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의 난 2
남경 공략
호남에 들어서면서 태평군은 민족 의식이 매우 강한 격문을 어려 차례 발표하였다. 이른바 '봉천토호격'으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내용이었다.
태평천국 역사상 크다란 오점은 '무창'에서 젊은 여성들 가운데 미녀를 골라 간부들의 처첩으로 삼은 일이었다. 미녀로 뽑히기를 꺼려한 여성들은 고의로 추녀로 위장하였고 심사전에 반드시 목욕을 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리고 무창에 보관되어 있던 막대한 금은보화도 얻었다.
태평군은 '무창'을 점령한 후 '장강'을 타고 '남경'을 공략할 준비를 서둘렀다. 2월 9일 발진한 태평군은 1만여 척의 배로 장강을 뒤덮은듯하였고 돛대는 숲을 이루었다. 일부는 육로를 따라 남경으로 향하였다. 수륙 양로군을 합하면 50만 대군이었다.
무창을 출발한 지 2주일 만에 안경을 함락한 태평군은 파죽지세로 '무호'를 함락하고 다시 1주일 후에는 '남경성'에 육박하였다. 태평군은 3월 19일 지뢰를 이용하여 남경의 '의봉문'을 폭파하는 데 성공하엿다. 태평군은 물밀듯이 성내로 들어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청군은 무력했지만 남경의 공방전은 치열하여 10여 일에 걸치는 사투가 계속되었다. 남경 주둔 팔기병 3만 명이 결사적으로 방어 작전을 펼쳤으나 함풍 3년(1853) 마침내 남경은 함락되었다.
"관병은 하나도 남기지 말되 백성으은 절대로 해치지 말라."
태평군은 만주족 팔기병 3만 명은 전원 몰살시켰다.
홍수전은 3월 29일 남경에 입성하여 양강총독 관저를 천왕부, 남경을 천경이라 개칭하엿다. 이렇게 해서 천경을 수도로 하는 태평천국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태평천국은 남경을 점령한 해에 '천조전묘 제도'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왕조에 대한 이상을 구체화한 것으로 천하의 토지는 천하의 사람들이 함께 경작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만들어진 제도였다. 따라서 경작지의 사유화를 금하고 국가 소유로서 경작자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수확의 잉여분은 국고에 납입시키며 개인적인 축재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게 태평군은 주변의 영토 건설에 주력하는 한편 북경 공략을 위해 '이개방'을 정(定)호후,'임봉상'을 정(靖)호후,'길문원'을 평호후에 봉하여 이들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북벌군을 편성했다.
남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북경 조야를 뒤흔들어 놓았다. 태평군이 단순한 봉기군이 아니라는 사실과 정부군이 상상 외로 약체화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태평군과 전투에서 유수한 군수뇌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청 조정은 붕천군 8천, 치치하얼군 4천, 길림군 2천, 흑룡강군 2천 명 등 총병력 1만 6천 명으로 북경 방어에 배치하고 각지의 주둔군은 언제던지 출동이 가능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태평천국의 북벌군은 5만 명으로 편성하여 '양주'를 떠나 '강소'에서 북서진하여 '안휘'를 공격한 다음 '하남'에 진출하여 '개봉'을 공략하고 '황하'를 건너고 '산서성'을 지나 1853년 10월에는 '천진에' 육박할 기세였다. 태평 북벌군이 '광서' 출신을 근간으로 해서인지 화북 백성들의 호응은 다소 소극적이었다.
북벌군은 10월에 하북에 들어선 뒤 북경의 바로 턱밑에 있는 '천진'을 공격하였다. 청군도 천진 수비의 중요성에 비추어 철통 같은 방어 태세로 태평군을 맞았다. 청군은 제방을 끓어 수공으로 공격하자 태평군은 대패하여 '정해'까지 후퇴하였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어느듯 겨울이 닥쳐왔다. 그러자 태평군은 동사자가 속출하고 식량마져 떨어져 가자 다음해 2월 '정해'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청군에서는 천진 전투를 몽골족의 맹장 '승격임심'이 지휘하였다. 그의 부하 중에는 추위에 익숙한 몽골족 기병이 많았다. 북벌군은 몽골족 기병에 압도되어 '정해'에서 '부성'까지 도망가는 사이 사령관 '길문원'이 전사하였다. 청군의 작전은 지형에 어두운 북벌군을 분산시켜 각개격파하는 전술이었다.
사령관 '임봉상'의 부대는 '연진'에서 격파되어 사령관 임봉상이 전사하였고 '이개방'의 부대는 '풍관둔'에서 포위되어 청군의 수공으로 전멸하였다. 함풍 5년(1855) 4월 16일 이렇게 되어 태평천국의 북벌군의 북경 공략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그래서 북벌군의 궤멸은 태평천국에게 큰 타격을 주었는데 병력의 반을 잃은 셈이 되었다.
증국번의 등장
태평천국은 북벌과 병행하여 서정도 감행하였는데, 서정군은 악주.무한을 점령하고 기세를 올리면서 강서로 진출하여 증국번이 거느리는 민간 의용군인 '상군'과 충돌하였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것은 민간 의용군인 상군이었는데, 청군이 부패하고 나태해짐에 따라 전투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패전을 거듭하자 청 조정에서는 정규군을 대신하여 민간 의용군을 능력있는 관료로 하여금 지방 당위로 조직토록 하였던 것이었다.
백련교도의 난 때에도 있었던 일로 민간을 무장시키는 일은 군벌을 형성할 우려가 있고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달가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가 부패하여 패전을 거듭하였기 때문에 조정은 1853년 증국번에게 지방의 무장 자위 집단이며 치안을 담당하고 관군을 보조하는 '단련'을 편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증국번은 모친상을 당하여 복상 중이었고 또 단련을 편성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친구와 그의 동생 '증국전'과 의논한 끝에 조정의 명령에 따라 장사에 가서 순무 '장양기'와 만나 협의하게 되었다.
증국번은 장사에서 태평군이 저지른 참상을 보고 분개하였으며 의분을 참지 못해 의용병 모집을 결심하였다. 그는 모병시 성실한 사람만 선발하고 지휘관도 군 경험이 없는 순수한 서생들을 선출하였다.
증국번은 북경 조정의 출병 독촉에도 출동을 하지 않고 정병제일 주의를 내세워 훈련에 박차를 가하였고 이동간 필요한 배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854년 준비가 완료되자 상군을 출동시킴과 동시에 유명한 비적을 토벌한다는 격문인 '토월비격'을 발표하였다. 증국번은 이 격문에서 '태평군이 중국 전통을 파과하고, 그리스도교를 강요하여 인민의 자유를 속박하고 있음'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증국번이 거느린 상군은 수륙 양로로 진격하여 악주.무주를 탈환하고 강서로 진격하여 '구강'을 공략하였으나 '안경'에 있던 태평군의 '석발개'가 원군을 지원하는 바람에 '정항'에서 패배에 이어 두 번째 패배를 당하였다. 증국번은 '남창'까지 도망하여 투신 자살까지 기도하였으나 다행히 구출되었다.
함풍 5년은 태평천국의 북벌군이 궤멸된 해였으나 서정군은 무창을 다시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한편 태평천국이 남경을 점령한 직후 '유여천'의 무리가 '소도회'라는 '천지회' 계통의 결사대를 이끌고 1853년 9월 '상해현성'을 점령하고 '대명태평천국'이라 칭하여 태평천국과 제휴하려 하였으나 태평천국에서는 거절하였다.
태평천국 수립 후 상해 거류 외국인은 엄정 중립을 선언하였지만 프랑스는 결국 청국측에 가담하여 소도회를 소탕하고 프랑스인의 조계를 획득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지금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던 외국 사절들도 태평천국에 적대적인 청국을 원조함으로써 태평천국은 불리한 국면을 맞이 하였다. 이러한 불리한 국면에서 태평천국은 자체내에서 걷잡을 수 없는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태평천국의 내분
천왕 홍수전을 주축으로 하는 동서남북 네 왕 가운데 남왕 '풍운산'과 서왕 '소조귀'가 이미 전사하여 동왕 '양수창'이 사실상 실권자가 되어 홍수전을 제처놓고 모든 결재를 담당하였다. 양수천은 미천한 출신이나 머리가 비상하여 태평천국의 일인자인 홍수전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홍수전은 천왕부 깊숙한 곳에서 사색과 저작에 몰두했을 뿐 권세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양수청의 언행과 독단적인 행태를 인지하고 이때부터 양수청의 세력을 견제해야 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야사나 공초 내용에는 홍수전과 양수청 사이에 여자 이야기가 나와 있으나 실제는 권력 다툼이 원인으로 판단하고 있다. 증국번의 첩보 주임이었던 '장덕견'의 보고에 의하면 이미 1년 전부터 내분의 조짐이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내분의 스토리는 대략 이러하다.
홍수전은 날로 커져가는 '양수청'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당시 강서에 있던 '위창휘'에게 양수청을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위창휘는 9월 1일 야밤에 친위 병력 3천 명을 이끌고 남경으로 들어와 9월 2일 새벽 동왕부를 급습하여 양수청을 위시한 그의 일족,친척,부하 등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때 익왕 '석달개'는 무창의 '홍산'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다가 남경의 대학살 소식을 듣고 급거 남경으로 달려왔다. 그는 평소 양수청의 횡포를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으나 무차별적인 학살에 위창휘와 그를 도운 진일강을 힐문할 목적으로 남경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정의감은 현실 앞에 무력해지고 만다.
남경에 온 석달개는 위창휘가 무턱대고 석달개를 숙청하려는 움직임을 직감하고 자신의 입장이 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소남문 가까이 있는 성벽을 타고 성 밖으로 탈출하여 안경으로 돌아왔다.
한편 위창휘는 석달개의 익왕부를 포위하고 석달개의 가족과 그의 부하들을 모두 참살하였다. 위창휘는 자기 계열이 아닌 다른 계열의 사람들은 모두 죽이는 잔학함을 저지르는 바람에 수만 명의 간부들이 희생되었다. 이렇게 남경에서 태평천국의 유혈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 때 광동에서 '애로 호' 사건이 발생하였다.
석달개가 남경을 탈출하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위창휘는 부하 '진일강'으로 하여금 추격을 명하였다. 처자와 일족이 모두 몰살당한 25세의 청년 장군 석달개가 분루를 삼키며 보복을 노리는 것은 당연하였다. 임지인 안경에 돌아온 그는 각처의 태평군에게 '군사를 남경으로 돌려 임금 곁에 있는 간사한 무리를 제거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띄워 보냈다.
전선에 있던 동왕 양수청 계열의 모든 부대는 양수청의 죽음 소식에 어쩔줄 모르고 있다가 익왕의 격문을 접하자 속속 익왕 석달개 진영으로 합류하였다. 익왕과 가장 절친했던 천지회 소속의 '나대강'의 부하들도 합류하였다.
익왕 석달개를 추격하기 위해서 남경을 출발한 '진일강'은 북왕 위창휘의 평판이 너무 나쁘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오로지 청군과의 싸움만이 옳은 길이라 판단하고 위창휘의 명령을 거부하고 석달개를 추격하지 않았다.
남경을 노리는 세력은 석달개의 일족인 '석진길'과 양수청의 사촌동생 '양보청'도 복수를 하기 위해 남경으로 향했다.
동왕부 대학살 사건이 있은 후부터 북왕 위창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각처에 주둔했던 태평군이 남경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남경성의 남문인 취보문 밖에 '천하제일탑'으로 불리는 높이 약 80미터에 달하는 '대보은사탑'이 있었는데 석달개군이 탑을 점령하여 성내애 포격을 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 탑을 파괴한 것이다. 이 천하제일탑은 흰 유리 타일과 오색의 유리 기와로 장식된 문자 그대로 천하 제일의 건축물이었다.
초초해진 위창휘는 석달개를 수령으로 하는 세력이 남경을 공략하기 전에 천왕부 홍수전을 공략하여 태평천국을 탈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산이었다. 천왕부의 저항이 예상 밖으로 완강하였고, 그의 부하들이 사기가 떨어져 탈주병이 속출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자 천왕부를 포위만 하고 다음날 공격을 미루고 있었다.
다음 날 정오 천왕부를 포위한 위창휘군의 후방에 난데없이 이들을 습격하는 군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남경성에 숨어 있던 양수청계의 몇몇 간부들이 위창휘군을 습격한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천왕부의 문이 열리면서 친위대가 쏟아져 나왔다. 이에 위창휘군은 앞뒤에서 협공을 당하자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결국 위창휘는 체포되었고 사지가 찢기는 혹형을 당하여 죽었다.
홍수전은 석달개에게 남경으로 돌아와 태평천국의 정치를 보좌하도록 조서를 내렸다.남경 근방까지 와 있던 석달개에게 위창휘와 진일강의 수급이 보내졌다. 그는 태평천국 안에서 가장 학식이 풍부하고 유학자 타입의 젊은 장수였다. 남경의 백성들은 이 같은 석달개에게 큰 기대를 걸고 남경 어디를 가나 석달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홍수전의 측근들은 시민들의 이러한 반응에 불안감을 느끼고 홍수전의 두 형인 '홍인발'.'홍인달'을 중용하도록 홍수전에게 부추겼다. 당시 홍수전의 두 형은 무능하고 포악하여 아무런 직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홍수전은 금전촌에서 거병한 이래 동지 양수청과 위창휘에게 배반을 당함으로써 인간을 불신하는 경향이 부쩍 늘었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육친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856년 태평군이 점거하고 있던 무창이 호북 순무 '호임익'이 거느리는 청군에 포위되어 저항하다가 마침내 함락되고 말자 홍수전의 두 형은 익왕 석달개를 비난하였으나 홍수전은 남경으로 돌아와 정치를 보좌하라고 조서를 내린 것이 자신이기에 고민에 빠졌다.
다음해 홍인발은 안왕, 홍인달은 복왕에 봉함으로써 측근파와 익왕파간에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무능한 두 형을 중용한 것에 대하여 석달개는 홍수전의 처사에 실망하게 되었고 이미 남경은 자신의 이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인되자 재상으로 정치를 보좌한 지 반년만에 20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남경을 떠나 버렸다.
석달개가 물러난 후, 태평천국은 '이수성'과 '진옥성' 두 사람이 운영하였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홍수전의 형들인 안왕과 복왕은 관직이 삭탈되어 버렸다. 이는 이들에 대한 평판이 너무 나빠 백성들의 원망의 화살이 홍수전에게 미칠것이 두려워 한 '몽득은'이라는 사람이 천왕에게 진언하여 내린 결과였다. 몽덕은은 홍수전이 육친 이외에 가장 신임하는 인물로 이후 태평천국은 진옥성.이수성.몽덕은 세 사람이 운영하였다. 내분의 상처와 병력의 이탈로 태평천국의 말로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익왕 삭달개는 대군을 거느리고 남경을 떠났으나 일정한 근거지를 가지지 못하였다. 태평천국으로 복귀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1859년에는 친히 관제와 예제를 제정하는 등 태평천국과 별로로 정권을 만들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1861년 '이영리'라는 사람이 사천에서 봉기하자 석달개는 이에 호응하여 사천에서 합류하여 '대도하'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고 청에 투항하였다가 1863년 마침내 책형에 처해졌다.
1859년 4월 홍수정은 홍콩에서 사촌 '홍인간'을 남경으로 불러 정치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홍인간은 유능한 인물로 간왕에 봉해져 정무를 총괄했다. 내분의 상처에서 다시 일어난 태평천국은 새로운 지도자 '진옥성'과 '이수성'의 분전으로 항주와 소주 등의 요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같은해 '애로 호' 사건에 의한 천진 조약의 비준을 놓고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원명원을 파괴하였다. 다음해 남하한 영국 함대의 제독 '호프'가 남경을 방문했을 때 태평천국은 연내에는 상해를 공격하지 않을 것과 장강에서 무역 활동을 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861년 9월,태평천국의 중요 거점이었던 '안경'이 청군에 함락되자 천왕 홍수전은 그 책임을 물어 홍인간과 진옥성을 해임하고 다시 무능한 홍인발.홍인달을 중용하자 모처럼 새 바람이 일었던 태평천국은 다시 어지럽게 되었다.
상해 공격
홍수전은 영국 제독 '호프'와의 약속 기간이 지나자 1862년 1월 상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 상해에는 미국인 '와드'를 대장으로 하는 외인 부대인 '양창대'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 부대는 소도회가 상해현성을 점령했을 때 외인 자위대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당시의 외인 부대는 엄정 중립을 지켰으나 이번의 외인 부대는 청조에 가담한 용병부대로 청 조정은 이 외인부대를 '상승군'이라 불렀다.
태평군의 상해 공격은 매우 치열하였는데, 프랑스 제독 '프로트'가 전사하고 영국 제독 '호프'는 부상을 당하였다. 상승군 부대장 '폴스터'는 포로가 되었다가 나중에 무기,탄약과 교환 조건으로 석방되기도 하였다.
이수성이 지휘하는 태평군은 송강 부근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결과 대승을 거두고 소총 5백 정, 화약 36상자를 노획하는 등 태평군의 상해 점령은 바야흐로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이때 남경이 청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천왕 홍수전으로부터 위급한 남경을 구하라는 전문이 하루에도 세번 씩 날아들었다. 이수성은 눈물을 삼키며 상해 공략을 중지하고 남경을 구출하기 위해 철수하였다.
홍수전은 상해 공략을 중지시킨 것을 나중에 후회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전세는 날이 갈수록 태평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863년 12월에는 소주를 빼앗기고 다음해에는 항주까지 청군에 빼앗기는 대참패를 맛보았다. 소주를 공략한 것은 청군이 아니라 '상승군'이 주력을 이루었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의 수도 남경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홍수전은 남경이 함락되기 48일 전인 6월 1일 병사했다고도 하고 음독자살했다고도 전해진다.
남경 함락 당시 태평군의 장병 가운데 항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천 명의 궁녀도 자살로 최후를 마쳤다. 이수성은 어린 천왕 '홍천귀'를 끝까지 지켜 탈출했으나 3일 만에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남방으로 도망간 '홍귀복' 마저 강서에서 체포됨으로써 태평천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수성은 죽기 전에 증국번이 자술서를 쓰게 하여 책으로 발간되었는데, 자공서 내용에 비굴한 말과 청나라에 아첨하는 말이 있어 증국번의 위작이나 개작이 아닌가 의심하였으나, 나중에 증국번의 집에서 원본이 발견되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태평천국의 몰락과 함께 홍인간.홍인발.홍인달 등 홍씨 일족은 모두 멸족되었다.
남경의 태평천국의 본거지가 함락되자 지방의 태평군도 고립되어 여지없이 격파되었다. 태평군의 멸망과 함께 그 주요인물도 모두 죽었지만 잔당들은 강북 일대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고 있던 '염비(비적)'들과 함류하였다. 뇌문광의 부대는 호북에서 '염군'의 '장종우'와 합류하여 산동에서 용맹을 떨치던 승격임심을 패사시켰다. 1866년에는 동.서의 염군으로 분열되었다가 '이홍장'이 지휘하던 안휘 민간 의용군인 '회군'에게 섬멸되었다.
태평천국군의 팽창 이유
구이린을 공격할 때는 격전 끝에 5,000명까지 감소할 정도였으나, 그 후 난징을 함락시킬 때는 태평천국군은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갖추게 되어, 수륙양면군을 편성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급격한 팽창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배경으로써 청나라 조정의 증세였다. 잇단 전쟁에 쓰이는 전비조달 및 패전 후의 피해배상을 지불하기 위해 청나라 조정은 법에서 정한 것보다 몇 배에 달하는 세금을 특히 동남해안부의 지방에서 징수했다. 거기에 [은귀전천(銀貴銭賤)]의 현상도 실질적 증세를 민중에게 강요했다. 당시 토지세는 은으로 납부하여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전을 은으로 교환하여 납부했다. 그러나 여러 나와의 교역으로 인해 은이 국외로 유출하는 등 은과 동전의 교환통로가 변동하여 그때까지 은 1량 = 동전 1,000문 이었던 것이 동전 2,000문 이상이 되었다. 이러한 세금의 불공평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된 서민이 대거 태평천국군에 참가한 것이 급격히 팽창하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아편 전쟁의 여파로 인해 전후 많은 비적이 횡행했는데, 이들을 태평천국이 흡수한 것도 팽창의 요인이었다. 난징조약으로 인해 교역이 광동 1개 항구로 한정된 결과, 국내의 물류통로가 극변하게 되어, 이때까지 화물수송에 관련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어 비적화되었다. 또 [향용](郷勇)이라 불린 임시모집병이 아편전쟁 후 해산되어 이들 중에도 비적화가 되기도 했다.
교리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킨 홍수전은 꿈 이야기를 근거로, 자기가 여호와(야훼)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백발의 노인이 도끼를 주면서 오랑캐를 물리치라고 했으며, 그 옆에는 청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꿈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홍수전의 주장은 당시 청나라에 반대하는 이들의 신념이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통해서 발전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태평천국의 토지 균분 제도는 즉, 토지를 지주들에게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준다는 제도는 농민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서양의 태평천국 인식
중국에 기독교 국가가 세워졌다는 정보를 전해들은 유럽인은 처음에 태평천국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태평천국 운동은 유럽 열강세력들과 청나라간의 맺어진 난징조약에 의해 배상금을 강제로 더 징수하게되어 그것이 농민들에게 더욱더 짐이되고 불만으로 퍼져나아가 태평천국을 건국하는계기가 되는데, 이때 반봉건 반외세적 운동을 외쳤던 것과 홍수전은 '자신을 하느님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라고 하는 교리적인 '이단성' 등으로 인해, 유럽 열강세력들은 태평천국 진압에 가담하게 된다. 더구나 태평천국은 당시 미국 유타 주에 뿌리박은 브리검 영의 몰몬교 운동, 뉴잉글랜드 일대에서 발흥한 엘렌 화이트 부인의 제7일 안식교 운동과 시기를 같이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중대한 문제였다.
멸망
천경을 도읍으로 정한 이후 태평천국은 점차 많은 내부 문제에 직면하였다. 홍수전의 조카 홍인간이 태평천국의 재정립을 위한 개혁정치를 하려던 중에, 1860년대에 본격화된 청나라와 서구열강의 협공으로 1864년 6월 1일 천왕 홍수전이 병사하고 7월 천경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은 멸망하였다.
평가
재산을 공유하고 토지를 농민들에게 고르게 분배하는 사회주의적 성격과 미국의 대통령 제도를 받아들이고자 한 민주주의적 성격을 갖춘 기독교적인 사회운동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백련교도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이나 나라가 혼란하고 부정.부패가 극심하면 반드시 혹세무민하여 일어나는 것이 바로 반란의 기치인데 둘 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영감을 얻은 지도자가 나타나 백성들이 바라는 것을 부르짓으며 선동하였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그 의도와 목적이 순수하였던 점도 있었으나 백성들의 호응을얻기 위하여 자신을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어 누구나 그렇듯 자신을 신의 계시를 받은 아들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종교적인 일체감을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또 그는 인간들이 누구나 최종적으로 희망하는 왕.황제.천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절대자의 권위를 누리려 했다는 점이다.
남경의 태평천국은 홍수전이 천왕으로 취임하여 궁중에는 처첩을 수천명씩 두고 황제같은 화려함을 누리려 했으며 결국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자를 비밀리에 무력을 사용하여 제거.숙청하는 비정함도 보였는데 이는 결국 내분으로 비화되었고 태평천국이 멸망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다는 점이다. 무능한 조정의 탄압과 폭정에 민중을 구하고 토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다는 목적으로 일어난 반란이지만 결국은 자신의 부귀영화와 절대권력을 누리려 했다는 점에서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반란이란 만약 성공한다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데, 전한 고조 유방, 후한 광무제 유수, 촉한의 유비, 위나라의 조조, 요,금,송나라, 그리고 당의 이세민, 명의 주원장, 청의 누르하치 등 성공한 반란군은 새로운 황조를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그의 자손들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창업 황제 말년에는 자신의 후손들이 안정적인 황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창업간 눈물과 피를 같이 나눈 수많은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는 것은 어느 황조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유럽인들이 가장 이야기 하기를 거북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중세가 암흑기라는 것이다. 중세를 우리는 암흑기라 함은 모든 정치.사회.경제.문화의 모든 논리가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는 가운데 종교의 영역을 벗어날 수가 없었으며 이단이나 교리에 어긋나는 언행은 철저히 배격하였으며 그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였는데 화형, 마녀 사냥을 무수히 저질렀다는 점이다. 정치는 종교에 예속되었고 사회는 종교 교리에 의해 발전을 가져 올 수 없었으며 문화는 종교의 찬양과 미화에만 볼두하였던바, 암흑기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적인 왕국은 중세뿐만아니라 공산주의, 전제군주, 나치스, 군국주의, 독재정권 등도 종교적인 정권의 한 유형에 불과하며 하나의 사상에 매몰된 사회는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였고 자유로운 이성을 마비시켰으며 인류의 문화 발전을 뒤로 되돌리며 기간이었다. 그들 지배층은 백성들의 삶은 아량곳 없이 그들 종교 지도층 집단만 배불리는 사회로 발전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이상인 종교가 지배하는 천년 세계왕국을 건설하기를 원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떠한 권력이라도 부패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망각한 체 인류 역사에 크나큰 오점을 남겼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상적인 정치 이론은 있을 수 있으나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부패를 한 사람의 지도자가 막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오늘날 수많은 종교 집단이 있으나 대부분 이단에서 출발한 종교 집단에 불과하다. 종교에 정통이란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파되고 갈라져 수많은 비슷한 유형의 종교 집단으로 곳곳에서 성장하였다. 어디가 정통이며 어디가 이단이라고 구분하기는 힘들다. 인우너수가 많거나 많은 헌금으로 재산이 증식되면서 비대화되면 정통이라는 이론은 허구이다. 사이비 종교 집단들이 혹세무민하여 신도들을 모으고 재산을 증식시키며 교주 한 사람과 측근들의 입신영달을 위해 소왕국을 건설하려 것이 그들의 이상이며 목표일뿐이다. 늘어난 교세를 이용하여 정치에 간섭하고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은 그들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인들의 비호하에 더 많은 부패와 불법을 저질러도 시시비비를 걸 수가 어려우며 문제를 제기하면 종교의 자유라는 헌번 기본권을 이용하여 종교 탄압으로 맞서고 있다. 그래서 우매한 민중들은 성전에서 자신의 현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정신적인 피안을 추구하다보면 점차 그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자신의 전 재산을 갖다 바치고 자신의 내세를 보장받으려는 어리석음을 그들은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벌이는 자살테러에 수많은 이슬람 젊은이들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이유는 자살테러 순간 자신은 천국으로 간다는 이슬람 과격주의 집단의 전통적인 테러 방식을 이용하여 막연한 희망을 갖게 만드는 종교의 최면성이다.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고 헛되고 과장된 이야기도 믿어야 하는 교리, 그래야 진정한 신도이며 이러한 진정한 신도는 교리와 교주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종교가 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반면에 폐악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드거니와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나라가 어지럽고 사회의 갈등이 증폭되면 구석구석에서 혹세무민하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부추기는 무리들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 현재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계의 실상을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으나 자신도 모르게 그 속으로 빠져든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간 개인은 이 시대의 흐름과 현실을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한 동물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연의 위대한 힘에도 무력할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경제적인 혼돈과 어려움도 모두 자신의 영적 세계를 힘들게 하는 만큼 무언가에 믿음을 갖고 귀의하고픈 마음일 것이다. 모두에게 가난을 극복하게 만들고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 그리고 내세에는 천국으로 간다는 새로운 천국같은 세상을 만든다면 누가 거부하겠는가? 홍수전은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이용하여 토지를 군등분배하고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모두가 똑같이 부를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그래서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태평천국이라는 천국같은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가 추구한 이상적인 나라가 이미 이 지구상에서 대부분 몰락하였고 오로지 북한 한 나라만이 남아 있는 공산주의 정치체제 나라였다는 점이다. 다같이 못 먹고 거지처럼 살아야하는 나라, 그들 지배층은 어느 왕조보다도 호의호식하며 즐기면서 살아가는 나라, 백성들의 자유와 이성은 마비되고 교조적인 우상숭배를 강조하며 반대하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집단농장에서 평생 노예처럼 일하면서 제도적 결함으로 생산량의 줄고 경제 발전은 제자리 걸음을 하는 나라가 되어 백성들은 사방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나라가 바로 홍수전이 이상적으로 표방한 나라였다는 점이다. 그는 겉으로 표방한 것과는 다르게 단지 자신의 입신영달을 위해 민중을 유혹하여 무리를 형성하고 반란을 획책하였다는 점에서 결코 성공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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