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함풍제 시대 : 태평천국의 난 1

구름위 2013. 6. 1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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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제의 치세는 조선철종(재위 1849~1863)의 재위기간과 대략 일치한다. 자연재해는 빗발쳤고, 민란은 연이어 일어났지만 정작 왕은 무능하여 그냥 먹고 놀다 가버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은 1853년 페리제독에 의해 나라의 문을 열면서 일시적으로는 혼란해졌으나, 1867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 문을 열게 된다.

여담으로, 그가 유일한 적자(공친왕 등은 서자)이긴 했지만, 사실 청의 제도로는 얼마든지 그것을 뒤집고 서자가 황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무능했던 그가 어떻게 즉위 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다. 도광제가 죽기 얼마 되기 전에 함풍제와 공친왕을 같이 불렀는데, 공친왕은 여러 국정현안에 대해서 막힘없이 답했지만 반면 스승들의 코치를 받은 함풍제는 황제의 병세가 이리도 악화되었으니 이는 다 자식인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눈물 작전이 먹혀서 후계자는 함풍제가 되었다. 그래서 '공친왕이 후계자가 되었다면'이란 가정은 지금도 가끔씩 회자된다고 한다.

 
그러나 함풍제는 그나마 재위 11년도 평안치 못하여, 온갖 종류의 재난이라는 재난은 모두 일어났다.

즉위한 이듬해인 1851년, 중국 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인 태평천국의 봉기가 일어났다. 무려 13년이나 계속되어 함풍제가 죽은 이후인 1864년에야 난징이 함락되어 끝났으며, 흡사 강희제 시절의 오삼계의 난처럼 중국의 남쪽 절반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미 백련교의 난(1796~1805), 1차 아편전쟁으로 재정을 소진했던 청은 또 없는 살림에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여 재정이 완전히 탕진되었고,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강남이 초토화되어 경제, 사회적으로 몹시 피폐해졌다.

이런 상태가 현재 진행 중인 상황에서 1856년, 영국 프랑스가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1858년 톈진 조약을 맺어 추가로 개항장을 지정했고, 러시아는 중개를 빌미로 아무르강 이북의 광대한 영토를 떼어먹었다. 1859~60년 사이 2차 아편전쟁의 속편 격인 사건이 일어나 영프 연합군이 청군을 괴멸시키고 베이징을 점령했고 함풍제는 궁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유럽인들은 건륭제가 세운 원명원을 약탈하고 파괴한 뒤 불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로 이때 청의 막대한 문화유산이 유럽에 반출당했다.

아무튼 이때 함풍제는 앞서 말했듯 수도를 버리고 요하(러허,熱河)의 피서산장으로 몽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중재에 나섰고,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후의 동치제)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그 중개료로 연해주를 차지하게된다.

 
그 이듬해인 1861년 함풍제는 자금성에 돌아왔다가 병들어 죽었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베이징을 점령하여 만행을 저지르며 '대등조약'을 요구하는 것에 화가 나서 화병에 죽었다고도 한다. 일부에서는 '제위에 오른 것 자체가 왕조와 나라 모두에 재앙'이라는 극악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하는 짓과 그 결과만 놓고 보면 변명거리가 없어 보인다. 이 황제의 황후인 서태후(西太后, 1835~1908)가 함풍제 사후 권력을 장악한다. 그런 의미에서, 함풍제가 죽고 딱 50년 뒤인 1911년에 청을 멸망 시키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태평천국의 난

 

 

태평천국의 옥새.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년~1864년)은 중국 청나라 말기에 홍수전(洪秀全)이 세운 기독교 신정(神政) 국가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이들이 일으킨 난을 태평천국의 난이라 불리었다.

 

 

배상제회(拜上帝會) 등장

아편 전쟁에서 패배와  5개 항구 개항 등으로 광동 지방의 실업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정부에 대한 불만도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붏만이 터져 아편 전쟁이 끝난 후 10년 째인 1851년에 마침내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태평 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은 광동성 화현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타향에서 이주해온 집인 객가 출신이었다. 그가 어디서 이중하여 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객가의 생활 수준은 원주민들 보다 못하였으나 홍수전의 집은 비교적 여유가 있어 그는 과거를 보기 위하여 공부에 열중하였다.홍수전은 두 번째 향시를 보기 위해 광주에 갔다가 거리에서 만난 영국인 전도사에게서 <관세양언>이라는 책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통독하면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가 도광 16년(1836년)으로 홍수전의 나이 24세 때였다.

 

다음해 홍수전은 세 번째로 향시에 도전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울분에 찬 나머지 병이 들어 화현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병이엇는지 모르지만 40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하니 중병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때 불가사의한 을 꾸게 되었다. 꿈의 내용은 상제(上帝) 야훼라 생각되는 금색 머리에 검은 도포를 입은 기품이 넘치는 노인에게서 "이 검으로 사악함을 물리치라"는 계시와 함께 파사검(破邪劍,사악함을 물리치는 검)을 선물 받고, 또 중년 남자로부터 요사스러움을 없애는 도끼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홍수전은 병이 완치되자 광저우에서 시험을 보기 위해 방문했을 때, 침례교 선교사로부터 권세양언(勸世良言)이라는 전도지를 받고 이전에 본 불가사의한 의 의미를 이해하였다. 노인은 야훼이고, 중년 남자는 예수이며, 자신은 예수의 동생이라고 자신이 꾼 꿈을 기독교적인 논리로 이해한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꿈과 기독교의 접합은 로버트 몰린 성서를 해석할 때 하느님(God)을 음대로 갓이라 표기하지 않고, '상제'란 말로 번역한 것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된다.

 

                          

 

홍수전은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서 특히 야훼, 즉 천부상주황상제(天父上主皇上帝)만이 유일신이라는 교리를 강하게 의식하여 우상파괴를 열심히 진행했다. 원래 다신교적인 전통을 갖고 있던 중국에서는 유교, 도교, 불교를 기리는 묘(廟)가 많았으나, 흥수전은 이것을 파괴하고 다만 상제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고향인 광둥 성에서의 선교활동은 일족과 몇 사람의 찬동자를 얻는 데 그쳤다. 홍수전은 효과적인 포교방법을 모색한 끝에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 [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이란 포교 문서를 집필했다.

 

홍수전의 본명은 홍인곤이었고 아명은 홍화수였다.  그리스도교의 전도를 시작하면서 그는 여호와로부터 받은 '전(全)"자를 넣어 홍수전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 전(全)자는 파자(破字)로 '인왕(人王)'으로서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란 뜻이 된다. 홍수전은 여호와를 천부(天父), 그리스도를 천형(天兄)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교에 몰두하였다.

 

홍수전은 자신의 교단에 배상제회(拜上宰會)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상제인 여호와를 숭배하는 결사라는 뜻이다. 홍수전은 그의 사촌 홍인간과 죽마지우 풍운산 등과 광동.광서 지방을 왕래하면서 회원 모집에 열을 올렸다.

 

1847년 태평천국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조직인 배상제회(拜上帝會)를 광둥 성 계평현(桂平縣) 금전촌(金田村)에서 창설했다. 이 땅에서 처음 소수에 불과했던 찬동자 중 한 명인 풍운산(馮雲山)이 포교활동을 벌여 약 3,000명의 신도를 얻고, 홍수전을 맞이하여 그를 지도자로 삼았다. 배상제회의 참가자는 가난한 농민, 광산노동자, 객가등의 가난한 민중들이 중심이었다. 고향 화현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 계평현에서 성공한 커다란 이유 중 1가지는 병조복등의 현세 이익중시의 포교였다. 단순히 종교적 열의 및 윤리를 설명하지 않고, 지금 현재의 생활에서의 이득을 강조한 풍운산은 다수의 신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직의 확대는 공권력 및 그 지역 토지의 유력자와의 마찰을 생기게 하였다. 풍운산을 시작으로 배상제회의 구성원의 체포가 차례로 이루어지자, 홍수전은 이때까지의 종교 활동에서 정치혁명으로 옮겨갈 것을 결정했다.

 

1850년 배상제회는 금전촌에 집결해 단영(團營)이란 군사조직을 결성했다. 여기서는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고, 각각 남영, 여영에 입영시켰다. 그 이전부터 소리를 내어 위장하고, 총포 및 대포 등의 무기를 비밀리 제조하여 혁명을 위한 준비를 진행해 나갔으나, 금전촌에 집결하는 과정에서 청나라 조정의 군대 및 자경단과 몇 차례 충돌이 발생했다. 금전촌에 집결한 사람들은 1만에서 2만 정도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중에서 성년남자는 약 3천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보다 몇 배 많은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면서 혁명의 불길이 일어나게 되었다.

 

배상제회가 '태평천국'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킨 것은 도광 30년(1850년) 12월 10일로 양력 1월 11일이었다. 군사를일으키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기간이 필요하였는데 그들이 군사를 일으킨 곳은 광서 계평현의 금전촌이라는 시골이었다. 그들은 아무리 시골이지만 관헌들의 눈을 피하여 짧은 기간내에 무기를 제작하는라 어려움이 많았다. 위창휘의 넓은 저택을 무기 공장으로 사용하여 공장에서 나는 소음을 위장하기 위해서 많은 오리를 키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각지의 배상제회 회원들은 거사하기 반 년 전부터 서서히 금전촌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거사 날짜로 결정된 홍수전의 생일에는 무려 1만여 명의 병력이 집결하였다.

 

반란에 참가한 동지들은 재산을 모두 성고(聖庫)에 바쳐 균등한 생활비를 분배받았다. 전형적인 공산주의 체제였으며 사이비 종교집단의 전형이었다. 가족 단위의 참가가 많았기 때문에 태평천국의 군대는 부인부대도 존재했다. 가족을 남겨 둘 경우 보복 대상이 될 것을 염려해서였다. 부인 부대를 여영이라 불러 남성 부대와 엄격히 격리시켜 아무리 부부간이라도 동거 생활이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가 여영에 접근하거나 여자와 만나면 부부,형제간이라도 사형으로 다스렸다. 태평천국의 군율은 모세의 십게명을 기본으로 한 매우 엄격한 것이었다.

 

태평천국의 소요 소식을 접한 북경 조정은 아편전쟁의 영웅 임칙서를 다시 흠차대신에 임명하여 사태를 진압토록 하였다. 임칙서는 병든 몸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고향 복건에서 광서로 가던 도중 광동의 조주에서 병사하고 말앗다. 그때가 도광 30년 10월 19일로 태평천국이 금전촌에서 거사하기 조금 전의 일이었다. 태평천국 거사 직전의 광서는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였다.

 

임칙서의 사망으로 토벌 작전은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태평군은 근거지였던 자형산을 출발하여 9월에는 계평과 계림의 중간 지점인 영안성을 점령하고 이곳에서 약 반 년 동안 주둔하면서 반란을 준비했다.

 

청 조정은 양강총독을 역임한 이성원을 임칙서 후임으로 임명하였으나 이 사람도 광서의 무선까지 왔다가 병사하고 말았다.

 

 

 

태평천국의 건국

1851년 1월 11일 금전촌에서 배상제회는 국호를 태평천국으로 하고, 홍수전을 천왕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때부터 태평천국을 칭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명확하지 않다. 정식으로 정해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인 3월 23일이었고, 이날을 등극절이라 불렀다. 국호를 지정함으로써 청나라 조정에 대해 공공연한 반기를 들었던 태평천국이었으나, 남경에 머무르는 것은 잠시뿐 각지를 전전하며 이동했기에 그 의미로는 유적적이었다. 태평천국군의 진로는 다음과 같다. 즉 금전촌에서 등현(藤県)을 거쳐 영안(永安;현재의 광서 장족자치구(広西壮族自治区) 몽산현(蒙山県)을 함락 시켰다. 등현에서는 뒤에 이야기할 후기 태평천국을 맡게 된 명장들이 참가하게 된다. 영안에서 반년동안 주둔한 태평천국은 이곳에서 관직제도 및 관작 등을 설치하고, 나라의 체계를 정비했다.

 

이때 천왕 아래의 다섯 간부는

로 결정되었다. 이 안에서 양수청은 '천부하범', 소조귀는 '천형하범'이라 칭하면서 각자 야훼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이것을 빌미로 스스로 명령을 내렸기에 서서히 홍수전의 발언력은 약해져 갔다.

  

청 조정은 광서제독 '향영'과 부도통' 오란태'의 지휘 아래 영안성을 포위했다. 1852년 태평군은 비를 틈타 포위를 뚫고 출격했다.태평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청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대군을 이끌고 달려온 천진총병 장서,양주총병 장수,하북총병 동광갑,운양총병 소학령 등 총병들이 모두 전사했다.

 

포위망을 똟은 태평군은광서성의 계림을 점령하려고 했으나 청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계림을 포기하고 동북방 약 13키로미터 지점에 잇는 전주성을 공격, 점령하였다. 이 싸움에서 남왕 풍운산이 중상을 입었다.

 

이어서 태평군은 2백여 척의 배를 타고 상강을 따라 호남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전주에서 호남의 영주(영릉)에 가는 두중에 사의도라는 곳에서 호남 강충원의 의용군과 싸움에서 대패하였다. 중상을 입었던 풍운산은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

 

사의도에서 대패한 태평군은 중강 도주에서 천지회 소속의 병력 2만 명을 흡수하여 휴식을 취한 다음 서왕 소조귀를 사령관으로 하여 장사를 공략하기 위해서 북상하였다. 태평군이 장사를 습격하자 후남 순무 낙병장 등이 방어에 나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 싸움에서 청군 총병 복성을 필두로 여러명의 고급 장수가 전사하였고 태평군 사령관 소조귀도 포격을 맞아 중상을 입고 곧 숨졌다. 이때 상남의 침주에 머무르고 있던 천왕 홍수전은 서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왕 양수청과 같이 병력을 이끌고 장사로 향했다.

 

 

10월 13일 장사에 도착한 태평군 본대는 청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나 청군의 저항 또한 완강하여 끝까지 함락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유발했다. 태평군의 장기인 땅굴파기와 성벽 폭파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청군은 맹인을 동원하여 태평군이 파는 땅굴을 탐지하여 물을 주입하는 바람에 태평군이 몰살하는 등 작전에 실패하였다.

 

태평군은 장사성을 포위한 지 한 달만에 포위를 풀고 철수하여서쪽으로 물러나 12월 3일 익양을 점령하고 민간 소유 배 수천 척을 동원하여 수로를 따라 악주로 향했다. 악주를 지키던 호북제독은 태평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하여 태평군은 악주를 무혈 점령하였다. 태평군은 승세를 타 무창을 공략하였다. 무창은 호광총독이 주둔하는 요새로 청군도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호북 순무.포정사.안찰사.제독.총병 등 무창의 고급 문무 대신들이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러나 태평군의 간부는 한 사람도 전사자 없이 압승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