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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스테네스 (Demosthenes) BC 384~322 (이하 데모스)
데모스는 바보라는 비웃음을 받으며 재산까지 횡령당했지만
복수심에 스스로를 단련시켜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웅변가가 되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에 끝까지 대항하며 아테네의 자유를 위해 지도자로 활약했으며
그의 연설문은 BC 4세기 아테네의 정치, 경제, 사회를 들여다 볼 수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청년시절
데모스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 인물로 부유한 칼 제조업자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체력도 약한데다가 말까지 더듬어 주위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7세 때 아버지가 죽어 많은 유산을 물려 받았으나 이것은 후견인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데모스는 이렇다할 대항도 못해보고 아포보스와 그 일당에게 전재산을 뜯기게 된다.
빈털터리가 된 데모스는 후견인들의 횡령을 고발하고 싶었으나
당시 사회는 고소 당사자가 직접 대중들에게 연설을 해야만 했다.
이것은 숫기도 없고 발음까지 부정확한 데모스에게는 패배가 뻔한 싸움이었다.
나약한 체력과 어눌한 말투, 게다가 기술도 없었던 이 청년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단 한가지, 그에게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속적인 의지가 있었다.
이때부터 데모스는 복수심이라는 일념하나로 지옥훈련에 들어간다.
먼저 그는 머리카락을 밀어버리고 지하실에 은둔하였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절대 사람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그의 비장한 눈빛이 어두운 지하실에서 푸르게 번뜩이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웅변술을 익히고 법률과 수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지하실에서 그는 끊임없이 큰 소리로 발성연습을 했으며
발음이 부정확하고 말을 더듬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자갈을 문 채 연설을 하고
달리기를 할 때나 숨이 찰 때 시를 암송해 자신의 결점을 하나씩 극복해갔다.
또한 큰 거울 앞에서 표정과 제스처를 연구해가며 연설을 연습하였다.
이렇게 열심히 훈련을 쌓은 그는 드디어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그는 밖으로 나와 대중들에게 최초의 연설을 했다.
하지만 연설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고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해야 했다.
얼굴이 빨개져서 무대에서 내려온 그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지하실에 들어간 그는 또 다시 맹훈련에 들어갔다.
BC 363년, 그는 후견인 아포보스에 대한 소송에서 처음으로 성공적인 연설을 했다.
이 소송으로 큰 돈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연설전략과 논쟁방법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확실히 돈이 많았던 아포보스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후 데모스는 더 이상 재산반환 소송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20세가 된 데모스의 웅변술은 서서히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당시 소송에서는 원고와 피고 모두가 직접 연설을 했기 때문에
연설문을 잘 쓰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관습이 있었다.
아포보스를 공격하는 연설에서 보인 그의 재능은 시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이 유명세로 기꺼이 많은 돈을 내고자 하는 부유한 권력층을 고객으로 맞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평생의 직업이 되었으며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극대화 시켜주었다.
BC 354년 (30세) 그는 '해군위원회에 관하여'라는 중요한 연설을 했다.
당시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아 민회가 소집되었는데,
그때 그는 "조용히 해군력을 강화하여 우리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페르시아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탄탄한 논리로 아테네인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또 "만약 아테네가 먼저 공격을 한다면 동맹국을 얻지 못하겠지만
페르시아가 먼저 공격한다면 다른 그리스 국가들이 아테네에 가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는 전생애에 걸쳐 주장한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즉 "아테네가 민주주의적인 자유를 가장 훌륭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는 한편, 위험이 닥치게 되면
언제든지 그들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테네의 민회가 열렸던 프닉스
이때부터 데모스의 활동은 사실상 아테네 외교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뛰어난 연설을 무기로 민주파의 실제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를 견제하는 과두파는 부유층과 상인들로 이익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테네의 자유와는 상관없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원했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마케도니아인들이 야만인이라는 데는 공감했으나
테베와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도 신용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마케도니아를 아예 적대시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테네 민회는 강한 구속력이 없이 느슨하게 조직되어 있었으며
구성원인 남자 시민이 6천명에 달했으므로 때로는 소란스러운 기구이기도 했다.
연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함을 질러 내려오게 하거나 비웃음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어떤 시민이라도 연설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있었지만 그 수준이 높아야만 무대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이런 혼탁한 시대에 데모스는 최고의 진가를 발휘했다.
현대인들은 준엄하고 무서운 그의 성격 때문에 그를 '금주가'라 불렀다.
당시 민회에서 욕을 하는 것은 예사였으나 그는 매너를 지키면서도 신랄했다.
그는 평생의 라이벌인 아이스키네스를 공격하면서 '왕관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그는 '간교한 동물, 게으른 수다쟁이, 궁전의 늙은 말, 타락한 인간' 등등의 표현으로
아이스키네스를 공격하였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청중들의 존경심을 깍아 내리는 전략이었다.
그는 한 문장의 표현으로 여러 요소와 효과를 담아내는 이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이스키네스 : 이하 아이스)
그는 언어 구사력을 높이고 충분한 이해를 위해 그리스 역사를 열심히 연구했으며
연설문에 역사적으로 유사한 사건들을 인용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 시켰다.
또 이를 위해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8번이나 베껴 쓰며 외웠다고 한다.
그는 끊임없이 아테네인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민주주의의 신념을 기억하며
그들이 얼마나 참주정치를 싫어했던가를 스스로 돌이켜 보라고 부탁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애정은 그의 연설에 인간미를 불어넣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흥미를 잃지 않게 해준다.
또한 그는 매우 부지런하여 낮에 들은 연설과 대화를 밤늦게까지 검토하였으며
그에 따라 제시될 수 있었던 답변과 연설을 여러 가지로 가정해보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미리 연설을 주의깊게 준비할 시간이 있을 때는 언제나 탁월함을 보였으나
아테네 정치 생활의 성격상 즉석에서 상대에게 답변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때는 상대를 압도적으로 능가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마케도니아의 팽창
한편 북쪽의 마케도니아에서는 데모스와 거의 비슷한 나이의 필리포스 2세가
팽창정책을 취하며 국경지대의 그리스 도시들을 차츰차츰 합병해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BC 356년에 아테네를 보호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영토를 갈취했으며
BC 354년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아테네의 소유지를 차지해 버렸다.
BC 353년, 스파르타와 아르카디아는 필리포스를 막기위해 아테네에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군사력뿐만 아니라 뇌물과 협박을 동원해가며 필리포스가 계속 남쪽으로 내려오자
아테네인들은 테르모필레 고개를 봉쇄하기 위해 지상군을 파견했다.
비록 필리포스는 뒤로 물러나 아테네와 정면 충돌을 피하기는 했지만 그의 의도는 분명해졌다.
그러나 많은 아테네인들은 필리포스의 위협이 일시적인 것이라고 계속 믿었다.
이것은 어쩌면 아테네의 부유층들이 그렇게 여론을 호도했는지도 모른다.
부유층과 이익집단들은 아테네가 모든 식민지를 잃더라도 전쟁은 절대 안된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의 상공업에 지장이 생기고 재산을 보호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든지 새로운 권력자와 결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데모스는 이러한 아테네인들의 안일함에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BC 351년 (33세) 데모스는 필리포스에 대항하는 소위 '필리포스 탄핵 1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그는 마케도니아에 대항하는 민주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
플루타르쿠스는 그런 그를 이렇게 평했다. "그리스를 위해 그가 선택한 길은 고귀하고 정당한 일이었다"
필리포스 탄핵 1편에서 그는 과거 아테네가 강력했던 스파르타를 무찔렀던 점을 깨우쳐주고
만약 필리포스가 우리가 생각하듯 진짜로 겁이 많았다면 우리의 땅을 빼앗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시민들에게 사태를 방관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 연설은 선동적이었지만 아테네인을 자극시키지는 못했다.
BC 349년, 필리포스가 칼키디키에 침입해 올린토스를 위협하자 그들이 아테네에 도움을 청했다.
데모스는 올린토스 원조를 주장하며 세 차례의 선동적인 연설을 했으나
올린토스는 아테네에게서 별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함락되고 말았다.
데모스는 오랜 싸움이 벌어지리라 예상해 그에 대비할 시간을 어느 정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평화조약에 동의하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필리포스와 협상하러 마케도니아에 갔다.
협상 동안 필리포스는 말 잘하는 데모스가 그의 계획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고
데모스를 무시한 채 대신 그와 함께 온 아이스에게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아이스는 오히려 필리포스의 의도가 훌륭하다고 사람들을 설득시켰다.
한편 필리포스는 테베와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 국가들이 서로 싸우도록 공작을 벌였다.
한편 필리포스는 테베와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 국가들이 서로 싸우도록 공작을 벌였다.
데모스는 필리포스에 대항할 세력을 얻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갔으나
이 여행은 마케도니아의 방해와 펠로 반도 국가들의 몸사리기로 실패했다.
필리포스는 이 사실에 분노하여 아테네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필리포스 탄핵 2편
BC 344년 데모스는 필리포스 탄핵 2편에서 더욱 강경한 주장들을 쏟아냈다.
그는 만약 필리포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자기는 절대 필로크라테스 평화조약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했으며
나아가 아이스와 그 파벌들이 아테네에 그릇된 안보지향주의를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듬 해에 '나쁜 사절'이라는 연설로 재판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아이스키네스가 허위 보고를 했고 잘못된 의견을 내놓았으며
지시를 따르지 않은 데다가 뇌물을 잘 받는다고 비난했으나 법정에서는 아이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아테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는 그뒤 위협과 반격이 계속되었고
BC 341년에는 아테네의 군사훈련이 마케도니아 국경을 위협한다는 논리로
해당 지휘관을 소환하라고 요구했으나 데모스는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마케도니아가 아테네인의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야심을 숨기고 있으며,
또 평화 조약을 깨고 우리와 전쟁에 돌입했다"고 선언했다.
필리포스 탄핵 3편
그 뒤 얼마 안 되어 데모스는 필리포스 탄핵 3편을 발표했다.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필리포스 저항 연설 가운데 단일 연설로서는 가장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이 결과 그는 해군 담당관이 되어 과거에 자신이 제안했던 해군 개혁안을 실행에 옮겼다.
나아가 필리포스에 대항해 테베를 비롯한 그리스 국가들의 거대한 동맹을 만들었다.
바다에서는 아테네가, 육지에서는 필리포스가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결판도 나지 않는 싸움이 뒤따랐다.
잘 조직된 마케도니아군은 고도로 훈련된 보병과 기병대가 함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나
그리스 동맹은 본질적으로 민병대 중심의 군대였으므로 불리했다.
BC 338년 (46세) 그리스 중북부에서 벌어진 전투 때 그리스 동맹군은 필리포스에게 패했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데모스는 뜻밖에도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그래도 아테네는 이 전투의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연설가로 그를 추대했다.
이후 아테네의 웅변가 겸 외교관인 데마데스에 의해 마케도니아와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필리포스는 더 이상의 군사행동을 자제했다.
하지만 이 패배로 인해 그리스 전역은 친(親)마케도니아 세력의 입장이 강해졌다.
데모스는 이때부터 아이스와 그 일파들로부터 교묘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등장
BC 336년 필리포스가 암살되자 그리스인들은 크게 놀랐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왕위를 잇자 많은 그리스인들은 자유가 곧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1년도 채 안 되어 알렉산드로스가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어서 반란을 일으킨 테베를 무참히 짓밟으며 그리스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더욱 대담해진 알렉산드로스는 반(反)마케도니아 8인을 자기에게 넘기라고 아테네에 요구했다.
아테네 쪽은 알렉산드로스에게 특사를 보내 겨우 그 명령을 취소시켰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아테네를 놔두고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BC 330년 (54세) 아이스가 주도하는 친(親)마케도니아 세력은
데모스의 지지자인 크테시폰을 기소하며 반(反)마케도니아 진영을 공격했다.
결국 양측을 대표하여 데모스와 아이스의 연설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그리스 전역이 이 빅매치를 관전하기 위해 아테네로 몰려 들었다.
아이스는 데모스를 겨냥하여 '결단력이 없고 전장에서는 겁장이'라고 비난했으며
데모스는 이에 대항하여 '왕관에 관하여'라는 희대의 걸작을 발표하게 된다.
이 연설문은 그리스 역사에서 수사학의 걸작이라 일컫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20년 동안의 관계가 전부 나와 있으며,
마케도니아의 첩자로서 아이스가 저지른 배반행위와 데모스의 정책이 하나하나 대조되어 있고,
항상 그러하듯 자세한 역사 설명이 곁들여 있어 매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데모스는 이 연설문에서 아이스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당신의 정책은 우리의 적이자 곧 나의 적이며 나라의 적을 지지했다"
또 "당신은 비열한 배신자이며 필리포스의 앞잡이"라며 매섭게 몰아부쳤다.
데모스의 연설에 시민들이 감동했고 배심원의 판결은 아주 분명했다.
아이스키네스는 20%의 표도 얻지 못해 망명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6년 뒤 60세에 접어든 그에게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케도니아인이 맡겼던 20탈렌트를 데모스가 빼앗아갔다는 혐의였다.
데모스는 유죄판결을 받고 50탈렌트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이 사건의 배경은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가 그 돈을 진짜 횡령했는지, 아니면 공공의 목적으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경우엔 보통 10배의 벌금을 무는게 관례인데 데모스는 2.5배를 선고받았다.
이것은 그가 돈을 횡령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준다.
아무튼 이 판결로 인해 데모스는 정치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그 뒤 데모스는 탈옥에 성공했지만 벌금 마련을 위해 아테네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한때 아테네의 지도자였던 그는 이제 아테네인의 눈길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데모스테네스의 최후
그러나 이듬해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마케도니아가 휘청이자 아테네인은 데모스를 망명지에서 불러들이고 벌금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안티파트로스가 다시 세력을 뻗치자
데모스 일파는 다시 아테네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그러자 그의 옛 친구였던 데마데스가 뒤통수를 쳤다.
그는 아테네인들에게 데모스를 사형시켜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데모스는 마케도니아 병사들을 피해다니다가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오랜 세월 국가를 위해 봉사했던 그는 이렇게 고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의 죽음은 오늘날까지 아테네 민주주의의 쇠퇴를 상징하고 있다.
그가 죽은 뒤 아테네인은 그를 기리기 위해 황동상(黃銅像)을 세웠다고 한다.
그 다음 세기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학자들은 그의 연설 중 유명한 작품들의 필사본을 편집했다.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는 연설문 '왕관에 관하여'에 큰 감동을 받아
그것을 라틴어로 옮기고 이를 위한 서문을 썼다.
BC 44년 키케로가 안토니우스에 반대해 잇따라 발표한 연설들은
데모스가 필리포스에 반대했던 때와 비슷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므로
'키케로'의 이 연설들 역시 '필리포스 탄핵'이라 불린다.
로마의 학생들은 웅변교육을 받을 때 데모스의 연설을 반드시 공부했으며
이후에도 영국 왕실 및 유럽의 많은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그는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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