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영국해군 항공모함

구름위 2013. 2. 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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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해군에서 항공모함의 역할은 항상 영국의 세계 전략과 그 전략에서 설정된 가상적, 그리고 그 가상적과 싸울 미래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예측에 따라 변했다. 1960년대의 CVA-01은 영국의 수에즈 동쪽 "East of Suez" 세계 전략을 수행할 도구로써 계획된 항공모함이고 그 진행 과정이 지금 건조를 추진하고 있는 차기항공모함 CVF와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CVA-01 이전의 영국해군 항공모함

 

1960년대 CVA-01와 지금의 CVF에 이르기까지 영국해군의 항공모함은 운용 개념과 설계가 미국해군의 항공모함과 많이 달랐고 그 기원은 제2차세계대전의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영국해군은 7척의 항공모함을 가지고 있었고 모두 6척이 건조되는 새로운 장갑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급은 아직 1척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영국해군 항공모함은 미국, 일본해군에서와 마찬가지로 함대의 주력인 전함의 보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역할은 초수평선 탐색/공격과 함대방공이었으며 주력 함재기인 소드피쉬 복엽 정찰/뇌격기의 역할은 수평선 너머 적함을 찾고 항공어뢰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해군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뇌격기와 급강하폭격기가 항공어뢰와 폭탄으로 적의 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적전함에 피해를 입혀 영국전함이 따라잡아 격침시킬 수 있도록 속도를 떨어뜨리는 정도만 기대했다. 1941년 5월 항공모함 아크로열에서 발진한 소드피쉬가 쏜 항공어뢰 1발에 조타기가 파괴되고 전함 킹조지5세와 로드니에게 따라잡혀 격침당한 독일전함 비스마르크는 항공모함의 함재기가 적전함의 속도를 떨어뜨리면 전함이 따라잡아 끝장을 낸다는 이 교리가 적용된 경우이고 영국해군의 항공모함과 전함은 제2차세대전이 끝나고 7년이 지난 1952년 실시된 NATO의 메인브레이스 훈련에서도 이러한 교리에 따른 훈련을 했을 정도였다.

 

1941년 5월 비스마르크를 향해 소드피쉬 뇌격기를 발진시키는 아크로열의 상상도

 

함대방공은 항공모함의 임무 중의 하나였지만 1930년대말 당시에는 레이다가 없어 적의 공습에 대한 조기경보가 불가능했고 영국해군의 항공모함에 탑재된 전투기는 육상기지에서 발진하는 전투기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방공은 어차피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그래서 당시 영국해군은 물론 일본해군 항공모함에도 전투기 숫자보다 뇌격기와 급강하폭격기 숫자가 더 많았다.

 

일본해군은 방공을 위한 전투기보다는 공격을 위한 뇌격기와 급강하폭격기를 잔뜩 실어 마찬가지로 방공이 취약한 미국해군 항공모함을 먼저 때리면 이긴다는 생각이었지만 영국해군은 가상적 독일과 이탈리아의 급강하폭격기가 던지는 폭탄을 맞아도 뚫리지 않게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을 두께 76mm의 장갑판으로 만들고 비행갑판 아래의 격납고는 사방이 막힌 강철의 상자로 만든 일러스트리어스급 장갑항공모함을 건조해 1940년 5월 완성했다.

 

이탈리아공군 폭격기의 공격을 받고 있는 아크로열

 


카미카제 에그 프라이 - 자폭기가 들이 받아도 장갑비행갑판을 뚫지 못하고 프라이팬에 달걀 깬 것처럼 된다 (항공모함 포미더블)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은 경하배수량이 23,000톤으로 2년 먼저 1938년 완성된 경하배수량 22,000톤의 항공모함 아크로열보다 조금 더 컸지만 탑재할 수 있는 항공기의 숫자는 36대로 아크로열의 72대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비행갑판을 장갑판으로 만들고 격납고의 사방에 장갑판을 두르다 보니 배의 무게 중심이 높아져 격납고를 2층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국 일러스트리어스, 미국 에섹스, 일본 쇼카쿠의 탑재 항공기 1대당 경하배수량을 계산해 보면 각각 639톤, 271톤, 357톤으로 영국 항공모함의 수치가 미국과 일본의 항공모함에 비해 월등히 높다. 이 수치는 영국 항공모함이 크기에 비해 적은 숫자의 항공기를 탑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러한 수치가 나오게 된 이유는 당장 출격하지 않을 항공기는 비행갑판에 두지 않고 모두 격납고에 집어 넣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영국해군의 항공모함 운용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해군의 항공모함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나 지금이나 격납고에 넣을 수 있는 숫자의 항공기만 탑재하고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해군은 전체의 약 1/3 정도만 격납고에 넣고 나머지 2/3는 항상 비행갑판에 둔다.

 


미국제 F4U 코르세어 등의 함재기를 미국식으로 비행갑판에 계류해서 탑재기 숫자를 늘린 영국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 포미더블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2년, 영국해군은 그 때까지 전투에서 잃은 함대항공모함 5척 아크로열, 커레이저스, 글로리어스, 이글, 허미즈의 의 빈 자리를 채우고 항공모함 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야심적인 항공모함 건조계획을 세웠다. 먼저 일러스트리어스의 격납고를 낮은 높이의 2층 격납고로 만든 일러스트리어스급의 마지막 2척 임플래커블의 설계를 확대 개량한 경하배수량 36,800톤의 장갑항공모함 오데이셔스급 4척이 계획되었고 곧 이보다 더 큰 경하배수량 45,000톤의 지브롤터급 항공모함 3척도 계획되었다. 여기에 더해 경하배수량 13,000톤에 구축함의 기관을 그대로 가져다 써서 24노트로 비교적 느리지만 상선규격에 맞춰 싸게 건조할 수 있는 콜로서스급 경항공모함 10척, 경하배수량 14,000톤의 마제스틱급 6척 또한 계획되었고 1944년에는 경하배수량 18,300톤에 함대와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는 28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는 허미즈급 항공모함 8척이 추가되었다.

 

경하배수량 45,000톤의 지브롤터급은 미국해군 항공대의 태평양 전투 경험을 받아들인 영국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의 주장에 따라 비행갑판에 장갑판을 대지 않고 격납고 또한 사방이 막힌 강철의 상자로 만드는 대신 앞뒤로 뚫려 격납고 안에서도 엔진을 돌려 예열하고 모든 항공기를 더 빨리 출격시킬 수 있는 미국식으로 설계하기로 1944년 5월 결정되었다. 공교롭게도 영국해군이 미국 에섹스급의 설계사상을 받아들일 때 미국은 비행갑판에 장갑판을 두르는 영국 일러스트리어스급의 설계사상에 따라 미드웨이급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에 장갑판을 둘렀다.

 

지브롤터의 비행갑판과 격납고를 미국식으로 바꾸는 이 변경은 설계를 매우 지연시켰고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브롤터급의 건조는 1척도 용골을 거치하는 단계까지 가지 못했다. 미국에서 돈을 빌려 전쟁을 치러 엄청난 빚을 지게 된 영국정부는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 이제 바다에서는 적이 없어진 마당에 설계변경 때문에 건조가 늦어진 지브롤터급 항공모함 3척이 필요없다고 판단해서 1945년 11월 45,000톤 지브롤터급 3척의 건조를 모두 취소했고 36,800톤 오데이셔스급은 1942년과 1943년에 용골을 거치하고 건조가 상당히 진행된 2척만 남기고 2척을 취소했다. 이밖에 18,300톤의 허미즈급도 삭감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8척 중에서 4척이 취소되었다. 경항공모함 콜로서스급과 마제스틱급은 마제스틱급의 1척만 빼고 모두 그대로 건조가 진행되었는데 새로 해군항공대를 건설하려는 영연방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1947년 독립한 인도, 그리고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다수가 매각 또는 대여되었다.


"1957년 전쟁"에서 항공모함의 역할 논쟁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신무기 원자폭탄이 등장하자 미국해군은 이 신무기 투발수단을 빨리 갖추지 못하면 항공모함은 물론 해군의 존재 자체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이에 미국해군은 당시 B-29 4발 중폭격기만 탑재할 수 있을 정도로 컸던 원자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쌍발 함재 공격기 AJ 새비지의 개발에 즉시 착수했고 새로 건조된 미드웨이급 항공모함에 탑재하기로 했다.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협력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원자폭탄 제조기술을 독점하려는 미국이 원자폭탄과 관련된 모든 협력관계를 끊어버려 배신을 당한 영국은 곧바로 독자적인 원자폭탄의 개발에 착수했고 영국해군은 이 때 선단호위를 위한 대잠수함전 항공기와 전투기 개발에 우선순위를 두어 제한된 자원을 공격기 개발에 충분히 투입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해군은 1948년 중반부터 2,000~3,000 마일의 항속거리를 갖는 신형 함재 공격기 연구를 시작했다. 이 함재 공격기는 당시 미국해군이 부지런히 갖고자 노력하고 있던 핵공격력과 동일한 능력을 영국해군에게 제공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이 때 영국 재무성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하여 비생산적인 국방지출을 최소화하기로 결정했고 육해공 3군의 연간 예산은 모두 합쳐 7억 파운드를 넘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여기에 대응해서 영국 육해공 3군은 1948년 11월 하우드 위원회라는 연구위원회를 설치했고 이 위원회는 소련과의 전쟁이 1957년에 벌어진다는 가정을 세우고 이 미래의 전쟁이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고,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육해공 3군의 전력을 어떻게 건설해야할 것인지 연구해서 1949년 2월 보고서를 내놓았다. 하우드 위원회의 보고서는 1957년 소련과의 전쟁에서는 제2차세계대전과 달리 미국이 처음부터 참전해서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지중해와 태평양 그리고 페르시아만 지역을 맡을 것이고 영국해군은 동대서양과 북해만 맡으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동대서양과 북해에서 영국해군의 임무는 해상교통로를 항공기와 잠수함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것이고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함종은 항공모함과 구축함/호위함이며 전함은 이제 모두 없애야 한다고 하우드 위원회는 보고했다.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는 영연방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해군에게 이 지역을 완전히 맡기고 영국해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하우드 위원회는 주장했다.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이 주장은 1960년대에 영국해군이 CVA-01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개발한 논리의 근본을 흔드는 것이고 1949년 당시에는 그냥 주장으로 끝났지만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아직 독립하지도 않았고 말레이 공산당 MCP의 게릴라가 날뛰어 당장 그냥 떠날 수도 없었다) 1967년 11월 파운드화 평가절하라는 경제위기를 당하고 나서 1968년 1월 영국정부가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 하우드 위원회 보고서는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해서 북대서양에 집중하고 항공모함과 구축함/호위함이 함대의 주력이 된 1970~1980년대 영국해군의 모습을 정확히 예측한 셈이다.

 

1949년 4월 영국 남부 그리니치에 있는 영국 해군대학에서 실시된 도상 지휘소 연습인 트라이던트에서 영국해군은 항공모함, 전함, 순양함, 구축함, 호위함, 잠수함, 소해정, 그리고 항공기가 해상교통로 방어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그리고 노르웨이의 북쪽 끝인 노스 케이프까지 진출한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로 소련 콜라 반도의 해군기지를 공격하는 방안의 타당성까지 조사했다. 하우드 위원회의 보고서와 트라이던트 연습의 결과를 참고해서 영국해군 기획처는 연간 예산 2억 파운드에 맞춘 “Revised Restricted Fleet (개정제한함대)” 계획을 1949년 5월 해군제1경(해군참모총장) 프레이저 제독에게 보고했다. 개정제한함대 계획은 인도양/동남아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한다는 것과 1957년 소련과의 전쟁에서 영국해군이 맡을 해역에서는 하우드 보고서와 같았지만 소련이 전함을 건조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킹조지5세급과 밴거드형 전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항공모함이 주력함이란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항공모함을 적의 해군기지를 폭격하는 공세적인 임무에 사용해야 한다는 견해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고가치 수송선단에 대한 적의 항공기와 잠수함의 위협에 대처하는 수세적인 임무에 사용해야 한다는 견해가 맞섰다. 1948년 프레이저 제독은 해군제5경에게 "우리가 반드시 완수해야 함에 이견이 없는 선단호위와 같은 임무에 대한 계획만 진행할 수 있다"고 말하며 항공모함을 선단호위에 사용해야 함을 분명히 강조했지만 본능적으로 좀 더 공세적인 역할을 원하는 해군항공대출신 간부들은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항공모함의 역할은 수송선단의 방공과 대잠수함전으로 제한되었고 해군항공대가 원한 원자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함재 공격기의 개발은 중지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 영국해군의 일선 항공기를 다 합친 숫자보다도 많은 200대를 최소 기본단위로 해서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집단적으로 지상공격에 투입한다는 미국해군과 아주 대조적이다. 이 기본적인 차이는 미국해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얻은 경험 및 전후의 발전과 영국해군이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해상교통로를 유지하며  얻은 경험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1952년 미국해군 항공모함 오리스카니의 AJ 새비지 핵공격기

함대에 대한 모의 핵공격 훈련

 

항공모함의 역할이 수송선단의 방공과 대잠수함전으로 제한되고 해군항공대가 원한 원자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함재 공격기의 개발이 중지되기 직전인 1948년 말, 영국해군의 본국함대(Home Fleet)는 카리브해의 영국령 해외 영토를 방문하고 영국 본토로 돌아오면서 소련 북부의 콜라 (Kola) 반도의 해군기지를 모의 공격하는 "Sunrise" 훈련을 실시했다.

 

이 훈련에서 본국함대의 장갑 중형항공모함 (fleet carrier) 일러스트리어스와 콜로서스급 비장갑 경항공모함 (light fleet carrier) 2척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의 임무는 플리머스의 "소련" 해군기지와 데본 및 콘월의 "소련" 공군기지를 모의 공격하는 것이었고 영국공군의 링컨 및 랭커스터 4발 중폭격기들이 기지를 방어하는 "소련군" 역할을 맡았다. 방어를 맡은 공군 폭격기들에게는 훈련의 규칙에 따라 2발의 원자폭탄이 있는 것으로 정해졌고 이에 대응하여 2차대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본국함대의 구축함들은 3마일 이상 떨어지고 더 큰 함정들은 4.5마일 이상 떨어지는 진형을 짰다.

 

훈련이 시작된 다음 날씨가 너무 나빠져 본국함대의 항공모함들은 항공기 이착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본국함대에게는 다행히도 공군 폭격기사령부의 링컨과 랭커스터 폭격기들이 전자적 기만에 속아 함대를 찾지조차 못했다. 마침내 공군 연안사령부의 해상초계형 랭커스터가 악천후를 무릅쓰고 가까스로 함대를 찾아내 1발의 원자폭탄 투하를 시뮬레이션 했다. 그러나 폭탄은 가장 가까운 구축함으로부터도 4,500야드나 떨어져서 폭발한 것으로 판정되어 함대는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훈련의 결과 넓게 퍼져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함대에 대한 원자폭탄의 위협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북대서양의 나쁜 날씨에서도 함재기를 안전하게 이착함시킬 수 있는 더 나은 항공모함과 함재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자주 파도가 거칠고 높게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북대서양의 환경에 최적화된 중형항공모함이라는 오데이셔스급 이글과 아크 로열은 건조가 계속 늦어져 1950년 초 이글은 1951년 3월에, 아크 로열은 1952년 말에 완성될 것으로 예상되었고 일러스트리어스급 중형항공모함 6척은 마침내 현대화 개장공사를 실시하기로 결정되어 1949년 포미더블부터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미더블은 점검 결과 전쟁 중에 입은 피해와 전후 4년간의 사실상 방치 때문에 상태가 너무 좋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고 대신 빅토리어스를 개조하기로 1950년 여름에 결정되었다. 빅토리어스는 1950년대 중반에 등장할 더 크고 무겁고 빠른 함재기를 운용할 수 있도록 완전히 새로운 비행갑판과 격납고를 갖게 되었고 이를 위해 선체를 반으로 자르고 새로운 플러그-인(plug-in)을 넣어 길이와 폭이 모두 커졌으며 격납고 갑판부터 그 위로는 모두 뜯어내고 새로 만들어 붙이게 되어 현대화 개장공사라기 보다는 사실상 재건조였다.

 


7년에 걸친 재건조 공사를 마치고 1958년 취역한 빅토리어스

 

항공모함의 필요성에 대한 신임 국방장관의 의문

 

1950년 2월 애틀리 수상의 노동당 정부는 총선거에서 승리해 재집권했다. 이어진 내각개편에서 총선거 이전에는 육군장관이었던 신웰이 국방장관으로 올라갔는데 그는 해군에 적대적이고 원자폭탄의 시대에 항공모함이 정말로 필요한지 의문을 품은 인물이었다.

 

신웰이 국방장관으로 취임하던 이 때 영국해군은 지중해에서 작전하는 중형항공모함에서 발진해 소련의 고속 폭격기의 집중공격을 상대할 단좌 고성능 주간 전투기와 대서양에서 작전하는 경항공모함에서 발진해 몇 대 되지 않는 소련의 저속 정찰기를 잡을 비교적 저성능의 복좌 전천후 요격기를 원하고 있었다. 대서양의 콜로서스급 경항공모함에서 출격해 저속 정찰기를 상대할 복좌 전천후 요격기는 2차대전 당시에 호위항공모함 CVE에서 발진해 독일공군의 Fw-200 정찰기를 요격한 시허리케인 전투기와 같은 개념이고 1980년대에 등장한 V/STOL 경항공모함 인빈서블급에 탑재된 시해리어 FRS1도 마찬가지이다.

 


1963년 멜버른 함상의 시베넘 FAW53 복좌 전천후 요격기

 

신웰의 국방부는 먼저 대서양에서 선단호위임무에 종사할 경항공모함에서 발진해 소련의 느린 장거리 정찰기를 격추시킬 임무를 맡을 전천후 요격기로 영국공군이 이미 쓰고 있는 베넘(Venom)을 약간 바꿔 쓰도록 요구했다. 이 때 마침 영연방의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이 영국제 마제스틱급 경항공모함 멜버른에서 운용할 수 있는 소형 전천후 요격기를 찾고 있어 영국해군은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주문까지 합쳐 베넘의 해군형 시베넘(Sea Venom)의 개발에 동의했다.

 

그러나 영국해군은 시베넘으로는 지중해에서 소련 폭격기의 집중공격에 대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1958년 시미터(Scimitar)란 이름으로 실전배치되는 고성능 단좌 주간 전투기의 개발을 고집했고 이 주간 전투기에 더해 새로운 고성능 복좌 전천후 요격기의 개발도 요구했다. 이 요격기는 1960년 시빅슨(Sea Vixen)이란 이름으로 실전배치된다. 영국공군 또한 시미터 및 시빅슨과 비슷한 임무를 맡는 단좌 주간 전투기 스위프트, 헌터와 복좌 전천후 요격기 재블린을 따로 개발했고 국방부와 조달청은 이 모든 것을 쓸데없는 중복투자와 낭비로 여겼다.

 


Tu-16 Badger가 나오기 전 소련해군항공대의 주력 폭격기였던 Tu-14 Bosun

무장은 항공어뢰

 


시미터

 

앞으로 해군과 공군의 중복투자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공군참모총장 슬레서는 해군참모총장 프레이저에게 공군의 연안사령부와 해군의 항공대를 합쳐 새로운 연합 해상 항공군, Maritime Air Force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슬레서는 이 연합 해상 항공군에서 해군은 대잠전에 집중하고 전투 및 공격 임무는 전부 공군이 가질 것을 제안했지만 프레이저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1950년 5월 11일 육해공 3군 참모총장과 함께 "국방정책 및 세계전략"이란 제목의 정책문서를 검토한 회의에서 신웰 국방장관은 항공모함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국방정책 및 세계전략"은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경우 서유럽에서 철수하고 석유가 나는 중동을 우선 지킨다는 기존의 전략으로부터 서유럽에서 소련군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180도 바뀐 내용을 담고 있었고 유럽 대륙에서 벌어질 대규모 지상전을 위해 육군과 공군에게 예산 배분의 우선 순위를 주었다.

 

국방장관은 항공모함이 왜 필요하냐고 묻고 육군과 공군이 앞으로 예산을 우선적으로 타게 되어 해군이 궁지에 몰린 이 때 마침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와 장소에서 터진 한국전쟁은 영국해군에게 극동함대의 콜로서스급 경항공모함 트라이엄프를 한국의 서해로 급히 보내 비록 제한전쟁이지만 해군의 항공모함이 지상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소련과의 전쟁이 이전의 계획에서 가정한 1957년보다 일찍 일어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주었다. 이 때 중립적인 육군의 템플러 중장을 위원장으로 해서 소집된 해상 방공 위원회는 소련과의 전쟁이 1954년에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해상교통로의 방공을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을 것인지 연구해서 1950년 10월 권고안을 냈다. 권고안의 내용은 해군의 손을 들어 준 것이었다. 해상 방공 위원회는 소련 폭격기의 위협으로부터 지중해의 해상교통로를 지키려면 중형항공모함과 고성능 전투기가 필수적이라고 인정했고 대서양에서 통상파괴전을 시도할 소련해군의 스베르들로프급 순양함을 상대하기 위해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공격기도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신웰 국방장관은 해상 방공 위원회의 권고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영국해군은 항공모함을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처칠의 재집권과 핵전쟁에서 해군의 역할

 

1951년 10월 처칠의 보수당은 총선거에서 노동당을 이기고 6년 만에 정권을 탈환했다. 처칠이 재집권할 때 소련은 원자폭탄을 성공적으로 시험한지 이미 2년이 지났고 영국은 첫 원자폭탄을 시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뿐만 아니라 영국도 곧 핵무기를 갖게 된 이 때 영국정부는 이제는 더 이상 1957년이나 1954년 전쟁이 난다는 가정을 하고 여기에 맞춰 2차대전 식의 전쟁에 대비할 필요가 없고 경제를 위해 그런 전쟁준비는 해서도 안되며 앞으로의 국방은 장기적인 억지력 확보에 중점을 두어야 함을 깨달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1952년 4~5월 육해공 3군 참모총장은 그리니치 해군대학에 모여 국방정책과 세계전략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했다. 1952년의 “세계전략” 문서는 1952년부터 앞으로 5년간의 국방정책의 기본을 세웠고 NATO라는 큰 틀의 안에서 각 군의 역할을 정의하고 그 역할의 수행에 필요한 전력을 결정했다. 이 문서는 영국은 혼자서 소련과 싸워 이길 수 없고 독자적으로 소련의 도발을 억지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영국공군의 새로운 밸리언트, 빅터, 벌컨 폭격기부대의 주요 역할은 소련의 핵전력에 대한 반격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정해졌지만 소련에 대한 주요 억지력은 미국공군의 핵공격력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또한 인정되었다. 앞으로 영국공군 폭격기부대의 역할은 영국에게 매우 중요한 표적에 대한 미-영 연합 핵공격 지휘에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58년 8월 16일 찍힌 미국해군 항공모함 미드웨이

A-3 스카이워리어 핵공격기를 12대까지 탑재

 

세계전략문서는 소련과 전쟁이 벌어지면 처음부터 서로 핵폭탄을 주고 받아 양쪽 모두 큰 피해를 입을 것이지만 곧바로 전쟁이 끝나지는 않고 살아남은 전력으로 전투를 계속하며 회복을 시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양쪽이 핵공격을 교환하고 큰 피해를 입은 채로 전쟁이 계속 될 것이라는 이 개념에는 "broken-backed war (허리가 부러진 채로 하는 전쟁)"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broken-backed war의 주요 전장은 핵공격에서 살아남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해상교통로가 될 것이라고 세계전략문서는 예상했다. 영국해군은 역할은 당연히 broken-backed war에서 해상교통로를 지키는 것으로 정의되었지만 영국해군은 이러한 방어적인 역할에 더해 새로 창설된 NATO 스트라이킹 플리트의 일원으로서 핵공격에도 참여하기 위해 미국공군의 폭격기공세에 동참해 영향력을 확보한다는 영국공군의 폭격기부대 정당화 논리와 같은 주장을 폈다. 다시 말해 미-영 연합 핵공격력에 영국공군의 폭격기부대를 포함시켜 미국공군의 B-36 피스메이커 및 B-47 스트래토제트 폭격기부대 지휘에 대한 영향력을 갖는 것만큼이나 NATO 스트라이킹 플리트에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영국해군의 공격기부대를 포함시켜 미국해군 AJ 새비지 또는 A3D 스카이워리어 공격기부대 지휘에 대한 영향력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고 주장 것이다.

 

핵공격력 확보를 위한 1952년형 중형항공모함 설계

 

이를 위해 영국해군은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대형공격기 개발을 다시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 대형공격기를 탑재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55,000톤급 항공모함이 계획되었다. 이 55,000톤급 항공모함은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을 힘들여 재건조 하는 것보다 아예 새로 만드는 것이 더 빠르고 싸다는 판단에 따라 계획되었고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중의 1척인 포미더블과 헌트급 구축함 몇 척을 해체해서 나온 강철로 만들 예정이었다.

 

신형 항공모함은 1952년 4월 경사비행갑판을 갖추고 중량 6만 파운드의 함재기를 운용할 수 있는 함정으로 정의되었고 1956년에 용골을 거치할 계획이었는데 3개월 후인 1952년 7월에는 영국공군의 캔버러 쌍발제트폭격기의 해군형을 운용할 수 있도록 이함중량이 7만 파운드로 늘어났고 격납고의 높이는 이글과 아크 로열의 17피트 6인치보다 25% 높아진 22피트로 바뀌었다. 사출기는 3개 또는 4개를 장비하기로 했고 속력은 32노트, 레이다는 새로운 984형 3차원 레이다를 달기로 했다. 이어 1952년 9월에는 배수량이 52,000톤으로 바뀌었고 그 해 9월 예비 연구를 끝내고 12월 상세 설계 시작, 1953년 12월 설계 제출, 1954년 1월 주문, 1954년 5월 용골 거치, 1958년 12월 31일 완성으로 진행 일정이 잡혔다.

 

그러나 처칠의 보수당 정권은 2차대전 중에 건조를 시작한 중형항공모함 아크 로열이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마당에 신형 항공모함의 건조를 새로 시작할 수 없다고 제동을 걸었고 영국해군은 1953년 4월 더 싸고 작은 항공모함을 만드는 것은 어떻겠냐고 양보했지만 1953년 7월 신형 항공모함의 건조는 완전히 취소당했다. 취소 당시 이 신형 항공모함은 배수량 53,150톤의 선체에 길이가 각각 200피트와 150피트인 증기 사출기 2대를 갖추고 함재기의 이함 중량 6만 파운드, 착함 중량 4만 5천 파운드로 설계되었다. 함재기는 연료와 무장을 뺀 기체만의 중량 3만 3천 파운드 공격기 12대, 2만 2천 파운드 전투기 33대, 1만 6천 5백 파운드 대잠기 8대를 탑재하고 격납고의 높이는 이글 및 아크 로열과 같은 17피트 6인치로 되었다. 함재기의 이함 중량이 7만에서 6만 파운드로, 격납고의 높이가 22피트에서 17피트 6인치로 다시 줄어든 이유는 캔버러 쌍발제트폭격기의 해군형 대신 훨씬 발전된 설계와 성능의 새로운 제트공격기 요구사항 NA39가 제출되어 이 신형 핵공격기를 탑재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NA39는 버커니어로 개발되어 1963년 실전배치된다.

 


60년대 초 빅토리어스 함상의 버커니어 S1 공격기
핵폭발의 섬광에 대비한 anti-flash 도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