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13년(1558) 17세의 유성룡은 부친의 임지인 의주로 향했다. 그는 34년 후에 이곳까지 쫓겨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유성룡은 압록강 가를 거닐다가 내던져진 짐바리를 발견했다. 사은사 심통원이 북경에서 돌아오다가 규정 이상의 물품을 사왔다고 탄핵당해 버리고 간 것이었다.
심통원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간 목적은 종계변무 문제 때문인데, 나중에 유성룡도 이 문제로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명나라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내용을 바로잡으려는 것이 종계변무인데, 개국이래 양국의 현안이었다. 공양왕 2년(1390) 윤이 · 이초가 명나라로 도망가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고, 고려의 여러 왕들을 죽였다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조선에는 태조 3년(1394) 이런 내용이 알려졌다. 조선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이를 개정하도록 요청했으나 명나라는 명 태조의 유훈이 《대명회전》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오랜 현안이 된 것이다. 명종 12년(1577) 10월 조정에서 이 문제로 사은사를 보내는 일을 논의했을 때 심통원이 보내야 한다고 주장해 그가 가게 된 것이다.
유성룡은 심통원이 버리고 간 짐바리 속에서 책 꾸러미를 찾아냈다. 그런데 전혀 못 보던 책이 있었다. 바로 《양명집》이었다.
《양명집》 뒤에 쓰다
당시에는 아직 왕양명의 글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보고 기뻐서 곧 아버님에게 말씀드리고, 글씨 잘 쓰는 아전을 시켜 베껴내게 하여 상자 속에 간직한 지가 어언 35년이다.
이렇게 유성룡은 심통원에 이어 조선에서 가장 먼저 양명학을 접하게 된다. 아직 어렸지만 그전 해 향시에 급제한 유성룡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심통원이 《양명집》을 버리고 갔다는 것은 새로운 책이라 구입해왔을 뿐 정작 내용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유성룡은 조선에서 양명학을 최초로 접하지만 그의 주변 환경은 양명학과 앙숙인 성리학 일색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두 달 전인 중종 37년(1542) 8월 풍기 군수 주세봉은 경상도 영주에 백운동서원을 세워 안향을 제향했다. 이렇게 시작된 백운동서원은 명종 5년(1550) 이황의 건의로 조선 최초의 사액 서원인 소수 서원이 되면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림파가 조선의 지성계를 장악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유성룡의 본관인 안동부 풍산현과 백운동서원이 위치한 영주는 가까운 곳이라 유성룡은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성리학을 접하며 자랐다.
우복 정경세(1563~1633)가 쓴 《서애선생 연보》는 유성룡이 4세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라고 전하는데, 부친 유중영이 스승이었을 것이다. 부친 외에 특별한 스승이 없던 유성룡은 21세 때인 명종 17년(1562)에 퇴계 이황을 찾아가 수개월간 머무르면서 《근사록》 등을 배우면서 이황의 제자가 된다.
《근사록》은 조선 사대부들이 주자로 떠받들던 남송의 유학자 주희와 여조겸이 편찬한 일종의 성리학 해설서다.
유성룡은 《양명집》을 발견한 지 35년 이후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틈틈이 읽어보기도 했을 것이다. 유성룡은 조선 유학자로는 특이하게 양명학과 성리학을 모두 공부한 것이다. 그러나 《연보》는 유성룡이 시종 양명학을 비판했다고 강조한다. 유성룡은 28세 때인 선조 2년(1569) 성절사 서장관 겸 사헌부 감찰로 북경에 갔을 때 명나라 태학생들에게 양명학을 비판했다고 적고 있다.
《연보》
그때 태학생 수백 명이 몰려와 구경하였다. 선생은 이들에게 물었다.
“요즈음 중국에서는 누구를 도학의 종주로 삼소?”
태학생들은 서로들 돌아보며 한참 있다가 답했다.
“왕양명… 입니다.”
선생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왕양명의 학문은 오로지 선학에서 나온 것이오. 내 생각으로는 설 문청을 으뜸으로 삼고 싶소.”
오경이란 신안 사람이 기뻐하며 앞에 와서 감탄하며 말했다.
“요즘 학문하는 방법이 잘못되어 학자들이 목표를 잃었기 때문에 태학생들의 대답이 이와 같습니다. 그대가 정당한 의논을 내어 배척하였으니, 이단의 배척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을 알겠소.”
유성룡 자신도 표면적으로는 성리학자를 자처하면서 양명학을 선학이라고 비판했지만 그 장점도 일부 흡수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양명학을 공부한다는 비방이 잇따랐다. 사경 조목이 그중 한 명으로, 유성룡이 양명학을 공부한다고 비판하자 이렇게 응수한다.
“무릇 강서의 학문(양명학)이 노맥(노선과 학맥)은 비록 다르지만 몸과 마음으로 힘써 행한 공부로서 역시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그날그날 한가롭게 세월이나 보내는 자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 잘못된 점을 말한다면 선현들의 변론에서 볼 수 있고, 그 어려운 점에 대해 말한다면 저로서는 쉽게 본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서의 학’ 이란 왕양명과 함께 양명학의 쌍두마차로 부르는 남송의 육상산이 강서 금계 출신이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양명학은 육상산과 왕양명의 성을 따서 육왕학이라고도 한다. 유성룡이 양명학에 대해 ‘그날그날 한가롭게 세월이나 보내는 자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라고 변호한 것은 주자학이 유일 사상체제로 굳어져가던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게다가 양명학 비판의 선봉장은 유성룡이 한때 사사한 이황이었다. 이황은 《전습록변》에서 ‘사문(주자학)의 화’ 라고 비판했지만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 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못했으니 《전습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었다. 어쨌든 학맥이 곧 정파가 되는 조선 풍토에서 스승이 비판의 선봉으로 나선 양명학을 부분적으로나마 옹호한 것은 유성룡이 내심 양명학 논리에 공감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양명학과 주자학의 가장 큰 차이는 사민(사· 농 · 공 · 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주자학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의 신분 차이를 하늘이 정해준 천경지의로 생각하는 반면 양명학은 사민평등을 주장한다. 왕양명은 사대부 계급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고 사민을 평등하게 바라보았다.
“옛날 사민은 직업은 달랐지만 도는 같았으니,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선비는 마음을 다해 정치를 펼쳤고, 농부는 먹을 것을 갖추었고, 장인은 기구를 편리하게 하였으며, 상인은 재화를 유통시켰다.”
중요한 것은 왕양명이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의해서 직업이 결정된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각자는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그 마음 다하기를 구하였다. 이러한 직업들의 궁극적 목적은 생인(生人)의 도(道)에 유익함이 있기를 바라는 점에서 동일할 뿐이다.”
정치를 하는 선비도 사대부 계급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 중에서 능력이 있는 자가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왕양명은 《전습록》 ‘서애록’ 에서 주희가 ‘대학’ 의 ‘재친민’ 을 ‘재신민’ 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신민’ 은 백성을 교화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대부의 계급 우월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원래 대로 친민이 맞다는 주장이다.
유성룡은 이황이 양명학을 비판하는데도 그 장점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우웅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양명학에 대해서는 노 선생(이황)께서 이미 충분하게 물리치셔서 유학자들이 대대로 지켜왔으니, 지금 설명하지 않아도 명확합니다.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깨달은 장점은 스스로 감출 수가 없으므로 옛 성현들도 취하였으니, 그것이 어째서 나쁘겠습니까. 벗들 사이에서도 나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번번이 선학이라고 비방하는 것을 늘 웃어 넘겼더니, 뜻밖에도 또 편지를 보내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군요. 그러나 앞으로는 마땅히 통절하게 반성할까 합니다.”
유성룡은 양명학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리면 된다는 실사구시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 그는 한때 불서(佛書)를 본다는 비판도 받았다.
“제가 요즘 불서를 본다고 깨우쳐주셨는데 이는 말을 전한 자가 사실보다 지나치게 한 말입니다. 지난번에 이웃에 사는 스님이 우연히 그 책을 가져왔기에 무료하던 참에 한번 슬쩍 보아 넘겼을 뿐이며 그 권(卷)도 다 보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선현들이 불교의 나쁜 점을 논박한 것은 더욱 명백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에게 약간 언급한 것인데 그것이 잘못 전달되어 어르신께 이토록 걱정을 끼쳐드릴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유성룡은 표면적으로는 성리학자를 자처했지만 교조적 신봉자는 아니었다.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성리학 외에 다른 학문이 모두 이단으로 몰리던 닫힌 시대의 열린 사고였다.
유성룡은 노비조차도 인간으로 바라보는 양명학에 끌렸음에 틀림없다. 유성룡이 훗날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서 노비 중용을 주장하는 혁명적 정책을 제시한 데는 이 시절 양명학을 읽으면서 받은 충격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유성룡은 17세 때 양명학을 접했으나 과거에도 매진한다. 24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인 명종 21년(1566) 대과에 급제하는데, 태학생이 된 지 1년 만의 급제는 드문 경우로 보통 4~5년 공부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첫 관직은 승무원 권지부정자(종9품)로 말단 보직이지만 국가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은 엘리트 관료들이 가는 중요한 관서였다. 그 후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예문관과 역사서를 편찬하는 춘추관, 성균관 등을 돌며 하위 관료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성균관 전적(정9품)으로 일하던 유성룡은 선조 2년(1569) 한번에 6계품을 뛰어넘어 공조좌랑(정6품)이 된다. 28세 때였다. 어떻게 이런 승진이 가능했을까? 인종의 신주를 모시는 문제에서 영의정 이준경과 맞서 이겼기 때문이다.
세종은 종묘 밖에 따로 문소전을 짓고 태조와 사친(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의 신주를 모신 이후 역대 임금들의 신주도 이곳에 모셨다. 그런데 성종이 부친을 덕종으로 추존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예종의 신주를 이미 문소전에 모셨기 때문에 자리가 없자 덕종의 신주는 별전에 모시고 연은전이라 불렀다. 따지자면 연은전은 문소전보다 격이 낮은 전각인 셈이다. 덕종은 즉위하지 못한 추존왕이었기 때문에 연은전에 모셔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인종은 달랐다.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왕위에 있던 인종은 문소전에 모셔야 했는데, 내심 인종을 부인하던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인종의 격주를 격이 낮은 연은전에 모신 것이다. 인종은 사림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특히 많은 사람들이 분개했으나 명종 즉위 초을사사화로 수많은 사림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명종이 승하하자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사림의 영수 이황이 나서 명종과 인종을 모두 문소전에 모시자고 주장했지만 영의정 이준경이 “조종에서 정한 좌향을 쉽게 변경할 수 없다” 면서 받아들이지 않아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 정9품 성균관 전적 유성룡이 상소를 올려 인종도 문소전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돌한 젊은 관료의 주장은 예상을 뒤엎고 많은 사림들의 동조를 받아 공론(公論)이 되어갔다. 그러자 영의정 이준경도 종전 주장을 버리고 유성룡의 견해를 따르면서 인종의 신주를 비로소 문소전으로 옮겨 모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유성룡은 일약 전국적 인물로 떠올랐다. 정9품이 정1품 영의정을 꺾은 것도 사건이지만 인종의 문소전 봉사는 사림의 숙원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준경은 보통 영상이 아니라 어린 선조를 보필하던 원상(院相)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영상에 맞서 인종의 문소전 봉안을 관찰했으나 단번에 주목받은 것도 당연했다. 이후 유성룡은 핵심 코스를 밟아나가는 엘리트 관료가 된다. 성절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서 국제 감각을 익히고, 귀국 후에는 사간원 정언 · 이조좌랑 · 병조좌랑 같은 주요 보직에 보임된다. 유성룡은 대간으로 부르던 사헌부 · 사간원에서 국정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고, 문관 인사권을 가진 이조좌랑과 무관 인사권을 가진 병조좌랑을 역임하면서 행정 실무를 익힌다. 31세 때인 선조 5년(1572) 홍문관 수찬(정6품)으로 있을 때는 이준경과 또 한 번 인연을 맺는다. 첫 관계는 악연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영의정 이준경이 선조 5년(1572) 7월 죽음을 앞두고 올리 유차가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준경이 “지하로 가는 신 이준경은 삼가 네 가지의 조목을 죽은 뒤에 들어주실 것을 청하오니 전하께서는 살펴주소서” 라면서 올린 유차의 네 번째 내용에서 ‘붕당의 사론을 없애야 한다’ 고 요청하면서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넷째, 붕당의 사론을 없애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과실이 없고 또 법에 어긋난 일이 없더라도 자기와 한마디만 서로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일은 바로 전하께서 공평하게 듣고 보신 바로써 이런 폐단을 제거하는 데 힘쓰셔야 할 때입니다.”
이준경이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았지만 율곡 이이는 자신을 비판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글을 올려 이준경을 공격했다.
“조정이 말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이는 임금과 신하를 갈라놓으려는 것이옵니다. 사람이 죽음에 임해서는 말이 착한 법인데 이준경은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악하옵니다.”
이이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에서 “정승 이준경은 정승의 업적이 볼 만한 것이 없으니 많은 선비들이 시원치 않게 생각했다” 라고 비판했는데, 정작 이 사건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했다.
《율곡행장》
이준경이 병들어 죽을 무렵에 차자를 올려 말했다.
“조신들 사이에 당파가 있어서 전하께서는 누구 말이 옳은지 알 수 없으시니 반드시 당파를 없애야 합니다.”
임금이 깜짝 놀라 “그게 사실인가?” 라고 물었다. 선생이 상소하여 그 의혹을 풀어드렸다.
그러나 이준경 유차의 파문은 ‘선생이 상소하여 의혹을 풀어드리는 것’ 으로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이준경은 곧 사망했으나 이이의 지지자들이 장악한 삼사(三司)에서 이준경 비판에 나서 벼슬 추탈을 주장했다. 관례에 따른 유차 한마디로 벼슬이 추탈될 판이었다. 사림의 영수 이이가 비판하고 삼사가 가세한 이준경의 관작 추탈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홍문관 수찬 유성룡이었다.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당의통략》
이때 삼사에서는 이준경의 생전 관작을 삭탈하게 하려 했는데, 유성룡이 홀로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말했다.
“대신이 죽음에 임박하여 임금에게 올린 말이 부당하다면 물리치는 것이 옳지만 죄를 주기까지 한다면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또 좌상 홍섬 등도 말했다.
“이준경은 살아 있을 때 공덕이 있습니다. 죄를 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에 의논이 중지되었다.
유성룡의 반론 때문에 이준경은 겨우 관작 추탈을 면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준경이 죽은 지 4년 후에 그의 예언이 사실로 입증되었다는 점이다. 선조 8년(1575)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데, 이해가 을해년이어서 이를 을해당론(乙亥黨論)이라고 한다.
유성룡은 김우웅 · 허엽 · 우성전 등과 함께 동인으로 분류되지만 사실 그는 사림이 동 · 서로 갈릴 때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조좌랑으로 있던 선조 6년(1573) 7월 부친상을 당해 선조 8년(1575) 9월까지 형 유운룡과 시묘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연보》는 “아침저녁으로 성묘하여 아무리 큰 추위나 더위나 비가 내려도 한결 같았다” 고 전하는데, 상복을 벗자마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35세 때인 선조 9년(1576) 사간원 헌납(정5품)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유성룡은 한 당파에 가담하기보다는 당파가 나뉜 것을 걱정했다. 《연보》는 “동서 당론이 처음 일어날 때부터 선생은 크게 근심하여 뜻이 맞는 여러 동지들과 적극적으로 타협하여 진정시킬 계획을 하였으나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라고 전한다. 창석 이준이 쓴 《서애 유 선생 행장》은 유성룡이 42세 때(선조 16년, 계미년) 무렵에도 조정의 당파 싸움 때문에 크게 고민했다고 전한다.
《서애 유 선생 행장》
이 무렵 조신들의 의견이 둘로 갈라졌는데 선생은 벌써부터 이를 크게 우려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힘써 화평시키고 진정시키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는 양쪽이 붕당으로 뭉쳐짐이 더욱 심해서 서로 상대방을 공박하고 자파를 성원하자 선생은 조정에 있기 싫어진 데다, 정경부인(모친)도 노환으로 와병 중이라, 근친하러 간 김에 그냥 향리에 머물러 있었다. 가을에 특명으로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 병환 때문에 사퇴했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바꾸어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유성룡이 동인 쪽에서 당파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면 서인 쪽에서는 이이가 그랬다. 이이는 이준경의 예언대로 사림이 동 · 서로 나뉜 것을 크게 반성하고 두 당파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이이는 서인이란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동인들에게서 집중적으로 비판받았고, 끝내 두 당파를 화해시키지 못한 채 선조 17년(1584)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당파는 서로 대립하다가 선조 22년(1589)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사건에 말려든다. 기축옥사라고도 부르는 정여립 사건이 그것이다.
유성룡은 38세 때인 선조 12년(1579)에는 홍문관 직제학(정3품)에 제수되었다가 같은 해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홍문관 직제학과 동부승지는 같은 정3품이지만 직제학은 당하관인 데 비해 동부승지는 당상관으로 격이 달랐다. 당상관이 되어야 비로소 주요 국정에 참여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유성룡은 국왕의 경연관을 겸해서 매일같이 선조와 얼굴을 맞대고 정사를 논의하게 된다.
유성룡은 중앙의 청요직에 있거나 지방관으로 있거나를 막론하고 고담준론보다는 실제적인 일을 중시했다. 선조 12년(1579) 승정원 동부승지로 있을 때는 종이 문제 해결에 나섰다. 승정원에서 쓰는 종이가 지나치게 크고 두꺼워서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실세 부서인 승정원의 일이기 때문에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동부승지로 부임한 유성룡은 먼저 한 달치 양을 정하고 지질도 얇게 바꾸는 것으로 낭비를 없애고 납품하는 백성들도 편하게 해주었다.
한편 상주 목사로 있을 때는 아전 제도 개선에 나섰다. 봉급도 없고, 승진할 길도 없는 아전의 부정은 필연적이었지만 지방관들은 못 본 체 눈감아주었고, 그 부담은 모두 백성들이 지는 상황이었다. 상주 목사 시절 아전 문제의 본질을 파악한 유성룡은 이렇게 말했다.
“아전이 아무리 성실하고 깨끗해 보았자 승진되는 일이 없으니 부정하여 축재하는 길이 조그마한 명예보다 더 실속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처음부터 청렴결백한 아전을 양성하는 법을 갖추지는 않고 청렴결백하지 않다고 야단만 치면 어찌 착하고 능력 있는 아전이 길러져서 서민(庶民)들의 모범이 되겠는가?”
《연보》는 유성룡이 아전의 급료제도를 정해 매월 1일마다 성적평가를 거쳐 지급하려 했으나 매듭짓지 못했다고 한다. 상주뿐 아니라 전국의 아전이 모두 걸린 문제여서 혼자 결정할 수 없었고, 목사로 재임한 기간이 채 1년도 안 되었기 때문에 마무리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러나 이는 명분보다는 실질을 중시하는 유성룡의 관직관이 드러나 사례들이다.
유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목청만 높은 명분론보다는 가장 시급한 현안 해결에 매달렸지만, 주요 보직을 역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동인의 영수가 되어갔기 때문에 서인들의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무렵 당쟁은 조정에 있는 이상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다. 율곡 이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론 조제(당론 조정)와 보합(당파 화합)을 자신의 정치 목적으로 삼았으나 동인들은 계속 그를 공격했다. 이이가 동인들의 공세를 받아 서인이 된 것처럼 유성룡도 서인들의 공세를 받아 동인이 된 것이다.
선조는 당쟁 시대에 이이를 크게 신뢰했다. 선조는 재위 16년(1583) 이이를 탄핵한 허봉 등 동인 세 사람을 모두 귀양 보내 ‘계미년에 세 신하가 귀양가다’ 는 뜻의 계미삼찬이란 말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서인이 집권당이 되었으나 이이가 당론 조절에 나섰기 때문에 두 당파의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이가 사망하면서 상황은 크게 변해갔다. 이이의 사망은 서인에게는 당론을 조절할 조정자가 사라진 것을 뜻했다. 게다가 선조는 이이가 죽은 후 태도가 돌변해 동인들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서인들은 동인들을 몰아낼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런 배경에서 발생한 것이 정여립 사건이다.
율곡 이이의 제자인 정여립은 서인이었으나 이이가 죽은 후 동인으로 당적을 옮겼다. 정여립의 당적 배경은 배사 행위로 여겨져 그는 동인 집권기인데도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전주로 낙향한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했다. 《국조보감》은 정여립이, “이웃 고을의 여러 무사, 공사천 중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 등과 대동계를 만들어 매월 15일 한곳에 모여 활쏘기를 겨루고 주식(酒食)을 장만하여 즐기었다” 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대동계는 비밀조직이 아니었다. 선조 20년(1587) 전라도 손죽도에 왜구가 침범했을 때 전주 부윤 남언경이 대동계 동원을 요청하자 왜구 격퇴에 나서기도 했다. 대동계는 국가권력에 의해 반승인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여립을 배사 인물로 보는 서인들에게 대동계는 좋은 역모의 소재였다. 정여립의 활동 공간은 호남이었으나 정작 그의 반란혐의를 고변한 곳이 황해도라는 점이나, 고변을 배후에서 주도한 인물이 서인의 모사 송익필이라는 점은 정여립 사건이 당쟁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정여립에 대한 고변이 접수되었을 때 정승인 이산해와 정언신은 고변자를 처벌하려 했으나 서인 대사헌 홍성민의 저지로 실패했다. 의금부에서 체포하러 내려가자 아들과 함께 죽도로 도망간 정여립은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아들 정옥남만 체포되었다. 타살설도 분분했으나 선조가 이 사건의 진실 파악보다 배사 인물 정여립에 대한 사감(私憾)과 명문가 출신 동인 엘리트 세력을 약화하는 계기로 이용하면서 사건은 크게 확대되었다.
선조가 노수신 · 정언신 등 동인 위관을 파직시키고 그 자리에 서인 강경파 정철을 앉히면서 희생자가 급증했다. 정철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보다는 동인 세력 약화를 기도했기 때문에 희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발 · 최영경 · 정개청 · 백유양 등이 희생되었으며, 이발의 팔순 노모와 열 살이 채 안 된 어린 아들까지 국문을 받다가 죽고 말았다.
거의 모든 동인 엘리트들이 연루되었으므로 유성룡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사건 와중에 장사(杖死=곤장 맞다 죽음)한 부제학 백유양이 정여립에게 보낸 편지가 문제였다. 백유양이 정여립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성룡에게 다시 관직에 나가도록 종용하라고 권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이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은거해 있자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이다. 편지 한 장이 저승의 초대장이 되는 상황이었다. 유성룡은 그간의 사정을 솔직히 설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선조수정실록》 22년 12월 1일
신이 10여 년 전에 호남에 정여립이란 자가 독서와 학문에 부지런하다 하여 자못 이름이 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 그 뒤 명성이 점차 성대해지고 전하는 자가 더욱 많아지자, 모두 요로에 천거하려고 했으나 … 오직 고(故) 집의 이경중 만이 그를 극력 배척하였습니다. … 이로부터 외정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모두 이경중이 선사(善士=아름다운 선비)를 시기하고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사년(선조 14) 여름에 사헌부에서 ‘아름다운 선비를 가로막았다’ 고 발론하여 마침내 이경중을 전조(이조)에서 내쳤는데 이른바 아름다운 선비란 곧 여립입니다. … 만일 환난을 미연에 말한 공을 논한다면 이경중이 거기에 해당되고, 나머지 사람은 취한 듯 바보인 듯 전후 사류가 일체 그의 술책에 떨어져서 그럭저럭 날짜를 보냈을 뿐 명백하게 들어서 거론하지 못했습니다. … 신이 역적에게는 전에 10년 동안 취하지 않은 마음이 있었고 뒤에 은미함을 살피고 드러난 것을 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 벼슬할 적에 도도히 뒤섞인 채 일찍이 한마디 말도 그의 간사한 정상을 피력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로써 나라를 저버린 죄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유성룡이 정여립을 배척한 유일한 인물로 지목한 이조좌랑 이경중은 이 때문에 선조 14년(1581) 정인홍 · 박광옥 · 정탁 등 동인 대간들의 논박을 받아 파직된 인물이다. 이경중은 선조 18년(1585) 이미 사망했는데, 유성룡은 이경중 한 명만이 정여립을 극력 배척했고, 나머지는 같이 어울렸다고 설명한 것이다. 유성룡의 이 상소는 기축옥사의 향배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이경중 외에 대다수의 사대부들은 정여립과 어울렸지만 역적으로 몰기에는 무리라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 상소 말미에 사관(史官)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22년 12월 1일
유성룡은 그의 이름이 백유양이 역적에게 보낸 서찰 중에 나왔을 뿐이고 애당초 역옥에는 간여됨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에 조신이 역모의 일을 빚어낸 것을 한쪽의 사류(동인)에게 죄를 돌렸으므로 유성룡이 상소하여 정여립의 사상을 두루 진달하여 여립을 끊지 않은 죄는 피차가 다름이 없음을 밝혔을 뿐이다. 정인홍이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드디어 성룡과 틈이 벌어져 남인 · 북인의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유성룡의 상소를 본 선조는 정여립 사건이 한없이 확대되는 데 제동을 걸게 되었다. 서인 이항복도 사건이 확대되는 데 제동을 걸었다. 문사낭청으로 사건 수사에 참여한 이항복은 “죄수가 많이 연루되어 옥사가 빨리 끝나지 않음으로써 남이 화를 당하는 것을 바라는 자의 마음을 열어놓는 상황을 민망히 여긴 나머지 죄상이 의심스러울 때는 바로잡아 억울한 사람을 살렸다” 는 것이다.
동인 유성룡, 서인 이항복이 사건 확대에 제동을 걸면서 기축옥사는 차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연보》는 “무고를 당한 명사(名士)들이 차츰 풀려나자 그 당시의 여론이 선생이 한번 상소한 힘이라 하여 서울 장안의 인사들이 상소문을 돌려가며 읽었으며, 부녀자들도 한글로 번역하여 읽었다” 라고 전한다. 반면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대로 정인홍이 삭탈관직되면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정여립 옥사 사건으로 좌의정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이 다시 실권을 잡았다. 그러나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유성룡이 모두 동인이므로 서인들이 독주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서인들은 얼마 못 가서 다시 몰락하고 만다. 이른바 세자 건저(세자를 세우는 것) 사건 때문이다.
《당의통략》
조정에는 아직 세자가 책립되지 않았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다 광해군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임금은 인빈의 소생인 신성군을 사랑하였다.
정철이 왕세자 세우는 것을 청하고자 이산해와 임금을 대면할 것을 약속하자 이산해도 허락하였다. 약속한 하루 전에 이산해는 몰래 인빈의 동생 김공량을 불러 말했다.
“지금 정승인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자 하면서 신성군 모자와 그대를 죽이려 하네.”
김공량이 크게 놀라서 곧바로 궁으로 들어가 인빈에게 고하니 인빈이 선조에게 울며 하소연했는데 선조가 미덥지 않아 말하였다.
“이것은 헛소문이다.”
다음날 이산해가 병을 칭하고 조회에 나오지 않아 정철과 유성룡 둘이서 임금을 대좌하게 되었는데, 정철이 먼저 세자 세우는 문제를 아뢰니 선조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정철은 황망중에 나오고 유성룡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 사건으로 서인들은 정권을 동인들에게 다시 빼앗겼다. 정여립 옥사 사건으로 서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동인들은 서인들에게 보복하려고 했지만 유성룡은 이에 반대했다. 이 문제를 두고 동인들은 둘로 갈리는데, 서인에 대한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인물들은 영상 이산해와 함께 북인이 되고, 온건한 처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성룡과 함께 남인이 된다.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은 이해하지만 유성룡은 지금이 당파를 나누어 싸울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쪽 일본에서는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열도를 통일하고 대륙 진출을 꾀하고 있었으며, 북쪽에서는 여진족 통합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림이 동서로 갈리고, 집권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린 상황에서 운명의 해 임진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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