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명나라의 임인궁변(壬寅宮變), 속칭 궁녀모반(宮女謀叛)

구름위 2013. 6. 1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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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역사상 궁중에서 일어난 해괴한 일들이 적지 않지만, 명나라 세종, 즉 가정제(嘉靖帝)때 궁녀에 의한 황제모살사건도 후세에 적지 않은 의문을 남겼다.

 

자고이래로 경비가 삼엄한 곳은 감옥이 아니라 황궁이었다. 황제는 다른 사람이 암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순라를 돌았다. 명나라때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 황제의 침궁은 자금성내의 건청궁(乾淸宮)이었다. 황제와 황후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이 곳에 거주할 수 없었다. 비빈들은 그저 순서에 따라 들어올 뿐이었고, 황제의 별도 허락없이는 오래 머물 수도 없었고, 그날 밤으로 떠나야 했다.

 

가정연간의 건청궁은 난각(暖閣)을 뒤에 두어 모두 9칸이었다. 매간은 상하양층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계단이 통해 있었다. 매칸에는 침상을 3장두었는데, 혹은 위층에 혹은 아래층에 두어, 모두 27개의 침상이 있었다. 황제는 그중 마음대로 한 곳을 정해서 거주했다. 그리하여, 황상에 어느 곳에 자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런 방식으로 황제의 안전은 많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그의 신변에 있는 궁녀들까지 방비할 수 있었을까?

 

바로 이들 궁녀들이 경천동지의 큰 일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상 "임인궁변"이라 불리우는 궁녀모반사건이다. "임인궁변"은 가정21년(1542년) 임인년에 발생한다. 당시의 사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가정21년 10월 21일 새벽, 십여명의 궁녀는 주후총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를 목졸라 죽이기로 결정한다. 먼저 양옥향(楊玉香)이 굵은 밧줄을 소천약(蘇天藥)에게 건냈다. 이 굵은 밧줄은 의장기에서 가져온 것으로 사화승(絲花繩)을 꼬아서 만든 것이었다. 소천약은 묶은 밧줄을 양금영(楊金英)에게 건넨다.  형취련(刑翠蓮)은 황릉말포(黃綾抹布)를 요숙고(姚淑皐)에게 건네고, 요숙고는 황릉말포로 주후총의 얼굴을 덮고, 그의 목을 꽉 조른다. 형취련은 그의 앞가슴을 눌렀고, 왕괴향(王槐香)은 그의 상반신을 눌렀으며, 소천약과 관매수(關梅秀)는 각각 그의 좌우손을 붙잡았다. 유묘련(劉妙蓮), 진국화(陳國花)는 각각 그의 두 다리를 눌렀다. 양금영이 밧줄을 묶기를 기다려, 요숙고와 관매수 두 사람은 힘을 다해서 밧줄을 끌어당겼다. 그들이 목적을 달성하려는 순간에, 밧줄은 양금영이 잘못 묶어서 더 이상 졸라지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를 그 자리에서 완전히 죽여버리지 못했다. 궁녀인 장금련(張金蓮)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바로 도망쳐서 방황후(方皇后)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황제를 구하러 달려온 방황후는 요숙고에게 한주먹을 얻어맞았다. 왕수란(王秀蘭)은 진국화로 하여금 등을 끄도록 시켰다. 그 후에 다시 총패(總牌)인 진부용(陳芙蓉)이 불을 붙였다. 그러자 서추화(徐秋花), 정금향(鄭金香)이 다시 불을 껐다. 이때 관사(管事)가 진부용이 불러 달려왔고, 이들 궁녀들은 체포된다. 주후총은 이로써 목숨이 끊기지는 않았지만, 너무 놀라서 계속 혼미해 있었고, 오래 지나서야 비로소 깨어나게 된다.

 

사건발생후, 사례감(司禮監)은 그녀들에 대하여 여러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하여 그들에게 진술을 얻어낸다. 그러나, 그녀들이 하는 말은 모두 양금영의 말과 일치했다. 결국 사례감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양금영등은 모반을 공모했다. 장금련, 서추화등은 등불을 꺼서 그에 가담하였으므로, 함께 처벌한다"

 

사례감의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주후총은 성지를 내리는데, "이들 역비(逆婢)들과 조씨(曹氏), 왕씨(王氏)는 침소에서 시해하기로 공모하였으니, 흉악하고 패륜적이므로 죄는 죽어마땅하다. 너희가 이미 심문을 통하여 명확히 알아냈으니, 주범과 종범을 구분하지 말고 모두 율에 따라 능치처참하라. 그의 친족들중 이에 참가한 자가 있으면 하나하나 찾아내서, 금의위가 압송해서 법에 따라 처결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에 넣어라. 진부용은 비록 역비이나 막았으니 추궁하지 말라. 이렇게 명하니 이에 따라 처리하라." 형부등 아문은 황상의 명을 받들어 바로 집행했다. 나중에 집행현황을 보고한 서류도 있다: "신등은 성지를 받들어, 즉시 금의위  장위사, 좌도독 진인등과 함께, 범죄자들을 붙잡아 묶어서 시정으로 끌고가서 하나하나 능지처참하였습니다. 시신은 효수하여 백성들에게 보이고, 황화승, 황릉말포는 물수하여 관고에 넣어두었습니다. 이후 계속 각 범죄자들의 친족을 잡아서, 모두 법에 따라 처결하겠습니다" 성지에 나오는 조씨, 왕씨는 누구인가? 고증에 의하면 그녀들은 영빈왕씨(寧嬪王氏)와 단비조씨(端妃曹氏)라고 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 성지를 근거로 조씨, 왕씨가 지시해서 이번 궁중변란이 일어났다고 보기도 한다.

 

사례감에 기록된 양금영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이번달 19일 동소간에 왕, 조시장(侍長, 아마도 영빈왕씨, 단비조씨를 가리키는 듯)이 있었고, 점등시에 서로 상의하여 말하기를: '우리 빨리 손을 쓰자. 그러지 않으면 (그의) 손에 죽을 것이다(누구의 손인지에 대하여 글자가 빠져 있는데, 아마도 황제에 대한 피휘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기재를 근거로 주모자가 조씨, 왕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만일 주모자가 조씨와 왕씨라면, 사료에 당연히 영빈왕씨와 단비조씨의 상황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에서 언급된 행형과정에서도 조씨나 왕씨에 대한 조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깊은 궁중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거리에 해가 비칠때도 그늘의 슬픔이 있는 법이다"이것이 명나라말기의 역사학자인 담천이 이 사건을 보는 입장이다. 사실이 어떠했는지는 더이상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이것도 하나의 궁중의 수수께끼사건이 되어 버렸다.

 

주후총이 아직 황제가 되기 전부터 그는 연단(煉丹)과 선도(仙道)를 익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온 신경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두었다. 그가 황제가 된 후에 인간세상의 부귀영화는 모두 누리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장생불사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그는 널리 도사, 방사를 불러모으고, 궁중안에서 재초(齋醮)등의 행사를 벌였다. 규모를 계속 확대했을 뿐아니라, 돈도 많이 쏟아부었다. 그는 호색한이었다. 예부로 하여금 경성, 남경, 산동, 하남등지에 사람을 보내어 민간여자 천여명을 궁중에 보내도록 시텼다. 이후 여러번 궁녀를 뽑았는데, 그 숫자가 수천에 달하였다. 가정26년(1547년)에서 가정43년(1564년) 사이에만 4번의 선발이 있었고, 모두 1080명의 8살부터 14살까지의 소녀들이 입궁했다. 이들을 뽑은 이유는 첫째, "원성순홍단(元性純紅丹)"을 연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주후총의 음락에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입궁한 여인들은 아주 적은 인원만이 봉호를 받았고, 대다수는 노역에 종사하고 몸을 망쳐갔다. 주후총이 이 사건을 당한 것은 그의 이런 호색행위와 관련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발생이유에 대하여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첫째는 가정제가 장생불사의 단약(丹藥)을 제조하기 위하여, 궁녀들을 학대하여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당시 시례감에서 궁녀를 심문한 기록에 보면 "우리가 해치워 버리자. 그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으냐"라는 말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으로 추단해보면, 궁녀들은 곧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어차피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면 먼저 손을 쓰자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각종 자료들을 살펴보면, 사건 발생전에 이 궁녀들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죽을 죄를 진 것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이런 점에서 추단하는 것이 아마도 장생불로의 단약을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가정제 주후총(朱厚[火+悤])은 여색을 밝혀, 건강상태가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럴수록 가정제는 도교의 선술에 빠져들어 장생불사를 기원했다. 유명한 방사(方士, 방술을 행하는 도사)들은 비약(秘藥)이나 연단약(煉丹藥)을 바쳐 횡재를 하곤 했다. 도중문(陶仲文)은 가정제의 가장 총애받는 방사의 하나였는데, 한번 상을 내릴 때면 10만냥의 은을 내리곤 했고, 관직도 일품에 달하게 하여, 그의 자손들까지 덕을 보게 되었다.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전국각지에서 비약과 연단약을 갖다 바치는 것이 줄을 이었다.

 

당시의 단약비방중 가장 유행하던 것은 "홍연(紅鉛)"이었는데, 처녀의 월경과 약가루를 섞어서 만든 것이었는데 진사(辰砂)와 비슷했다. 또 하나는 "함진병자(含眞餠子)라는 것인데, 갓태어난 영아가 입에 물고 있는 핏덩어리를 얘기한다. 가정제 때는 1547년에서 1564년까지의 사이에 4번에 걸쳐 궁녀를 뽑았는데, 1008명의 8세부터 14세까지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궁녀로 뽑았다. 당시 항제는 궁녀들에게 하혈약을 강제로 복용시켜 궁녀들의 신체가 많이 상했을 뿐아니라, 피를 뽑은 궁녀들은 아마도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하에서, 궁녀들은 다른 궁녀들이 죽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도 조만간 죽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면 가정제와 동귀어진하자고 생각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가정제가 궁녀들의 원한을 산 것까지는 비슷한데, 다만 원인을 장생불로의 단약이 아니라 가정제의 포악함에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가정제는 성격이 잔폭하고 기뻐하고 화내는 것이 순간적으로 바뀌며, 사람을 대하는게 그때그때 달랐다는 것이다. 황후부터 궁녀까지 모두 그랬는데, 황후만 보더라도 첫번째 황후인 진씨는 단지 가정제가 호색하는데 대하여 약간의 불만이 있다는 이유로 화를 불같이 내며 진씨와 그 복중의 아들까지 다 죽여버린다. 진씨의 사망후에 가정제는 순비 장씨를 황후로 세우고 매우 아꼈는데, 역시 사소한 일 하나로 화가 나서 장씨를 폐출시키고 덕비 방씨를 황후로 세운다. 황후 방씨는 바로 임인궁변에서 가정제의 목숨을 구해주는 그 여인이다. 그런데, 방씨가 황제가 총애하던 조씨를 죽게 하였다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몇년후 황후의 후궁에서 불이나는데, 가정제는 그저 보기만 하고 구해주지를 않아 방씨는 무섭고 놀라서 경황이 없는 중에 사망하게 된다.

 

황후들에게도 이렇게 대한 가정제가 나머지 궁녀들에게 어떻게 대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조선의 사서에 의하면 가정제는 색을 탐하였으나, 궁인이 아주 조그마한 잘못을 저질러도 절대 용서하지 않고 매질을 심히 하였다. 이로 인하여 200여명에 달하는 궁녀들이 맞아죽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는 궁녀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동시에 너죽고 나죽자는 심정까지 생기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궁녀들이 "우리가 먼저 손을 쓰자. 그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 것이다.

 

셋째 의견은 영빈 왕씨가 주모자라는 것이다. 왜 왕씨가 궁녀들을 교사하여 가정제를 살해하도록 하였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가정제는 신체가 약하고, 항상 기침을 하였던 그녀는 가정 9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가정 10년부터 가정제는 궁내에 흠안전에 제단을 설치하고 후사를 잇도록 기도를 드렸는데, 예부상서가 감례사가 되어 문무대신들이 돌아가며 향을 올렸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가정 15년에 도사 소원절(邵元節)등이 주청하여 단을 세우고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교묘하게도 그 해부터 후궁비빈들이 사내아이를 낳았고 여러명의 아이를 낳게 되었다. 영빈 왕씨도 이 해에 가정제를 위하여 아들을 낳게 된다. 관례에 따르면, 빈에서 비로 승격시켜주어야 하는데, 왠 일인지 가정제는 영빈을 비로 승격시켜주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영빈 왕씨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 가정제가 총애하는 조씨의 궁중에서 잘 때, 양금영등 궁녀를 시켜 황제를 목졸라 죽이게 하여 보복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며, 책임을 조씨에게 덮어씌우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설은 설득력이 좀 부족하다. 이미 자식을 낳은 비빈이 이렇게 큰 모험을 한다는 것도 상리에 맞지 않을 뿐아니라 십여명의 궁녀가 영빈 왕씨를 위하여 생사를 돌보지 않고 황제를 살해하는데 가담하였다는 것도 가능성이 적다.

 

넷째, 정치투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직전 황제인 무종은 황음무도하여 자식을 남기지 않고 사망하였는데, 유언도 남기지 못하였다. 임종시에 태감에게 태후와 조정대신들이 상의하여 후사를 정하라고만 하였을 뿐이다. 자수황태후가 조정대신들과 상의한 후 흥헌왕(興獻王)의 아들인 주후총을 가정제로 세우기로 한다. 배분상으로는 세종과 무종은 당형제이므로, 황위계승의 원칙과 황가의 전통에서 보자면 자기의 생부인 흥헌왕은 숙부가 되고, 무종의 부친인 명효종을 부친으로 삼는 것이 맞다. 그런데, 가정제는 자신의 생부를 황제에 추증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황통을 이을 때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지 아니하는 바람에 가정제의 즉위후에 이를 둘러싼 조정의 논쟁은 끊이지를 않았다. 내각수보인 양정을 중심으로 한 일파에서는 명나라 황실의 전통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장총등의 사람들을 대표로 한 일파에서는 가정제의 뜻에 따라 처리하자는 입장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이를 둘러싸고 역사에서 말하는 소위 "대예의(大禮儀)"논쟁을 근 20년간 벌인다. 표면적으로는 예의에 대한 다툼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정신하와 황제, 그리고 조정신하들간의 격렬한 권력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예의논쟁이 막 가정제의 의사대로 종결되자마자 임인궁변이 일어난다. 그리고, 단비 조씨와 영빈 왕씨가 관련된다. 이로써 추측해보자면, 대예의논쟁에서 패배한 일파?에서 비빈을 이용하여 가정제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