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에 대한 나의 모든 헌신과, 미국 시민으로서의 나의 충성심과 명예 모두를 걸고, 나는 나의 검을 내 고향의 친지와 친구들, 이웃들에게 겨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군을 사임하고, 내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사람들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 나의 검과 어줍잖은 능력을 발휘하도록 부름 받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연방군을 사임하면서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15년 전, 미국은 텍사스의 영유권을 놓고 멕시코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당시 미군 최고사령관은 스콧 장군으로, 멕시코의 수도를 향해 육로와 수로로 진격하고 있었다.
스콧 장군의 핵심 참모 중에 로버트 리라는 공병 대위가 있었다. 원래 존 울 장군의 참모였는 데,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보여준 출중한 능력으로 스콧 장군의 핵심 참모가 되었다. 스콧 장군의 특별요청에 의해 보직 변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후 리 대위는 포대 배치, 공격로 탐색, 보급로 개척 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적진 한가운데에서 병참선도 없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리 대위는 이 전쟁 중에 3번이나 진급을 하여 미국에 돌아올 때는 대령이 되었다. 최고 사령관 스콧이 말하기를, 자신의 승리의 상당부분은 이 영민한 참모의 용기와 능력의 덕을 봤다고 말했다.
멕시코 전쟁이 끝나고 15년 뒤, 텍사스에서 기병연대를 지휘하고 있던 리 대령은 수도로 복귀하여 스콧 총사령관에게 신고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링컨의 당선 직후, 남부는 탈퇴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정규군의 신분으로는 이동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리장군은 사복차림으로 워싱턴으로 가서 스콧장군을 만났다.
1861년 4월 17일, 남군의 섬터요새 포격 이후 5일 뒤, 리는 링컨 대통령으로부터 북군 총사령관의 직위를 명령받았다. 당시 총사령관 스콧장군이 강력하게 요청하기를, 자신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리 대령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미군 총사령관의 지위와 10만의 병사가 지금 리 대령의 앞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리는 그것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미국의 모든 주가 남부와 북부로 갈라졌는 데, 그의 고향 버지니아주가 남부로 분열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리 대령은 이 제안을 전달한 블레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연방이 분열되지 않기를 누구보다도 원합니다. 하지만 연방이 분열되고 주가 갈라선다면, 저는 제 고향주로 돌아가 고향사람들과 운명을 함께 하겠습니다.” 그러고 그는 일어섰다.
블레어와 작별을 한 뒤, 리는 스콧장군의 집무실로 갔다. 리 대령에게 자신의 제안에 대한 대답을 들은 스콧은 매우 처연한 눈빛으로 리 대령을 바라봤다. “대령, 이 나라는 지금 최고의 인재를 가장 적절하게 활용할 방법을 잃었고, 자네는 자네 인생 최대의 실수를 했어.”
“사령관님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고향 사람들을 향해 침략군을 이끌고 갈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상황에 처하기 보다는 사직서를 내기를 원합니다.”
“자네의 생각은 충분히 알고 있내, 군은 더 이상 명령을 거부하는 자를 데리고 있을 수 없네, 귀관은 군을 떠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게.”
리는 스콧 장군에게 경례를 하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자신의 웰링턴 농장으로 돌아가 버지니아 주로 출발했다. 불세출의 명장이 고향 때문에 조국을 등지는 순간이었다. 리가 스콧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는 날, 그의 고향 버지니아주는 연방 탈퇴를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시켰다.
버지니아주가 탈퇴하고 리가 사직서를 제출할 때, 그의 아내 메리 리가 말하기를 “남편은 이 처참한 전쟁의 엄청난 희생을 생각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명예를 아는 버지니아인으로서, 그는 자신이 할 일을 알고 있었다.” 남부와 북부의 정치인들이 상대를 우습게 알면서 단 몇주만에 끝날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리 장군은 자신의 조국에 닥칠 처절한 운명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리가 사직서를 제출하고 남부로 간 지 약 1년 뒤,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동쪽으로 불과 10킬로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북군 맥클레란의 12만이 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맞서는 조셉 존스턴의 남군은 6만이 안되었다. 당시 리는 데이비스 대통령의 군사고문으로 있었는 데, 북군에 대한 전략에서 존스턴과 차이가 있었다. 처음 북군이 리치먼드 동쪽의 반도에 상륙했을 때, 리는 최대한 적을 지연하면서 수도의 멀리에서 결전을 벌이자는 입장이었지만, 존스턴은 수도 근처까지 끌어들인 다음에 적이 보급부족에 허덕일 때 단번에 격파한다는 생각이었다.
존스턴은 반도에서 기술적으로 후퇴하면서, 북군을 수도 근처까지 끌고 왔다. 남군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대에는, 그리고 남군이 공격하기 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잭슨의 계곡작전의 힘이 컸다. 잭슨이 계곡에서 활약하면서 맥클레란에게 맥도웰의 군이 2번이나 증원될려다가 취소가 됬던 것이다. 항상 남군의 수를 과대평가하는 맥클레란은 더욱 많은 증원이 있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맥도웰은 오지 않았고, 맥클레란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 때, 남군 사령관 존스턴이 공격을 가했다. 당시 치카호마니강을 사이에 두고 북군은 둘로 나눠졌는 데, 북군으 보급로인 철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의 북쪽에 있어야 했지만, 리치먼드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강의 남쪽에 있어야 했다. 이 상황이 소심한 맥클레란을 더 머뭇거리게 하다가 강의 남쪽에 단 2개 군단이 내려왔다. 일시적으로 1만 7천의 북군이 6만의 남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존스턴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이 전투가 1862년 5월 30일에 있었던 세븐 파인즈 전투인데, 당시 심한 폭우와 번개가 내리치는 속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무슨 착오였는지 모르지만, 남군의 2개 공격제대가 따로따로 가야 되는 데 같은 방향으로 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남군의 공격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북군을 밀어내기는 했는 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전과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남군 총사령관 조셉 존스턴이 전방에서 총상을 입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그 뒤 1년 동안 전장에 나설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전장에 나와있던 데이비스 대통령과 리 장군은 존스턴이 들 것에 실려가는 것을 봤다. 선임순으로는 다음 장군은 스미스 장군으로, 대통령은 그에게 사령관직을 맡으라고 하였다. 하지만 스미스 장군은 전투에서의 심한 긴장감으로 인해 정상적인 지휘가 어려워보였다. 전쟁터에서의 상황을 도저히 모르겠다며 대통령에게 오히려 하소연했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자신을 수행하고 있는 리 장군을 보았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이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꾼 중요한 결단을 하였다. “리 장군, 장군을 야전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가서 북군을 격파하고 수도를 안전하게 지키기 바랍니다. 리치먼드에 도착하는 대로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적의 대군이 수도 앞 10킬로에 온 상황에서, 리는 자신의 검을 수여받았다. “각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리 장군이 한 말이었다.
한 때 북군 최고사령관이 될 뻔했으며, 스콧 사령관이 5만명의 가치가 있다고 본 이 예의바른 버지니아인은 마침내 자신의 칼을 들고 고향에 쳐들어온 북군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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