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움을 '업(業)'으로 하는 일본 한국과 일본 두 민족에 대하여 문(文).무(武) 두 길중 하나를 택하라면 한국에서는 '문'을 일본은 '무'를 선택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누구나 다 인정할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단군시조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내세워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그 이후 불교.유교가 국교가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한민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무력을 거부하는, 외교관계에서도 상대에게 예의를 다하고 친선과 우호를 우선 시하는 높은 도덕성의 선비문화가 국민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 국교화는 되지 않지만 이러한 국민성을 바탕으로 불교.기독교.카톡릭.이슬람교 등 세계적 종교가 대립의 벽이 없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존경 받는 역사적 인물들도 세종대왕.이이.이황 등과 같은 학자이거나 학문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일본은 수많은 전쟁의 귀신들이 있듯이 문보다 무를 숭상하는 민족이다. 무는 문보다 완력이 더 강하고 결정적일 때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을 흔히 ‘사무라이 나라’라고도 말한다.
사무라이는 ‘칼 문화’를 뜻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칼이란 강한 힘 앞에서는 비굴하게 굴복하지만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무자비하게 상대를 제압한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죽음을 의미하고,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사무라이 문화란 상대의 피와 눈물 위에 쌓여진 문화라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남기 위하여 적을 속이고 완력에 의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이분법 문화일 뿐이다. 여기에는 선비문화와 같이 남을 배려하는 평화철학이 있을 수 없다. 태권도와 같이 도(道)를 우선시하고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말하는 ‘사무라이’는 정치와 군사를 독점하고 묘지(苗字. 성을 사용)와 다이토(帶刀 칼을 착용) 등의 갖가지 특권을 가지는 지배신분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지배자들은 칼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병법(兵法)을 공부하고 무술을 연마했었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 발생하는 분쟁은 막부나 지역 성주 다이묘 등 법에 의거 해결한다.
그러나 무사 사회 내부에서 발생하는 분쟁은 겐카(喧 --싸움)에 호소한다. 하지만 겐카에 의거 승패를 가리더라도 자기의 명예는 자력으로 지키는 것이 무사의 요건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겐카는 이들에게 있어 도덕과 평화철학이 없다. 살이 튀고 뼈가 부서지는 처참한 죽음을 즐기는 게임일 뿐이다.
이러한 칼의 문화에 대하여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들의 표현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일본인들은 조금만 불평이 있으면 문득 칼을 뽑아 서로 죽인다. 의심이 많아 부자간에 잠을 잘 때도 칼을 풀지 않는다. 남자는 칼 셋을 차고 다니는데,
큰칼은 남을 죽이는 데 사용하고, 중간 것은 남을 막는데 쓰고 작은 것은 자살용이다. 얼굴에 칼 흉터가 있으면 용감한 자로, 머리 뒤에 있으면 비급한 자로 배척된다. 기뻐하고 성내는 빛이 당장에 나타나고 속임수가 많다.”
또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던 강항(姜沆)이 저술한 간양록(看羊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일본은 무(武)를 중시하는 분위기여서 칼로 싸운 흉터가 얼굴에 있으면 용기 있는 사람으로 존경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분에 못 이겨 서로 다투다가 원수를 죽이는 자는 장부답다고 불렀다.
칼을 잘 쓰는 자의 자손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귀한 혼처를 얻었다. 권력자였던 장군들은 글을 몰라, 병법서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해 곁에는 학식이 풍부한 스님이 항상 함께하고 있다.”
이렇듯 평화와 도덕적인 면을 강조하는 유교의 나라 조선인들의 눈으로 보면 일본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적이 되어 싸우고, 형제간에도 싸우는 야만 국가 그 자체인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무력.폭력을 행사하는 야만적인 겐카(喧)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 패전 후 조선과 명나라로부터 고립을 피하기 위하여 유교를 장려하는 등 평화를 정착시키는 정책을 수용했던 막부는 겐카(喧)를 없애는 ‘겐카료세이바이(喧 兩成敗)’라는 법령을 만들었다.
이 법은 만약 겐카를 벌인 경우, 누구의 잘잘못에 상관없이 쌍방을 동등하게 처분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정착된 사무라이 문화의 폐단이 어디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던가.
이에 대하여 야마모토 쓰네토모(山本常朝)는 그의 저서 ‘엽은(葉隱)’ 첫머리에서 사무라이의 딜레마를 ‘무사도란 죽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그의 논지는 “사무라이들이 겐카 등 선택의 장에 처해졌을 때는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은 쪽을 택하라. 그러면 살아남아 치욕을 당하고 비겁한 자로 욕먹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설령 겐카에서 이겨 살아남더라도 겐카료세이바이에 의거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 싸울아비 그렇다면 일본열도에 고대로부터 정착된 사무라이 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고대에는 오히려 한반도에서 많은 무사들이 일본에 도래하여 무술을 전해 주었다. 백제의 ‘싸울아비’ 또는 경상도 사투리 ‘사나이’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는 ‘사무라이’라는 어원 형성의 뿌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열도가 무를 숭상하는 국민성이 된 이면에는 한반도에 대한 열등의식과 역사조작이라는 꽈리가 틀고 있다.
663년 백촌강 전투 패배 이후 일본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패배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본서기를 비롯한 역사서를 조작해서라도 신라를 극복하고자 했다.
또 신라의 침공 의심이 성을 쌓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현실적 대비를 병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762년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痲呂)가 신라 침략 계획을 시작으로 수많은 한반도 침략과 노략질에서 보듯이 복수의 칼날을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백제계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기존 신라.가야.고구려계와 치열한 정권 다툼이 사무라이들의 실습장이 되면서 칼의 문화에 상승 작용을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일본역사에는 수많은 사무라이들의 난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들은 힘은 오로지 칼끝에서 나온다.
즉 칼만이 그들을 지켜주는 절대적인 힘으로 신봉하게 되었던 것이다.
◆ 손자병법 사무라이들은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병학(兵學)이 필요했다. 사무라이들의 교과서이자 경전이 바로 ‘손자병법(孫子兵法)’이다. 손자병법은 6세기 중국 춘추전국시대 유교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유교는 한반도에서 꽃을 피웠지만 손자병법은 이러한 일본 사회의 여건에 편성하여 중국보다 일본에서 더 화려한 꽃을 피웠다.
서양에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의 ‘군주론 (Principe(The Prince)’이라든가 칼 폰 클라우제비치(Carl von Clausewitz)의 ‘전쟁론(Vom Kriege)’이 있었다면 동양에는 손자병법이 있었다.
이 곳에서는 종교와 윤리 도덕적 선악은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잘 싸우는 방법을 가르친다. 침략하여 영토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 각양각색의 기술을 알려준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 훔치지 마라. 이웃을 사랑하라 등의 도덕적이고 상식적인 가르침과는 정반대 사상이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선이란 전쟁에 나가면 이겨야 하는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이기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선인 것이다. 적의 인권 같은 건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기면 영웅, 지면 역적’ 일본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 말은 전쟁에 나가 이기기만 하면 잘못된 점까지도 정당화되지만, 졌을 경우에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역적이 된다는 말이다. 병법에서 가르치는 악이란 전쟁에서 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나라는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상대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는 일정한 공식을 갖고 움직인다. 모든 일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완벽한 시나리오에 의해 움직인다. 겉은 ‘스미마생’이라고 입에 달고 있어 그지없이 친절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남을 이기기 위해서 항상 비수를 숨기고 있는 근성은 바로 손자병법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는 속(혼네-本音)과 겉(다테마에- 建前)이 다르다는 단어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 근본정신에는 사무라이들의 경전 ‘손자병법’ 정신이 짙게 깔려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손자병법 모정편(謨政編)에 나오는 이 말은 일본인들은 영원한 진리로 생각한다. 그리고 손자병법에 충실한 일본은 선제공격과 기습공격의 명수다.
그래서 일본은 상대방을 철저히 파악한 후에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서면 항상 선제공격을 시작한다. 명성황후시해사건.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진주만 사건 등 일본이 저질렀던 모든 전쟁이 그러했듯이 선전포고도 없는 비굴하게 야간 기습 또는 선제 침략이었다.
최근에는 제2차 한일어업협정과 다카노 前대사가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외치던 사건도 기습과 선제공격이었다. 
그리고 평화철학이 없는 사무라이 나라 일본은 힘이 약한 자를 먼저 공격한다. 정한론자들이나 후쿠자와 같은 자가 조선을 먼저 정벌하자고 했던 것이나, 오늘날 일본사회에 만연한 힘이 약한 자를 괴롭히는 ‘이지메’가 바로 이런 비열한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폭력을 멀리하고 문을 가까이 하고 있는 한국이 항상 일본으로부터 선제 공격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미국에 대해서는 ‘금붕어 똥’과 같이 따라 다니듯이 상대가 강하다고 여기면 비굴할 정도로 상대에게 아첨하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 패전 후 유교를 받아들였던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는 전국시대와 같은 큰 전란이 없었다.
때문에 사무라이들은 싸움에 대한 실전감각이 둔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한(藩)에는 빠짐없이 병학 사범이 있어 무사들을 교육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평화스런 시대에도 일본은 무력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병학 학습에도 열중했다. 힘을 심봉하는 일본의 자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근본에 있어서는 똑같다. 그리고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기본자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정한론을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요시다 쇼오인(吉田松陰) 등은 막부 말 대표적인 병학자들이다.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메이지정부의 중심을 이루었던 대부분이 그의 제자들이다.
이처럼 일본인은 오랜 세월 동안 전쟁에서의 승부를 중심으로 한 선악의 기준을 윤리기준에도 꿰어 맞춰왔다. 그래서 일본에는 인도적이고 보편적인 선악의 기준이 매우 미약하다. 더군다나 3류 사무라이들이 정권을 찬탈한 메이지 쿠데타를 거치면서 이러한 사상은 안개가 깔리듯 일본국민들도 모르는 사이에 더욱 심화되어 갔다.
1970년대 10만 표류 베트남 보트피플이 발생했다. 한국은 바다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수많은 보트피플을 받아들였다.
지리적 여건상 베트남과 가까운 일본에도 예외 없이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들을 모두 죽음의 바다로 되돌려 보냈다. 인간으로써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열한 작태가 아무런 도덕적 의심 없이 일본은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세계 비난 여론이 쏟아지는 등 일본에 불리해지자 가자미 눈을 한 일본이 이때 형식상 구출한 난민은 단 3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2004년 먹을 것을 찾아 목숨을 담보로 탈출한 북한 난민들은 심양 일본영사관으로 몰려 들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들을 모두 영사관 밖으로 내쫓아 중국공안에 인계하였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작태는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듯이 일본은 평화를 사랑하고 타민족을 존경하는 철학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평화주의와 인권존중 철학이 확립되지 않은 비열한 3류 사무라이 사상이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 있는 일본이 만약 국가주의가 다시 부활이라도 한다면, 언제라도 국가이익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다시 인권을 무참히 짓밟고, 다른 나라 국민들을 학살하는 상황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