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명나라때의 의문의 북경대폭발

구름위 2013. 6. 1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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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년전인 1626년 5월 30일(명나라 천계제 6년 5월 6일) 오전 9시경에 북경의 자금성바깥 서남쪽 약 3킬로미터지역에 위치한 곳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왕공창(王恭廠, 현재의 선무문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3평방킬로미터지역에 걸쳐서 일어났는데, 북경에서 십킬로미터이상 떵어진 곳에서도 강렬한 진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폭발의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것뿐아니라, 폭발후에 발생한 재해의 형태도 매우 기괴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최초에 이 사건을 기재한 것은 관방의 기록문서인 저보(邸報)이고, <<명계북략>>에서 <<병인오월초육기이>>로 기재하고 있는데,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계병인오월초육 사시에 하늘은 희고 맑았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큰 진동이 들리더니 하늘이 꺼지고 땅이 가라앉았다. 깜깜한 밤처럼 어두워졌고, 집들이 무너져 평지가 되었다. 왕공창일대는 파괴가 더욱 심하였다. 시체가 겹겹이 쌓이고, 악취가 진동했다. 성안에 있는 집들도 성한 곳이 없었다. 모두 놀라서 날뛰었고 멀리 구름기운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어지러운 실같은 것도 있고, 오색인 것도 있고, 영지버섯처럼 검은 것도 있었는데 하늘로 솟아올랐다. 대전에서 일하는 자들이 진동으로 떨어진 자가 2000명이었는데, 모두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상처입은 남녀들은 모두 발가벗은 상태였고, 실오라기하나 하나도 걸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부인들이 벗은 몸으로 지나가는데, 어떤 이들은 기와로 음호를 가리고, 어떤 이들은 반쪽다리로 가렸으며, 어떤 사람은 반쯤남은 이불로 가린 자도 있었다. 장안가의 공중으로 사람의 머리, 논썹, 코, 이마가 우수수 떨어졌다.

 

이상의 기록에서도 폭발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알 수 있다. 여기서 영지버섯과 같은 구름은 마치 원자폭탄이 폭발했을 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의복이 모두 벗겨져서 모두 나체로 되었느냐는 점이다. 도대체 의복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저보>>는 아래와 같이 기재하고 있다.

 

진동으로 무너진 후, 보고에 의하면, 옷들은 모두 서산에 날아가서 절반정도는 나무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창평주의 교장에도 의복이 쌓여있고, 장신구 은, 식기등 없는 것이 없었다.

 

관방의 보고서외에 민간에서 쓴 글에서도 이 재난을 기록하고 있다. 유약우가 저술한 <<작중지>>에 의하면

 

천계6년 5월 초육일 진시에 갑자기 크게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큰 나무 스무그루가 땅에서 모두 뽑혔다. 뿌리가 위를 향하고 가지가 아래를 향하였다. 그리고, 구덩이는 수장깊이가 되었다. 구릅이 올라갔는데 영지버섯 모양을 하고, 동북쪽으로 몰려갔다. 죽은 자들은 사지가 멀쩡하지 못하였고,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나체였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도 역시 대부분은 옷과 모자가 벗겨졌다. 정말 보지 못했던 해괴한 사건이었다.

 

이외에 어사 왕업호가 황제게게 바친 글에서도 스스로 겪은 바를 기재하고 있다.

 

신등이 진각에 관청에 들어가 일을 보려고 할 때, 갑자기 진동음이 들렸는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같았습니다. 화염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사방에서 담장이 무너지고 집이 갈라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정원의 나무가 모두 뽑혔는데, 불에 탄 흔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약방건물이 날아가 버리고 수장깊이의 구덩이가 생겼습니다.

 

각종 기재를 보면, 북경대폭발은 절대 단순한 폭발사건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많은 의문점들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왕공창이 비록 당시에 군수용품을 보급하는 기관이기는 하였으므로, 화약을 보관하고 있었겠지만, 폭발후에도 풀하나 나무하나 불에 타지 않은 것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폭발한 것인지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폭발의 위력이 엄청난 것도, 그리고 사람들의 옷이 모두 벗겨져서 창평으로 날아간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머리카락 하나 손상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공왕창에서 동북쪽으로 약6킬로미터 떨어진 화신묘에서는 폭발전에 어떤 사람이 기괴한 음악성을 들었고, 그리고 하나의 불구덩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얼마지나지 않아 재난의 진동음이 들렸다는 것이다. 당시 공부상서 동가위는 두 팔이 절단되었고, 어사 하정추, 반운익은 집에 있다 죽었으며, 두 집안의 가족들도 모두 흙속에 묻혔다고 한다. 또한 석부마대가의 50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돌사자는 날아서 순성문바깥에 떨어졌고, 상래가의 황가상원의 상방은 모두 무너져서 코끼리가 놀라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승은사가의 8명이 메는 가마가 지나가다가 재난을 만났는데, 가마는 거리중심에 부서져 있는데, 가마탄 여자와 8명의 가마꾼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었다. 채시구의 주씨 성을 가진 소흥에서 온 사람은 6명과 얘기하고 있다가 홀연히 머리가 날아가고 몸통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옆에 있던 6명은 아무 일이 없었다. 더 이상한 것은 죽은 자이건, 상처를 입은 자이건, 아무런 상처가 없는 자이건 모두 사고이후에는 옷이 날아가서 나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원홍규가를 지나가던 가마속의 여인은 재난시에 가마두껑이 날아가고 여인의 옷과 장신구는 다 날아갔지만 그녀의 몸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가마속에 앉아있었다고 한다. 어느 관리의 시종도 재난을 당했을 때 그저 모자와 옷과 바지 그리고 신발등이 순식간에 다 없어졌다고 한다. 어느 한 관리의 소첩은 기왓장더미에 깔렸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주고 보니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폭발의 힘은 주로 왕공창 중심구역내였다. 폭발후의 충격은 동, 서, 북의 세개 방향이었고, 남쪽으로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 원인에 대하여는 수백년동안 각종 의견이 제시되었다. 지진으로 인한 것이라는 설, 화약폭발에 의한 것이라는 설, 운석에 의한 것이라는 설, 화산열에 의한 강폭풍이 있었다는 것, 등이다. 심지어는 UFO가 나타났다든지 외계인이 침입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북경지질학회등 20여개의 단체는 1986년에 학술토론회를 열어 이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였는데, "대기의 정전기가 재난을 불러일으켰다는 설", "지진이 화약폭발을 일으켜 사고가 났다는 설", "지구열핵의 강력한 폭발작용이라는 설"등이 제시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론은 신선하기는 하지만, 재난동안 저온이며 불이 붙지 않고, 의복이 날아가는 등의 드문 특징을 해석하기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