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가까이 온 시점에서 조정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유성룡은 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조정이라고 김성일의 보고만 믿고 아무 일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임란이 일어나기 두 달 전 조정은 신립과 이일을 보내 군사태세를 점검하게 했다.
대장 신립과 이일을 여러 도에 보내서 병비(兵備)를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충청 · 호남)로 가고, 신립은 경기와 해서(황해)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다. 그러나 순시하며 점검한 것은 궁시와 창도(창칼)에 불과했으며 군읍에서도 모두 형식적으로 법을 피하기만 하였다. 신립은 본래 잔포하다고 일컬어졌으므로 수령들이 두려워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대접하는 비용을 대신의 행차와 같이하였다. 당시 조야에서는 모두 신립의 용력과 무예를 믿을 만하다고 하였고 신립 자신도 왜노들을 가볍게 여겨 근심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믿었다.
조정이 군사태세를 점검하라고 보낸 대장 신립은 자신의 위엄을 세우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징비록》은 “신립은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고 전한다. 수령들은 방어태세가 허술한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신립에 대한 대우가 후하지 못해 화를 낼까 봐 더 우려했다. 유성룡도 전쟁 직전 신립에게 만일 왜적이 침입하면 막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임금께 복명한 후인 4월 초하루에 신립이 나를 찾아 사제로 왔기에 내가 물었다.
“멀지 않아 변고가 있으면 공이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 할 터인데,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의 어렵고 쉬움이 어떠하겠소.”
신립은 대단히 가볍게 여기고 대답했다.
“그리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4월 초하루는 임진란 발발 열이틀 전이었다. 그러나 대장 신립은 ‘걱정할 것이 없다’ 고 호언할 뿐이었다. 신립의 호언장담에 유성룡은 근심했다.
“그렇지 않소. 그전에는 왜적이 다만 칼 · 창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장기까지 있으니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오.”
신립은 말했다.
“비록 조총이 있다 해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말했다.
“나라가 태평한 지가 매우 오래 되었으므로, 사졸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과연 급변이 생긴다면 항거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오. 내 생각으로는 몇 해 뒤에 사람들이 자못 군사 일에 익숙해진다면, 난을 수습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는 매우 걱정이 되오.”
신립은 도무지 반성하고 깨달은 점 없이 가버렸다.
문신인 유성룡이 일본의 침입을 걱정하고 있는데, 무신인 신립이 ‘걱정할 것이 없다’ 고 호언하는 상황이었다. 조정에서는 혹시 일본의 침략위협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립과 이일에게 군사태세를 점검하라고 시켰으나 두 대장은 천하태평이었다. 두 대장의 사고가 정상이라면 일본에 간자(間者)라도 보내서 정보를 수집해야 했지만 그런 조치는 전혀 없었다.
전란의 조짐은 여러 군데서 나타나고 있었지만 대장 신립부터 ‘걱정할 것이 없다’ 라고 무시했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 ‘한 사내가 오솔길의 길목을 지키면 천 사내를 두렵게 할 수 있다’ 고 부하들을 격려한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전라 조수사가 되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순신이 왜 문과가 아닌 무과를 지원했는가는 수수께끼다. 문관을 우대하고 무관을 천시한 조선에서 홍문관 박사 이거와 대제학 이변을 배출한 집안의 후예로 왜 무장이 되려 했을까? 조카 이분이 쓴 《이 충무공 행록》은 “처음에 두 형들을 따라서 유학을 공부했는데 재기(才氣)가 있어 유자로 성공할 수도 있었으나 매번 붓을 던지고 싶어 했다” 고 전한다. 기질 자체가 무장에 맞은 것이다. 대제학 이식이 쓴 이순신의 「시장」에는 “독서를 하여 대의를 통달했으나 글 읽는 것을 우습게 여겨 마음에 두지 않았다” 라고 적고 있다. 문관의 길을 ‘글 읽는 것을 우습게 여겨’ 포기하고 무관의 길을 자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관의 길 또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28세 때인 선조 5년(1572) 훈련원 별과시에 응시했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순신은 선조 9년(1576) 32세 때 식년무과에 다시 응시해 필기시험이라 할 무경(武經)은 만점을 받았으나 정작 급제는 가장 낮은 점수인 병과(丙科)였다. 서른두 살에 백두산 밑 동구비보의 권관(종9품)이 그의 첫 보직이었다. 이 무렵 세 살 위의 유성룡은 홍문관 교리(정5품)와 홍문관 부응교(종4품)를 역임하며 조정의 실세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뒤늦게 시작한 이순신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못했다. 《행록》은 “성품이 엽관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서울에서 출생해서 서울에서 자랐는데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라고 적고 있는데, 이런 성격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동구비보로 2년 간 근무한 이순신은 선조 12년(1579) 2월 훈련원 봉사(종8품)로 전보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일종의 영전인 데다가 승진 기회가 많은 중앙 생활이었다. 이순신에게도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공이 훈련원 봉사로 있을 적에 병조판서 김귀영에게 서녀가 있어서 공을 맞이하여 사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섰는데 어찌 세도가에게 발을 붙이겠는가” 하고, 그 자리에서 중매쟁이를 쫓아버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병조판서 김귀영의 서녀를 첩으로 맞을 수 있는 기회를 박차버린다. 게다가 병조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병조정랑 서익과 척을 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서익이 이순신에게 자신이 아는 지인을 참군(參軍)으로 승진시키려고 서류를 꾸며 올리라고 명하자 이순신이 거부한 것이다. 화가 난 서익은 패지(牌旨)를 보내 이순신을 호출해 섬돌 아래 세워놓고 힐난했으나 이순신은 논리정연하게 항변했다. 백호 윤휴는 《통제사 이 충무공 유사》에 “서익은 본디 기가 세서 동료들이 그의 뜻을 감히 거스르지 못했는데 … 훈련원의 여러 아전들이 서로 혀를 내두르며, ‘병부낭중이 훈련원의 하급 관원에게 굴복당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게다가 이 관원이 감히 본조(병조)에 대항하다니, 그는 유독 앞길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라고 말했다” 라고 적고 있다.
이순신은 훈련원 근무 8개월 만에 충청 병사의 군관으로 좌천된다. 그러다가 선조 13년(1580) 7월 전라 좌수군 산하 발포(전남 고흥군 도화면) 만호(종4품)로 승진했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행록》은 “서애 유 정승만이 같은 동리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친구로서 공이 장수의 재목이라고 알아주었다” 라고 전하고 있듯이 유성룡은 권력 실세들과 척이 져 지방으로 쫓겨난 이순신을 생각해준 유일한 인물이다. 선조 12년(1579)부터 13년(1580)까지 유성룡은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승지, 홍문관 부제학, 상주 목사,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다. 상주 목사를 빼고는 대부분 경연참찬관으로서 임금과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는 자리였다. 유성룡 외에 병조 핵심 실세에게 미움받는 이순신을 끌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발포 만호 자리도 순탄하지 못했다. 전라 좌수사 성박이 발포 만호진 객사 앞의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려고 하자 “이것은 관물(官物)” 이라며 거절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성박의 후임으로 온 이용은 전라 좌수군 산하 5포(浦)의 결원을 조사해 3명의 결원이 있는 발포 만호 이순신을 처벌하도록 요청했다. 이순신이 다른 4포의 결원 현황을 입수하니 발포의 결원 숫자가 가장 적었다. 이순신의 항의를 받은 수사 이용이 부랴부랴 사람을 보내 장계를 되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도 조정에서 유성룡이 이를 문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속상관인 수사가 이순신에게 보복할 수 있는 길은 여럿이었다. 이용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실시하는 인사고과인 전최(殿最)에서 이순신에게 최하위인 전(殿)을 주어 파면시키려 했다. 그런데 문서 작성을 맡은 도사 조헌이 이를 거부했다.
“나는 이모(이순신)의 군사 실력이 도내에서 제일이라는 말을 익히 들어왔소. 다른 진포를 모두 하하등으로 할망정 이모는 깎아내릴 수 없소.”
조헌은 서인 강경파이지만 그 역시 이이나 유성룡처럼 당파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않았다. 유성룡은 조헌 덕분에 무사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선조 15년(1582) 1월 군기시에서 무기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이 들이닥쳤는데, 그가 바로 과거에 다툰 적이 있는 병조정랑 서익이었다. 발포의 무기상태가 가장 좋았으나 이순신은 파직당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이이를 찾아갔다. 이순신이 파직당한 선조 15년(1582) 초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율곡 이이 선생이 이조판서로 있을 적에 서애를 통하여 공을 만나보기를 청했으나, 공은 만나려고 하지 않으면서, “같은 문중 사람이니 만나보아도 괜찮겠지만, 인사권을 가진 자리에 있으니, 만나보아서는 안 된다” 라고 말했다.
‘같은 문중 사람’ 이란 동성동본이란 뜻이다. 《행록》에는 이 내용이 과거 급제한 후 보직을 기다리던 선조 9년(1576)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던 때는 선조 15년 1월부터 7월까지다. 이조판서 이이가 파직당한 이순신을 만나려고 유성룡에게 청을 넣었을 리는 없다. 유성룡이 이순신을 복직시키기 위해 이이에게 청을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만남을 거부했다. 이순신은 현실 앞에서 원칙을 꺾지 않는 인물이었다.
발포 만호에서 파직당한 지 4개월 만인 1582년 5월 이순신은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발령받는다. 8계품이나 강등되었으나 이순신은 14개월을 묵묵히 근무했다. 선조 16년(1583) 7월 함경도 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군관으로 발탁하는데, 《행록》은 이용이 “전날 공을 알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했다” 고 비로소 이순신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용이 3개월 만인 선조 16년(1583) 10월 이순신을 건원보 권관(종9품)으로 보낸 것은 과연 그가 이순신의 진가를 알고 발탁했는지를 의심케 한다. 그 직후 함경도 남병사는 김우서로 교체됐는데, 이때 이순신은 여진족 우두머리 우을기내를 유인해 체포하는 커다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함경도 남병사 김우서가 이순신이 사전 승인 없이 군사를 움직였다고 비난하는 장계를 올리는 바람에 이순신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순신은 그해 11월 훈련원 참군(정7품)으로 승진했는데, 《행록》은 “정해진 훈련원 근무 기간이 만기가 되었기 때문” 이라며 “공은 명성이 자자했지만 권세가들을 분주히 찾아다니지 않아 벼슬이 뛰어오르지 못해 사람들이 안타깝께 생각했다” 고 전하고 있다.
이순신은 그해(1583) 부친 이정이 충청도 아산에서 사망하자 3년 간 시묘살이를 마친 후 선조 19년(1586) 1월 종6품 사복시 주부로 복직되었다가 곧 함경도 조산 만호(종4품)로 승진되었다. 4계품을 뛰어넘은 발령에 대해 《행록》은 “오랑캐의 소란이 한창 심하였는데, 조산은 오랑캐 땅에 근접했으므로 조정은 조산 만호로 보낼 사람을 아주 엄선해서 보내야 한다고 하여 공을 만호로 천거했다” 고 전한다. ‘엄선했다’ 는 것은 그만큼 논란이 많았음을 뜻하는데, 그를 ‘만호로 천거’ 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선조실록》 30년 1월 27일 기사에는 이순신이 한창 공격당할 때 유성룡이 “이순신이 성종 때 사람 이거의 자손인데, 그 자리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서 당초에 신이 조산 만호로 천거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예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 유성룡이 이순신을 조산 만호로 천거한 것이다. 역시 그의 배후에는 유성룡이 있었다.
조산 만호 이순신은 함경도 순찰사 정언신의 명령으로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한다. 녹둔도는 조산 만호영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두만강 하구의 삼각주 섬이다. 이순신은 녹둔도 주둔병력으로는 여진족의 기습공격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함경도 북병사 이일에게 여러 차례 병력 증강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이일이 계속 묵살하는 가운데 선조 20년(1587) 8월 여진족 사송아가 기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흥 부사 이경록이 봉수군을 거느리고 추수하고 있을 때였다. 사송아는 저항하는 조선군을 공격해 녹둔도 수비 군관 오언과 둔전 감관 이경번 그리고 군사 10명을 전사시키고 포로로 잡은 조선인들에게 추수한 곡물을 지게 하고 퇴각했다. 급보를 받은 이순신은 전승대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급습해 끌려가던 남녀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러나 북병사 이일은 군관과 병사들이 전사한 책임을 이순신에게 전가하기 위해 이순신을 영문으로 압송했다. 백사 이항복은 이 사건을 이렇게 적고 있다.
녹둔도 전투 때 한창 싸우다가 공이 유시(流矢)를 맞았는데, 남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아버리고 낯빛도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온 군중에서 그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다. 당시 주장 이일이 공을 체포하여 영문으로 송치시켰다. 장차 들어가 조사를 받게 되자, 친구 선거이가 공이 죄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하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권하여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니, 공이 정색하며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린 것인데, 술은 무엇 하러 마신단 말인가.”
이일은 이순신에게 패군(敗軍)의 정상을 공술하게 했다. 이순신의 자백을 명분으로 목을 베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일에게 조목조목 따졌다.
나는 녹둔도의 군졸이 단약(單弱)하기 때문에 누차 군졸을 늘릴 것을 청하였으나, 주장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군부(문서)가 여기에 있으니, 만일 조정에서 그 사실을 알면 죄가 나에게 있지 않을 것입니다. 또 나는 힘껏 싸워서 적을 물리치고 쫓아가 우리 쪽 사람들도 다시 빼앗아 돌아왔는데, 패군으로 논죄하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또한 “이일은 부끄러운 생각에 기가 꺾여 그를 죽이지는 못했다” 라고 적고 있다. 이로써 목숨은 건졌지만 이순신은 백의종군에 처해진다.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백의종군하며 조산 만호 직책을 그대로 수행하던 이순신은 곧 큰 공을 세운다. 여진족 우두머리 우을기내를 유인해 사로잡은 것이다. 우을기내는 변방을 소란케 하는 큰 우환거리였으므로 이순신은 큰 공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백의종군만 면했을 뿐 다른 상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선조 21년(1588) 윤6월에는 조산 만호 직에서도 제관되었다. 44세 때 다시 실직자가 된 것이다. 《행록》에는 “그때 조정에서는 차례를 무시하고 뽑아 쓸 무사를 천거했는데, 공이 두 번째에 들어 있었으나 임명되지 못했다” 라고 전하고 있다. 같은 동인 계열의 정언신과 이산해가 추천했으나 뽑히지 못한 것이다.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불우한 무신 이순신에게 미래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선조 22년(1589) 이순신은 전라 순찰사 이광의 요청으로 순찰사 조방장(종4품)으로 복직했다. 그 배경에는 역시 유성룡이 있었다.
이순신을 정읍 현감으로 삼았다. 순신이 감사 이광의 군관이 되었는데 이광이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주달하여 본도의 조방장으로 삼았다. 유성룡이 이순신과 이웃에 살면서 그의 행검을 살펴 알고 빈우로 대우하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과거에 오른 지 14년 만에 비로소 현감에 제수되었다.
게다가 그해 겨울에는 정읍 현감이 되었다. 정읍 현감은 종6품으로 종4품 조방장보다 품계는 4계품 낮으나 문관들이 가는 자리로 사실상 승진이었다. 선조 22년(1589) 10월 유성룡은 이조판서가 되었고, 그 두 달 후 이순신은 정읍 현감이 되었다. 과거 급제 후 14년 만에 현감이 된 이순신은 평소 마음의 빚을 갚기로 마음먹는다. 요사(夭死)한 두 형 이희신 · 이요신의 조카들 일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조카들을 정읍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자 너무 많은 식솔들을 데려간다며 남솔(처자를 많이 데려가는 것)이란 비난이 일었다. 《행록》은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내가 차라리 남솔의 죄를 지을 지언정 이 의지할 데 없는 어린 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습니가” 라고 말하자 듣는 이들이 의롭게 여겼다고 전한다. 유성룡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두 형 희신 · 요신은 다 먼저 죽었다. 이순신은 이 두 형의 어린 자녀들을 자기 친자식같이 어루만져 길렀다. 출가시키고 장가보내는 일도 반드시 조카들이 먼저 하게 해주고 자기 자녀는 나중에 하게 했다.
이순신이 조카들을 데려갔다고 민폐를 끼친 것은 아니다. 《선조수정실록》에 ‘고을(정읍)을 다스리는 데에 성적(聲績)이 있었다’ 라고 기록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인근 태인 현감이 결원이어서 이순신이 겸임했는데, 이순신의 일 처리 방식을 지켜본 태인 사람들이 어사(御使)에게 이순신을 태인 현감으로 발령해달라는 청원서를 내기도 했다. 정읍 현감으로 성가를 올리면서 이제 이순신의 오랜 불운은 끝나고 있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정읍 현감이 이순신의 정위치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순신은 무관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성룡이 이순신을 거듭 천거한 이유는 무재(武才)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유성룡은 선조 23년(1590) 7월 이순신을 고사리 첨사로 옮겼으나 대간에서 논박하는 바람에 가지 못했고, 다시 만포 첨사로 옮겼으나 대간에서 다시 ‘너무 갑자기 승진했다’ 며 논박하는 바람에 다시 취소되고 정읍 현감으로 되돌아왔다. 만포 첨사는 당상관이므로 유성룡이 힘껏 천거했으나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유성룡은 이순신을 계속 정읍 현감으로 놔둘 수 없었다. 빨리 군문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전운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선조 24년(1591) 2월 이순신은 진도 군수(종4품)로 승진했다가 곧바로 종3품 가리포(전남 완도) 첨사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전라 좌수사로 승진했다. 전라 좌수사는 정3품 당상관이다. 그야말로 눈부신 승진이니 대간에서 논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간원에서 아뢰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정읍 현감으로서 아직 진도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뛰어넘어 제수하는 것)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그러나 선조는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유성룡도 이렇게 말했다.
이때 왜가 침범하리라는 소리가 날로 급해졌으므로 임금은 비변사에 명령해서 각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셨다. 내가 순신을 천거했다. 순신은 드디어 정읍 현감을 뛰어넘어 수사(水使)로 임명되었다.
이때가 선조 24년(1591) 2월 16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으로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 무렵 이순신에게 제수된 벼슬들을 보면 유성룡의 의중을 잘 알 수 있다. 진주 부사나 가리포 첨사 그리고 여수에 수영(水營)이 있던 전라 좌수사는 모두 일본이 침략할 경우 최전선 지역이다. 이곳들이 무너지면 곡창지대 호남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불우한 이순신은 임진왜란 한 해 전에 ‘전라 좌수사’ 가 되었다. 이순신을 빈우로 대한 유성룡이 있었기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 이 일본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미수 허목이 쓴 《서애유사》는 “선조께서 비변사와 각 대신에게 명해서 재능 있는 장수를 추천토록 하니 선생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다. 그 당시 권율과 이순신은 모두 하급 무관이어서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라고 전하고 있다. 유성룡이 추천한 두 장수가 임란 3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승전으로 이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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