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델란드의 아름다운 꽃으로만 기억되는 튤립
하지만 이 튤립에 얽힌 광기의 역사는 수 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 넣고
빚더미에 올려 놓았으며, 수 천명을 파산시키고 자살에 이르게 했다.
한 송이의 꽃이 어떻게 한 나라를 파멸로 이르게 했을까?
1. 튤립의 탄생
튤립은 전 세계에서 장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심어지고 있는 꽃이다.
대부분 네덜란드의 꽃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중앙 아시아에서 태어난 동양의 꽃이다.
최초의 튤립은 파미르 고원에서 처음 꽃을 피우고 이름없이 지냈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환경이 나쁘다는 톈산 산맥의 구릉과 계곡에서 번성했다.
이렇게 이름없는 야생화가 나중에 한 국가를 뒤흔들 줄이야...
이 때의 튤립은 그다지 세련된 모습이 아니었다. 화려한 색깔도, 타오르는 듯한 불꽃 모양도,
여유로운 우아함도 가지지 못했지만 황량한 들판에서 피어난 튤립은 그래도 아름다웠다.
그 지역의 투르크족 유목민들에게는 생명과 다산을 상징하는 꽃으로 여겨졌고,
무엇보다 봄의 전령이었던 튤립은 대략 11세기경 페르시아에서 처음 재배되었다.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정착하면서부터 튤립의 기나긴 역사도 시작되었다.
2. 술탄의 튤립
튤립은 페르시아의 야생화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정원을 장식했다.
14세기 무렵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튤립을 불운을 막아주는 신성한 꽃으로 여겼다.
활짝 피면 고개를 숙이는 튤립이 “신 앞에서의 겸손”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으며
천국이 튤립으로 뒤덮여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왕궁에서는 그 꽃을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병사들은 전장에 나갈 때 갑옷 속에 입는 셔츠에 튤립을 수놓았는데,
속옷에다 그렸던 이유는 이슬람에서는 당시에 튤립을 그리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15세기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꾼 뒤부터
튤립은 오스만 왕궁의 정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꽃으로 지위를 확고하게 굳혔다.
기이한 것은 술탄의 정원사는 사형 집행인도 겸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들은 술탄의 엄명으로 궁 안에서 가장 은밀한 술탄의 정원에 튤립을 심고 가꾸었다.
이때부터 오스만 제국은 무려 1,500여 종의 튤립 변종을 만들어냈다.
이후 16세기 말부터 튤립을 그리는 것에 대한 금지가 관대해지면서
슐레이만 황제의 비단 옷에는 수백 송이의 튤립이 수놓아졌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튤립이 유럽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3. 튤립의 침략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를 침략하면서부터 튤립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튤립을 식품이나 약초로만 여겼던 유럽인들은 그 꽃의 아름다움 때문에
꽃을 재배한다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때부터 튤립은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튤립은 한 상인의 옷감 꾸러미에 실려 들어와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상류층을 사로 잡았다.
당시 네델란드는 해상무역으로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엄청난 부를 얻게 된 네델란드의 상류층들은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교외에 저택을 지었고
그 정원에 값비싼 식물들을 심게 되면서 튤립은 이른바 부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더군다나 유럽의 기후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튤립은 더욱 신비한 모양으로 바뀌어갔다.
그러자 이 희귀한 품종은 매우 높은 가격에 거래되면서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게다가 부자들은 이 꽃을 상류층의 징표로 삼아 상대의 부를 측정하기도 했는데,
이를 모방하고 싶었던 평민들도 나중에는 이 꽃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튤립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치닫고 있었다.
4. 튤립의 광기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중에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있다.
툴프 박사는 암스테르담 최고의 의사였으며 본명은 클라스 피테르존이었다.
그는 튤립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튤립을 상징하는 툴프로 바꾸었다.
이처럼 야생화였던 튤립은 17세기 네델란드인들에게 유행 아이템이 되고 있었다.
튤립 광풍이 네델란드를 휩쓴 것은 1630년대에 들어서부터였다.
처음에 15길더에서 거래되던 것이 나중에는 열 배가 넘는 175길더로 뛰었다.
꽃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너도 나도 튤립재배에 뛰어 들었다.
값은 계속 폭등했고, 사람들은 전 재산을 팔아 튤립 뿌리를 사서 키웠다.
기록에 따르면 1633년 500길더였던 것이 4년 뒤에는 1만 길더를 기록했다고 한다.
당시 암소 한마리 가격이 100길더였으므로 꽃 한송이로 소 100마리를 살 수 있었다.
그러니 튤립의 광풍은 오늘날 자본주의적 광기에 다름 아니었다.
네델란드 사람들은 앞 다투어 튤립산업에 달려들었다.
이젠 농부, 벽돌공, 군인, 선장, 성직자까지 모두 튤립의 상인으로 변모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치웠고, 제분소와 양조장까지 팔아 튤립매매에 뛰어들었다.
최고 인기 품목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얼룩말 무늬가 생기는 튤립이었다.
사람들은 희소성을 더하기 위해 그 튤립에 등급과 이름을 붙였다.
이 튤립은 셈페르 아우구스트라는 이름으로 한 송이 값이 무려 집 여섯 채 가격이었다.
튤립은 이제 꽃이 아니라 금이었다. 네델란드 전역에 튤립 거래소가 설치되었고
암스테르담의 증권거래소는 튤립 거래를 상장 종목으로 내걸었다.
5. 튤립의 재판
17세기 네델란드의 한 농가에 사는 한스(가명)는 친구를 만나러 암스테르담에 갔다.
그는 친구 집 앞마당에 싱싱해 보이는 알뿌리가 심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양파잖아? 고것 참 맛있겠군!" 한스는 알뿌리 한 알을 캐서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이를 발견한 친구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한스를 법정에 불러 세웠다.
"집 한 채 값이나 하는 튤립 뿌리를 먹어 치우다니! 당장 물어내!!"
어리둥절한 한스는 법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튤립 한 뿌리가 집 한 채 값이라고요? 아니, 튤립이 왜 그렇게 비싼 겁니까?
그럴 가치가 있나요?"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한스는 평생에 걸쳐 그 빚을 갚아야 했다.
대학에서 식물학을 가르치던 바스텐(가명) 교수도 재판을 받았다.
그는 튤립에 대한 사람들의 광기를 경멸했다. "모두 미쳐가고 있어!"
그는 거리를 지나다니며 튤립을 지팡이로 후려치는 난폭한 행동을 보였다.
곧바로 체포된 그는 재판을 받았고 정신이상자 판정을 받았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결국 교수는 미쳤다는 이유로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외쳤다. "나만 빼고 다 미쳤어!!"
6. 튤립의 몰락
루테르(가명)라는 유명한 풍경화가가 있었다.
그는 3년 동안 그림에는 손대지 않고 튤립 열풍에 휩싸였다.
"이 거래는 술 취한 머리로 해야 해, 그리고 대담할수록 더 좋아."
1673년 2월 4일, 그는 자신의 전재산과 거액의 빚을 더해서 튤립 알뿌리를 샀다.
그 날은 네델란드 역사상 튤립이 가장 비싸게 거래된 날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이었다. 그는 막차를 타고 말았다.
튤립으로 떼돈을 번 암스테르담의 한 상인이 그 날 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냥 꽃일 뿐인데, 왜 금보다 비싸지?"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2월 5일 아침,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튤립을 시장에 내 놓았다.
결국, 천정부지로 치솟던 튤립 값이 하루 아침에 폭락하기 시작했다.
1만 길더짜리 튤립이 1천 길더에도 안 팔리고, 500길더에도 팔리지 않았다.
시장에는 악성루머가 돌고 있었고, 이것은 가격폭락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리고 이제는 50길더에도 팔리지 않게 되었다.
결국 루테르와 함께 막차 탄 사람들은 졸딱 망하고 말았다.
하루만에 수 천명의 알거지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울부짖었고
암스테르담 곳곳에서 자살자들이 속출했다.
정부는 폭락을 막기 위해 긴급대책을 내놓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이 광기로 인해 네델란드에는 경제 공황이 불어 닥쳤다.
루테르는 이후 19년 동안 가난에 시달리다가 빚을 다 갚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7. 튤립의 부활
튤립의 광기가 유럽을 초토화시킨 뒤 300년이 지나서야 튤립이 다시 부활했다.
그것도 애초에 야생화로 피어났던 고향 땅에서 다시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이다.
때는 2005년 3월 13일이었다. 키르키즈스탄에서 두 번째 의회 선거가 있었던 날이다.
당시 키르키즈의 집권여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는데, 이 과정에서 온갖 부정이 저질러졌다.
야당과 언론에서 이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면서 전국적으로 반정부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시민들의 위대한 힘을 절감한 아카예프 대통령은 15년간의 장기 집권을 마감하고
러시아로 도피했으며, 여당의 실세인 타나예프 총리 역시 사임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었고 시민의 지지를 받는 바키예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역사가들은 이를 가리켜 튤립혁명이라고 부른다.
[출처] EBS 지식채널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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