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도광제 시대 : 1차 아편전쟁

구름위 2013. 6. 13.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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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제(道光帝, 1782년 9월 16일 ~ 1850년 2월 25일)는 중국 의 제8대 황제(재위 1820년 ~ 1850년)이다. 휘는 민녕(旻寧), 묘호는 선종(宣宗)이다. 가경제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지친왕(智親王)으로 봉해졌다.

 

즉위 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전개한 삼각 무역(아편무역)으로 엄청난 문제가 일어나자 임칙서로 하여금 이를 수습하게 하였다. 결국 1840년 제1차 아편 전쟁으로 이어졌고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 영국에 넘어감은 물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개항되어 서구 열강이 대대적으로 쇄도해오는 길을 열어주었다.

 

도광제는 건륭(乾隆)시대, 가경제(嘉慶帝)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금녕(錦寧). 어린시절부터 문무양도에 재능을 보여 조부 건륭제(乾隆帝)에게 사랑받는다. 가경제 즉위후 황태자가 되지만 이것은 관례에 의하여 본인도 알지 못하였다. 가경제가 위독하였을 때 처음으로 밀갑에 봉인되어있던 종이에 의하여 세자로 지명된다. 가경(嘉慶)25년(1820)에 가경제가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다음해 도광(道光)이라 연호를 고쳤다.


생활은 소박하고 검약하도록 하였으며 궁중의 비용은 은 20만냥을 넘지 않도록하였으며 비빈들에게도 강조하여 새옷을 지어 입는 경우에는 심한 구박을 하는 관계로 비빈이나 궁인들도 새 옷을 지어 입을 수가 없어 모두 낡은 옷만 입었다고 한다. 또 신하들에게도 만날 때마다 근검절약을 강조하였고 신하들도 황제의 지시에 따라 낡은 옷을 입었다. 그래서 낡은 옷이 동이나 가격이 새 옷보다 더 비싼 상태까지 되었다고 한다.

 

또 도광제는 위정자로서는 평범하였다. 특히 중국 고래의 도덕, 관습 등은 엄격히 지키고 존중하였으나 진취적인 기상이 부족하고 국외의 문명이나 움직임에는 무관심하였다.


청(淸)은 광대한 국토에 많은 이민족의 문제를 안고 있어 도광제의 시대에는 위구르족이나 요족(瑤族)의 반란이 다발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가장 큰 대외문제는 영국과의 통상문제-이른바 아편전쟁이다.


청은 원칙적으로 쇄국정책을 취하였으나 구미 제국의 압력도 있어 조공의 형식으로 광주(廣州)에 한정하여 교역을 허락하고 있었다. 청은 자기 나라에 없는 것은 없다고 호언하였는데 실제로도 구미의 물건은 중국에서는 불요불급인 것이 많고 중국산은 귀중품이었고 또한 구미인에게 필수품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차였다. 특히 홍차를 마시는 습관이 정착된 영국인으로서는 절대적인 물품이어서 영국의 수입초과가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막대한 무역적자를 끌어안게 된 영국은 그 대신 중국에 인도산의 아편을 가져가게 된다.


물론 아편의 해악은 옛부터 잘 알려져 청에서는 옹정(雍正)시대부터 몇번이나 금지령이 내려져 있었다. 영국도 그 해악은 충분히 알고 있어 자국내에서는 엄격히 금지하였으면서 대량으로 중국에 수출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장은 역전된다. 수입초과가 되어 결제대금인 은의 부족과 아편환자의 증대에 고민하던 청은 몇번인가 대항수단을 강구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하들에게서 대책을 모아 우수한 안을 제출한 자를 흠차대신(欽差大臣,전권특명)으로서 광주에 파견하기로 하였는데 도광제가 택한 것은 임칙서(林則徐)였다.


도광제의 뜻을 받들어 임칙서는 구미에 대해서든 국내에 대해서든 완고한 태도를 취한다. 아편을 피운 자를 사형에 처하는 한편 구미의 상인에 대해서는 아편의 제출을 명하여 소각처분하였다. 그 보복으로 영국은 사소한 것을 트집잡아 함대를 홍콩으로 파견한다.


전근대적인 군사 장비를 가진 청은 구미의 무기를 이길 수 없었다. 더우기 함대가 연안을 북상하여 천진(天津)에 이르자 청의 궁정은 놀라서 손바닥 뒤집듯이 임칙서를 파면한다. 그후로도 몇번인가 교섭과 저항과 막대한 손해를 반복하며 결국 들이밀어진 요구에 굴복하게 되었다.


조건 중에는 조약의 체결, 전쟁비용 및 손해배상, 상하이(上海)를 비롯한 도시 몇군데의 개항 외에 홍콩(香港)섬의 할양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광22년(1842) 8월의 일이다. 홍콩은 그후 99년간 대여라는 계약으로 쿠룡반도(九龍半島)까지 영국령이 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중국은 불공평조약으로 줄곧 괴로워하게 된다.

 

그후 도광제는 국방에 뜻을 두고 개혁에 착수하나 한계가 있었다. 세상을 떠난 것은 8년후인 도광30년(1850). 재위 31년, 향년 69세.
홍콩이 중국으로 돌아간 것은 도광제 사망으로부터 약 150년 후인 1997년이었다.


 

가족

아들들

  1. 은지군왕 혁위(隱志郡王奕緯)
  2. 순화군왕 혁강(順和郡王奕綱)
  3. 혜질군왕 혁계(慧質郡王奕繼)
  4. 살친왕 혁저(薩親王 奕詝) - 함풍제
  5. 돈근친왕 혁종(惇勤親王奕誴)
  6. 공충친왕 혁흔(恭忠親王奕訢)
  7. 순현친왕 혁현(醇賢親王奕譞)
  8. 종단군왕 혁합(鍾端郡王奕詥)
  9. 부경군왕 혁혜(孚敬郡王奕譓)


아편 전쟁(鴉片戰爭)

 

19세기 중반에 청나라 영국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다음과 같이 2번의 전쟁이 있다.

 

제1차 아편 전쟁

제1차 아편 전쟁은 중국 아편 단속을 빌미로 하여 영국 1840년에 일으킨 전쟁이다.

 

전쟁 발발 무렵 영국과 중국 사이에는 중국 신발의 인기로 인해 불공정한 무역이 계속되었다. 이미 우수한 옷감 제조 기술을 보유한 중국은 영국산 방직물을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 상인들은 아편 무역을 통한 이윤 창출을 고안해냈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중국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아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청나라는 아편 단속으로 마약상들을 홍콩으로 쫓아냈다.

 

청나라의 아편 단속에 반발한 영국은 무역항을 확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842년에 영국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영국 측은 난징조약 체결과 홍콩의 할양, 광둥 이외의 다섯 항구를 추가 개항하도록 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제2차 아편 전쟁

제2차 아편 전쟁, 일명 애로호 전쟁은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청나라의 개방이 기대에 못 미치자 영국이 1856년 아일랜드,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광대한 영토를 가진 청나라는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하여 영국과의 무역이 생각만큼 확대되지 못했다. 영국의 주력 상품은 이었는데, 중국에서 생산되는 면포는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 게다가 제1차 아편 전쟁으로 광둥을 중심으로 대영 항쟁이 전개되었다. 이에 영국은 중국인 소유의 영국 해적선 애로호를 빌미로 한 애로호 사건을 일으켰다.

 

영국은 프랑스와 구성한 연합군으로 광저우를 침략하고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고, 이와 동시에 러시아군도 청나라 영토로 진격했다. 연합군은 톈진을 점령하여 불평등 조약인 톈진 조약을 맺었다. 톈진조약은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개항 항구를 확대하며 아편 무역을 합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청나라는 이때 기독교 공인도 약속해야 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텐진조약 체결 후에도 청나라의 후속 조치가 미진하자 진격을 계속해 1859년에 수도 베이징 근처까지 이르렀고, 1860년에는 황제의 별궁인 원명원을 약탈하였다. 결국 베이징 함락 후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1차 아편전쟁

 

청나라 내정이 불안한 가운데 서양에서는 점차 거센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는 황제를 비롯한 중신들이 여전히 중화사상에 도취되어 바깥 세상에는 전혀 무감각하였다.

 

당시 국제 정세는 포르투칼.스페인.영국 등은 일찍부터 해양으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확보하고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항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특히 영국은 이미 오래 전에 동인도회사를 창립하여 식민지 개척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국내적으로는 산업혁명의 물결을 타고 차를 마시는 습관이 널리 퍼져 차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영국과 중국의 무역은 1689년에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포르투칼의 방해로 중국과 무역을 시도할 수가 없었다. 1715년에 이르러 중국에 영국 상관이 설치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중국과 교역을 시도하고 있었다.

 

영국이 중국에서 수입하는 것은 생사.도자기.차 등이었다. 특히 차가 주종을 이루었고 영국은 중국에 주로 모직물을 수출하고 있었다. 인도는 광산물.상아.목재.면포 등을 중국에 수출하였고 중국인들은 모직물을 야만인들이 입는 것으로 인정하여 수요가 늘지 않았다. 이 같은 무역 불균형으로 당시 사용되던 멕시코 은화가 계속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것은 영국의 고민이자 동인도회사의 고민이기도 했다.

 

수입 초과를 방지하고 무역 불균형을 깨뜨릴 새로운 상품 개발에 고심하던 영국은 아편을 등장시켰다. 아편은 양귀비에서 분비되는 유액을 굳힌 것으로 새로운 상품이 아니라 옛날부터 약재로 소량이 수입되어 사용되고 있던 상품이었다. 양귀비는 명나라 시대 명의 '이시진'이 저작한 <본초강목>에 아편을 양귀비꽃으로 기록한 점으로 보아 명나라 시대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이것을 환약으로 조제해 특효약으로 사용하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기호성 마약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보건상.경제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다. 특히 담배에 섞어 피우거나 담뱃대에 담아 불을 붙여 피우게 되면서 아편은 병의 치료보다는 마약으로서의 아편으로 둔갑했다.

 

아편 흡연이 유행한다는 사실을 안 옹정제는 옹정 7년 (1729년) 아편 금지법을 제정했다. 이어 2년 후에는 전국적으로 아편 금지령을 내리고 판매자 또는 아편 흡연관의 경영자와 아편 단속을 게을리한 관리 처벌에 대한 벌칙을 강화했다. 그러나 금지령이 무색할 정도로 아편은 급격히 유행하여 민간은 물론 관료들 사이에도 아편 흡연자가 증가하였다.

 

그후 가경제가 재위 25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이어 선종 도광제가 재위에 오르자 조정은 온통 아편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편 수입량의 증가 추세는 가경 21년(1816년)에 5천 106상자, 도광 4년(1824년)에 1만 2천 434상자, 도광 10년(1830년)에는 2만 상자에 육박하였다. 아편 전쟁 직전인 1838년에는 4만 상자를 초과하였으니 아편이 정치 쟁점이 된 것은 당연하였다. 청나라 조정은 세가지 중요 문제점을 생각하고 있었다.

 

1. 어떻게 하면 중국인이 아편을 피우는 나쁜 버릇을 버리게 할 것인가?

2. 어떠한 방법으로 영국인의 아편 밀수를 금지할 것인가?

3. 어떠한 방법으로 은의 유출을 막아 국내의 경제를 안정시킬 것인가?

 

조정의 공론은 두 갈래로 갈렸다. 먼저 아편 무역을 금지해야 한다는 '황작자' 등 신하들과 소수이긴 하지만 해금론을 주장하는 '허내제' 같은 신하도 있었다. 그러나 도광제와 조정 중신들은 아편이 국민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수수 방관할 수만은 없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도광제는 심사숙고 끝에 호북과 호남에서 아편을 엄금하여 성과를 거둔 '임칙서'를 양광 총독에 임명하여 '흠차대신'(황제 특명 전권대사)으로 광주에 파견하였다.

 

 

 

임칙서는 옛부터 많은 명사를 배출한 복건 태생으로 매우 엄격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가 태어날 때 복건 순무 '서사증' 일행이 소낙비를 피해 그의 집에 머물렀기 대문에 임칙서의 아버지가 서순무를 닮으라는 뜻에서 이름을 '칙서'로 지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소망대로 서순무를 닮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27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는 지방관으로 절강 지방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강소.호북.하남을 순시하면서 수리 공사와 재해 구제 사업에 많은 치적을 쌓았다.  

 

흠차대신으로 부임한 임칙서는 책임이 중차대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일설에 의하면 임칙서는 동생이 아편 중독으로 폐인이 되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아편에 대한 인식이 엄격하였다고 한다. 또 황제인 도광제 자신도 아편을 흡연한 적은 있었으나 자력으로 끊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편은 반드시 금할 수 있다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임칙서가 임지인 광주에 도착한 것은 도광 19년(1839년) 1월 25일이고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광주에 도착한 임칙서는 각국의 상관이 있는 이관 가까이 있는 '월화서원'을 숙소로 정하였다. 임칙서는 도착하기 9일 전에 미리 포고문을 두 통을 광동에 보냈다. 한 통은 외국 무역 독점권을 얻은 특허 상인의 조합인 '공행'에 보내고, 한 통은 광동 주재 외국 상인들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 앞으로 영원히 외국 상인들로부터 아편을 반입하지 않겠다. 명령을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하고 재산은 모두 몰수해도 좋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3일 이내에 제출하라. 만약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오렛동안 간사한 외국 상인과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죄를 삼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겠다. "

 

이 포고문을 받은 공행의 조합원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각국 상인에게 보낸 포고문에는 아편 무역의 비인도성을 힐난하였다.

 

" 우리 대황제께오서 천하만민을 차별없이 대우한다는 뜻에서 너희들에게 무역을 하락하셨기 때문에 너희는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 너희는 이같은 은혜에 감사하고 법을 지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내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쳐서는 안 될 일이거늘 어찌하여 너희 나라에서 조차 금하는 아편을 가져와 재산을 편취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려 하느냐? 너희들은 아편으로 중화의 백성들을 유혹한 지 이미 수 십 년에 이르고 그동안 너희들이 얻은 불의의 재산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다. 이 점 공분을 면치 못하는 바이며 하늘 또한 용서치 않을 것이다. "

 

영국은 공행이 제공한 정보를 통하여 임칙서의 성격.경력 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이번 문제는 흐지부지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처음에는 그 또한 청국 관리이므로 다른 관리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생각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나왔다. 영국측은 임칙서가 강경하게 나오는 것은 뇌물의 액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했다. 이에 난처해진 공행측이 임칙서는 다른 경우이니 큰 손해를 보기 전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며 영국 상인들을 설득했다. 

 

 영국측에서도 공행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려 공행측을 통해 임칙서에게 전달했다.

 

"아편 1천 37상자를 건내주겠소."

 

영국측은 아편을 이 정도 내 놓으면 흠차대신 임칙서의 체면은 설 것이라 생각하여 만족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임칙서는 이 제의를 일축했다.

 

임칙서는 사전에 사건 조사를 통하여 그들의 아편 재고량이 2만 상자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매수하려는 의도로 생각하고 격노하면서 외국 상관의 중국인 고용인을 모두 철수시키고 식량의 반입을 금지시키는 한편 나머지 아편을 전부 내 놓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리고 각국 상인들에게 다시는 아편을 가져 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 같은 소식을 들은 영국의 무역 감독관 '엘리엇'은 마카오에서 급히 광주로와서 이관으로 들어가 청국 관리와 직접 교섭을 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엘리엇이 이관으로 들어가자 임칙서는 약 1천 명의 관병을 동원하여 이관을 포위하고 이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중화행'의 벽에 큰 글씨로 유명한 4개조 포고문을 써붙였다. 엘리엇은 이관에 포위된지 48시간 만에 물과 식량이 떨어져 굴복하고 말았다. 만약 굴복하지 않으면 외국인 275명이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엘리엇은 공행을 통해 아편 2만 283상자를 내놓겠다고 임칙서에게 통보했다. 당시 아편 한 상자 가격은 7~8백 달러 정도 였으며 전체 금액은 1천 5백만 달러에 상당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임칙서는 아편을 모두 임시 창고에 저장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엄중히 경비토록 하였다. 임칙서는 아편을 북경으로 운반하여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려 하였으나 수송도 문제였고 북경에서 처치하기도 곤란하여 조정에 건의 한 결과 조정에서 현지에서 처리하라는 전갈이 왔다. 이에 임칙서는 '호문' 해안에 구덩이를 파고 아편을 짠 물에 담갔다가 소석회를 섞어 3주 동안 끓여 아편의 성분이 완전히 소멸된 것을 확인한 후에 바다에 흘려 보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날 문제는 아니었다. 임칙서는 광동의 외국 상인들이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자 무역 활동을 제한하고 거주를 못하도록하는 등 임칙서와 엘레엇이 계속 대립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구룡'에서 중국인 '임유희'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임칙서는 엘리엇에게 범인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엘리엇은 거부하였다. 이에 임칙서는 마카오에 식량 공급을 차단시키고 중국인 노무자들을 철수시키고 무력으로 마카오를 봉쇄하였다. 이에 엘리엇은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영국 군함 '보라주' 호와 '히야신스' 호를  이용하여 청국군과 접전을 벌이게 된다. 마침내 영국 군함 2척과 청해군 군함 29척 사이에 포격전이 벌어졌다. 두 시간 동안 벌어진 포격전에서 영국의 '보라주' 호는 선수와 돛대가 포탄을 맞고 깃발이 떨어져 나갔다. 청국측 병선은 29척 중 3척을 제외하고 대부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영국 군함은 포격전 후 일단 철수하였을 뿐인데, 임칙서는 북경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게 된다. 승전보를 받은 도광제는 임칙서에게 "짐은 경 등의 용맹을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오로지 걱정되는 일은 경들이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약간의 만용을 부려도 괜찮지만 겁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이처럼 당시의 북경 조정은 대영국 정책은 매우 강경하였다.

 

이러한 북경의 태도에 영국도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1840년 2월 '윌리엄 멜본'을 수반으로 하는 영국의 자유당 정권은 청국 원정을 의결하였다. 4월~5월에 걸쳐 영국 상하 양원은 군사비 지출을 의결.승인함으로써 마침내 아편 전쟁의 막이 올랐다.

 

6월에 인도 총독 '오크란드'는 '스리랑카'에 주둔한 제18연대, '칼카타' '윌리엄포드'에 주둔한 보병 제26연대, '뱅골' 주둔 공병 2개 중대, 의용병 수개 중대, '마드리드' 주둔 포병 2개 중대 등 약 4천 명의 육군 병력에 동원령을 내렸다.

 

원정군 사령관은 해군 소장 '엘리엇'이었다. 그는 당시 무역 감독관 찰스 '엘리엇'의 종형으로 전권대사의 직도 겸하게 되었다. 이번에 동원된 기함은 '웰즈리' 호를 비롯하여 9척의 전함과 수송선 9척 등 원정군은 5월 말경에 싱가포르에 집결하여 속속 남지나 해로 향했다. 당시 영국 외상 '파머스턴'은 원정군 파견 이유를 영국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기 위함이라고 선언했지만 사실은 아편 문제임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이처럼 아편으로 인한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전쟁이 시작되었다.

 

'주산열도'에는 청국군의 '정해 3진'이 있어 약 2천 명의 군사가 수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름만 군사일 뿐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토공.목수 등이 대부분이었다. 영국군은 주강 입구를 봉쇄하고 주산 열도의 '정해'를 무혈 점령하였다. 정해진의 총병 '장조발'은 전사하고 정해 지현 '요희상'은 연못에 투신하여 순직하였으며 수비병은 모두 도망쳐 달아났다.

 

 주산을 점령한 영국 함대는 군함 5척과 수송선 4척을 거느리고 천진 방면으로 향했다. 영국 함대가 천진 앞바다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북경 조정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북경 조정은 직례 총독 '기선'으로 하여금 영국측과 교섭하도록 명하였다. 청국 관리는 외국인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청국 총독 기선이 엘리엇 소장과 교섭을 요구하자 청국 정부의 대표성을 문제로 지연시키다가 결국 만났다. 청국 총독 기선을 만난 엘리엇은 영국 외상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1.흠차대신이 광동에서 몰수한 아편 대금을 배상할 것.

2.영국 무역 감독관에게 가한 모욕에 대하여 사과할 것.

3.장래를 보증할 것.

4.연해의 몇 개 섬을 영국 국민의 거주와 상업 활동 장소로 지정할 것.

5.공행 상인들이 영국 상인들에게 진 부채를 청산할 것.

 

영국측의 요구에 청국 정부는 이 사건은 원래 광동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교섭은 당연히 광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득하여 교섭 무대를 다시 광동으로 옮겼다.

 

북경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건이 임칙서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며 임칙서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비등하였다. 큰소리 치던 도광제도 영국 함대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청국 조정은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영국이 가장 증오하는 임칙서를 즉시 파면하였다. 임칙서 파면 소식을 들은 엘리엇은 '임칙서는 제능과 용기가 있는 유능한 총독이었다. 애석한 것은 그가 외국 사정을 몰랐을 뿐이다."라며 임칙서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협상교섭 장소가 광동으로 옮겨지자 영국 함대도 광동으로 철수했다. 임칙서에 이어 새로 흠차대신으로 부임된 기선도 북경에서 광동으로 급히 달려와 교섭에 임했다.

 

영국의 특명 전권대사 엘리엇은 파머스턴 영국 외상의 훈령을 그대로 내 놓았다.

 

1.영국인 모욕 사죄

2.몰수 아편 대금 배상과 원정비 배상

3.공행 부채 청나라가 보증

4.외양에서 아편 밀수와 관련 영국인과 선벅에 누가 미치지 않도록 할 것

5.수출입세 일정 유지

6.무역선 경비 경감

7.영국인의 청원서는 황제에게 직접 전달

8.복건 등 6개 항구 영국에 개항 

9.북경에 대사관 설치 및 개항장 영사 주재

10. 개항장에 마카오 방식의 외국인 거류지 설치

11.거류지에 영국인 가족 거주

12.개항장에 영국인 범죄는 영국 관헌이 처벌

13.개항장에 교회 설립

14.공행제도 폐지, 곤란시 인원수 증가 말 것

15.영국이 특별 사법권을 가지는 도서나 항구 할양

 

이와같이 영국은 15개 조항에 대하여 수락을 강요하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기선은 개항 문제와 도서나 항구의 할양 문제는 조정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며 회답을 미루었다.

 

 

 

그러자 1841년 1월 7일 영국군은 '호문'의 포대를 공격해 청국을 위협하면서 협상에 유리한 우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기선은 영국군의 무력 행동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광주까지 공격할 지 모른른다는 생각에 영국측 요구를 적당히 받아들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엘리엇은 '사각' 등의 포대를 점령한 후 요구조건 수락을 강요하면서 위협하자 결국 '천비가 조약'이 성립되었다.

 

조약 내용은 아래와 같다.

1.홍콩 할양

2.6백만 달러 배상금 지불

3.양국 정부의 직접 교섭권 인정

4.무역의 재개

 

그러나 이 내용이 북경에 알려지자 도광제는 격노하여 교섭의 중지를 명하는 한편 기선을 소환하여 관직을 박탈하고 정역장군 '혁산' (강희제 6대손)을 후임으로 광동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혁산은 나이가 들고 주술에 심취한 사람으로 영국군을 주술로 제압하려 하였다. 그는 영국 함포와 포대 사격술이 정확한 것은 영국군에 영묘한 신통력을 가진 주술사가 있다며 그것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인근 민가에서 부녀자들의 변기을 모아 뚜껑을 열어 변기 주둥이를 모두 영국 군함 쪽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나라가 망하려면 이렇게 무능한 관리가 넘쳐나고 주술과 사이비 종교가 날뛰는 등 병이 든 청나라였다.

 

1841년 4월 24일 빅토리아 여왕의 탄생일을 기하여 영국군은 광주성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이성으로부터 사방의 포대를 공격하여 광주성을 포위할 태세를 보였다. 광주성 밖에도 청군이 있었으나 영국군만 보면 그대로 도망칠 뿐 총 한 방 쏘는 일이 없었다. 일반 주민은 도망칠 수가 없어 영국군의 잔학한 약탈과 방화, 강간, 폭행을 고스란히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광동군무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남편은 화를 입고 아내는 욕을 당해 두 사람 모두 죽였다. 아들은 꽁 꽁 묶이고 어머니는 살 길이 없어 집안은 망하였다. 집은 무너지고 묘는 모두 파헤쳐져 백골이 나뒹굴고 있었다. 참으로 귀신이 곡하고 산천초목이 울어도 시원치 않을 참상이었다."

 

성 밖 주민들은 참다 못해 괭이.삽.장대 등을 들고 일어나 영국군과 싸웠다. 삼원리를 비롯한 90여 마을 주민 2만여 명이 집결하여 '평영단'이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마드리스 보병  제37 보병대 2천여 명을 포위했다. 이날이 5월 30일로 마침 비가 내리는 굿은 날씨였다. 비가 내리자 영국군은 총을 쏠 수가 없었다(당시 영국군 총은 비가 내리면 사격 불가). 영국군이 총을 쏘지 못하자 주민들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모여들어 영국군을 포위하고 위협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이 발생하기 3일 전인 5월 27일에 영국측과 광주의 청국 수뇌들 사이에 '광동 협약'이 성립되었다. 주된 내용은 청국측이 영국군에 6백만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의 내용이었다. 강주 지부 '여보순'은 무슨 이유인지 영국측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영국군이 삼원리에서 주민들에게 포위되어 위험하자 현지로 달려가 주민들을 설득하여 포위를 풀었다. 해산의 결정적인 계기는 포위를 풀지 않으면 주민들에게 배상금 6백만 달러를 지불하게 할 것이라는 엄포 때문이었다. 이 금액은 삼원리 주민들이 1백년에 걸려도 조달이 불가능한 금액이었기에 주민들은 포위를 풀었다고 한다.

 

광동의 수뇌들은 북경 조정에 군사를 물린 이유를 변명했다. 그리고 국고에서 영국에게 지불한 돈은 민중구제금이라는 명목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그러나 북경 조정도 속지 않았다. 감찰원 등 여러 정보망을 통하여 영국군이 얼마나 강하고 청국군이 얼마나 열세인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승산이 없기에 광동 협약 정도에서 이 사건을 마무리 짓고자 방관했을 뿐이었다.

 

광동의 양국 수뇌들도 '광동 협약'으로 사태를 종결하려 했으나 영국 정부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영국은 그동안 교섭을 담당했던 엘리엇을 소환하고 새로운 특명 전권대사로 '헨리 포팅거'를 임명하였다.  8월 10일 광주에 도착한 그는 광동은 그대로 둔 채 홍콩을 확보하고 함대를 동쪽으로 진격시켜 '아모이'를 점령한 후 다시 북상하여 '주산 열도'를 점령하였다.

 

주산 열도의 재점령은 맞은편에 있는 '진해'를 노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10월에 진해와 영파를 점령한 영국군은 일단 군대를 물렀다가 1842년에는 인도로부터 온 증원군과 합세하여 '사포'를 점령하였다. 사포 전투에서 청국군을 전멸시켰다.

 

사포를 함락한 영국군은 '오송'을 목표로 공격하여 당시 맹장으로 이름이 나 있던 청군 강남 제독 '진화성'이 요새 함락과 같이 전사하자 양강총독 '우감'은 패잔병을 이끌고 후퇴하였다.

  

영국군은  8월에 상해를 점령하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중국의 대동맥인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청군의 요새인 '진강'을 치열한 전투 끝에 겨우 점령했다. 아편 전쟁에서 진강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는데 영국군은 여자가 보이면 욕을 보인 후 살해하였는데, 수많은 여자들이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목숨을 던진 여인들이 많았다. 이 전투에서 청군은 전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일으킨 홍의포도 영국군의 최신식 무기인 거함.거포를 당할 수가 없었는데 무기의 위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장강의 요충지 진강의 함락은 곧 남경의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8월이 되자 영국군은 남경을 위협하는 한편 북경을 공격할 태세마저 보였다. 진강의 함락과 청군의 전멸 소식을 접한 청 조정은 경악하였고 대혼란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양강총독 구감.기영.이리포 등 청국의 중신들도 영국군이 천진을 노리는 듯하다는 급보를 북경 조정에 보냈다. 천진은 북경의 바로 턱밑으로 천진을 노린다 함은 바로 북경을 노린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북경 조정의 황제 도광제도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래와 같은 유지를 내렸다.

 

"연안 백성들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부득이 영국과 강화를 체결할 수 밖에 없다."

 

마침내 1842년 8월 29일 남경의 양자강 위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 '콘 윌리스' 호에서 청국측 대표 기영과 영국 대표 포팅거가 강화에 조인함으로써 아편 전쟁은 청국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나게 된다. 이 강화 조약이 이른바 '남경 조약'으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홍콩의 할양

2. 광동.아모이.복주.영파.상해 등 5개 항구 개항

3. 개항장에 영사관 설치

4. 전비 배상금으로 1천 200만 달러.몰수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공행 부채 300만 달러. 합계 2천 100만 달러를 3년이내에 지불할 것.

5. 공행의 무역 독점 폐지

6. 관세 협정

7. 상호 대등 관계 확인

 

남경 조약이 조인된 다음해인 1843년 6월 26일 홍콩에서 비준서가 교환되었다. 남경 조약은 아편 전쟁을 결말짓기 위한 조약이었으나 아편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가 없었다. 조약 체결 후에도 영국은 아편 자유화를 번번히 강요했다. 청나라는 1943년 천진 조약 체결시까지 이것을 거부했지만 아편의 밀수입은 계속 성행하여 오히려 아편 전쟁 전보다도 배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남경 조약은 주문 자체는 간단했으나 뒤이어 1843년 7월에는 5항 통상장정이 나와 영사 재판권, 최혜국 조관, 5항에서 군함 정박권 등이 보충되어 불평등 조약체제의 기본적인 조항이 제정되었다.

 

이어 1844년 7월에는 미국과 '망하 조약'이 체결되고, 같은 해 프랑스와 '황포 조약', 47년 스웨덴.노르웨이와 '광동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와 체결시 천주교 금지했던 기존의 중국 법령을 해제하기로 하였다.

 

러시아는 1848년부터 1853년 사이에 5개항에서 무역을 요구했다가 일단 거절 당했으나, 1851년 '이리 조약'을 체결하여 육로 무역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이 중국에 본격 진출하게 되었다.

 

아편 전쟁 결과 청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유아독존격인 중화 사상에서 점차 의식 개혁이 일어나 근대화의 움직임이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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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이 이처럼 영국에 무릎을 끓은 것은 무기의 성능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이는 2차 세계 대전에서 그토록 막강한 군대로 중국과 동남아를 석권하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미국의 원자탄 2발에 무릎을 끓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지금 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 발표로 한국이 대북제제를 시행한다지만 이에 대한 북한의 무력보복이나 전면전 엄포도 핵무기를 가졌다고 가정한다면 공갈로만 치부하기에 너무 안이한 생각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언제까지 미국의 핵우산 아래서 우리들의 생존을 위해 자주를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안타깝기만하다. 자주와 생존은 남이 해주기를 바랄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