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해전기록 - 1장 - 임진왜란(1592.4.13) 발발

구름위 2013. 5. 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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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대륙 속지화를 위해 현해탄을 건너온 왜군 선봉대 제1진이 부산에 상륙했다. 상륙한 왜군들은 부산성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상주→충주를 거쳐 한성을 향해 북상했다. 뒤이어 상륙한 왜군 후속 부대들과 대마도 및 나고야에 비상대기하고 있던 병력을 합하면 총 30만 대군이었는데 이는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 동원이었고, 이순신은 이 같은 위기 속에서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사생결단의 해전을 시작했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거북선을 진수시키고 대포를 쏘아 보았다. 이는 그가 전라좌수사로 부임해온 지 1년 만에 거둔 성과중 하나였다.

 

4월 15일에는 거북선 관계 보고서를 전주에 있는 전라감영에 보냈다. 그리고 그날 오후 경상우수사 원균(1540~1597)으로부터 ‘4월 13일, 왜선 90여 척이 부산포에 와 닿았는데 해마다 오는 세견선과는 달라 보인다’는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렇게 생각한 이순신은 즉각 여수 본영과 관내 10개 수군 기지(순천 · 광양 · 보성 · 흥양 · 낙안 등 다섯 고을 소속 기지와 방답 · 사도 · 여도 · 녹도 · 발포 등 다섯 개 포구 소속 기지)에 “별도의 영이 있을 때까지 기지별로 굳게 지키라!” 는 명령과 함께 비상동원령을 내렸다.

 

● 임진왜란 발발

 

역사적으로 볼 때 왜적들은 부산 쪽을 공격한 후에는 전라도 쪽으로 몰려오는 것이 통례였다. 또 원균이 보내온 공문의 내용들도 규정에 따라 ‘90여 척’ 등 왜선단이 부산포를 침공한 규모 정도를 알려온 통보성 공문이었다.

 

즉, 향후 왜군의 진로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경상도 쪽으로 출동해 달라는 내용은 더더욱 없었다.

 

당시는 타도 간의 출동 여부는 조정에서 결정할 사항이었으므로 지방의 수사급 벼슬아치들 간에 구원을 요청하고 또 거기에 응하는 군령체계가 아니었다. 이 같은 상황이었으므로 이순신 수사는 본영과 관내 10개 수군기지에 “비상소집을 해서 각자 기지를 굳게 지키고 있다가 만약에 별도의 명령이 있으면 여수로 달려오라!”고 전령을 내렸는데, 이는 자체 방어전의 개념이다. 그래서 이때 이순신이 조정에 올려보낸 장계의 이름도 ‘왜란에 대비하는 장계’ 이다.

 

같은 날 또 공문이 왔는데 ‘왜선단 150여 척이 또 부산에 와 닿았다’ 는 내용이었다.

 

이튿날인 4월 16일에는 원균 수사가 ‘400여 척의 왜선단이 부산에 와 닿았다’ 는 공문을 다시 보내 왔다. 이렇게 원균으로부터 보내진 공문은 모두 세 차례로 ‘90여 척’, ‘150여 척’, ‘400여 척’ 등 왜선단의 규모를 알려온 것들이었다.

 

같은 날 진주에 있는 경상감사(관찰사) 김수(1547~1615)로부터 ‘이 달 13일에 왜선 4백여 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와 닿았는데, 적의 형세가 여기에까지 이르고 보니 극히 걱정스러운바, 또 (앞으로의 상황을) 차차 전달하겠으며 사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라는 내용의 공문이 왔다. 김수 감사의 공문 역시 통보성 공문이며 그 자신도 자체 방어 준비에 임하고 있었다.

 

4월 20일이 되자 경상감사로부터 또 공문이 왔는데 내용인 즉, ‘전라 수군이 경상도로 구원 나오도록 조정에 장계했고, 그 내용을 전라감사와 이순신 수사에게 알리는 바이니 차질 없이 준비해 달라’ 는 당부였다.

 

※ 충무공의 장계 ※
적의 형세가 크게 벌어져 부산 · 동래 · 양산이 벌써 함락되고 육지 안으로 향하므로 본도 우수사에게 수군을 모두 이끌고 적선을 막기 위하여 바다로 나가도록 이미 명령했기 때문에 경상우도 여러 진에는 전선이 한 척도 없어 만약 우도에 변고가 생기면 즉시 와서 구원해야 한다는 일로 장계를 올리고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니, 이 뜻으로 감 · 병사들에게 의논을 통하여 시행케 하라!··· 하였습니다.

 

공문을 읽은 이순신은 놀라고 분한 마음을 쉽게 가누지 못했다. 왜적의 침입도 분한 일이지만 조선의 거성들이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고 분했다.

 

예로부터 성이란 적이 몰려오면 즉시 나아가 물리쳐야 하고, 큰 적이 쳐들어오면 죽기로 버팀으로써 후방에 제 2, 제 3의 방어진을 구축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 제1의 임무였다. 그럼에도 최전선의 주성들이 그 같은 역할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 전쟁은 시작부터 크게 잘못되고 있다’ 는 불길한 에감이 이순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시 출동을 위해서는 ‘경상우수사→경상감사→조정→전라감사→전라 좌·우수사’ 와 같은 절차에 의해서 조정과 전라감영의 승인과 지시가 필요했다. 오늘날 소개된 관련 저술들에서는 ‘원균이 직접 이순신에게 출병을 요청했다’ 는 식의 설명이 많다. 그러나 변방의 수사들끼리의 협의로 출병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두 잘못된 해설이다.

 

공문을 받아든 이순신은 관내 수군 기지대장들에게 병력 소집, 진지 구축, 병선의 수리와 화약무기 탑재 등 만반의 출전 태세를 서두르도록 독려했다. 또한 향후 경상도 쪽으로 구원 나가라는 조정의 명령에 대비해 관내 기지 함대들에게 “4월 29일까지 함대를 이끌고 본영에 집결하라!” 고 명령했다.

 

경상감사의 4월 20일자 공문이 온 후, 4월 26일과 27일 조정으로부터 출동명령서가 잇달아 내려왔다.

 

※ 원균과 합세하여 적을 치라고 명령하는 유서 (1592년 4월 27일자) ※
왜적이 이미 부산 · 동래를 함몰하고 또 밀양으로 들어왔다는 바, 이제 경상우수사 원균의 장계를 본즉, 여러 포구의 수군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 형세를 뽐내어 적을 덮쳐 격멸할 계획을 세운다 하니 이는 좋은 기회라 그 뒤를 따라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네가 원균과 합세하여 적의 배를 쳐부수기만 한다면 적은 이미 평정시킨 것과 다름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선전관을 보내어 달려가 이르도록 하는 것이니 너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독촉하여 거느리고 급히 나가 기회를 잃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이라 혹시 무슨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이에 구애되지는 말라.

 

왜군들이 ‘밀양으로 들어왔다’ 고 했지만 이 무렵은 신립 장군의 탄금대 패전 하루 전이다.

 

‘원균의 장계를 본 즉, 여러 포구의 수군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라고 되어 있는 것은 원균의 구원 요청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갔음을 말하고 ‘그 뒤를 따라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 한 것은 조정이 이순신에게 내린 출동명령 격이다.

 

‘그러나 천리 밖의 일이라 뜻밖의 일이 있을 것··· 이에 구애되지는 말라’ 고 한 것은 현지의 장수들인 전라감사, 병마사, 우수사, 그리고 토호세력(유림과 명문 가문 등. 고경명, 최경회 등도 이같은 출신이다)들과 충분히 논의해 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 이순신과 전라좌수군

 

조정으로부터 출동명령이 하달된 지 이틀 뒤인 4월 29일. 전라좌수영 수뇌부는 조정에서 내려온 명령서에서 “무슨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이에 구애되지는 말라” 는 부분을 두고 진해루(현재 진남관 앞 망해루 터에 있던 누각)에서 최종적인 논의를 가졌다.

 

지키자는 쪽에서는 ‘기지를 비운 사이 적이 기습을 해온다면 전라도마저 적에게 내주게 될 수 있으며, 그것은 함대 본연의 임무에 위배된다’ 는 주장을 폈다. 반면에, 출동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적이 남해안 일대를 거점화하기 이전에 소탕해야만 전라도를 지켜낼 수 있다’ 고 맞섰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회의는 정오가 될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급박한 전시상황 하에서 이순신은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유를 들어 설명하고 출동을 선택하게 된다.

 

“첫째, 지키고만 있다가는 조만간 경상도 쪽에 주둔해 있는 왜의 수군이 한꺼번에 공격해 올 것이므로 절대 불리한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적은 20~30척 단위의 기동함대로 편성되어 있다. 왜적을 해상에서 각개로 격파하면서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이다. 둘째, 왜군의 주력은 이미 문경새재(조령)를 넘어 한성을 향해 북상하고 있다. 만약 당장이라도 한성이 함락되고 만다면 앉아서 이곳을 지키고 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 이상 출전의 불가함을 말하지 말라.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며, 이후부터 소속 부대의 군기를 더욱 엄히 세우라!”

 

그렇게 해서 이날 회의에서는 ‘출동’ 이 결정되었다. 중지가 결집되자 곧이어 출병에 따른 기지별 준비 상황과 해전을 위한 세부 작전계획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결정된 사항들은 전라감사 이광(1541~1607)과 전라우수사 이억기(1561~1597)에게 보내졌는데, 공문의 내용은 ‘북상 중인 적을 교란하고 서해안 방어와 부산 근해의 적 수군을 소탕하기 위해 4월 30일, 이억기 함대가 오는 대로 함께 출동할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 《난중일기》 1592년 5월 2일 ※
정오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말인가.

 

옛날에는 변변한 지도도 등대도 없었다. 특히 다도해에는 섬과 암초가 많고, 안개와 비, 그리고 강풍이 부는 날이 많았다. 때문에 해역을 여러 개로 나누고 구역마다 세습으로 이어오는 수로 뱃사공 겸 안내인들을 두었다.

 

더구나 그때는 전시였으므로 야간 항해도 해야 했고, 또 왜군 함대가 어디에 잠복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출동일인 4월 29일, 경상우수영 관내인 남해도에 군관 송한련 등을 보내 해로 안내를 요청토록 했다. 그런데 송한련 일행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현령, 미조항 · 상주포 · 곡포 · 평산포 등의 관리와 군사, 그리고 백성들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모두 도망가버렸고, 무기 등 온갖 물자들도 죄다 흩어져버려 남은 것이라고는 없다.” 고 알려 왔다.

 

‘왜군들은 아직 부산 근해에 머물러 있을 텐데 어떻게 멀리 떨어져 있는 남해도의 고을들이 텅 비게 되었을까?’

 

이순신을 비롯한 군사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경상우수영 관내는 낙동강 하구에서부터 남해도에 이르기까지 3도 수영 관내 중 가장 넓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원균 함대에게 병선과 무기, 군량을 공급해야 할 후방 고을들의 형편이 이와 같다면 사실상 원균의 함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함대와의 합동작전에 과연 기대할 것이 있었을까? 경상우수영 함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해상기지로서는 전라좌수영이 최전선에 놓여지게 됨을 의미했다. 게다가 4월 30일까지 여수에서 합류해 경상도 쪽으로 출동하기로 되어 있던 전라우수영 함대는 5월 1일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출동준비에 차질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와 당혹감이 전라좌수영 수뇌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경상우수영 관내가 온통 비어 있고 전라우수영 함대도 당장 출동을 못할 형편이라면 전라좌수영 함대는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 이었다.

 

조정에서는 왜란이 터지자 장군 이일(1538~1601)을 순변사로 삼아 군사를 소집케 했다. 그러나 병적상 기록되어 잇는 병력은 3만 명 수준이었지만 막상 일이 닥쳐 동원된 병력은 노약자 등을 합쳐 300명에 불과했다.

 

이에 이일은 며칠간이나 출발을 늦추었고, 더 이상 출발을 지체할 수 없다고 보고는 서둘러 상주로 내려갔다. 상주로 내려가는  도중에 모은 군사의 수는 모두 800여 명이었다.

 

이렇게 서둘러 상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천험의 요새로 일컫는 조령을 사수하기 위해서였다. 왜군이 조령을 넘는다면 한성까지는 이렇다 할 험로가 없기 때문에 조선의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조령만은 지켜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급모된 군대는 평소에 훈련 한 번 받지 않은 오합지졸들이었다. 때문에 상주 인근의 야산에서 기초훈련부터 시켜야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왜의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1600)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되고 말았다.

 

● 맹장 신립, 탄금대에서 참패하다

 

애초부터 이일의 군대에 큰 기대를 갖지 못한 조정은 여진족 토벌에 공이 높았던 명장 신립(1546~1592)을 3도 도순변사로 임명하고 제2차 저지작전을 지시했다.

 

신립은 경기와 충청도 지역의 군졸과 역졸들을 모아 3천의 기마대를 조직했고, 이에 신립군은 보병을 합쳐 8천 명이 되었다. 그러나 신립이 군사를 이끌고 충주성으로 향하던 도중 ‘왜군이 조령을 넘고 있으며, 곧 충주에 육박할 것’ 이라는 미확인 정보가 들어왔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충주성에 입성하기 전에 왜군과 맞서게 될 것을 우려한 신립은 말머리를 돌려 곧바로 탄금대 앞 벌판으로 향했다.

 

일부 장수들이 ‘조령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적을 막는 것이 더 좋겠다’ 고 주장했건만, 신립은 ‘산 속에서는 기병전술을 활용할 수 없으며, 적이 조령을 넘었다면 오히려 기습에 허를 찔려 낭패를 볼 수 있다’ 는 이유를 들어 탄금대행을 강행했다. 그리고는 남한강 유역에 배수진을 치고 적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그 시각, 연전연승으로 한껏 기세가 올라 있던 고니시군은 질풍의 북상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조령을 넘었다.

 

조령을 넘는 동안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나는 새도 쉬어 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문경새재’. 햇볕조차 통과되지 않는 울창한 원시림과 기암계곡들. 그 사이로 조선의 군대가 어디에 얼마나 숨어서 자신들을 노리고 있을지, 또 언제 어떻게 기습전을 전개해 올지를 생각하며 조바심을 했다. 그런데 조선군은 조령의 중요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았으므로 왜군들로서는 참으로 이상할 따름이었다. 굳이 병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곳이 방어를 위한 천험의 요새라는 것쯤은 상식이련만 자신들이 어떻게 이 고산준령을 싸우지 않고 오를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조센징 군대들은 겁쟁이가 아니면 바보천치가 아닌가!”

 

“놈들은 이미 우리와 싸우기를 포기한 모양이다!”

 

놀라움 반 기쁨 반, 흥분한 왜장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진중에서는 흥에 겨웠는지 여기저기서 북과 피리, 그리고 노랫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한바탕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고니시는 이 모든 것이 숨 돌릴 새도 없이 쾌속 진군한 결과이며, 자신의 북상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조선으로의 출병이 공포된 이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6~1598)는 줄곧 ‘조령 돌파를 전광석화와 같이 끝내는 것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요체’ 임을 강조하였고, 이에 고니시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1562~1611), 구로다 나가마사(흑전장정 1568~1623) 등 선봉군 대장들의 경쟁심을 한껏 부추긴 바 있었다.

 

조선 출병이 있기 며칠 전, 히데요시는 이를 재차 확인해 두려는 듯 다음과 같이 주지시킨 바 있었다.

 

“조선 정벌은 과연 너희들 두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야. 물론 많은 난관을 깨쳐야 할 것이지만 그 영광 또한 크고 값지지 않겠느냐? 내 그간 일러 두었듯이, 부산 상륙에서부터 한성 공격까지는 여지없이 몰아붙여라. 선봉 제1군(고니시 군)은 제2군(가토 군)이 부산에 상륙하기 전까지 부산을 장악하고, 조령 돌파를 병행하라. 2군 역시 상륙과 동시에 조령을 넘어야 할 것이다. 한성을 함락하고 나면 내가 직접 건너가 그 공을 치하할 것이며…”

 

이같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조선 측이 응전태세를 갖추기 이전에 신속히 이동해야 했다. 때문에 발이 부르트도록 쉬지 않고 달리고 달렸다. 그리고 조령을 넘었다. 이제 충주성까지 손에 넣는다면 한성 공략을 위한 준비는 끝나는 셈이었다. 남은 것은 부산 상륙을 마치고 조령과 추풍령을 넘어 한성으로 내달릴 다른 왜군 선봉부대들과의 경합뿐이었다.

 

거칠 것 없는 기세로 조령을 넘어 충주로 향하던 고니시는 앞서 떠난 정찰대로부터 “충주성이 비어 있다!” 는 믿기 어려운 보고를 받았다. 조선군이 자신들의 위세에 눌려 성을 버리고 허겁지겁 줄행랑을 쳤을 것이라고 생각한 왜군들은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령은 운이 좋아 무사히 통과했다지만, 적어도 충주성을 놓고는 한바탕 공방전을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충주성마저 걸어서 들어가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충주는 용인과 여주를 연결하는, 말하자면 한성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었고, 충주성은 이 관문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뜻밖의 희소식을 접한 고니시와 그의 참모들은 하늘이 자신들을 돕고 있으며, 이쯤 되면 한성 함락의 주역은 당연히 자신들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일등 가신이자 전국 다이묘(영지를 소유한 영주)들 중 최고의 지장으로 이름을 날린 고니시에게 있어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는 즉각 제장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충주성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절대 긴장을 풀지 말 것과 기마대를 주축으로 한 선발대를 조직, “속히 성을 접수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적의 기습과 뒤늦게 파견되었을 수도 있는 조선 증원군에게 성을 내주게 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그리고 선발대에 이어 충주성에 무혈입성한 고니시는 정찰대로부터 또 한 차례 보고를 받았다. 그 내용은 “기병을 주축으로 한 1만여 명의 조선군이 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 우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세가 등등해져 있던 왜장들은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너나 할것 없이 “출전의 명을 내려 달라!” 며 호기를 부렸다. 그 중에는 조선 땅을 밟은 이래 전쟁다운 전쟁 한 번 해보지 못해 안달이 난 자들도 있었고, 한성 함락을 목전에 두고 이번이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자들도 있었다.

 

왜장들에게 조선군의 수가 많고 적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개전 첫날, 숫한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어 온 이 역전의 용장들도 부산성 공격을 앞두고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가슴을 졸려야 했다.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살아온 무장들이었지만, 공성전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이들로서는 결코 머나먼 이국땅에 뼈를 묻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공성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성은 반나절도 안 되어 함락되었다.

 

조총 소리에 놀란 조선의 병사들이 항전은커녕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달아나던 그 모습을 왜장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동래성과 상주 전투에서도 왜장들이 기억하는 조선군의 모습은 오합지졸의 겁쟁이들이었으며, 그들을 상대로 한다면 누구라도 일당백의 용사가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마저 생겨날 정도였다.

 

더구나 충주의 조선군은 벌판에, 그것도 강을 등지고 진을 쳤다하므로 또 한 번의 대승을 노려볼 만했다. 도한 이번에야말로 그간 갈고 닦은 기량과 전술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기대감과 자신감이 그동안 쌓였던 피로를 한껏 덜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고니시는 장수들의 호들갑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 애써 무거운 표정을 지어 가며 꾸짖듯이 타일렀다.

 

“이미 날이 저물었고 모두가 지쳤다. 공격은 내일 동이 트는 대로 시작할 것이다. 내일 대승을 거둔다고 하더라도 경거망동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한성에 닿을 때까지 밤낮 없이 진국할 것인즉…”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왜장 하나가 매우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놈들은 허허벌판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강을 등지고 있으니 야습을 한다면 일거에 무찌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고니시가 눈을 부라리며 좌중을 향해 호통을 쳤다.

 

“적이 성을 마다하고 배수진을 친 것은 필시 죽기를 각오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공명심으로 인해 네 수하들을 얼마나 잃고 싶은 게냐! 다이코님께서는 ‘불필요한 희생을 원치 않는다’ 하셨다. 너의 기상은 갸륵하나 싸움에는 항시 보다 쉽게 이기는 방법이 있느니라!”

 

고니시의 머릿속에는 이미 전투에 대한 작전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의 작전은 조선군이 넓은 지역에 진을 쳤다는 점과 기병이 주축이 된 군대라는 점을 참작해 구상한 것이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아마도 조선군은 기병 돌격전과 단접병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판단이 서자 고니시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흘렀다.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번 전투는 아주 손쉽게 끝낼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즉 ‘보다 쉽게 이기는 방법’ 을 모색했음인데, 그 해답은 조총에 있었다.

 

4월 28일. 동이 트기 무섭게 1만 6천의 고니시군은 성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탄금대 앞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 대행렬이었다.

 

그러나 이들 병력 중 신립군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수천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조선군을 기만 · 유인해서 일시에 섬멸코자 하는 고니시의 계략이 숨겨져 있었다.

 

고니시는 자신의 대장기를 앞세운 일단의 군대를 신립군 정면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는 조총으로 무장한 3천의 병력과 주력군을 후방에 매복시켰다. 조선군을 자신들이 매복한 곳까지 유인해 낸다면 통쾌한 승리가 예상되는 바였다.

 

한편, 이같은 계략을 눈치채지 못한 신립은 기마전에 능한 야전의 명수답게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립으로서는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전투였다. 또한 패한다면 한성이 고립무원에 빠질 것이었지만 결코 가망 없는 싸움이라고는 단정 짓지 않았다. 왜군의 수가 더 많다고는 하나 왜의 주력은 기병이 아닌 보병이었고, 보병으로는 기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라고 믿었다. 신립은 대륙의 기마전을 알 리 없는 섬 오랑캐들에게 노도와 같은 돌격전을 감행한다면 초전에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벌어지자 신립의 판단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왜의 보병이 당시 지구촌 최첨단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을 너무 소홀히 여겼던 것이다.

 

왜군의 등장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무렵, 드디어 수천의 왜군들이 창칼을 번뜩이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신립군 전방 100여 미터 지점까지 육박해온 왜군들은 더 이상 전진하지 않은 채 그곳에 진형을 갖추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각각 수백여 명으로 구성된 조총수, 궁수, 창검수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싸울 테면 싸워 보자는 듯한 기세로 백여 명의 검수들이 진영 앞으로 나와 칼을 휘두르고 야유를 퍼부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의 위용을 보고는 선뜻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한 신립은 전군에 ‘공격 준비령’ 을 하달했다. ‘적의 유인책일 수도 있다’ 는 장수들의 견해도 있었지만 신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십 명의 조총수들이 이따금씩 조총 사격을 해대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신립은 막연히 두려웠던 이전의 감정들을 떨쳐내고 서서히 자신감을 되찾고 있었다. 이것이 설사 왜군들의 유인책이라 하더라도 하등 문제될 것은 없어 보였다.

 

‘도대체 저따위 나무토막 같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겁이라도 집어먹고 달아나주기를 바라고 있음인가?’

 

신립은 그리 신통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조총을 주력 병기로 삼고 있는 왜군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소리만 요란한 조총에 속아 무릎꿇었을 우군 부대들을 생각하니 울컥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신립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왜군 측의 의도된 유인책은 서서히 그 결실을 거둬가고 있었다. 신립군은 왜군들의 위협사격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것이다. 총포성이 울릴 때마다 군마들이 놀라 몸을 떨었고, 기마병사들의 표정에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간을 끌수록 유리할 게 없다고 판단한 신립은 드디어 장검을 빼어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이내 공격명령이 떨어졌고, 선두에 포진한 기마대 1진이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적진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곧바로 2차, 3차로 돌격전을 감행할 후속 기마대와 보병부대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선봉대를 응원하며 그 빈자를 채웠다.

 

신립의 기마대는 과연 노도와 같은 기세로 내달렸다. 신립군이 움직이자 신립군 정면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들은 한 차례 위협사격을 가한 뒤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후퇴를 시작했고, 그 광경을 지켜본 신립은 적이 퇴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신립의 눈에 비친 왜군들의 모습은 마치 꼬리를 내린 하룻강아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됐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왜군의 퇴각에 고무된 신립은 승리를 예감했다. 마침내 신립의 입에서 “총공격!” 의 일성이 터져 나왔다.

 

신립의 군대는 달아나는 왜군들의 무리를 쫓아 왜의 주력이 매복해 있는 곳까지 진격해 들어갔고, 그때를 기다려 온 왜군 조총부대들은 좌우와 전방에서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3교대 밀집형 조준사격이었다.

 

그 순간, 수천에 달하는 조총들이 거대한 화망을 형성하며 탄환을 쏟아냈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총포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자 사람이고 말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첫 탄에 맞지 않은 기병들은 2차 3차로 이어진 사격에 여지없이 말에서 굴러 떨어졌으며 그 뒤를 좇아 맹렬한 기세로 돌격해 들어간 후속 기마대와 보병들도 모두 같은 운명이 되었다. 야전의 용장 신립으로서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전투였다.

 

넋이 나간 조선의 군사들은 퇴각령이 내려지기도 전에 후퇴하기 시작했고, 그 뒤를 범 같은 기세로 쫓아 붙은 왜군들의 창칼에 무참히 도륙되었다. 신립 역시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탄금대 전투는 왜군의 조총이 부산 · 동래성 전투에 이어 다시 한번 맹위를 떨친 전투였다. 반면에, 조선군으로서는 조총의 위력을 얕잡아 보고 무모한 돌격전을 고집한 끝에 당한 참패였다.

 

사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강이라 할 만큼 막강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전까지 전장의 주역으로 군림해온 기마대의 시대는 조총의 등장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이것은 세계사적 흐름이었다.

 

피의 전국시대를 거치며 검의 이치를 갈고 닦은 사무라이들에게 조총이라는 신병기는 호랑이가 날개를 얻은 격이었다.게다가 일본은 조총에 의한 정교한 공격과 방어 전술을 소프트웨어 격으로 개발해서 실전에 활용해온 터였다.

 

이름하여 ‘3교대 밀집사격법’, ‘시스템 방어전’ 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술은 일본 통일의 초석을 다진 오다 노부나가(1534~1582)에 의해 창안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일본을 통일했다.

 

조총은 임진왜란 50년 전인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전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내에 보편화된 병기였다. 총구로 화약과 총탄을 밀어 넣고 뒤쪽에 도화선 심지를 심는다. 화승은 약 50cm 길이의 30분간 모기향처럼 천천히 타들어 가는 특수한 섬유질의 끈으로 적과의 대결이 예상되면 각자는 화승에 불을 붙여 불씨를 나누어 갖는다.

 

조총은 장탄에서 사격가지 약 1분이 소요되는데, 용두 심지에 불을 붙이고→목표를 조준하고→방아쇠를 당기면→용두의 불꽃은 도화선에 옮겨 붙고→탄환이 발사되는 순서를 거친다.

 

1분간을 3교대로 나누어 사격하는 것이 ‘3교대 밀집사격’ 이다. 이 경우 그래도 20초라는 간격이 있는데, 이 간격 동안에는 활, 칼로 공격하고 왜성을 근거해 싸울 때는 통나무나 돌을 굴리는 등의 시스템적 방어전을 펼쳤다. 이러한 원리 때문에 왜군 조총수들은 최소 30명 단위로 집단을 이루었으며 조총은 오늘날과 같은 보초용 개인화기로는 사용될 수 없었다.

 

오늘날 일본의 전사 연구가들은 “하드웨어(조총)는 비록 유럽에서 건너왔지만 소프트웨어(사격법)는 일본에서 개발되어 그 후 유럽으로 건너갔다.” 고 주장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수들은 조총의 밀집사격술을 부산성과 동래성에서 사용해 두 성을 일격에 무너뜨렸다. 그 다음 신립 군과의 탄금대 앞 전투에서도 이 전술을 사용했다.

 

3천여 명으로 구성된 조총부대가 총 3회만 사격했다고 생각해 보자. 3천 발씩 모두 9천 발이다. 이 9천 발의 탄환이 유효 사정거리 50m 안에서 탄막을 형성했으니 그 파괴력은 둘째 치고 신립군은 우선 그 요란한 소리에 놀라고 놀랐던 것이다.

 

임진왜란 전, 대마도에서도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성룡(1542~1607)이 쓴 《징비록》을 보면,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 3월, 한성을 다녀간 대마도주가 두 정의 조총을 선조에게 바치고 돌아갔는데, 이유는 “히데요시 정부가 이같은 무서운 무기를 가지고 있으니 일본의 요청을 들어달라.” 는 뜻이었다고 한다.

 

조선과 일본이 충돌하면 가장 난처해지는 쪽이 대마도주였다. 반면에, 전쟁이 아닌 통상이 이루어진다면 대마도는 번영이 약속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될 것이므로 대마도주로서는 어떻게든 전쟁만은 막아야 했던 것이다.

 

선조는 받은 조총을 군기시에 보냈다. 군기시에서는 나름대로 분석해서 그 결과를 조정에 보고했을 것이다. 그리고 왜란을 우려한 측에서는 이를 관심 있게 보았을 것이다. 유성룡 등도 관심을 가지고 이순신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에게 그 내용을 알렸던 것이 아닐가?

 

《징비록》을 보면 임진왜란이 있던 해 봄, 조정은 변란을 대비해 신립과 이일을 변방에 보내 조선군의 전쟁방비 상황을 확인케 했다. 이들이 상황을 점고했을 때 창고에는 활, 화살, 칼, 창과 같은 무기들뿐이었다. 그나마 이 무기류도 문서상의 숫자만을 형식적으로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유성룡은 화약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조선군의 사정을 개탄했고, 지방순회를 다녀온 신립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군들은 조총이 있는데 어떻게 왜군을 만만히 볼 수가 있단 말이오?” 라고 하자, 신립은 “왜병들이 조총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그게 어디 쏠 적마다 다 맞는답니까?”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대목이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다.

 

신립은 지난 날 여진족 기십 명이 구식 승자총을 가지고 난사하는 정도만을 생각했지, 수천의 왜군들이 가늠자와 가늠쇠를 갖춘 명중률 높은 유럽식 신식 조총으로 3교대 밀집사격을 가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붓글씨 쓰기와 시문놀이에 젖어서 왜란 대비를 소홀히 한 것은 그렇다 치고, 조정이 천하명장으로 믿고 있던 신립과 이일의 조총에 대한 이해도 이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