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4년(1591) 정월, 일본에 간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귀국했다. 이들이 일본으로 향한 때가 전해 3월이니 무려 10개월이나 걸린 노정이었다.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서로 다른 귀국 보고는 4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명하다. 그 내용을 《국조보감》에서 살펴보자.
통신사 황윤길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왜국의 사신 평조신 등과 함께 오면서 황윤길이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상이 불러 보고 하문하니, 황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다.
김성일이 아뢰었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상이 하문했다.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는가?”
황윤길이 아뢰었다.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김성일이 아뢰었다.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이는 김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다.
이 기사는 《선조수정실록》과 흡사한데, 다만 《선조수정실록》은 이 기사 뒤에 “대체로 황윤길의 말을 따르는 이들에 대해서는 모두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 라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라고 덧붙였다. 동인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황윤길의 말을 따르는 것은 모두 서인이란 이유로 배척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인에 속한 유성룡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선조수정실록》은 이 기사 뒤에 유성룡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했다.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했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성일이 말했다.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유성룡은 일본이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김성일도 ‘단정’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김성일은 선조 앞에서는 달리 말했을까?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두 사람의 통신사 길을 따라가야 한다.
전국시대를 끝내고 열도를 통일한 풍신수길은 조선과의 교역을 전담하던 대마도주 종의조(소 요시시게) · 종의지(소 요시토시) 부자에게 특수 임무를 주었다. 명나라를 공격할 길을 빌려달라는 ‘가도입명’ 을 관철시키고, 조선국왕을 일본으로 입조(入朝)시키라는 명이었다. 조선과의 무역으로 먹고사는 대마도 도주(島主)는 조선 사정에 밝아서 ‘가도입명’ 이나 ‘국왕입조’ 는 전혀 실현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꾀를 냈다. 단절된 조선통신사 파견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두 나라가 서로 교류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종의조는 자신의 가신 귤강광(다치바나 야스히로)을 일본 국왕사라며 조선에 보냈다. 사실은 대마도주사에 지나지 않지만 국왕사라고 칭한 것이다. 선조 20년(1587) 9월 부산에 도착한 귤강광은 ‘일본 국왕이 완미하여 폐하고 새 국왕을 세웠다’ 며 화친을 요청했다. 직전신장(오다 노부나가)을 폐하고 풍신수길을 세웠다는 뜻이다. 선조는 신하가 왕을 시해하고 그 자리를 빼앗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했으나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했다. 대신들의 뜻이 관철되어 귤강광은 겨우 서울로 올라왔지만 풍신수길이 보낸 서계(書契)의 첫 문장이 알려지면서부터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 천하가 짐(풍신수길)의 한 줌 안에 들어 있도다.’
짐은 황제의 자칭이었기 때문이다. 귤강광은 서울까지 올라오면서 많은 화제를 낳았다. 인동을 지날 때는 “너희들의 창자루가 몹시 짧구나” 라고 조롱하고, 기생들의 가무로 접대하는 상주 목사 송응형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오랫동안 싸움터에서 자랐으니 터럭이 이렇게 세웠지만 노래와 기생 속에 파묻혀 아무런 근심 없이 지내온 사또께서는 어찌하여 머리칼이 그렇게 셌소이까?”
또한 서울에서 압연관인 예조판서가 술자리를 베풀자 그는 고의로 호초를 흩어놓았다. 비싼 호초를 줍느라고 기공들의 대열이 흩어지자 객관에 돌아와 역관에게 말했다.
“이 나라의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거의 망하게 되었다.”
귤강광은 조선과 일본 지배층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조선이 일본을 오랑캐의 나라로 깔보고 있었다면 귤강광은 조선을 문약(文弱)의 나라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수께끼 인물인 귤강광은 통신사 파견 요청에도 그다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조선은 조선통신사 파견을 거부했고, 귤강광은 풍신수길에게 사형당하고 말았다. 조선 편을 들었다는 이유였다.
대마도주 종의조는 이에 굴하지 않고 현재의 후쿠오카인 박다(하카다)의 성주사 주지 현소를 정사(正使), 자신의 아들 종의지를 부사로 삼아 거듭 조선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계속되는 요청을 무작정 거부할 수 없던 조선은 조건을 내걸었다. 선조 20년(1587) 2월 흥양을 침범해 녹도보장 이대원을 전사시킨 왜구 두목과 조선인 사화동 그리고 붙잡아간 조선인들의 쇄환을 요구한 것이다. 사화동은 고된 부역과 공납으로 바치는 전복의 수량이 지나치게 많아서 살 수 없다며 일본에 붙어 왜구를 손죽도로 안내한 조선 백성이다. 조선통신사 파견에 사활을 건 대마도주는 이 요구를 선뜻 수락하여 긴시요라 등 왜구 3명과 사화동 그리고 조선 포로 김대기 등 116명을 돌려보냈다. 조선은 긴시요라와 사화동의 목을 베었는데, 일본이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조선도 통신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 23년(1591) 3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일본을 향해 떠났다. 세종 25년(1443) 통신사 변효문을 파견한 이래 150여 년 만에 재개된 행차였다. 임란 때의 의병장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이때 선조가 술을 내리면서 당부한 말을 적어놓았다.
“나라의 체통을 존중하고 왕의 위령을 멀리 폄이 이 한 번의 길에 달렸으니, 경들은 어김이 없도록 하라.”
부산으로 내려간 통신사 일행은 4월 29일 그믐날 다대포를 출발해 태풍 때문에 고생하다가 대마도 대포항에 도착하는데, 이것이 수백 년 간 논란의 대상이 되는 조선통신사 일정의 시작이었다. 대포항에서 하룻밤을 자고 물 위에서 사흘을 자면서 대마도주가 있는 부중(府中)에 도착한 날이 5월 4일. 황윤길과 김성일은 이때부터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마도 국분사 환영회 석상에 부사 종의지가 뒤늦게 나타난 것이 그 계기였다. 부사가 정사보다 늦은 데다 가마를 타고 대청까지 올라온 것이다. 며칠 전 대마도 동산에서도 종의지는 말을 타고 장막 앞까지 왔었다. 김성일이 황윤길에게 자리를 파하자고 말했으나 거부하자 김성일은 혼자 돌아갔다. 문제가 생겼음을 눈치 챈 종의지가 역관 진세운에게 까닭을 묻자 “병 때문에 먼저 들어가셨다” 고 답했다. 이를 알게 된 김성일은 ‘왜 병을 핑계댔느냐?’ 며 역관 진세운에게 곤장을 쳤다.
이 소식을 알게 되자 종의지는 당황했다.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풍신수길은 귤강광의 목을 벤 것처럼 자신의 목을 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의지는 가마를 메고 온 교꾼의 목을 베었다. 문간에 들어갈 때 가마를 멈추라고 했는데도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교꾼에게 책임을 돌려 죽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나 김성일은 ‘사람이 죽은 것은 참혹하지만 이로써 깎인 나라의 치욕을 조금 씻게 되었다’ 고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서장관 허성이 김성일에게 편지를 보내 사신의 체모만 따지다가 사람이 죽었다고 비판했다. 김성일은 곧 허성에게 반박 답장을 보냈다.
“대개 이 섬이 우리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대대로 우리나라의 은덕을 받아서 우리의 동쪽 울타리가 되었으니,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고, 땅으로 말한다면 부용국입니다. 이번에 사신이 나올 때에는 평의지(종의지)가 직접 행차를 호위하였고, 관소에서 접대하는 것도 전보다 더함이 있었습니다. 왕명을 전달하는 날에는 뜰 복판에서 절하고 조아려서 공경하게 받들기를 의식대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견할 때에도 앞에 와서 두 번 절하여 감히 도주의 예로 자처하지 않았으니, 공손하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들의 실수는 그들의 환심을 얻고자 지나치게 겸양하여 낮춘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문득 교만한 마음을 내어 며칠 뒤에는 이미 처음에 우리를 대하던 태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김성일은 통신사 일행이 ‘그들의 환심을 얻고자’ 지나친 겸양으로 대하자 일본인들의 조선통신사를 깔보았다고 한 것이다. 김성일은 비록 ‘우리들의 실수’ 라고 표현했지만 내심 황윤길을 지목한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쳤는데, 선위사 문제에서도 충돌했다. 당사국은 선위사를 국경 부근에 보내 국도(國都)에 도착할 때까지 수행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통신사 일행이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선위사가 보이지 않았다. 김성일이 일본인 역관에게 따지자 “바닷길이 많이 막혀서 지금 미처 오지 못한 것입니다” 라고 변명했다.
김성일은 황윤길에게 선위사가 오기 전까지 움직이지 말자고 제안했지만 황윤길은 그의 권유를 무시하고 그냥 출발해버렸다. 배를 출발시키는 문제에서도 두 사신은 서로 부딪쳤다. 황윤길은 종의지에게 허락받은 후에야 출발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그냥 출발해도 괜찮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성일은 종의지가 자신들의 기를 꺾기 위해서 일부러 출항을 허가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신의 배가 출발하면 저들은 뒤따라오기에 바쁠 것인데, 어찌 허락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스스로 중하게 할 줄은 모르고 다만 왜놈들의 마음을 거스르고 왜놈들이 노여워할까만을 염려하니, 이것이 무슨 사체(事體)입니까.”
통신사의 배는 조선 것이므로 김성일 말대로 그냥 출발하면 대마도의 일본인들은 따라오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윤길은 끝내 종의지에게 허락을 받은 뒤에 출발했다. 일기도에 도착하자 비로소 선위사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여기에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김성일은 선위사의 면담 요청을 받고 나서 만나자고 주장한 반면 황윤길과 허성은 그냥 먼저 가서 만나자고 주장한 것이다. 김성일은 “아무리 서로 만나보는 것이 급하다 하더라도 주인이 마땅히 손님을 청할 일이지, 손님이 먼저 청할 일이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 황윤길과 허성은 역관 진세운을 시켜 선위사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선위사는 적관(시모노세키)에서 만나자며 거절했다. 적관에 도착하니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었다. 처음에는 하인을 보내 문안이라도 하더니 나중에는 그것도 없어졌다. 통신사 일행이 선위사의 영접을 받은 곳은 지금의 오사카 사카이시인 계빈이다. 일본 본토에 상륙해서야 선위사를 만난 것이다. 실제로 선위사가 일기도까지 왔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런데 선위사를 만났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3개월 만인 1590년 7월 말 국도 교토에 들어가 대덕사(다이도쿠지)에 짐을 풀었으나 문제는 계속되었다. 풍신수길이 동쪽 정벌에 나서 국도에 없다는 것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풍신수길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풍신수길은 한 달 반을 기다린 끝에 9월 초 귀경했으나 이번에는 궁전인 취락정이 수리 중이어서 만날 수 없다고 했다. 일본에 도착한 지 5개월이 지나도록 풍신수길을 만나지 못하자 사신들은 점차 초조해졌다.
그러자 풍신수길의 측근인 법인과 현량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관백(풍신수길)을 빨리 만나자고 권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김성일은 <객의 난설에 대해 상사(황윤길)에게 답한 편지>에서 자신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관백을 빨리 만나라고 권하는 객(客)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신이 왕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와서는 비록 한결같이 예법대로 하여 구차스럽게 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실수하여 왕명을 욕되게 할까 염려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좌우 사람에게 뇌물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일본은 정사 황윤길이 초조해하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일본은 황윤길의 이런 심사를 약점으로 삼았다. 이때 종의지가 조선의 음악을 들려달라고 청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은 조선통신사 일행이 200여 명이라고 적었는데 그중에는 장악원 소속의 악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은 통신사 파견을 조선의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는 계기로 삼아서 악단을 대동한 것이었다. 종의지가 객을 보내 음악단을 요청했으나 김성일이 거절했다.
“사신이 왜도(倭都)에 들어온 지 지금 몇 달이나 되었다. 저들이 왕명을 중하게 여기지 않아서 빈 산속에 버려둔 채 공손히 받을 뜻도 없으면서 도리어 ‘너희들이 음악을 가지고 왔으니, 우리가 들어보고 싶다’ 하니, 그 욕됨이 심하다 하겠다. 관백도 오히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하찮은 왜놈이겠는가.”
김성일은 단순히 악단을 빌려주고 빌려주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왕명을 받든 신하가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왕명을 전하지 못했다는 것은 시집가지 않은 처녀와 마찬가지입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기생처럼 노래를 팔아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면, 어찌 나라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왕명을 풀밭에 팽개치게 되었는데도 마음 아파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음악을 도중(都中)에서 연주하여 왜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료로 삼는다면, 처녀가 기생처럼 노래를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저들이 애걸해도 불가하거늘 하물며 명령을 내리는데 가하겠습니까?”
풍신수길은 조선통신사의 진을 다 빼놓은 다음에야 면담을 허락했다. 이제야 국서를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성룡은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국서 전달 장면을 《징비록》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놓았다.
그들이 우리 사신을 접대할 적에 교자를 타고 그들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으며, 날라리와 피리를 불고 앞에서 인도하여 당에 올라와서 예를 행하게 하였다.
수길은 용모가 작고 못생겼으며 낯빛이 검어서 남다른 위의는 없으나, 다만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사람을 쏘아보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 잠시 후에 수길이 갑자기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편복 차림으로 안에서 어린애를 안고 나와, 당 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므로 쳐다보니 바로 수길인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엎드려 있을 따름이었다. 잠깐 뒤에 수길이 난간으로 나와 앉더니, 우리나라 악공(樂工)을 불러 여러 가지 음악을 성대히 연주토록 하여 듣고 있다가, 어린애가 옷에 오줌을 싸므로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子)를 부르니, 한 왜인 여자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오자, 어린애를 주고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모두가 제멋대로이고 매우 자만하여,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태도였다.
조선통신사는 겨우 선조의 국서를 풍신수길에게 전할 수 있었다. 선조의 국서는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의례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풍신수길은 선조의 국서를 받고도 곧장 답서를 써 주지 않았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이 문제로 다시 대립했다.
우리 사신이 장차 돌아가려고 하매, 답서를 즉시 써 주지 않으면서, 먼저 가라고만 하였기에 김성일이 말했다.
“내가 사신이 되어 국서를 받들고 왔는데 만약 답서가 없다면, 이것은 국명을 풀밭에 버리는 것과 같다.”
황윤길은 더 머물게 할까 두려워, 서둘러 출발하여 계빈으로 와서 기다리니 답서가 그제야 왔으나, 글 내용이 거칠고 거만하여 우리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답서를 써 주지 않자 김성일은 답서를 받기 전에는 교토를 떠나지 않겠다고 주장했으나 황윤길은 자신을 억류할까 두려워서 황급히 떠났다. 황윤길은 전쟁을 일으키려는 풍신수길이 자신을 억류해 인질로 삼을 수 있다고 두려워한 것이다. 정사가 떠났는데 부사만 남아 국서를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김성일은 황윤길이 “호랑이 입에서 몸이 빠져 나오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겨서, 의리와 사명이 있는 것은 돌아보지 않고 빈손으로 나왔으니, 이것이 무슨 사신의 체모란 말인가” 라고 비판했다.
황윤길이 두려움을 느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접견 때 풍신수길의 태도가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학봉전집》의 ‘언행록’ 에는 《인재록》을 인용해 정랑 박성이 김성일에게 마음이 흔들린 순간을 묻자 ‘일본에 갈 때 풍랑에 배가 뒤집히려 할 때’ 와 ‘풍신수길이 사납고 드센 위엄을 크게 보이면서 으르고 협박할 때’ 라고 적어놓았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계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드디어 풍신수길의 답서가 왔다. 답서가 온 것은 다행이지만 내용이 문제 투성이였다. 풍신수길의 「국서」 는 통상적인 국서의 형식과는 사뭇 달랐다. 국서에 “나의 어머니께서 일찍이 나를 잉태하셨을 때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점쟁이)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 라고 말했다” 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국서에 태몽을 거론하며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것은 일본이 그만큼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소외됐다는 것을 뜻한다. 더 큰 문제는 다음 구절이었다. 명나라를 침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람의 한평생이 백 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오래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는 것도 관계없이 한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 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先驅)가 되어 입조한다면 원대한 생각은 있고, 가까운 근심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軍營)에 임한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을 굳게 할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다른 게 아니라 삼국(명나라 · 조선 · 일본)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명나라를 공격할 테니 조선이 앞장서라는 뜻이다. 선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군영에 임하라는 말까지 있다. 내용은 둘째 치고 용어부터가 예법에 맞지 않았다. ‘조선국왕 전하’ 라고 해야 할 것을 정1품 신하의 호칭인 ‘합하’ 라고 썼으며, 대등한 관계에서 ‘예폐’ 라고 써야 하는데 수령이 임금에게 바치는 예물을 뜻하는 ‘방물’ 이라는 것도 문제다. ‘한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으로 들어간다’ 느니 ‘귀국이 선구가 되라’ 는 것도 국서에 쓸 수 없는 거만한 말이다.
《국조보감》에는 “김성일이 현소에게 서신을 보내 대의를 들어 깨우치고 만일 이 글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이 있을 뿐, 가져갈 수는 없다고 했다” 고 나와 있다. 현소는 할 수 없이 부사 종의지를 시켜 풍신수길에게 아뢰어, ‘합하’ 와 ‘방물’ 이란 단어를 고쳐주었다. 그러나 김성일이 문제 삼은 ‘입조’ 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조선왕이 입조한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이 대명에 입조한다’ 는 뜻이라면서 고쳐주지 않았다. 김성일은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 잘못된 부분을 고치도록 청했으나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은 빨리 일본을 떠나려 했다. 《국조보감》 을 살펴보면 “김성일이 두세 차례 서신을 보내 고치도록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반면 황윤길과 허성 등은 ‘현소가 그 뜻을 달리 해석하는데 굳이 서로 버티면서 오래 지체할 것이 없다’ 면서 돌아왔다” 는 것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통신사 일행은 무려 10개월이 지난 뒤에야 돌아왔다. 김성일의 《해사록》뿐만 아니라 《국조보감》 같은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사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인물은 김성일이다.
그러나 그는 사신 과정은 적절히 수행했으나 가장 중요한 결과보고에서 중대한 실책을 저지르면서 두고두고 구설수에 휘말린다. 이미 기술한 대로 황윤길은 ‘병화가 있을 것 같다’ 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 고 상반되게 보고한 것이다. 《국조보감》에는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 해서 김성일이 이렇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황윤길이 일본인들의 무인기질에 겁먹었다면 김성일은 오랑캐라고 얕보았다. 명나라를 공격하겠다는 공언을 허풍으로 본 것이다. 사신에 대한 예우 등 지엽적 문제에는 잘 대처했으나 가장 중요한 결과 보고에서 엉뚱하게 보고함으로써 모든 과정을 망친 것이다. 김성일의 사신 행적에 대해서는 김시양이 광해군 4년(1612) 함경도 종성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 집필한 《부계기문》에서 내린 평가가 비교적 객관적이라 할 만하다.
학봉 김성일은 동지 황윤길 등을 따라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비굴함이 없는 꿋꿋한 태도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겁내는 일이 없었다. 회답의 글을 받는 일이나 여러 가지 논의에 모두 힘껏 다투어 바로잡았으나 동행한 사람은 목을 움츠리고 적인은 경탄하였다. 그 또한 목숨을 바쳐 힘쓴 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는 말로 일컫는 것에 이르러서는 나는 부끄러워해야 할 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저 전대(사신이 외국에 가서 의외의 사건에도 자유자재로 대처하는 것)라는 것이 어찌 요행이나 절목의 일을 가리키겠는가.
학봉이 돌아오니, 상이 적인의 실정을 물었다. 윤길 등은 모두 적이 침입할 조짐이 있다고 말하니, 학봉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여 수천 마디 말로 깊이 윤길 등을 공격하고, 스스로 적의 실정을 자세히 살폈다고 말하였다. 다음해에 적이 전 국력을 기울여 가지고 침략하여 종묘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민생이 주륙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병화의 참혹함이 옛날부터 임진년과 같은 적은 없었다. 그가 요령을 얻지 못함이 이와 같다.
그러나 임란에 대처하지 못한 책임을 김성일에게만 모두 돌릴 수는 없다. 조선통신사가 받아온 서계에는 분명 명나라를 침략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풍신수길은 조선통신사가 돌아갈 때 종의지와 현소를 회례사로 임명해 함께 보냈는데, 이들의 입에서도 내년(임진년)에 침략하겠다는 말이 공공연히 새어 나왔다. 일본 사신들을 접대한 선위사 오억령은 현소를 만난 후 일본의 침략 정보를 정확히 보고했다.
오억령이 현소에게 묻자, 명년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바로 침범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오억령이 즉시 들은 대로 왜적이 침입할 정세임을 장계하였다. 이때 국사를 담당하고 있는 자들은 왜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한쪽 말만 주장하고 있어 오억령의 장계가 오자 조정과 민간이 크게 해괴하게 여겨 즉시 아뢰어 오억령을 교체시켰다.
오억령이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아뢰자 드디어 그를 교체시킨 것이다. 오억령은 교체되었지만 일본이 임진년에 침략하리라는 내용은 조정은 물론 민간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현실을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다’. 전쟁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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