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하오 4시경 멀지 않은 바다에 왜의 큰 배 5척이 지나간다고 척후장이 보고하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쫓아서 웅천 땅 함포(마산) 앞바다에 이르니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오르므로 사도첨사 김완이 왜의 큰 배 1척, 방답첨사 이순신이 왜의 큰 배 1척, 광양현감 어영담이 큰 배 1척, 그 부통(광양 고을을 일컬음) 소속으로 방답에서 귀양살이하던 전 첨사 이응화(귀양살이 중 백의종군한 듯)는 왜의 작은 배 1척, 신의 군관 봉사 변존서 · 송희립 · 김효성 · 이설 등이 힘을 합해 활을 쏘아 왜의 큰 배 1척을 남김없이 깨뜨려 불태우고 밤을 타고 노를 재촉하여 창원 땅 남포(구면산 남포리) 앞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이순신의 해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넓은 경계망과 탐색망’ 을 하루 24시간 가동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이렇게 입수한 정보들을 분석해서 다양한 해전 프로그램을 짜 나갔다. 적의 동향이 파악되는 즉시 각 단위 함대에는 세부 작전지시가 하달되었고, 탐색망에 걸려든 왜선단은 반드시 요격되었다.
이 날도 물샐 틈 없는 정찰활동이 사방에서 이루어졌으며 가덕도 쪽으로 나간 탐색선 하나가 이동 중인 5척의 왜선단을 발견하고는 살같이 달려와 알렸다. 이들 탐색대는 옥포해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수척의 협선에 나누어 타고 해상을 경계하고 있었다. 해전 전에는 또 다른 적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했고, 해전 후에는 본대가 영등포에서 무사히 밤을 지낼 수 있도록 적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척후장의 보고에 따라 본대는 즉각 추격에 나섰다. 왜선들은 이미 가덕도와 합포 사이 어디쯤을 항진하고 있었는데 시간적으로는 석양이 깃들 무렵이었다.
왜군들은 그간의 승리 분위기 속에 마냥 즐겁기만 했다. 춤추고 노래 부르며 무인지경의 형편이 경상도 해안을 분탕질해 가면서 서쪽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날 옥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신출 하듯’ 나타난 대선단이 자신들의 뒤편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왜군 함대의 출현쯤으로 생각한 왜군들은 더욱 흥을 돋우어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것이 마치 자신들을 뒤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모든 배들이 누런색의 쌍돛(왜선들은 외돛이 원칙)을 달고 있었다.
“앗! 조센징 병선이다!”
누군가가 내지른 소리에 갑판 위는 졸지에 아수라판으로 변했다. 기겁을 한 왜군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넘어지고 부딪히며 달아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5척의 왜선으로는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했거니와 적 함대가 숲 속의 범처럼 숨어서 자신들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질겁할 만한 사건이었다.
조선 함대는 적을 놓칠세라 군악을 울리며 맹렬한 기세로 따라붙었다. 쫓기는 왜군들은 먼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합포만으로 배를 몰았다. 그리고는 해안에 닿자마자 배를 버리고 허둥지둥 산으로 기어올라갔고, 산 속 깊이 몸을 숨기고는 조선 함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선 함대의 선봉 선단은 배만 깨뜨리고 되돌아갔다. 왜군들은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깊은 숨을 몰아쉬던 왜군들은 박살이 나서 불타고 있는 배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배도 없이 기지까지 걸어서 돌아갈 일도 걱정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적 함대의 출현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모두 얼떨떨하기만 했다. 해전이 끝난 때는 밤 9시경, 처음 치른 야간 해전이었다.
조선 함대는 곧바로 합포만을 되돌아 나왔다. 역시 상륙한 왜군들을 뒤쫓지 않는 치고 빠지기식 전술이었다. 그리고는 힘들여 야간 항해로 남포항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 곳에도 인근에 또 다른 왜군부대나 왜선단이 있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바다에서 진을 치고 숙영했다. 장계에서 ‘바다에서 진을 쳤다’ 는 것은 적의 기습에 대비한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렇게 하면 이튿날 새벽 일찍 출항하기에도 좋다.
이순신은 언제든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어느 때건 신속히 기동할 수 있는 만반의 테세를 갖추고자 힘썼고 수병들을 거기에 맞춰 끊임없이 조련시켜 나갔다.
이 날도 해상에서만 머룰렀는데, 육지에서 쉰다면 머물렀던 흔적이 남게 되고 탈영병까지 생길 우려가 있었다. 이 역시 다방면을 고려한 이순신 식의 군영체계이다.
합포만으로 쫓겨 올라간 왜군들은 이튿날 아침이 되자 조선 함대의 소재를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선 함대는 보이지 않았다. ‘귀몰 현상’ 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의 신출귀몰의 항해술에 대해 ‘조선 함대가 특별히 속력이 빨랐다’ 든지 ‘거북선이 입으로 유황 연기를 내뿜었기 때문에 전체가 보이지 않아 신출귀몰했다’ 는 식의 해석이 많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싸울 때는 전 함대의 함형을 드러내서 왜군들을 두려워 떨게 했다. 그리고는 바람과 우레같이 몰아쳐서 격파한 다음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때문에 이순신 함대가 기동함대로 나서기만 하면 왜군 측에서는 시종일관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고, 마냥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초여드레 이른 아침에 진해 땅 고리량에 왜선이 머물러 있다는 기별을 듣고 곧 출발하였습니다. 섬들을 협공하고 수색하면서 저도(돌산면)를 지나 고성땅 적진포(통양군 광도면 적덕동)에 이르니 왜의 큰 배, 중간 배 아울러 13척이 바다 어귀에 정박했는데, 왜인들이 포구 안 여염집들을 분탕질한 뒤에 우리 군사들의 위세를 바라보고 겁내어 산으로 올라가므로, 낙안군수는 그 부통의 소속인 순천대장 유섭과 협력하여 왜의 큰 배 1척, 같은 부통장으로 그 고을에 사는 급제 박영남과 보인 김봉수 등이 협력하여 왜의 큰 배 1척, 보성군수가 왜의 큰 배 1척, 방답첨사가 왜의 큰 배 1척, 사도첨사가 왜의 큰 배 1척, 녹도만호가 왜의 큰 배 1척, 그의 부통장인 귀양살이하는 전봉사 주몽룡이 왜의 중간 배 1척, 신의 대솔군관 전봉사 이설, 송희립 등이 협력하여 왜의 큰 배 2척, 군관 이봉수가 왜의 큰 배 1척, 군관 별시위 송한련이 왜의 중간 배 1척 등을 모두 총(대포)을 쏘아 맞추어 깨뜨려 불태우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아침밥을 먹고 쉬게 하는데…
5월 8일, 바다에서 진을 치고 하룻밤을 보낸 조선 함대는 이날도 새벽 일찍 이동했다.
장계에 기록된 진해 땅은 오늘의 진해가 아니라 마산에서 통영시로 가는 진동리 쪽이다. 그 일대를 탐색선(협선과 포작선)들을 앞세워 수색케 했는데, 탐색선들이 적진포까지 이르렀을 때 하늘에는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왜군들이 아침부터 분탕질에 나섰던 것이다.
현장을 목격한 탐색선 하나가 급히 본대로 달려오면서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 이때 이순신은 또 ‘이겼다고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무겁게 하라!’ 는 깃발을 내걸었을 것이다.
왜군들이 이렇게 거리낌 없이 분탕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나름대로 펼쳐 둔 경계망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함대는 합포에서 왜선들을 격파한 후 즉시 야간 항해로 남포에 왔고, 이튿날에는 새벽 일찍 움직였으므로 왜군들의 경계망에 포착되지 않았다. 아무튼 100여 척에 달하는 대 함대가 이렇게 신출귀몰하듯 다니고 있었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적진포 근처에 사는 향화인 이신동이란 자가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는 산꼭대기에서 어린애를 업고 울부짖으면서 내려왔습니다. 이에 작은 배로 실어다가 신이 친히 왜적들의 하던 짓을 물어본 즉, “왜적들이 어제 이 포구에 와서 여염집에서 빼앗은 재물들을 소와 말로 실어다가 저희 배에 나누어 실었습니다. 그리고 초저녁에 배를 바다에 띄워 놓고 소를 잡아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피리 불며 날이 새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가만히 그 곡조를 들어보니 모두 우리나라의 곡조였습니다. 오늘 이른 아침에 반수는 배를 지키고 반수는 육지로 올라가 고성으로 향하였으며, 소인의 늙은 어미와 처자들은 적이 오자 서로를 잃어버려 간 곳을 모릅니다.” 하며 슬피 울면서 호소하므로, 신은 그 정상도 불쌍하고 또 포로가 될까 걱정스러워 데리고 가려 했으나 그 어미와 계집을 찾아보려고 따라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는 더욱 통분하여 서로 돌아보며 기운을 돋우어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곧 천성 · 가덕 · 부산 등지로 향하여 적선을 섬멸할 생각을 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적선이 대어 있는 그 지형이 좁고 얕아서 판옥선 같은 큰 전선으로는 싸우기가 매우 어렵고, 본도 우수사 이억기가 미처 오지 못하여 홀로 적진 속에 들어가기에는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로워 원균과 마주앉아 계획하며 좋은 방책을 얻어 국가의 치욕을 씻고자 하였는데…
본도 도사 최철견의 통첩이 뜻밖에 도착하여 비로소 상감께서 관서로 피난 가신 소식을 알게 되어 놀랍고 통분함이 망극하와 종일토록 서로 붙들고 간장이 찢어져 울음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터졌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제각기 돌아가기로 하여 초아흐레 정오 때 모든 전선을 거느리고 무사히 본영으로 돌아와 여러 장령들을 신칙하매 배들을 더 한층 독려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도록 타이르고 진을 파하였습니다.
5월8일. 적진포 해전을 끝내고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전라도사 최철견이 보낸 공문이 이순신의 군영에 도착했다(감사 이광은 육군을 거느리고 공주까지 북상했고, 이에 최철견이 공문을 보냈다).
‘신립이 지키던 충주 방어선마저 무너졌기로 전하께서는 북쪽으로 몽진을 떠나셨다’ 는 내용이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전자에 나와 있는 자들에게는 자결을 한다 해도 결코 씻을 수 없는 불충의 순간이기도 했다. 모두가 통곡을 했다. 임금은 하늘이며 어버이였다. 그 어버이가 2백년을 지켜온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갔다는 것은 부모 잃은 슬픔과도 같았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왜적의 무리들을 남김없이 섬멸하여 북상하는 적의 발길을 돌려놓고자 다짐했건만 이제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이 상태로는 정상적인 전투 수행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라감사를 비롯한 도내 책임자들과도 향후의 계획을 시급히 논의해야 했다.
한성이 떨어졌고 임금이 피난을 떠났다는 사실은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제 왜세는 전국에 창궐할 것이며, 그 세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 이라는 게 이순신의 생각이었다. 곧 귀항이 결정되어다.
적진포 해전이 끝난 5월 8일. 선조의 피난 소식을 접한 이순신, 원균 함대는 추후 다시 연락을 하기로 하고 각기 귀항을 서둘렀다.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터였기에 좌수영 함대의 귀항은 시끌벅적했을 법도 했지만 선조의 피난 소식으로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침통한 분위기 한 가운데에 이순신이 있었다.
병사들로서는 생사를 기약할 수 없었던 출동이었다. 때문에 이날의 귀항은 분명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는 그 어디에도 믿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함대만이 격랑의 바다 위를 표류하듯 떠 있을 뿐…
귀항길에 오른 함대는 순풍에 돛을 올리고서 어느덧 미조항을 돌아 평산포를 지나고 있었다. 멀리 어둠 너머로 어렴풋한 불빛들이 보였다. 여수항이었다. 다시 찾은 고향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낯익은 섬들이 어둠 속에서도 군사들의 귀항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들에게 지난 며칠 동안은 수년의 세월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차마 목이 메여 부르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그리운 얼굴들이 파도 소리와 함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돌아오는 내내 침통했던 분위기는 군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함대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쾌속선 편으로 전해지면서 여수항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 나온 백성들로 또 한 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의 눈에 멀리 어둠을 뚫고 횃불을 밝힌 병선들이 북과 군악을 앞세우고 항구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 몇 번을 확인해 봤지만 분명 좌수영 함대였다.
조선 육군들이 연거푸 패했고, 믿었던 임금마저 한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후였다. 그 마당에 적의 소굴을 스스로 찾아 들어간 함대가 무사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함대의 귀항은 가히 기적이라 할 만했다. 기적을 확인한 백성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오늘날에도 여수와 옛 5관 5진포 지방에 가면 해변가 백사장에서 그날의 귀항을 축하하는 오색의 잔치가 열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환영 차 준비한 잔칫상도 오색 음식과 오색 과일이며 14살 어린 신랑의 무사 귀항을 맞는 새색시의 옷 빛깔, 자랑스러운 조선 수군의 군기 높이 올린 황포돛, 그리고 하늘, 바다, 땅 모두가 오색빛깔이다.
여수시에서 매년 주최하고 있는 ‘여수 진남제’ 역시 기적 같은 그날의 귀항과 이순신 함대가 남해의 왜적들을 진압, 국난을 막았음을 기리기 위한 연례행사로 개최되고 있다.
무사히 귀항을 마친 이순신은 진을 파한 후 숙소로 돌아와 곧바로 목욕재개하고 선조에게 올릴 장계를 쓰기 시작했다. 총 3천 5백여 자로 쓰여진 방대한 분량의 장계였다.
장계의 이름은 ‘옥포파왜병장(옥포에서 왜군을 격파한 장계)’ 이다. 이 장계는 5월 10일 이순신의 군관 송한련과 진무(실무 책임자) 김대수가 배편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이 장계를 5월 23일경 평양에서 받아 보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통곡했다. 전란이 있은 후 처음 받아본 승첩의 장계였기 때문이다. 옥포해전에서의 승리에 고무된 조선 조정은 애초 만주로 파천하기로 했던 계획을 접고 의주에 머물 생각을 갖게 된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순천의 대장 유섭이 다시 빼앗은 우리나라 계집아이는 나이 겨우 4, 5세이니 그 근본이며 살던 곳을 알 길이 없고… 보성군수 김득광이 다시 빼앗은 소녀 1명은 나이가 좀 들었고, 머리를 깎아 왜인같이 되었습니다.
문초했던바, 임진년 5월 초이레 동래 응암리(동래읍 오장리)에 사는 백성 윤백련이요, 나이는 14세로서 그 아무 달 아무 날 아무 데서 왜적을 만나 누구누구와 한꺼번에 사로잡혔다가 당일 접전할 때(옥포해전 때) 도로 붙잡혀 나오게 된 연유와 왜적들의 하던 짓이며 제 근본과 신분 등을 모두 아뢰었습니다.
“아버지는 다대포 수군으로 왜란이 나자 생사를 알 수 없고, 어머니는 보통 사람의 딸로 이름은 모론인데 지금은 죽었으며, 친 · 외조부는 다 모르고, 기장(동래군 기장면) 사는 신선(초급군관의 직명) 김진명의 하인이 되었습니다. 날짜는 기억이 안 나나 지난 4월 왜적들이 부산포에 이르러 정박하매 주인 진명은 군령에 의하여 소인에게 군대 장비를 지우고 부산진으로 데리고 가는데, 마비 을이현(서면 범전동)에 이르러서 왜가 벌써 부산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서 소인을 데리고 바로 기장 고을로 달려가 성안에 진을 쳤다가 군졸들이 도망가므로 진명이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늙은 아버지와 친척들이 마침 이곳으로 피난나왔다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 그 고을 경계에 있는 운봉산(동래군 철마면) 속에 숨어서 8, 9일 동안 지내다가, 왜적들이 무수히 쳐들어와서 소인과 오빠 복룡 등이 먼저 사로잡혀 해가 질 무렵에 부산성으로 와서 밤을 지내고 나니, 오빠 복룡은 간 곳이 없고 소인은 배 밑창에 넣어두고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날짜는 기억 못하나 하루는 적선 30여 척이 김해부로 향하더니 반 넘어 상륙하여 머물며 도적질하기 5, 6일 뒤인 초엿새 상오 10시쯤 일제히 출발하여 율포(거제도 장목면 대금리)에 와서 밤을 지내고 초이레 새벽에 그곳에서 옥포 앞바다로 와서 정박했는데, 그날 접전할 때 왜인의 배 안으로 우리나라 탄환과 장편전이 비오듯 쏟아져 맞는 놈은 엎어져 피를 흘리며 왜인들이 아우성치고 거꾸러지며 어찌할 바를 몰라 물로 뛰어들고 산으로 오르는데, 소인은 겁 많은 사람으로 배 밑창에만 오래 있었으므로 다른 일들은 알지 못합니다.”고 하였습니다.
14세 소녀의 증언을 기록한 장계다. 이 장계에는 전쟁을 당한 한 소녀, 한 가정, 한 지역의 상황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윤백련은 신선 진명을 따라 부산성에 가던 중 이미 부산성이 함락되었고, 기장에서도 군사들이 도망가는 것을 목격하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 대목에서 부산과 동래성이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함락됨으로써 동원령을 받은 군사들마저 성안으로 들어가 싸우지 못했다는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윤백련이 여성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명의 하인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윤백련은 남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윤백련은 피난길에 가족을 만나 하인생활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산 속에 숨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왜군들에게 잡혀 다시 이산가족이 되었다. 그녀의 오빠는 징용병이 아니면 왜군들의 하인이 되었을 것이다.
윤백련이 왜국식 머리를 한 것으로 볼 때 왜장 도도 다카도라나 그 휘하 자수의 여인이 된 듯하다. 윤백련은 이렇게 자신의 기구했던 운명과 옥포만에 이르기까지 도도 함대가 지나온 지역, 그리고 조선 수군이 사용한 무기(살탄) 등에 대해서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이순신은 이 증언을 토대로 왜군 측의 상황을 읽어 나갔다. ‘옥포파왜병장’ 은 오늘날 옥포해전에 관해 전해지는 한·일 양국의 가장 권위 있는 자료로 남아있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그리고 위에서 말한 윤백련과 계집아이들은 순천 · 보성 등 관원들에게 각별히 보호하도록 다시 내어주었거니와, 흉악한 놈들의 해독이 이 지경에 이르러 벌써 살육도 많고 또 사로잡고 노략질도 많이 하여 이 지역 백성으로 고아 되지 아니한 자가 없을 뿐더러, 신이 이번에 연해안을 두루 돌 때 지나치는 산골마다 피난민이 없는 데가 없었습니다.
신의 배를 바라보고 아이나 늙은이나 메고 지고 서로 이끌며 흐느껴 울고 부르짖는 것이 다시 살길이나 얻은 것같이 하며, 혹은 적의 종적을 가르쳐 주는 자도 있었습니다. 보는 바에 참담하여 모두 싣고 가고 싶었으나, 그런 이들이 하도 많은 뿐만 아니라 전쟁하는 배에 사람들을 가득 싣고서는 운행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까 하여 “뒷날 돌아갈 때 데리고 갈 것이니 각각 잘 숨어서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여 사로잡히지 말도록 하라” 고 타이른 뒤에 적을 쫓아 멀리 떠났습니다.
그랬다가 문득 서쪽으로 행차히신 소식(선조의 피난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와 노를 재촉하여 돌아왔으나(여수로의 귀항) 애련한 정은 오히려 잊기 어렵사온데, 그들이 피난한 지 오랜 지라 가진 양식이 다되어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 도 감사에게 그들을 찾아보고 구호해 주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순신은 윤백련 등 구출해 온 백성들을 순천, 보성 등지로 데리고 가서 보호케 했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윤 소녀는 21세의 여인 되어 있었을 것이다. 윤 소녀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러나 이순신이 윤백련과 같은 소년 소녀들을 구해내서 양육시키고, 훗날 혼인까지 시켜준 사례는 무수히 많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그런데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와 관원들은 분격하지 않는 이가 없어 앞을 다투어 적에게 달려들어 함께 큰 승첩을 기약하여 전후 40여 척을 불태우며 왜의 머리를 벤 것은 다만 이 둘뿐이라 신이 섬멸하고 싶은 대로 다 못하여 더 한층 통분하온데, 접전할 때 헤아려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선은 빠르기가 나는 듯한데 우리 수군을 보고 미처 도망치지 못하게 되면 대부분 기슭으로 붙어서 고기 두룸 엮은 듯이 행선해 가다가 형세가 궁하면 육지로 올라 가버리므로 이번 길에 모조리 다 잡지 못해 간담이 찢어질 것 같아 칼을 어루만지며 탄식하였습니다.
왜선에 실렸던 왜의 물건은 모두 찾아내어 5칸 곳간에 채우고도 남았습니다. 나머지 사소한 물건들은 모두 다 적지 못 하옵고 그 중에서 전쟁에서 쓰일 만한 것만을 골라서 따로 그 종류를 모아 놓았으며, 김해부 관리 이관안과 분군성책과 각색 활과 화살 등을 모두 차례로 기록하였서니와, 왜선에 실렸던 우리가 먹을 만한 쌀 3백여 석은 여러 전선의 굶주린 격군과 사부들의 양식으로 나누어주고 의복과 무명 등의 물건도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어서 적을 쳐부수고 소득을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왜인이 붉고 검은 철갑과 여러 가지 쇠로 만든 투구와 철광대, 금관, 금우, 금삽, 우의, 우추, 라각 등과 같은 것들에 이르기까지 기이한 모양으로 사치하게 꾸며 귀신같고 짐승 같아서 보는 이로 놀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성을 깨뜨리는 모든 기계와 물건도 역시 괴상하옵니다.
군용 물건 중에 가장 긴요한 것 한 가지씩을 뽑아 봉해 올리는 바, 그 중에는 철갑, 총통 등의 물건과 낙안군수 신호가 벤 왜의 머리 하나는 왼쪽 귀를 도려서 궤에 넣고 봉합했는데, 접전할 때 공로를 세운 신의 군관 송한련과 진무 김대수 등에게 주어 올려 보내오며 나머지 올려 보낼 물건도 수량대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적선은 빠르기가 나는 듯하다’ 고 강조했는데, 왜선은 판자가 얇아서 날렵했다. 하지만 충돌전에는 약했다. 반면에 조선의 병선은 두터운 판자에 굵은 기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둔중했다. 그래서 망망대해에서는 왜선을 잡기가 어려웠겠고, 효과적인 해전을 위해서는 몰래 포구에 정박해 있는 왜선단에 접근, 학인진으로 탈출을 봉쇄한 후 공격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시종일관 이러한 이치를 따랐으므로 연전연승하게 된다.
‘귀신같고 짐승같이 꾸몄다’ 는 것은 백병전 때 자신의 눈동자의 움직임을 감추어 칼싸움에서 유리하게 하고 얼굴을 보호하는 가면이나 장식물들을 설명한 것이다.
낙안군수 신호는 머리 하나를 베었고 큰 배 1척을 깨뜨렸으며, 왜장의 칼, 갑옷, 의관 등을 노획했다. 이순신은 신호가 으뜸의 공을 세웠다고 여겼음인지 신호 장군의 공을 강조해 두었다.
5월 2일자 난중일기에는 신호 장군이 경상도 쪽으로의 출동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 신호가 이렇게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순신이 그 후 며칠간 신호를 특별히 설득하고 독려하면서 신호가 으뜸의 공을 세우도록 배려했던 것은 아닐까?
신호장군은 그 후로도 용감히 싸웠고, 정유재란 때는 남원성에서 장렬히 전사한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접전할 때 순천 대장선 사부 정병 이선지가 왼팔 한군데에 화살을 맞아 조금 상한 것밖에는 부상을 입은 군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수사 원균은 다만 전함 3척을 거느렸는바, 신의 여러 장수가 잡은 왜선을 활을 쏘면서까지 빼앗으려함에 두 사람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주장으로서 부하 단속을 못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뿐더러, 멀지 않은 바다에서 연일 접전하고 있는데도 그 도 소속 거제현령 김준민은 주장인 원균이 격문을 보내어 오라고 재촉해도 끝내 나타나지 아니하니 소행이 해괴스러운바 엎드려 조정의 처치를 바라나이다.
‘다만 전함 3척을 거느렸는바’ 라고 했는데, 5월 5일 ~ 6일에 양쪽 함대가 만날 때는 판옥선 4척이었다. 그 후에 병사와 격군을 갖추다 보니 3척만 참전한 것이 아닐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마당에 원균 휘하의 장수들이 아군 병사들에게 활까지 쏘면서 수급을 빼앗으려 했다니 참으로 놀랍다.《선조실록》을 보면, 거제현령 김준민은 그 무렵 경상감사 김수의 명령에 따라 육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균은 이를 모르고 계속 독촉을 했던 것 같다. 원균의 독촉 공문을 가져간 군사가 그러한 사실을 보고하고자 했으나 원균이 이곳저곳으로 도망을 다니느라 보고를 받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김준민의 거제읍 행정관아와 원균의 가배량 군영은 인접한 곳이었는데도 서로 간의 정보가 불통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관아와 군영이 따로 놀았기 때문에 원균의 가배량 분영조차도 행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반면에 이순신의 좌수영은 순천부의 행정적 지원을 받는 체계였는데, 순천부사 권준은 행정적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했으며, 제2차 출동 때는 순천부 소속 거북선을 거느리고 나와 중위장을 맡았다. 권준은 그 후로도 이순신의 오른팔 역할을 해냈다.
군영과 관아의 시각에서 보면 이순신과 원균 간에는 천양지차이가 있었다. 김준민은 이듬해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그리고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적을 막는 방책에 있어 수군이 나가 활동하지 않고 오로지 육전으로 성 지키는 방비에만 힘을 썼기 때문에 나라의 수백 년 내려온 터전이 하루아침에 적의 소굴로 변한 줄로 아옵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매 목이 매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적이 만일 뱃길로 본도를 침범해 온다면 신이 나가 해전으로써 죽음을 결단하고 담당하려니와…
세종대왕 때는 수군을 육성해서 대마도를 정벌했고, 거제도 등 남해안에는 세종 때 쌓은 성들의 유적이 오늘에까지 전해져 온다. 하지만 선조 무렵에는 조정이 ‘수전 맹’, ‘육전 맹’, ‘해운 맹’ 에 빠져 있었고, 때문에 부산포 앞바다, 한강·임진강·대동강에서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육지로 침범해 오면 본도 장사들이 전마 하나 없어 대응할 도리가 없사오니, 신의 생각으로는 순천 돌산도 백야곶, 흥양, 도양장의 목장 중에서 전쟁에 쓸만한 말들도 많은데 넉넉히 잡아내어 장수들에게 갈라주어 살찌게 먹이고 길들여서 전쟁에 쓴다면 승첩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이것은 신의 품계할 바가 아니오나 사태가 급하므로 관찰사 이광에게 감목관을 정해 보내게 하고 말 몰아내는 군사는 각 포구 분부군으로서 1~2일 기한으로 잡아내도록 하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냈습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조정에서 각 섬에 목장을 두어 말을 키우게 했다. 그런데 전쟁이 터졌는데도 말들은 목장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들이 방치되고 있을 때, 신립은 탄금대로 내려가면서 경기·충청도의 역마들을 모조리 끌어갔고, 이에 경상·전라·충청·경기도의 파발조직이 무너졌으며 이로 인한 조정과 지방의 당황과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 역시 군마 관리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육전맹의 조정 문신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순신이 1차 출동 때 당포에서 송미포(거제도 해금강 인근)까지 이동한 것을 보면 ‘왜 이렇게 외항 쪽으로 돌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더구나 오늘날에도 한산도에서 해금강 쪽으로의 항로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파도가 거칠기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이 멀고 험난한 길을 택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왜군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둘째, 송미포에서 하루를 쉰다면 격군들의 피로는 쉽게 풀릴 것이므로 이튿날 남풍을 업고 순풍을 받으며서 옥포와 가덕도 쪽으로 접근하고자 했었던 것 같다.
셋째, 견내량을 통과해서 가덕도 쪽으로 나아가려면 견내량이 문제였다. 소수의 왜선단이라도 잠복해 있었다면 조선 함대는 통과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조선 함대의 기습전이 사전에 노출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견내량 해협을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여수로 귀항할 때에는 견내량을 통해서 왔다. 거리도 가깝고 복병한 적도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간 기착지격인 당포항을 지나서 이번에는 직진 코스로 미조항을 지나왔다. 역시 이순신의 신출귀몰한 항해술이다.
이순신은 여수로 귀항하던 5월 9일, 그동안 기록해 둔 선상일지를 장계형으로 고쳐 썼다. 그리고 5월 10일 송한련과 김대수로 하여금 조정에 올리도록 했다. 그간 왜군 추격대에 쫓겨 울면서 피난을 떠난 임금과 비빈, 그리고 무너져 가는 조정의 모습을 연사하면서 이순신은 승전의 소식과 화약무기의 위력, 소·중형 선박의 활용방안 등을 서둘러 알리고 싶었다.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경기도의 바닷길이 왜군들에게 차단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도 했을 것이다.
“대첩 소식이오!” 하는 소리와 함께 전라좌수영의 깃발을 올린 산탄포로 무장한 협선 2척이 강화도 해안에 접어들자 포구에 몰려든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모두 만세를 불렀다. 강화도 연안에는 한강과 임진강 등지에서 피난 온 어선, 상선, 화물선 수백 척이 몰려들 만큼 많은 피난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감격에 겨워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고 밤이 새도록 모닥불을 피우며 군사들의 전쟁담에 귀를 기울였다. 백성들은 그동안 어느 때고 들이닥쳐 살육과 납치를 자행할 왜군들을 생각하며 가슴을 조여 왔는데, 해전에서의 승첩 소식을 듣고는 ‘우리도 의병으로 나서서 내 고장을 지키자!’ 며 결의를 다졌다.
강화도를 떠나 황해도에 접어든 송한련 일행은 연안성 근해에서 조선군을 만나 피난 조정이 평양에 있음을 전해 들었고, 육로와 수로 어느 쪽을 선택해서 평양성에 도착했다.
평양에 도착하기까지 송한련 일행이 직접 전쟁담을 나눈 사람은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그 결과 승첩의 해전 소식을 접한 해안지역에서는 의병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를 시발로 의병 봉기는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아래는 조정이 <옥포파왜병장>을 받아본 무렵의 《선조실록》이다.
※ 선조실록 (1592년 5월 23일) ※
5월 23일 상이 평양에 있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17일에 밤을 타고 임진강을 건넜다가 좌위장 이천은 적을 상류에서 만나 적에게 패배 당하였고, 유극량은 죽었으며, 신할도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적이 하류에서 군사를 숨겨가지고 강을 거넜다고 보고하였다.
임진강 방어전에 나섰던 조선군 1만 5천이 왜군의 유인전에 속아 강을 건너 추격전에 나섰다가 섬멸당한 전투에 대한 기록이다. 조선군이 격파되자 가토 기요마사의 2만 군은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3만 군은 황해도를 거쳐 평양성으로 향했다. 임진강 패전과 왜군의 임진강 돌파 소식을 들은 조정은 눈앞이 캄캄했는데, 그때 <옥포파왜병장>이 올라왔기에 모두가 통곡을 했다.
※ 선조실록 (1592년 5월 23일) ※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주사(수군)를 동원해서 타도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수급을 베었으며 빼앗겼던 물건을 도로 찾은 것이 매우 많았다. 비변사가 논상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가자하라고 명했다.
영의정 최흥원 : “금곡창의 것도 써야 하고, 아산창은 이제 운송해 오려 하고 있고, 흥원창에도 2천여 석이 있으나 운송하기가 어렵습니다. 삼강(한강, 용산강, 마포강)의 배를 많이 모아 두었는데 어제 윤담을 시켜 이것으로 운반하게 하였습니다.”
선조 : “적이 그 배를 빼앗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최흥원 : “피난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처자를 실었으므로 힘을 다해 막을 것입니다.”
좌의정 윤두수 : “어제 임진에서 얻은 지도를 보니 강화 교동 등지의 뱃길의 거리를 자세히 적어서 왜적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인심이 이러하니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선조 : “해로에 모두 파수가 있는가?”
최흥원 “경기 수사가 해야 하는데 수사가 도망갔으므로 다시 차임(새로 발령하여 보내는 것)했습니다.”
선조 : “경기 수사가 과연 도망했는가?”
최흥원 : “1천 5백 명을 데리고 도망하였다고 하나 그럴 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한준 : “소신도 길에서 들었는데 수사의 군사가 패하고 나서 강원도로 가는 길로 향했다고 했습니다.”
<옥포파왜병장>이 도착하자 조정은 그때서야 해로와 수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초보적인 단계의 논의를 시작했다. 좌의정 윤두수는 조선 사람이 해도를 그려서 왜적에게 준 것을 분개했는데 그 자체도 문제였지만 조정에 그같은 해도가 없었던 시대상이 더 큰 문제였다.
※ 선조실록 (1592년 5월 29일) ※
비변사 : 경강의 배들이 피난을 나와 외양에 모여 있는 것이 무려 수백여 척에 이릅니다. 또 경성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지금 강화 · 인천 · 남양 · 교동 등처에 많이 들어가 있으니 이들을 모집한다면 건장한 병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피난한 백성들의 대규모 선단이 파악되었고, 서해 해로가 열리고 있으며, 조정의 지휘체계도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6월 1일부터 고니시와 구로다군이 대동강 건너편에 모습을 드러내자 문신으로 구성된 선조의 조정은 핏빛을 잃었다. 이때 평양성의 수비군은 4천 명, 왜군은 3만이었다.
피아간의 직선거리는 약 1km. 만약 왜군이 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하면 이전의 부산성과 동래성처럼 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왕과 비빈들이 미리 성을 빠져 나온다 해도 왜군 기마대에게 하루이틀이면 붙들릴 수 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위기속에서도 선조는 6월 11일까지 평양성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전라·충청·경상도의 근왕군 5만이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고(6월 3일 대패한다), 둘째, 평양성을 잃으면 더이상 갈 곳이 없었으며 셋째, 명나라가 구원군을 보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기대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선조는 “의주?” “강계?” “아니면 설한령을 넘어 강계?” 하면서 무작정 평양성을 빠져나왔다. 참으로 아슬아슬했던 조선왕조의 역사이다.
그리고 6월 14일 왜군이 대동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윤두수와 이원익 등 사령관들은 조선 제일의 거성인 평양성과 왜군이 6개월간 먹을 10만석의 군량미를 버리고 도망을 갔다. 이에 평양성에 입성한 왜군들은 군량미로 술과 떡을 빚어 승전 잔치를 벌였으며 어떤 왜군들은 평양 기생의 치마저고리를 입고서 왜식 춤을 추었다.
● 이순신과 여수
임진왜란 전적지는 역사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체험학습의 장이다. 이 같은 체험학습에 《난중일기》와 《임진장초》는 좋은 안내서이며, 해전이 펼쳐진 전적지들은 오늘날에도 소중한 에피소드들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옥포에는 매년 옥포대첩 기념제전 행사를 비롯해서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대첩기념관, 충무공 사당, 옥포정 등 해전을 기념하는 명소들도 있는데, 다음의 시는 옥포정에 전시되어 있는 노산 이은상의 <옥포야 작은 마을>이라는 시다.
한 바다 외로운 섬 옥포야 작은 마을, 고난의 역사 위에 네 이름 빛나도다.
우리 님 첫 번 승첩이 바로 여기더니라.
창파 굽이굽이 날으는 저 갈매기, 승전고 북소리에 상기도 춤을 추나
우리도 자손 만대에 님을 기리오리라.
옥포해전을 기념해서 해방 후 조선소를 지었고, 그 후 (주)대우에서 인수하여 세계화시켜 온 것이 오늘의 대우조선이다. 그러자 거제도는 세계적인 조선업공단이 되었고, 삼성조선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음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이곳에 조선소 건설을 준비할 당시 조선소 건설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영국의 기술심사 및 자문회사인 애플 도어사의 롱바톰 회장과 기진 첫 만남에서의 대화내용을 그의 자서전에서 인용한 것이다.
※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 정주영 ※
“아직 선주도 나타나지 않고 한국의 상환능력이나 잠재력 자체에 의문이 많아 곤란하군요.”
현대의 능력으로는 이 사업이 무모하다는 평가인 듯했다. 나는 맥이 쭉 빠졌다.
지금 같으면 주요 인사와 면담할 때 그에 앞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미리 준비도 하고 했을 테지만, 그때는 그럴 여유도 경험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내 바지주머니 속에 있는 500원짜리 지폐가 생각났다. 나는 재빨리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500원짜리 한 장을 테이블 위에 펴놓았다.
“보십시오. 우리는 300년이나 영국을 앞서 있었소. 다만 우리는 쇄국정책 때문에 산업화가 늦어졌고 그동안 아이디어가 녹술었을 뿐이오. 한 번 시작한다면 몇 백 년 동안 잠자던 잠재력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내 말에 롱바톰 회장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는 한국을 직접 돌아보고 현대건설의 발전소 시공 능력과 정유공장 건설 등 기계토목 공사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대형 조선소를 지어 큰 배를 건조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바클리은행에 제출해 주었고, 차관 제공이 걱정됐던 71년 9월 바클리은행과의 재접촉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영국인들은 거북선과 이순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지금도 해양대국의 국민들답게 바다 이야기만 나오면 신바람이 나는 민족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 희망이 없어 보였던 첫 만남의 자리도 사실 거북선과 충무공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일순간 옛 친구를 만난 듯한 신바람 나는 대화 분위기로 바뀌었고, 차관 교섭은 성공했다. 한강의 기적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오늘날 우리의 조선공업은 불과 30년만에 세계 제1위의 위치를 고수하게 되었다.
아래는 매년 5월 7일에 열리는 ‘여수 진남제’ 때 발표된 여수시립국악단(단장 김영옥)의 판소리 가사이다.
※ 여수라 충절의 땅! ※
방답진 쇠소리는 거북선을 만드신가, 망마산 선소에는 판옥선이 당당하다.
강강술레야! 강강술레야!
거북선 대포소리 혼비백산 놀란 왜군, 불에 타고 물에 빠져 귀신들이 되었구나.
강강술레야! 강강술레야!
대포소리 높은 곳에 군악소리 높았고, 군악소리 높은 곳에 우리 수군 함성소리.
강강술레야! 강강술레야!
보리밥 김밥 말고 생선회 가득 뜨고, 온갖 젓갈 버무리고 조개미역 국을 끓여
정 나누며 해전하고 우국청절 다했도다.
강강술레야! 강강술레야!
장하도다 여수 본영 빛나도다 오관오진
장하도다 우리 수군 빛나도다 우리 조상
여수라 충절의 땅 천년만세 이어가세
여수라 충절의 땅 천대만대 이어가세
강강술레야! 강강술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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