩을 빼앗긴 이승이 고소하려 하자 세자는 사람을 보내 “내가 한 일을 사헌부에 고할 것인가? 형조에 고할 것인가? 어느 곳에 고할 것인가?”라고 힐난했다. 권력남용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심지어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과 사적 관계까지 맺었다. 민무구 형제를 옹호하다 사형당한 이무(李茂)의 인친(姻親) 구종수의 집에 가 박혁인(博奕人:바둑·장기 명인) 방복생(方福生), 악공 이오방, 기생 초궁장·승목단(勝牧丹) 등과 어울려 놀았다. 이때 구종수 형제 등이 “저하께서 저희를 길이 사반(私伴·사적 수하)으로 삼아 달라”고 청하자 허락의 증표로 옷까지 벗어주었다. 한마디로 공사 구분이 안 됐다. 태종이 구종수 등을 귀양 보낸 후 다시 목을 벴어도 세자는 변하지 않았다. 태종이 출궁시킨 어리를 장모 전씨를 시켜 몰래 세자전으로 다시 데려왔다. 그래서 태종은 재위 18년(1418) 5월 10일 세자를 구전(舊殿)으로 쫓아냈다. 마지막 경고였다. 그러나 세자는 보름 후에 되레 수서(手書)를 보내 항의했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해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어리)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이 첩(妾)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 『 태종실록』18년 5월 30일)

세자는 조사의 난 때 태조를 동북면까지 모셔갔던 신효창(申孝昌)은 죽이지 않으면서 장인 김한로는 왜 처벌하느냐고도 따졌다. 외척까지 옹호하는 것을 본 태종은 세자 교체를 결심하고 정승들에게 수서를 보여 주었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했으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 없어서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면서 오직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기를 바랐으나 이제 도리어 원망하며 싫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태종이 폐위 의사를 밝히자 의정부와 삼공신(三功臣)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료는 즉각 동조 상소를 올렸다. 세자의 비행은 ‘매와 개[鷹犬]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던 황희(黃喜) 등 소수 신하만이 반대였다. 신료 사이에는 양녕의 아들을 대신 세워서도 안 된다는 공감대까지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효령과 충녕 중에서 누가 적당한지를 묻자 “아랫사람이 말할 수 없는 일”이라며 사양했고 태종은 “충녕(忠寧)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몹시 추운 때나 더운 때도 밤새 독서하므로 병이 날까 두려워 야간 독서를 금지했으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태종실록』18년 6월 3일)며 충녕을 선택했다.

영의정 유정현 등은 “신 등이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擇賢]도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례했다. 충녕을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뜻밖에도 충녕이 술을 조금 할 줄 알아 명 사신을 접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명(明) 성조(成祖)는 1406년(태종 6) 안남(安南·베트남)을 침략해 호 꾸이 리(胡季이) 부자를 납치해 갓 건국한 호조(胡朝)를 멸망시켰다. 명은 내사(內史) 정승(鄭昇)을 사신으로 보내 이를 조선에 알렸다. 명과의 우호관계는 국체 보존의 핵심 과제였으므로 술을 전혀 하지 못하는 효령(孝寧)은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두 달 후인 8월 8일 태종은 전격적으로 왕위를 물려주었다. 태종은 양위의 변에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을 거부할 때 ‘필마(匹馬) 한 필만 거느리고 혼정신성(昏定晨省·조석으로 부모를 모심)하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왕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형제와 싸우며 임금이 된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신하들이 말리자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족하다”며 강행했다. 태종은 권력을 호랑이 등에 탄 것으로 여겼다. 자칫하면 호랑이에게 삼켜 먹힐 것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살아생전 후계자 수업을 시키려 했다. 호랑이 등에서 내려온 것으로 태종은 악역이 끝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권력이 호랑이 등에 탄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