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문장과 그림에 뛰어난 사람은 풍채가 좋고 정도 많아 풍류생활을 즐길 수 밖에없었나 보다. 이백, 당백호(唐伯虎) 등 시인들이 그러했고, 건륭황제와 송휘종(송徽宗) 등 절대 권력자들도 그러했다. 하지만 사랑과 업적에서 동시에 해피앤딩을 거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학적인 재주와 성과로 너무나 익숙한 소동파(1037~1101), 그가 바로 그 행운과 행복의 주인공이었다. 그의 곁을 지킨 세 명의 왕씨부인, 어쩌면 그녀들로 인해 지금의 소동파가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현명하고 어진 첫 번째 부인 - 왕불(王弗)
1054년 18살 되던 해 소동파는 옆 마을의 왕불을 아내로 맞았다. 진사(進士)댁 딸이라 당연히 글에 막힘이 없었지만 잠자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소동파가 책을 읽을 때면 그녀는 밤이 얼마나 깊어지던지 꼭 옆에서 지켜주었다. 그러다 후에는 남편이 글을 읽다가 간혹 막히기라도 하면 조용히 힌트를 주었다. 의아한 생각에 다른 책의 내용을 물어도 청산유수로 답을 올리니 소동파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새로운 눈으로 그녀를 보게 되었다.
특히나 인간관계처리에서 소동파는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모든 사람은 나의 친구이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남편에 대해 왕불은 시시각각 사람을 올바르게 보는 눈을 가질 것을 충고했다. 하루는 소동파를 방문 한 손님이 떠난 후 그녀가 남편에게 방금 그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고 일렀다. 소동파가 알 수 없다는 듯 영문을 묻자 그녀는 “방금 그 사람은 아첨에 너무 능숙합니다. 대화 내내 약삭빠르게 당신의 표정변화를 지켜보면서 좋은 말로 환심을 사려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의 눈은 항상 정확했다.
하지만 1065년, 왕불은 남편과 6살 난 어린 자식을 두고 2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결혼한지 11년이 되지만 소동파가 손꼽아보니 관직 때문에 항상 떨어져 있어 함께 한 시간은 겨우 4년밖에 되지 않아 더욱 미안하고 마음이 쓰렸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蘇洵)까지 세상을 뜨자 그는 사직하고 동생과 함께 두 사람의 유체를 몇천몇만리 떨어진 고향에 고이 모셨다 한다. 소동파는 또 훗날 그곳이 울창한 삼림으로 되어 아내에게 좋은 환경을 줄 수 있게 해주기 위해 무려 3만 그루의 소나무를 산에 옮겨 심었다. 10년 후 어느 날, 꿈에서 아내를 만난 소동파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깨어나 그 애절한 마음으로 시 한 수를 지었다 한다. 그것이 바로 <강성자?기몽(江城子?記夢)>이다.
아량 넓은 현모양처였던 두 번째 부인 - 왕윤지(王潤之)
두 번째 부인 왕윤지는 왕불의 사촌동생으로 세 명 중 이름이 가장 적게 알려지고 있지만 소동파의 일생 중 최고 전성기를 함께 했다. 오래 전부터 형부의 재주와 인품을 흠모해오던 왕윤지는 1068년 소동파와 가정을 이루었다. 왕윤지는 성품이 부드럽고 유순하였다. 소동파가 제일 감격한 것은 그녀가 왕불이 남긴 어린 아들을 자기 두 아들과 똑같이 친자식처럼 아껴주고 사랑한 것이다.
당시 소동파는 관직의 몸이라 화류계를 넘나들며 술을 마셔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이 항상 뭇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왕윤지는 한번도 그를 의심하거나 추궁하지 않았다. 총명한 그녀는 남편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믿음이고 이해심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의심은 깨끗이 버리기로 했다. 대신 항상 남편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관심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세 아들을 키웠다. 그리고 남편이 화를 내거나 우울할 때면 다른 여인네들처럼 남편 손의 술잔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음식과 함께 술을 덥혀와 함께 잔을 부딪쳤다.
1093년 왕윤지마저 세상을 뜨자 소동파는 또 한번 억장이 무너지듯 한 마음으로 연일 울었다 한다. 그녀를 위해 쓴 시가 그 유명한 <접연화(蝶戀花)>이다. 왕윤지가 죽을 때 그의 세 아들은 이미 20세를 넘은 청년으로 훌륭하게 장성하였다.
1071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왕조운은 노래로 생계를 유지하는 12살 어린 나이의 가기(歌妓)였다. 어린 나이를 초월한 당당함과 청초함, 그리고 뛰어난 음악적 재주는 좌중을 놀라게 했다. 소동파는 그녀의 가기 신분이 측은하여 집에 시녀로 데려왔다. 그런데 몇 년 전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워 집에 데려와 키우고 있던 여자아이가 왕조운의 친동생일 줄이야. 이렇게 왕조운 자매는 소동파의 집에서 해후하게 된다.
왕조운은 소동파를 평생의 은인으로 간주하고 성심껏 모셨다. 어릴 때는 단순히 은혜갚음이었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소동파의 재능과 마음씨에 감복해 결국에는 자기보다 26세나 많은 소동파와 남은 인생을 함께 하기로 한다. 왕조운은 소동파의 인생 중 가장 힘들고 험난한 시간을 같이했다. 그가 조종의 배척을 받아 멀리 유배를 떠날 때 다른 첩들은 다 뿔뿔이 달아났지만 왕조운만은 한마디 말도 없이 끝까지 곁을 지켰다고 한다.
결국 이번에도 소동파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먼저 보내는 고통을 면하지 못했다. 소동파가 60세를 맞던 해, 그를 가장 잘 알아주던 왕조운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에서 천고에 길이 빛날 <서강월?매(西江月?梅)>를 읊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 후로 그는 세속을 떠나 조용히 혼자 살다 미소를 머금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남들은 평생 하나도 얻기 힘든 현명한 여인을 셋이나 맞은 소동파, 그는 어쩌면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그녀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며 만면에 미소를 띠고 세상을 떠났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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