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5월 29일. 이 날은 이순신 함대가 두 번째로 출동한 날이다. 2차 출동에서는 사천포,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네 차례의 해전을 치뤘다. 그리고 6월 14일 이순신은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장계의 이름은 ‘당포파왜병장’. 모두 6천여 자로 쓰여진 이 장계는 이순신의 장계들 중에서 가장 긴 것이다.
2차 출동에서는 조선 함대를 중세기 세계 최강의 함대로 끌어올린 신병기가 등장했다. 거북선이었다. ‘당포파왜병장’ 에는 거북선 출전에 따른 세 편의 특집이 기록으로 남아 전해진다. 그간 거북선과 학익진 관계 기록이 태무하다고 알려져 왔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1차 출동에서 조선 함대는 왜선 40여 척을 격파했다. 왜군 사상자 수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인명 살상보다는 ‘병선 깨뜨리기’ 에 중점을 둔 해전이었으므로 왜군 측 사상자의 대부분은 해전 초 왜선단에 화력이 집중될 무렵 발생했을 것이다.
해전에 소요된 시간은 30분~1시간 정도. 이 시간 동안 왜군들이 결사 반격에 나섰던 시간은 초기 15분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당시 왜군 측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들로는 조선 함대에 심한 타격을 가할 수 없었다. 이미 초동진화 단계를 넘어 불타고 있는 배를 지키기 위해 무모한 희생을 치를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바람과 우레처럼 일시에 해치웠다’ 는 장계의 기록은 이순신이 왜선과 왜군을 동시에 해치우고자 했음을 말해 준다. 왜군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바로 도망쳤고, 만약 끝까지 항전했었다면 불에 타 죽었을 것이다.
아무튼 1차 출동은 병사들에게 값진 승리와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사령관과 지휘부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와 존경심도 더욱 커졌으며, 함대의 결속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이 역시 커다란 수확이었다. 이순신에게도 왜군 기동함대의 전력을 실전을 통해 요모조모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값진 성과였다.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이순신에게는 값진 성과 못지않게 가슴을 졸이게 하는 고민거리들도 많이 생겨났다. 쫓기는 신세가 된 임금, 왜적의 총칼 아래 유린당하고 있을 백성들, 언제고 전라도를 향해 수륙 양면으로 쳐들어올 왜적들…
여수로 귀항해 온 이후 이순신은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쉽게 잠을 이룰 수도 없었지만 이같은 위기를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함대의 존재가 드러난 만큼 여기에 대한 각별한 대책이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적을 찾아다녔지만 이제부터는 그 반대의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해전은 기습전이 아닌 전면전이 될 공산이 컸다.
전면전은 자칫 백병전으로 이어질 소지가 많았다. 왜군들이 화공에 대비해서 선체를 젖은 가마니 등으로 덮고 돌격해 온다면 백병전은 불가피해질 것이며, 그것은 이순신이 염려하는 최악의 해전 상황이다. 수병의 60%는 격군(노꾼)이었고, 나머지 병사들 중에서 직업군인은 5백 명 수준이었다. 이에 비해 5만에서 10만 명 규모로 들이닥친 왜군들은 백병전에 능한 무사들인지라 백병전이 있게 되면 조선 함대는 단 한 차례의 해전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전라우수영 함대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예측되는 앞날의 전황들은 대체로 조선 함대에는 극히 불리한 것들이었다. 그 와중에 군사들과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임금과 조정은 어디에 있는지 소식이 두절된 상태였고, 임금이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느니,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피난을 갔다느니하는 별별 추측과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다.
사변에 대비하여 그동안 많은 준비를 해 왔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고 보니 크고 작은 문제들이 위기에 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라는 변방의 장수 신분으로서 난국을 헤쳐나가야 했다.
2차 출동을 앞두고 이순신은 전면전에 대비한 전술과 많은 수의 왜군 함대를 상대할 경우를 생각하며 다양한 해전술을 구상했다. 어떤 경우에든 ‘백병전을 차단하고 시종 화력전으로 전투를 이끌어간다’ 는 것이 이순신 해전의 대원칙이자 필승의 전략이었다. 이 원칙은 옥포해전 때에도 적용되어 지켜졌다. 그러나 그때는 기습전이었고, 적의 규모는 조선 함대보다 적었다. 앞으로의 상황은 그 반대가 될 공산이 컸다.
한편 이순신은 이러한 난제들을 일찍부터 예상해 왔고, 예상되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위기관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나온 것이 학익진법과 거북선이었다. 학익진이 필승의 전법이었다면 거북선은 필승의 전함이었다. 함대는 2차 출동 전까지 거북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술과 진법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훈련을 하면 할수록 새롭게 얻어지는 것들이 많았다.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을 활용한 해전의 이치들은 더욱 정교히 다듬어졌다. 거북선에는 특별히 힘이 세고 지구력이 강한 격군들이 차출되었다. 거북선이 적진을 누비며 좌충우돌의 충돌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빠른 기동력은 필수였다.
사수들 역시 민첩하고 근성이 강한 이들로 선발했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명중탄을 퍼부어야 했기 때문이다.
“속도가 너무 늦다! 더 빨리 전진하라!”
“특공조는 공격선에 대기하라!”
“노를 저어라! 더 힘껏 저어라!”
훈련은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실전을 뛰어넘는 맹훈련이었다. 훈련은 다양한 진법 연마에도 집중되었다. 공격과 방어, 유인과 포위, 판옥선 및 거북선의 합동전술과 거북선 단독의 돌격전술 등, 훈련은 하루에도 수차에 걸쳐 반복되었다.
“돛을 올려라!”
“돛을 내려라!”
“북을 울려라!”
“함대 군악에 맞춰 전진 앞으로!”
“공격선에 정렬…!”
“학익진을 펴라!”
이순신의 명령은 곧바로 수기와 북, 대포 등 다양한 신호로 전달됐는데, 신호에 즉각 반응하지 못하는 대장들은 훈련 중에는 물론 훈련이 끝난 후 열리는 작전회의에서 엄중한 질책을 받아야 했다.
이순신이 부임해 온 이래 숫한 훈련이 있어 왔지만 이 기간 동안에 실시된 훈련은 가혹할 만치 고되고 힘든 것들이었다. 또한 군사들이 숙지해야 할 역할과 임무들도 더욱 많아졌다.
하지만 요령을 피우는 이들은 없었다. 훈련교관들의 눈을 피할 수도 없었지만 그 길이 자신이 살고 시산시해(시체로 된 산과 바다)가 되는 것을 피하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히데요시의 분노
5월 중순경이 되자 한성을 거점화한 왜의 선봉부대들은 또다시 파죽지세로 북상을 시작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군과 구로다 나가마사 군은 임진강을 돌파하고 평양으로 향했으며, 가토 기요마사 군은 철령을 넘어 원산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한성의 왜군 사령부에서는 왜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가 조선에 상륙한 전 왜군부대들을 지휘했다. 왜군 선봉부대들의 북상과 때를 같이 하여 여타의 부대들은 경상 · 충청 · 경기 · 강원도 지역에서 각기 영지 구축을 시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큐슈 북단 나고야에 전략사령부를 두고 조선으로 건너간 왜군들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나고야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사연이 많은 곳이다.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며, 백제 · 신라 · 고구려인들도 이 지역과 많은 교류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유적과 도자기 등 한반도의 전승문화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일본 역사 속에 한반도를 정복한 적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신공황후의 출병지도 바로 이곳이다.
히데요시는 이곳에서 옥포 등지에서의 패전보를 받았다. 내용인 즉, “우리 수군들이 옥포 · 합포 · 적진포에서 조선 수군의 기습으로 패주해 돌아왔으며, 수치감을 이기지 못하고 할복한 이들이 있었던 반면, 살아서 돌아온 것을 천우신조로 여기는 자들도 많았다. 적과 맞선 우군 함대들은 모든 병선을 잃고 일부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는 전언이었다.
히데요시에게는 해괴하고 황당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바다의 나라라는 일본의 수군들이 그까짓 조선 수군에게 참패했다는 사실, 더구나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냈어야 할 병선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 모든 병선을 잃었다는 사실 등은 납득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쟁에 관한 한 신기에 가까울 만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는 히데요시로서도 이 패전의 진상은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소식으로만 전해진 사실만 가지고는 어떠한 것도 명확하지가 않았다. 답답한 일이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다 도망가고 없다’ 던 조선 수군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한성이 함락되고 조선의 왕도 도망을 친 시점에 있은 적의 도발이었기에 더욱 이상했다.
히데요시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부산 주둔 사령부에 전령을 띄워 “조선 수군의 실체와 행방, 그리고 그간의 해전상황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신속히 보고하라!” 고 독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문이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외에 새롭게 밝혀진 것이라고는 “적은 전라도 지역에 근거를 둔 조선 수군인 듯하다. 나타나고 사리지는 것이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졌기로 그 행방과 병력, 적장에 관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00여 척이나 되는 병선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고 하는바, 이것이 적이 보유한 모든 병력인지 아니면 일부인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다. 옥포에서는 수천의 사상자가 생겼고 거의 모든 병선이 해전 중 파괴되거나 전소되었다…” 는 정도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선을 잃었다’ 는 것은 사실로 드러난 셈이었다. 그 순간 히데요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성난 야수처럼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이 놀라운 사태를 의논하기 위해 황급히 불려온 군사 구로다 간베에를 비롯한 히데요시의 핵심 측근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함한 다이로(히데요시를 보좌하는 최고의 참모직. 모두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음)들은 머리를 다다미 바닥에 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판단하기로도 이 사건은 실로 충격이었고, 간단히 설명될 수 없는 문제였다. 또한 섣불리 나섰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모두 눈치를 살피면서 히데요시의 노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잠자코 있겠다는 심사였다.
히데요시는 한참을 서성댔고 갑자기 무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참모들은 그가 이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리고는 더욱 긴장하며 머리를 바닥에 바짝 밀착시켰다.
통상적인 해전 방식에 얽매여 이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이해해 보려 했던 히데요시는 마침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너무 싱거운 전쟁을 치른 탓에 모두 나태해진 것이 분명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적은 바로 나태와 방심이 아닌가. 이렇게 어영부영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그렇지 않아도 뜻밖이다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승세를 굳혀가고 있는 자신의 군대가 늘 걱정이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개선장군 행세를 하고 있는 대장들이 많았다. ‘긴장이 풀어진 군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는 것이 피의 시대를 살아온 그의 신조였기에 언젠가 한 번은 귀가 번쩍 뜨이도록 해줄 작정이었다.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무슨 빌미를 잡아 군기를 잡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히데요시가 무겁고도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선에 건너간 대장들이 과연 나의 의중을 충심으로 이행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서 내 앞에 무릎을 꿇리라는 조선의 왕은 보기 좋게 놓쳤고, 우리 수군은 적의 놀림감이 되지 않았는가? 서해 항로 개척과 전라도 공격을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걸 보면(대마도 맞은편에 있는 거제도에 상륙하지 않았기에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격이다) 나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이 모두가 군의 기강이 해이해진 탓으로 그대들에게도 책임없다고 할 수는 없을 터…. 나는 이같은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이렇게 사납게 쏘아붙인 후, 히데요시는 모종의 결심을 내비치려는 듯 근엄함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의 사항들을 우키타 사령부에 전하라!
첫째, 지체 말고 조선왕을 사로잡을 것!
둘째, 속히 전라도를 속지로 삼아 원정군의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케 할 것!
셋째, 남해안 일대를 거점화하고 성을 쌓을 것!
넷째, 남아 있는 조선의 수군들을 찾아내 철저히 멸할 것!
다섯째, 서해안 돌파를 서두를 것!”
● 사천포 해전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전일 경상도의 옥포 등지에서 왜선 40여 척을 불태운 사연은 이미 장계 드린 바 있사옵니다. 그후 부산에 있는 적들이 계속해 드나들고 거제도 서쪽을 침범하면서 연해안 여러 고을에서 분탕질하여 가져가기를 제 물건 옮겨가듯 하기에 통분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그래서 본도의 수군을 계속 모으면서 다른 한편 본도의 우수사 이억기에게는 힘을 합해 공격에 나서자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으나, 뱃길은 멀고 바람 사정도 예측하기 어려워서 6월 3일까지는 일단 본영 앞바다에 모여서 경상도 해역으로 구원가기로 약속하고 있었습니다.
5월 27일, 이순신은 2차 출동을 앞두고 소속 기지 함대들을 소집하여 출전태세를 점검했다. 출동일은 6월 3일로 결정되었다. 이날은 이억기 함대도 합류하기로 예정되었다.
출동 목적은 왜군들의 심장부격인 부산을 두들겨 왜군 상륙부대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적의 보급망을 흔들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부산은 일본과 조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왜군부대들을 연결하는 최대의 병참기지였고 주요 군수물자와 증원군이 집결되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대규모 수송선단들이 하루에도 수차례씩 대마도와 나고야를 오가며 어마어마한 물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또한 부산은 적 수군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이곳에 집결해 있는 왜군 함대와 수송선단을 격파해서 조선 8도에 미치고 있는 적의 기세를 꺾어 놓겠다는 작전을 구상했다. 1차 출동 때는 선조의 피난 소식을 접하면서 이 계획을 접어야 했지만, 2차 출동을 앞두고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부산까지는 먼 거리였다. 도중에 적 함대들과 얼마나 부딪쳐야 할지, 출동한 사이 후방 기지와 고을들이 공격당하지나 않을지 실로 많은 난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려됐던 것은 전라 좌 · 우도 함대가 싸움에서 패하게 되는 경우였다. 그것은 조선 수군의 패배이기에 앞서 그나마 조선에 남아 있는 정규군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이후의 결과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것이었다.
이순신이 각 기지의 함대들을 소집, 출동 준비 상황을 점고하고 있을 무렵 원균이 보낸 전령이 공문을 가지고 달려왔다.
내용은 ‘왜군 선발대가 사천포와 곤양까지 쳐들어왔고(여수항에서 불과 50km 안에 있는 지역들), 자신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인 노량해협까지 밀려났으니 급히 출동해 달라’ 는 것이었다. 이무렵 원균은 본영을 창신도 부근에 두고 있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런데 5월 27일에 전해온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에 ‘적선 10여 척이 이미 사천포와 곤양까지 쳐들어 왔고, 원균 수사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노량해협까지 병선들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고 했습니다.
만약에 당초 약속된(전라우수영 이억기 함대와의 합류) 6월 3일까지 기다리다가 출동한다면, 그 사이에 적은 그들의 무리들을 더욱 많이 끌어들여서 형세가 더욱 창궐하게 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 무렵 왜의 육군은 진주는 물론 함안군을 넘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런데 공문의 내용은 왜의 수군이 벌써 사천포까지 와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원균 함대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밀린 것이었을 수도, 왜의 수군이 그 지역으로의 진출을 서둘렀기 때문이었을 수도, 아니면 왜군측에서 조선함대의 섬멸을 서둘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왜군의 서해안 보급로 개척이 다급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순신이 출동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적은 그들의 무리들을 더욱 많이 끌어들여…’ 라고 한 대목에서 보듯이 사천포 지역에서의 왜군의 세력팽창을 커다란 위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출동 절차를 잠시 정리해 보자.
1차 출동은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향하는 첫 출동이었다. 때문에 전라감사와 조정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4월 27일자 조정의 출동명령서에서 출동과 귀항이 현지 수사들에게 위임되어 있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래서 수사들끼리의 협의만으로도 출항과 귀항이 결정될 수 있었다.
때문에 원균도 상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구원을 요청했고, 이순신도 전라감영에 통고만 하고 출격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장계로 보고했다. 이 점이 1차 출동을 앞두고 복잡한 절차를 밟았던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5월 27일, 이순신에게 전달된 원균의 구원 요청 공문은 임진왜란을 통해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한 유일한 사례였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이순신의 경상도 쪽 출병을 원균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아 왔다. 그러나 1차 출동 때를 보면 조정과 전라감영, 그리고 이순신 쪽의 출동지지론 등에 의해 이루어졌고, 2차 출동의 경우는 비록 원균의 요청은 있었지만 이억기 쪽에서 그 이전에 도착했다면 이순신 함대는 이미 한두 차례의 해전을 더 치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여수와 지척인 사천포에 왜의 수군이 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래서 신의 군관 전 만호 벼슬의 윤사공을 유진장으로 삼고, 수군 조방장인 정걸에게는 전라좌도 수영 관내의 각 진(지역 수군기지)과 포구에 지휘할 사람이 없으므로 흥양 고을에 주둔하면서 만약에 일어나는 사변에 호응토록 엄히 조처해 두었습니다.
신은 5월 29일에 한걸음 앞서서 2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우후 이몽구와 함께 떠나왔습니다. 이억기에게도 사유를 기록해서 공문으로 알렸습니다.
출동을 앞서 후방 단속에 관한 사항을 적어 올린 장계의 내용이다. 이순신이 이처럼 자세히 기록한 것은 주력함대가 기지를 비운 사이 있을 수 있는 만약의 사태에 대한 조정의 염려를 불식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윤사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군해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정걸은 여수와 지척의 거리인 흥양 고을에서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진주성 등이 아직 건재했고, 사천포 근해의 왜선은 10여 척 정도였으므로 이순신은 일단 후방 고을인 광양이나 순천 쪽은 아직 큰 위험은 없을 거라고 판단했겠지만, 또 다른 왜군 함대가 먼 바다로 우회해서 공격해 올 수 있는 경우도 생각했던 것 같다.
정걸 장군은 병선과 화포 분야에 밝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부산포 해전이 있었던 제4차 출동 때는 기동함대를 따라서 실전을 익혔고, 이듬해 2월 행주대첩을 앞두고는 충청수사가 되어 강화도 일대의 어선 · 상선 · 화물선을 이끌고 한강의 수상권을 확보했으며, 왜군의 한강 진입을 봉쇄하는 한편 화살과 신기전 등의 무기를 강화도에서 실어 날랐다.
권준 순천부사는 5월 초 이광 전라감사를 따라 육군에 참전해서 공주까지 북상했다가 선조의 피난소식을 듣고 되돌아 왔는데, 이번에는 수군 쪽에 참전해서 작전사령관 격인 중위장을 맡았다.
군사와 행정이 2원화되어 있던 당시, 권준은 여수 · 돌산도 등지의 일반행정을 관할했던 순천부의 부사로서 개전 전부터 이순신을 도와 함대 건설에 큰 역할을 했다. 또 방답첨사 이순신, 우후 이몽구, 조방장 정걸, 훈련봉사 나대용 등과 더불어 거북선 계획에도 깊이 관여했던 장수였다.
거북선의 참전은 새로운 방식의 해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또 좌수영 관내에서 제 2인자 격이자 거북선에도 밝았던 권준이 중위장을 맡게 된 것은 좌수영 함대가 정상적인 군사편제를 회복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튼 뒤숭숭했던 개전 초의 분위기보다는 많이 개선되어 있었다.
2차 출동 때는 총 23척의 판옥선이 동원됐다. 이순신은 2차 출동 때부터 판옥선과 거북선 모두를 가리켜 ‘전선’ 이라고 기록했다. 협선과 포작선은 몇 척이나 동원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원된 23척에는 거북선도 2~3척(기밀이었기 때문인지 숫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정도 포함된 숫자였으므로 판옥선의 숫자만을 놓고 본다면 지난 번 24척보다 몇 척 정도 적은 숫자이다.
아마 원래 예정일보다 며칠 앞당겨진 출동이었던 관계로 관내 기지 소속 판옥선들 중 출동 준비를 마치지 못한 판옥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협선과 포작선은 1차 출동 때와 비슷한 숫자가 동원된 듯하다. 그러나 함대의 공격력과 전반적인 전력은 대폭 증강되었다.
거북선의 참전과 증가된 총포류, 1차 출동 때의 실전 경험과 그에 따른 자신감, 실전 못지않은 강도 높은 훈련 등으로 좌수영 함대는 당시 지구촌 최우수 함대로 발돋움해 가고 있었다.
5월 29일, 사천포를 향한 출전의 북이 울렸다.
만약 사천포 일대에 적의 거점이 마련되기라도 한다면 왜군들은 사천포를 전라도와 서해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천포를 경계로 한 동쪽 해역(한려수도에서부터 부산까지)은 적의 소굴이 될 것이었다.
‘거점’ 이라고 하는 것은 수비에 강한 왜성을 쌓고 그 안에 병력과 병선을 주둔시켜 인근의 지역을 군사 · 정치 · 경제 · 사회적으로 통치함을 의미한다. 왜선은 일단 축성이 끝난 뒤에는 열 배의 병력으로도 깨치기가 어렵고, 이는 100년 동안 이어진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해 여실히 입증된 바였다. 때문에 왜군들이 왜성을 쌓고 그곳에 1만 명 정도가 주둔하게 된다면 10만의 군사로도 깨치기 힘들다. 그리고 조선에는 그만한 병력은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시 좌수영 함대로서는 벼랑끝으로 내몰린 상황이었다.
왜군들이 사천포를 차지하게 되면 여수는 아침저녁으로 적의 공격권 내에 놓이게 될 것이고, 또 사천의 왜군을 방치한 채 경상도쪽으로 나간다면 후방은 텅 비게 되어 여수를 위시한 모든 기지들이 차례로 유린당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출동을 미루게 되면 왜적들은 섬진강을 타고 전라도 내륙지역에 대한 침공에 나설 것이었으므로 2차 출동은 1차 출동 때와는 달리 출동에 대한 결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아무튼 이순신의 판단은 옳았고 사천포의 전략적 가치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사천포는 진주성과는 불과 1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진주성은 전라도로 통하는 관문이자 조선 육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 성은 임진왜란 기간 중 최대의 격전지였다. 지리적 특성상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천 지역을 왜군측이 점령한다면 왜군들은 해로를 통해 군사력을 증강해서 진주성을 바다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작전을 시도할 것이 분명했다.
당시 전라도에서 진주로 가는 길은 섬진강을 타고 내려와서 남해를 돌아 사천포로 빠지는 길뿐이었다. 이순신과 진주의 경상감사 김수는 이 길을 통해 공문을 내왕했고, 훗날 전라도 쪽에서 진주성의 수비전을 도우러 갈 때도 주로 이 길을 이용했다.
육지 쪽으로는 지리산, 노령산맥, 소백산맥이 가로막고 있어서 당시로는 내왕이 거의 불가능했다. 왜군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천포를 거점화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한편, 진주성은 함안군수 유승인과 의병장 곽재우에게는 후방의 요충지였다. 진주성이 함락되면 이들 전위부대들의 운명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부대들과 진주성은 전라도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때문에 왜군 측에서는 이 전위부대들의 섬멸도 단단히 벼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왜성은 영주가 자신의 군사력으로 지킬 수 있을 만한 크기의 해안이나 강가의 산을 골라 산봉우리를 깎고 그 위에 천수각 또는 천주각이라는 집을 짓고 그 안에서 가족과 함께 거처했다. 천수각 아래에는 여러 층의 마루라는 돌담을 쌓았는데 맨 아래에는 바다로 통하는 해자가 있고, 이 해자에는 수책을 쌓아 여러 척의 병선들을 두었다.
해자 주위에는 무사계급, 그 바깥에는 일반 백성들이 살게 했다. 해자로는 뱃길로 내륙과 바다, 그리고 어민들과 연결되며, 왜인들의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해산물들이 운송되었다. 또 전쟁 때는 구원군과 보급물자가 이곳을 통해 보내졌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구조의 왜성은 비가 많고 하천이 많은 일본에 적합한 형태였으며, 일본의 통치 구조와 군사적 개념에 부합되는 성곽이다. 왜성은 많은 수의 적을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방어체계가 구축되어 있는 요새이다. 외부로부터 적이 공격해 오면 해자의 병선들은 1차로 바다에서 적을 막는다. 그 다음엔 해자에서 막고, 적이 해자를 지나 맨 아래 돌담을 점령하면 수비군은 위쪽 돌담으로 물러나 조총으로 밀집사격을 가한다.
또 조총을 장탄하는 동안에는 화살을 쏘거나 바위와 통나무 등을 쉬지 않고 굴려 내린다. 아래 위 돌담 사이는 50m 정도이므로 공격군은 조총의 유효 사거리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또한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바위나 통나무도 잘 굴러 떨어진다. 왜성은 이같은 다단계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공격군이 해자를 뚫고 맨 아래쪽 돌담을 점령했다고 해도 결코 오래 버틸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위층의 돌담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사다리 등을 옮겨야 하는데,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또 각 돌담의 출입문은 갈 자 형식으로 위치해 있어 더 이상 위로 옮겨가기도 어렵다.
반면에 수비군은 희생이 있다고 해도 위쪽의 돌담은 아래쪽보다 둘레가 작기 때문에 병력이 줄어도 밀집 수비진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다. 거기에 일본 무사도 정신은 항복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할복하거나 동료들끼리 서로 칼로 내리쳐 죽이거나, 창으로 찔러 죽고 죽이는 동반자살하는 방식이다.
그런 이유로 일본에서 있었던 전쟁의 역사를 보면 열 배의 병력으로도 결국은 여러 달이나 1년이 넘게 포위해서 굶겨 죽이기 작전을 전개한 사례들이 많다.
굶겨 죽이기 작전으로 승리한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돗토리성 전투’ 이다. 돗토리성 전투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으로 출전했을 때 치른 전투였는데, 일본 역사상 가장 완벽한 승리이자 가장 잔인한 전투로 전해지고 있다.
일명 ‘말려 죽인 싸움’ 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를 쟁취했다. 애초부터 ‘굶겨 죽인 후에 무혈입성하겠다’ 고 작정한 히데요시는 전투가 있기 수개월 전, 두 배 가량 높은 가격을 쳐서 그 지역의 곡식을 모두 사들였다. 그러자 영문을 몰랐던 성 안의 중신들은 심지어 성에 비축해둔 군량미마저도 팔아치웠다.
결국 이 전투에서 성안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잡아먹는 참극을 연출했으며, 성은 저절로 무너졌다.
이 사례를 통해서 보더라도 일본에서의 공성전은 평지형의 조선 성이나 중국형 돌담 성에서 전개되는 전투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함대가 곧바로 노량해협에 이르자 원균은 단지 3척의 전선만을 거느리고 하동 선창에 있다가 신의 함대를 보고 노를 재촉하여 나와 서로 만났으며, 적정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고 있던 중에 천포로 가고 있다 하므로 선봉의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이를 끝까지 추격해서 잡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과 남해현령 기효근 등이 추격해서 그 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왜인들은 이미 육지로 도망갔기에 빈 배만 깨뜨리고 불살랐습니다.
함대는 노량해협에서 원균 측과 합류했다.
원균에게는 3척의 판옥선이 전부였다. 관내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피난을 떠난 터라 행정력이 마비되었고, 때문에 병선을 건조하거나 무장을 강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원균의 함대는 화약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이순신 함대의 뒤를 따라다니며 죽은 왜병의 목을 베는 일에 집중했다.
아무튼 후방의 백성들이 피난을 갔느냐 안 갔느냐에 따라서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함대의 모습은 이렇게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조선 함대는 사천포의 왜군을 찾아 항진해 들어가던 중, 1척의 왜선을 불살랐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선봉 함대의 대장이었고, 그와 더불어 원균의 휘하 장수인 남해고을 현령 기효근이 그 왜선을 깨쳤다. 곤양과 사천포 일대는 경상우수영 관내 해역이었기 때문에 기효근도 최선두에 서서 선봉 함대의 해로 안내를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함대 측에서는 이 1척의 왜선이 곤양에서 무슨 짓을 하다가 나왔는지, 예정 항로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 함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동료들이 있는 사천포 쪽으로 도망하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기슭을 타고 달아난 것은 여차하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칠 생각이었기 때문인데, 결국 속도가 빠른 척후선들이 앞을 가로막자 육지로 도망쳤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리고 난 후 사천 선창을 바라본 즉, 산이 둘러져서 7, 8리(약 3km)는 되어 보임직한 지형인데 험준한 지형에서 무려 400여 명의 왜적들이 긴 뱀이 똬리를 튼 듯한 모양의 진을 치고 붉고 흰 깃발들을 난잡하게 꽂아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진중에서도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따라 장막을 치고 분주히 내왕하고 있는 광경은 무슨 지휘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곧 사천포 선창을 바라볼 수 있는 곳까지 함대가 접근했다.
여기서 이순신은 대단히 특이한 광경을 보았다. 왜군들이 해안을 끼고 있는 험준한 산꼭대기에 장막을 치고 그 주변에 ‘긴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의 진’ 을 치고 깃발을 꽂아놓고 무언가 분주하게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해전에 앞서 첫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자세히 기록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사천포에서는 왜군들이 무엇인가 이상한 진을 치고 작업을 하고 있는 광경을 기록해 놓았다.
뱀의 머리 부분을 장막이라고 보면 바로 왜성을 쌓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해석해 보면 당시 부산 등 타 지역의 왜성 쌓기 작업과 일치하고 사천포의 왜군들도 왜성을 쌓는 것이 당면 과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만한 병력으로 조선군의 심장부격인 전라좌수영 본영을 공격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왜군들도 잘 알았다. 또 조선군 관내 깊숙이 있는 사천포에 들어왔으므로 우선 안전한 근거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같은 정황으로 볼 때 이순신이 긴급히 출동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한 일이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리고 누각같이 생긴 것이 설치된 왜선 12척이 언덕 아래에 열지어 정박해 있는데, 진을 친 곳의 왜인들은 우리를 굽어보면서 칼을 휘두르며 짓밟을 듯한 기세였습니다.
사천 선창에는 12척의 누각이 있는 큰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이순신은 이 병선들을 층루선, 또는 층각선이라 기록하고 있다.
층루선(일본명: 아다카)의 층루, 또는 누각은 천수각 같은 건물을 2, 3층으로 세운 것으로 판옥선보다 높았다.
임진왜란 기간 중 육지가 난공불락의 왜성의 무대였다면 바다는 거북선의 무대였다. 그리고 거북선에 대적할 수 있었던 일본 수군의 유일한 병선이 층루선이었다.
일본의 병선 건조사를 보면 서기 1500년 무렵부터 유럽의 선박들이 내왕함에 따라 선체가 커지고 높이가 높아진 층루선이 개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설계도나 실물은 전해오지 않는다.
이순신은 언덕에 400여 명의 왜군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언덕 뒤편에서 흙을 나르고 돌을 깨고 있었을 왜군들의 숫자까지 감안하면 그 수는 몇 배로 늘어난다.
사천포의 민가를 분탕질하고 있던 병력도 있었을 것이고, 함대를 지키고 있던 병력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군의 총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층루선의 승선 인원은 약 180에서 200명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 이하가 되면 노젓기가 어려워지고 전투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름과 같이 계산해 볼 수 있다.
12척 * 180명 = 2,160명
또 큰 병선에는 보조선들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이순신 함대도 장계에는 ‘전선 23척’ 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늘 협선과 포작선이 뒤따르고 있었다. 왜군 함대 역시 보조선들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 사천포의 왜군은 약 3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사천포의 왜군들은 소문으로 듣던 조선 함대의 등장에 일단 긴장을 했다. 하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오히려 호기를 부리며 야유와 조소를 퍼부었고, 일부의 왜군들은 조총을 쏘기도 했다.
썰물 때였기 때문에 조선 함대가 접근해 올 수 없다는 것도 이들이 호기를 부릴 수 있었던 이유였지만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기습이 아닌 정면대결이 될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감도 있었다.
이들은 옥포에서의 패배를 불시 기습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했고, 그때 당한 패배를 설욕하고자 하는 의지도 강했다. 그래서 칼을 뽑아 들고 의기양양하게 조선 함대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순신은 ‘사천포에서 12척의 왜선을 발견했다’ 는 보고를 받고는 거북선의 전투수행 능력과 전술, 성능 등을 자연스럽게 평가해 볼 수 있는 첫 번째 시험무대가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내심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해 보니 바다가 얕아서 접근자체가 여의치 않았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우리 배들은 일제히 그 아래로 돌진해 들어가 사격코자 했으나 화살(대포용 살탄 포함)들이 미치지 못하겠고, 또 적의 배를 불태우고 싶었으나 마침 썰물 때인지라 판옥선 같은 큰 배(거북선 포함)가 쉽게 정면 충돌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높은 곳에 있고 우리 측은 낮은 곳인지라 지세가 이롭지 못하고 날도 또한 저물어 가기에, 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적들이 몹시 교만한 태도인데 우리가 짐짓 물러가면 저놈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나와 싸우려 할 것이니, 우리는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내어 공격하는 것이 매우 좋은 방책이겠다” 고 지시했습니다.
그런 후 함대를 돌려 1리(393m)도 채 못 나왔을 때, 왜적 200여 명이 진에서 내려오더니 반은 배를 지키고 반은 언덕 아래에 진을 치고 총을 쏘며 날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싸우지 않으면 약한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마침 저녁 조수가 밀려들어 차츰 배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시간을 끌지 않고 어떤 방법으로든 공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적을 깊은 바다로 끌어내어 섬멸한다는 작전을 구상했다.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유인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첫째, 썰물 때인지라 거북선과 같은 큰 배가 충돌전 등의 작전을 전개하기에는 바다가 얕았다는 점.
둘째, 적은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공격이 여의치 않았다는 점.
상식적으로도 낮은 쪽에 위치한 쪽이 싸움에 불리하지만, 당시의 대포는 톱니바퀴 장치로 포신을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무토막을 고이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대포로 언덕 위의 적을 향해 45도에 가깝게 포신을 세워 사격을 한다는 것은 사각에도 문제가 있었다.
셋째, 음력 그믐 때였으므로 사천포 앞바다의 밀물과 썰물 때의 간만의 차는 2.5m나 된다는 점(그리고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남해안 지형을 참조하면 썰물 때는 200m까지도 갯벌화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거리가 멀어서 판옥선에서 대포로 쏘는 각종 철탄과 살탄들도 명중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넷째, 지금까지는 포구에 있는 왜선들을 공격했고, 왜군들은 육지로 쉽게 도망칠 수 있었다는 점.
사실 이 점이 항상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번부터는 넓은 바다로 적을 끌어내어 몽땅 섬멸해버릴 계획이었다.
조선 함대는 시리와 지리적 측면 등에서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겁을 먹은 듯 배를 물려 멀리 이동해 가려는 듯이 유인전을 시작했다. 함대가 느린 속도로 400m 정도까지 물러나자 일부 왜군들이 해안으로 내려와 위협사격을 하며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추격해 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군들로서는 물이 빠진 터라 배를 이동시키기도 힘들었고, 쫓아가서까지 상대하고 싶은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싸움보다는 성을 서둘러 쌓는 것이 절실했으며, 또 전투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병력 손실의 문제도 고려해야 했다. 사천포의 전략적 가치를 따져보았을 때 아마도 축성 작업은 나고야 사령부의 특명이 있었던 것 같다.
언덕 위에 일부 왜구들이 해변가로 내려오자 왜군 함대의 수비병과 언덕 위 왜군들도 사격에 나섰다. 그러나 거리로 보아 역시 위협사격이었다. 왜군들은 칼을 뽑아 들고 계속해서 야유를 보내고 있었는데 마치 ‘어서 겁을 먹고 물러가라’ 는 뜻인 것 같았다.
이순신은 유인전이 전혀 먹혀들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오히려 왜군들 쪽에서 유인전을 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함대를 물려 나온다면 왜군들은 기고만자해질 것이고, 또 적을 방치해 둘 수도 없었다. 이에 이순신은 ‘모조리 섬멸하지는 못하더라도 배만이라도 박살내자’ 고 생각했다.
마침 밀물 때가 임박해 오고 있었다.
함대는 바닷물이 어느 정도 차오를 때까지 한동안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포구 ㅉ고을 향해 전진해 들어갔다. 함대가 포구 앞 100m 전방에 이르렀을 때 사천포구는 만조로 출렁이기 시작했다. 순간 이순신의 두 눈에 섬광이 번뜩였다.
사천포 해전은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해전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사천포 해전에서의 거북선 기록과 당포 해전에서의 기록, 그리고 당항포 해전에서의 기록들을 연결해 풀어 보면 400년 동안 세계 해전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거북선의 구조와 해전법들이 모두 재조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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