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세를 풍미했던 몽골은 유라시아대륙을 휩쓸었고, 싸우는 전투마다 승리했고, 격파하지 못한 성이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두번이나 쳐들어갔지만, 모두 참혹한 실패로 끝이 났다. 몽골인들이 일본으로 진격한 이유는 일본이 몽골제국에 신복(臣服, 굴복하여 신하로 자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여러번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으로 하여금 신하를 자처하고 공물을 바치도록 요구했다. 고려국왕도 일본에 서신을 보내어 몽골인들에 굴복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매번 쿠빌라이의 요구를 가볍고 멸시적으로 거절했다. 이같은 무례한 나라에 대하여 군림천하의 몽골대칸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두번에 걸친 대규모의 일본본토침략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제1차몽골의 일본침입은 1274년에 발생한다. 일본으로 진격하는 원정군은 조선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규슈로 향한다. 원정군은 모두 2만5천명이었고, 그 중에는 몽골인과 고려인이 각각 절반씩이었다. 그리고 일부 여진족과 일부 한족이 끼어 있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몽골인 홀돈(忽敦)이었고, 두명의 부사령관은 고려인 홍다구(洪茶丘)와 한인 유복형(劉復亨)이었다. 원나라군은 하카다(博多)항까지 항행하여 갔고, 먼저 쓰시마섬(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를 점령했다. 그후에 세 곳으로 나누어 규슈에 상륙해서 내륙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삼로(三路)의 군대중에서 일로(一路)는 주력군이었고, 양로(兩路)는 보조군이었다. 주력부대의 상륙지점은 개략 나카사키(長崎) 부근이었다. 제1차 몽고침입을 맞이하여, 일본의 카마쿠라(鎌倉) 막부는 일부 정규군을 소집하여 응전했다. 규슈연해의 각 번(藩)들도 긴급히 사무라이와 민병을 조직하여 전투에 참가한다. 참혹한 전투는 20여일간 지속되었다. 유복형은 격전중에 전사하고, 원나라군은 절반을 잃고 바닷가로 물러나서, 대포에 의지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원나라군의 사상자가 많아, 패전은 불가피했다. 화살과 식량도 바닥이 났으므로 더 이상 진지를 사수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원나라군은 배에 올라타고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제2차몽골의 일본침입은 1281년에 발생한다. 쿠빌라이는 중국을 통일한 후, 제2차일본침입에 착수한다. 원나라제국의 방대한 원정군은 강소절강과 조선에서 동시에 출발한다. 이번 출정의 군대진용은 이전보다 훨씬 장관이었다. 대소선박이 모두 5천척이고, 군대는 약 20만이었다. 그중 몽골인이 4만5천명, 고려인이 5만여, 한인이 약 10여만이었다. 그중 한인의 절반이상은 신부군(新附軍, 즉, 개편한 남송의 군대)이었다. 원정군에서 몽고인들은 당연히 작전의 핵심역량이었다. 6월상순, 원나라군은 상륙작전을 시도한다. 상륙지점은 구룡산(九龍山)으로 제1차때 상륙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번 원정군은 더욱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몇명의 몽골군 고급지휘관이 연이어 전사한다. 격전은 1개월여간 지속되었고, 원정군의 손실이 이미 1/3을 넘어섰다. 일본연해의 바닷가에 견고한 석장(石墻)을 쌓아두었으므로, 원나라군의 계속된 진공도 돌파하지 못하여 무위로 돌아갔다. 7월하순, 원나라군의 양식과 화살이 기본적으로 바닥났다. 그리하여 원나라군은 철수하게 된다.
사료를 분석해보고, 필자는 몽골이 두번에 걸친 진격에서도 일본을 정복하지 못한 주요한 이유는 아래와 같은 여섯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제1차일본진공때는 병력이 부족했다. 남송이 아직 멸망하지 않아서, 몽골은 중국의 북방만을 지배하고 있었고, 당시 몽골제국은 병사를 모아 남송을 치는 것을 준비하고 있어서, 일본에 진공하는 군대는 그저 5만여에 불과했다. 먼길을 가서 싸우는데다, 몽골인들은 바다를 건너서 전투하는데는 익숙하지 못했다. 여기에 일본민족은 강인하였다. 그리하여 병력차이가 현격했다. 병력부족의 원인은 전선이 여러개였다는 것을 제외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쿠빌라이가 당시 군사력이 강했던 일본을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둘째, 몽골은 전술상으로 전혀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일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몽골인들의 전투력은 상상한 것처럼 강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개시후, 일본인은 몽골인과 접근전방식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몽골인들의 궁술과 대포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몽골병사들은 힘든 것은 잘 견디고, 필요하면 말고기를 먹고 말피를 마시면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작전에서는 기동력이 좋고, 적은 식량과 풀만 가지고도 사병의 먹고 입는 문제는 현지에서 강탈하여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전쟁에서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도저히 발휘하지 못했다. 내륙의 주민거주지까지 진입하지도 못했다. 그러다보니 약탈할 땅도 없었다. 이와 비교하여 일본인들의 전술은 훨씬 고명했다.
셋째, 몽골은 무기장비에서도 우세하지 못했다. 대일작전에서 몽골은 제1차침입때 무기장비의 면에서 자기들에 비하여 손색이 없는 적수를 처음 만난다. 일본인들의 우세는 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사의 철갑(鐵甲)에서도 두드러졌다. 원나라군의 보통사병의 도검이 일본도와 부닥치면 바로 부러졌다고 한다(당시 일본의 야금술과 도구제작기술은 세계일류였다. 일본도의 성능은 북인도와 서아시아에서 나는 다마스커스검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였고, 일본강철은 중국강철보다 훨씬 강했다). 거리가 조금만 멀어지더라도 몽골군의 화살은 일본무사의 갑옷을 뚫지 못했다.
넷째, 일본사무라이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아서, 전투기술의 측면에서 몽골인들보다 뛰어났다. 몽골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단독격투에서 뛰어났다고 한다. 이는 일본인들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일본인들은 원나라군대에서 한인들에 대한 평가는 아주 낮았다. 그들이 보기에 한인군대는 죽기를 겁내는 겁장이였고, 사기도 낮았으며, 가장 표준적인 날나리부대였다.
다섯째, 바다를 건너는 전쟁임에도 비밀유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두번의 침입은 모두 기습이 아니었다. 일본은 사전에 정보를 취득하고 있었고, 충분한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제2차침입에 대하여 일본인들은 엄밀하게 원나라제국의 동향을 파악했고, 몽골의 공격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이때 일본정국은 안정되어 있었고, 북조시종(北條時宗)은 카마쿠라막부와 일본 각번에 대하여 잘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하여 인력과 물자를 많이 동원할 수 있었다. 막부는 규슈에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하카다만일대에 몽골군이 상륙할만한 곳에 석방을 쌓았다. 이로써 몽골기병들의 활동을 제약하게 하였다. 사실상 몽골병사들은 이 방어선을 시종 뚫지 못하였던 것이다.
여섯째,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태풍이 일본을 도와주었다. 두번의 침입에서 모두 맹렬한 태풍의 습격을 받아, 손실히 참혹했다. 1281년 제2차침입때인 8월 1일, 태평양상에 돌연 맹렬한 태풍이 발생한다. 퐁풍은 4일간 지속되었고, 원나라군의 남방함대의 함선은 기본적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북방함대의 함대도 절반이 부서졌다. 북방함대의 남은 함선에 지휘관과 일부 몽골군과 고려군을 싣고, 전장터를 떠나 고려로 돌아간다. 남방군의 지휘관과 고위장수들은 희망이 없다고 보고, 대부대를 남겨놓고, 남방함대의 잔존한 몇 척의 배에 올라타고 도망치게 된다. 이때 구룡산의 바닷가에는 아직도 거의 10만에 이르는 원나라군대가 남아있었다. 이들은 보급선과 퇴로를 차단당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도 없게 된다. 그리하여, 절망적인 지경에 놓이는 것이다. 3일후, 일본인들이 반격을 시작하고, 잔존한 원나라군은 팔각도(八角島)라는 협소한 지역으로 몰아넣고, 공세를 취한다. 그리하여, 원나라군은 대부분 피살당하고, 남은 2만여명은 포로로 붙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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