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구(舊) 소련 잠수함대의 해저 2만리

구름위 2013. 1. 15. 16:52
728x90

이 글은 1942년 10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톡 항을 출발, 적 잠수함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북극해에 있는 소련 무르만스크로 이동했던 소련 잠수함대에 대한 기록이다.

이들 잠수함들이 지나간 항로가 1905년 유럽의 발틱해를 떠나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으로 항해하다 쓰시마 근해에서 일본 함대에게 섬멸 당했던 러시아 발틱 함대의 길을 반대로 갔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발틱 함대


소련 잠수함 한 척이 오래곤 주 앞 바다에서 일본 잠수함에게 격침당했던 이야기는 지난 봄에 이 블로그에 올렸었다.

비록 수중 항해보다 수상 항해가 많은 이동이었지만 특징있는
잠수함들만의 항해라서 프랑스 작가 쥴 베른의 작품 '해저 2만리'의 제목을 빌려 지었음을 양해 바란다.

---------------------------------------------------------------------------


1939년 소련은 동해 북방 블라디보스톡 해군 기지에 대규모의 태평양 함대를 주둔 시키고 있었다.

이반 쥬마쉐브 소장 지휘하의 태평양 함대는 14척의 구축함,
30척의 소해함, 92척의 초계정,그리고 80여척이나 되는 잠수함으로 장비되어 있었고 2년 뒤인 1941년 극동에 긴장이 높아지자 블라디보스톡 조선소에서 진수한 8,800톤급 경순양함 두 척이 함대에 추가 합류하였다. 두 척의 순양함은 35노트의 속력을 자랑하는 신예함이었다.

----------------------------------------------------------------------------

한국전쟁 중 미 해군은 이들 순양함을 경계하여 동해에 로스엔젤스급 등의 중순양함들을 파견했었다.

최초로 동해에 파견된 미 경순양함 쥬노는 영국의 중순양함
자메이카, 구축함 블랙 스완과 함께 함대를 편성하였고 이 함대가 1950년 7월 2일 주문진 앞 바다에서 북한 어뢰정 네 척을 격침했던 해전사를 이 블로그에서 소개했었다.

----------------------------------------------------------------------------

이후 태평양 함대는 두 척의 순양함 외에도 구축함 2척(총 16척)
, 잠수함 14척(총 94척)이 증강된 대형 함대가 되었다.

태평양 함대의 잠수함은 크기와 성능이 다른 다양한 모델로 이뤄져있었는데
L급 13척, Shch급 41척, M 급 33척, S급 6척, 그리고 유일하게 K 급 1척이 있었다.

------------------------------------------------------------------

     

글 끝에 소개할 S급 S-56 잠수함. 북극해로 이동하여 큰 전공을 세워 우표에까지 소개 되었다.


글의 주제가 되는 함대의 주력인 S급 잠수함은 총 톤수 1,050톤으로 소련과 독일이 서로 사이가 괜찮았던 1930년대 초기 거의 독일 기술로 디자인 된 것이다. [S는 Srednyaya(중형-中形)의 약자이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서 잠수함 건조가
금지되었던 독일은 네델란드에 조선소를 열고 이 곳에서 잠수함을 건조했었는데, 이곳을 방문해서 잠수함을 보고 그 성능에 감동했던 소련은 독일로부터 설계도 청사진을 구매, 여러 개량을 거쳐 S급 잠수함을 생산하게 되었다.

태평양 함대의 대부분의 S급 잠수함들은 그 구조물들을 미리 발틱 해 연안 등의 조선소에서 건조한 후 화물 열차편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운반해서 조립하였는데, 초기에는 독일 등의 외국 부품들을 많이 사용하다가 후에는 소련산으로 모두 조달하여 생산하였다.

총 56척이 생산되었고 그 중 S-52와 S-53은 1954년 중국에 판매되어 중국 잠수함대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S급 잠수함의 활약은 전쟁 중에 소련 해군이 격침했던 적 함선의 1/3이 S급의 전과였음이 증명하고 있다.

---------------------------------------------------------------------
------


소련 국토의 어느 해군 기지에서도 태평양 해군 기지처럼 강력한 해상 전력이 활동하는 곳은 없었는데 이는 모두 일본을 의식한 증강이었다.

소련과 일본이 조선과 만주 국경 장고봉에서 전투를 벌인 
1938년 8월, 이들 함대는 비상 전투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1941년에도 소련의 극동지역은 증대되고 있는 일본군의 위협으로 항시 긴장 상태에 있었다.

만주 지역의 일본군과 만주군의 병력은 48만 명에서 백 만 명으로 확장되었고, 일본의 위협에 불안을 느낀 소련은 일본과 맺은 소일 불가침 조약에도 불구하고 40 여개 사단을 극동에 배치하며 이에 맞서고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미국과 전쟁에 돌입한 일본은 소련의 동해안과
사할린 섬 중간의 해협인 라 페루즈 해협과 대한 해협을 일본 해군이 통제하는 전쟁 해역이라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

해협 이름 라 페루즈는 서양인 최초로
우리나라의 울릉도를 발견하여 라 페루즈 섬이라고 명명한 프랑스 함장의 이름을 딴 것으로 탐험가인 그의 정식 이름은 '쟝 프랑소와 드 가롭 코트 드 라 페루즈[1741-1788]'이다.

 

 

                                라 페루즈가 그린 탐험해도
유감스럽게도 동해가 일본해로 되어있다. 일본은 이 지도를 근거로 일본해 명칭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긴 이름 뒤에 붙은 것은 귀족 출신인 그의 영지 지방 이름을 말한다.
탐험 도중 실종되었다.

---------------------------------------------------------------------------


일본의 일방적인 선언 직후인 1941년 12월 한 달 동안
해당 해역에서 소련 화물선 네 척이 국적 불명 잠수함들의 공격으로 격침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긴장 높은 극동보다도 소련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북극해로 영미의 원조 상선들이 소련 콜라 반도의 무르만스크와 영국 항구를 오가는 항로가 있는 곳이었다.

상선단이 가져오는 각종 전쟁 물자는 독일과 전쟁 중인 소련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단비와 같은 값진 것들이었는데 이 항로는 노르웨이에서 출격하는 독일 공군기와 독일 해군 함들이 항상 위협하며 노리고 있어 이곳의 해군력을 증강할 필요가 시급했다.

결국 소련 해군은 태평양 함대의 일부 잠수함들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고 북빙양을 통과해서 무르만스크로 이동하도록 결정하게 된다.


                                    무르만스크 항


소련과 일본 사이의 해상 긴장이 일 년 가까이 지속되던 1942년 10월 6일 아침 7시, 4척의 소련 S급 잠수함이 태평양 함대를 떠나 물결 높은 가을의 바다로 향했다.

각 잠수함들은 이반 포미크 쿠체렌코 대위의 S-51, 
드미트리즈 브라틴슈코 대위의 S-54, 레프 미하일로비치 슈스킨 대위의 S-55, 슈체드린 중령의 S-56이었다. S-56의 함장 슈체드린 중령은 이 미니 잠수함대의 사령관이기도 했다.

잠수함 파견 임무가 너무 비밀이라서 오직 함장들만 알고 있었고 승무원들은 단지 장거리 초계 항해에 나선다는 것 정도만 짐작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미니 잠수 함대는 북상하였다. 그들이 항해하고 있는 해역은 일본군이 출몰하는 위험 수역으로
그날 밤 선두를 항해 하던 S-51이“일본 해군 기뢰 부설함 출현!”의 경고를 보냈다. 야간 견시[見視]와 신호병들은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주위를 계속 주시하여야만 했다.

소련 잠수함들은 사할린 근해의 타타르 해역을 지나 쿠릴 해협으로 들어섰다. 쿠릴 해협은 일본 해군함들이 수시로 초계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10월 14일 소련 잠수함대는 소련 캄차카 반도의 소련 해군기지인 패트로파프로브스크 캄차카쓰키즈 항에 기항했다.

태평양 함대의 잠수함 전단 사령관 알렉산더 트리폴스키는 '각 잠수함들은 이 기지에서 가능한 최대의 보급품을 적재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그 지시에 잠수함의 수병들은 자신들의 최종 목적지와 항해거리가 상상하던 것 보다는 휠씬 더 긴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1941년 10월17일 슈체드린 함장은 승조원들에게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가
태평양과 대서양 두 곳을 통과해 북빙양으로 문을 열고 있는 소련 반대쪽의 무르만스크 항으로 항진하는 것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그런데 또 다른 극비 사항이 있었다.
S급 잠수함들이 출발하기 전에 이미 블라디보스톡항을 출항해서 무르만스크로 향하고 있는 소련 잠수함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 잠수함들은 L급 잠수함들로서 S급 잠수함들 보다 2주 정도 빠른 9월 24일 극비로 블라디보스톡 항을 출항하였다.


----------------------------------------------------------------------------

                                       소련 L급 잠수함


L급 잠수함은 소련이 내전 상태에 있던 1차 대전 직후 러시아 근해에서 침몰한 영국 잠수함 HMS L-55를 모델로 해서 개발한 잠수함으로 기뢰를 부설 할 수 있었다. S급 보다 더 큰 1,327톤이고 승조원의 숫자도 더 많다. [L은 Leniet의 약자다.]

코마로프의 L-15와 구사로프 대위가 지휘하는 L-16이었다. 구사로프는 나중에 출발한 S급 잠수함장들을 포함한 함장들 중에 최고 연장자였다.

10월 5일 소련 L급 잠수함들은 미국 영토인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에 도착했다. 소련 잠수함들은 이 곳에서 재급유와 보급 그리고 정비 등을 했다.

 


                    알래스카 앞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 - 현재는 북태평양 어업과 관광의 중심지다.

         

선임자인 구사로프는 미 해군 장교들과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남쪽 항로에 대해서 여러 번 논의할 기회를 가졌었다. 일본의 잠수함들이 태평양 전역에서 횡행하고 있었으므로 앞으로 갈 항로 역시 위험한 수역이었다.

미 해군은 소련 함장들에게 유사시 개방 공용 무선망을
사용하기를 권고했는데 특히 미국 영해에 들어갔을 때는 이 무선망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말해 주었다.

그 동안에 한가지 유의 할 작은 일이 있었다.

함장 코마로프가 우연히 소련 이민자 출신인 한 미군 수병과 이야기하다가
소련 S급 잠수함들이 자신들의 잠수함을 따라서 알류샨 열도로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L급 잠수함 함장들은 블라디보스톡 출항 시에 이런 사실을 통보 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미국 해군은 이 사실을 알면서 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일까? 코마로프는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10월 5일, L-15와 L-16은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를
출발해서 남하했다.

10월 11일 야간 견시 교대를 막 끝냈던 오전 11시 15분, 일렬 종대로 항해하던 후방 잠수함 함교의 함장 코마로프와 신호병 스몰니코프는 갑자기 거대한 두 번의 폭발음을 들었다.
 
놀란 두 사람의 시야에 전방의 L-16 함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와 화염이 보였고, 같은 시각 함 내의 통신병은 개방 중인 무선에서 “우리는-----”이라는 말을 남기고 송신이 끝나 버린 L-16의 무선을 받았다.

코마로프가 지켜보고 있는 수 초 동안에 L-16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그러면서
 스몰니코프는 멀리서 수면 아래로 급히 사라지는 정체 불명의 잠망경을 확인하고 이를 코마로프에게 급히 보고 하였다.

코마로프는 포 반원들을 함포에 배치하고 스몰니코프가
목격했던 잠망경의 위치에 포격을 가했지만 너무 늦은 반응이었을 따름이었다.

L-15는 L-16이 격침된 위치를 지나가면서 L-16의 부유물이나
생존자가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코마로프는 미확인 잠수함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급속 잠항을 명령했고, 그 날 하루 종일 전 함내 승조원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적의 어뢰 공격에 대한 공포에 떨며 최대의 경계태세를 유지해야 했다.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한 승조원들의 쇼크가 너무 커서
사기는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초긴장한 함장 코마로프는 항해 내내 소나에 온 신경을 쏟으며 적 잠수함의 프로펠러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나 다행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L-15는 적 잠수함의 습격을 경계해서 밤에만 수상 항해를 하고
낮에는 잠수 항해를 했으며 닷새 후에 샌프란시스코 항에 입항하였다.

소련은 자국 잠수함에 공격을 가한 정체불명의 잠수함이
미국의 것이라고 의심했었는데 후속하고 있는 소련 잠수 함대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던 사실이나 위치가 쉽게 노출 될 수 있는 개방 공용 무선망을 사용하라고 권고한 것이 그 의심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일본의 대형 잠수함 I-25[함장은 다쿠미 아키지 중좌였다.]에 의해서 행해진 것으로 I-25는 열흘 전에도 근처 해역에서 두 척의 유조선을 격침하였었다.

                         


                                 일본 해군 잠수함  I-25

L-16이 격침 된 지점은 워싱턴 주에서 800 마일 떨어진 앞 바다로[수역이 멀다보니 오래곤 주 앞 바다라고 쓴 글도 있다.] 일본 측은 L-16이 단 20초 만에 격침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당시 일본 잠수함은 이 소련 잠수함을 미 해군 잠수함으로 오인했었다.

I-25는 총 톤수 3,654톤으로 
대형이지만 속도가 소련의 S급이나 L급 등 소형 잠수함보다 더 빠른 23노트나 되었다.

I-25는 수상기 요코스카 E14Y형을 탑재하고 있었는데
후지다 노부오 준위가 조종한 이 수상기는 미 오래곤 주 삼림에 대형 화재를 겨냥하고 소이탄을 투하했었다.

                                   

                         I-25 잠수함에 탑재한 수상기 요코스카 E14Y

I-25는 1943년 8월 25일 뉴 헤브릿지 섬 근해에서
미함 USS 패터슨에 의해서 격침되었다.

-----------------
----------------------------------------------------------


소련은 견시[見視]였던 스몰리코프가 '당시 목격했었던
잠수함의 잠망경이 자기가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에 기항했을 때 보았던 미국 잠수함 S-급의 그 것과 비슷했다'고 증언하는 바람에 이 정보를 바탕으로 미국에 생떼를 썼다.

미국 해군은 부근 해역에서 일본 잠수함이 목격되었고
미국 연안에서 이미 두 척의 유조선들이 격침되었다는 응답으로서 이들의 의심을 일축했다.[두 유조선은 I-25 잠수함이 격침 했었다.]


뒤에 출발했었던 네 척의 S급 잠수함들이 10월 27일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에 기항했는데 미 해군으로부터 L-16의 비극적인 격침 소식을 들은 소련 함장들은 경악 했다. 함장들은 사기를 염려해 부하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입소문으로 전 수병들이 비극적인 사건을 다 알게 되었다.

소련의 잠수함대는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에서 단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인 10월 28일 서둘러 출항했는데 이때 S급 잠수함들은 미 해군이 제공한 두 척의 구축함 호위를 받게 되었다. 두 구축함들은 굴뚝이 네 개 있는 USS Fox와 USS Saros로 구형 구축함들이었다.

---------------------------------------------------------------------------
 

                                      구축함 USS FOX
USS FOX는 1919년 진수한 구축함으로서 태평양 전쟁 중 태평양 연안에서 상선단 호위, 대잠 등의 임무를 수행했었다. 1,190톤의 크기였으며 1945년에 퇴역하였다. 아쉽게도 USS SAROS의 제원은 발견하지 못했다.

------------------------------------------------------------------------------


미국 구축함의 호위를 받은 소련 잠수함들은 극도의
대잠 경계를 하는 조심스런 항해를 해서 11월 5일 무사히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하였고 그 곳에서 6일간의 휴식을 취한 후 11월 11일 다시 파나마 운하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미 해군은 소련 잠수함대를 위해 계속해서 두 척의
대잠 호위 콜베트 함을 붙여주었다.

한편 2주 전인 10월 25일 파나만 운하를 향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L-15는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여 대서양으로 들어섰다.

코마로프 함장은 미 해군으로부터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해역에는 일본 잠수함들이 잠복해서 먹잇감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경고를 받고 긴장했지만 무사히 파나마 운하에 도착할 수 있었다.

L-15 잠수함이 단독으로 간 항로를 네 척의 S급 잠수함이
두 척씩 짝이 되어 뒤 따라 항진해갔다. 두 척 구성의 팀들은 각각 한 척씩의 미 콜베트 함의 호위를 받았다.

11월 18일 S-56이 북부 멕시코 바자 캘리포니아 앞 바다를 지날 때
야간 견시를 보던 신호병 니에말체프가 갑자기 외쳤다.

“우측 50미터!”

함교의 야간 견시 장교 스코핀은 즉시 진로를
최대한 바꾸도록 명령했고 어뢰는 겨우 50미터의 차이를 두고 비껴갔다.

함장 슈체드린은 반사적으로 함교 위로 올라와 상황을 지켜보고 동행함 S- 56에 적 잠수함의 출현을 알렸으며 호위하던 미 콜베트 함이 의심 추적 구역에 달려가 폭뢰를 투하
했으나 적 잠수함은 도주해버렸다.

이 비상 조우를 빼놓고 S급 잠수함들은 선행했던 L-15와 같이
파나마 운하를 무사히 빠져나가 카리브 해의 미 해군기지 코코 솔로에 기항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소련 잠수함들은 태평양에서 겪었던 일본 잠수함의
위협보다 휠씬 크고 치명적인 독일 U 보트 함대가 득시글거리는 대서양을 횡단해야 했다.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12월 2일 네 척의 소련 잠수함들은 
코코 솔로 미 해군기지를 출항했다.

-------------------------------------------------------------------

이 작은 해군 기지에서 미래에 미국 대통령 후보가
되는 존 맥케인이 1936년 탄생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일생을 바다에서 보낸 해군 가문이며 맥케인도 해군 조종사로 월맹 상공에서 격추되어 5년간 포로 생활을 했었다.

그는 지난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민주당의 오바마와 대결했다가 실패하였다.


                         코코 솔로 해군 기지-1942년 촬영

---------------------------------------------------------------------------


소련 잠수함장들은 미 해군이 제공한 카리브 해의 자세한
지도를 가지고 항해에 나섰다. 이 카리브 해도에는 독일 U 보트들이 출현했던 곳들이 정확히 표시되어 있었다.

소련 잠수함들은 먼저 쿠바 섬의 동쪽 끝에 있는 미 해군
관타나모 기지에 들렀다가 다시 북상 미 동해안을 따라 캐나다의 노바 스코셔 섬의 하리팍스까지 가는 방향을 잡았다.

잠수함대 네 척은 두 척씩 짝을 진 함대형을
그대로 유지하여 선두에 S-51과 S-56 팀이 먼저 출항하고 며칠 간격을 두고 S-54와 S-55가 뒤따르기로 하였는데 미국은 계속 각각의 잠수함 그룹에 한 척 씩, 두 척의 콜베트 호위함을 동행시켜주었다.

12월 18일 소련의 S급 잠수함 네 척은 미리 배치 된 캐나다 해군의
호위함들과 만나 노바 스코셔의 하리팍스 항에 입항하였는데 이 하리팍스에서 2주 앞서 블라디보스톡을 먼저 떠났던 L-15 잠수함을 만날 수 있었다. 

                          


                        하리팍스 항이 있는 캐나다 노바 스코셔 섬 


L-15는 나흘 먼저 도착해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L-15는 동료함인 L-16을 잃고 홀로 항해하여 이 곳까지 도착했기 때문에 S급 승무원들과 만나 반가운 해후를 했다.


1942년 12 월 28일. 이번에는
L-15와 S-51이 한 팀이 되어 먼저 하리팍스 항을 출항, 눈보라가 수시로 몰아치는 북대서양으로 향하였다. 그 뒤를 따라서 S급 잠수함들이 순차적으로 출항하였다. 12월 29일 S-54와 S-55가 뒤를 이어 출항했고 몇 시간 뒤에 마지막 함인 S-56이 홀로 뒤를 따랐다.

선두 팀인 L-15와 S-51은 북 대서양을 가로질러 가는
지름길인 제일 북쪽의 항로를 택했다. 이들 두 척이 중간 목표 기항지로 정한 곳은 얼음이 둥둥 떠있는 그린랜드의 해협을 통과해서 항해해야 하는 아이스 랜드의 레이캬빅 항이었다.

다른 3척의 잠수함들은 모두 영국 해군 기지가 있는 북대서양 반대 편 스코트랜드의 레사이스 항을 목표로 항해했다.

최북방 항로를 항해한 L-15와 S-51은 그린랜드의
아이즈 캡 수역에 도착하였는데 이 곳은 독일 U 보트의 출현이 빈번한데다가 북빙양의 폭풍이 거세 항해하기가 힘든 곳이었다. 결국 L-15와 함께 출발한 S-51은 폭풍으로 동료함 L-15와 헤어지게 되었고 홀로 항해하여 1943년 1월 12일 아이스랜드의 레이캬빅에 기항하였다.

 


                                                  레이캬빅항이 있는 아이스랜드 섬


다른 세 척의 잠수함들은 목적지였던 스코트랜드의 레사이스의 영국 해군 기지에 무사 도착하였는데 이들이 레사이스 기지에 정박하고 있는 동안 한 만남이 있었다.

그 해군 기지에 폴란드 망명 정부의 잠수함 ORP Sokol이 기항해 있었다. ORP Sokol는 원래는 640톤 급의 영국 잠수함 HMS Urchin이었는데 1940년 진수와 동시에 폴란드 망명 정부에 대여된 잠수함이다.[1945년 영국에 다시 반환되었다.]
  


                                      영국이 폴란드 망명  정부에 대여해준 ORP Sokol
 

이 잠수함은 폴란드 해군에 활용되면서 19척의 적 함선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였다.

ORP Sokol의 폴란드 함장과 장교들은 소련 잠수함대 사령관인
슈체드린과 브리타쉬코 등의 장교들이 주최한 만찬에 초대받는 기회를 가졌는데 이 회식에서 폴란드측 잠수함 장교 보구스라프 크라우칙 상위가 단연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전에 폴란드 잠수함 ORP Wilk의 함장이었는데 1940년 6월 20-21일 사이 야간에 독일 U 보트를 충돌로 침몰시켰었다. [ORP Wilk는 1,250톤으로 1929년에 프랑스에서 진수한 비교적 구식함이며 기뢰 부설을 주 임무로 했었다.]

------------------------------------------------------------------------

하지만 이 U 보트 격침에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독일 잠수함이 아니라 덴마크 잠수함이라던가 대형 부표라는 설이다.

-----------------------------------------------------------------------

레사이스에 기항하는 동안 소련 수병들은 영국 해군이 나포한
독일 잠수함 U-570을 관람할 기회를 갖기도 하였는데 U-570은 1941년 8월 27일 아이스랜드 남쪽 해상에서 영국 허드슨 폭격기의 공습을 받고 표류하다가 영국 해군에게 나포된 잠수함으로 독일군 승조원 44명도 전사자 없이 모두 포로가 되었었다.



1945 1월 17일 아주 추운 일요일, 홀로 아이스랜드의
레이캬빅항에 입항하였던 소련 잠수함 S-51은 마지막 종착지인 소련의 무르만스크를 향하여 바다로 나갔다.

S-51은 도중에 소련으로 향하는 연합군의 상선단 JW-2의 옆을 지나가야 했는데
강력한 대잠 호위를 받는 이 선단의 옆을 지나 가다가 호위 함대로부터 오인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컸지만 다행히 무사히 통과 할 수 있었다.

S-51은 1월 21일 밤 북극해의 바렌츠 해로 들어섰고
1월 24일 먼 곳까지 마중을 나온 소련 구축함 라줌프즈와 상봉하여 무르만스크 부근 포라노즈에 위치한 에카체린 해군 기지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S-51은 극동을 떠난 6척의 태평양 함대 잠수함 중 두 개의
대양을 건너는 17,000 마일의 긴 회항(回航) 끝에 북극해의 항구로 들어온 최초의 잠수함이 되었다.

북방 함대의 부사령관 고로우코 소장은 시간을 내서 에카체린
기지로 와서 용감한 S-51과 그 뒤를 후속해서 며칠 뒤에 도착한 S-56의 승무원들을 열렬히 환영했었다.



스코트랜드 레사이스 해군 기지에 입항했던 세 척의 소련 잠수함들은
날씨 관계로 2월 초까지 정박하고
있었다.
            

 

                                소련 S급과 L급 잠수함들이 기항했던 스코트랜드 레사이스


이들은 정박하는 동안 영국 BBC 방송에서 스타린그라드에서 포위되어 있던 독일 폰 파우루스 원수의 6군(30만명)이 소련군에게 항복했다는 뉴스를 듣고 환호하기도 하였다.

한편 S-51과 동행해서 아이스랜드의 레이캬빅 항으로 가던 L-15는 거친
북해의 폭풍우로 대파되어 수리를 위해 함수를 돌려 스코트랜드 레사이스 해군기지로 입항하여야 했다. L-15는 그 곳에 기항하고 있던 다른 S급 잠수함들과 같이 정박하며 수리를 받았다.

스코트랜드 레사이스 기지를 떠난 S-54와 Sㅡ55는 3월 8일
무르만스크 부근 포라노즈에 입항하였고 수리를 마친 L-15는 제일 늦은 3월 28일에야 소련의 항으로 돌아왔다. 휴식과 정비를 한 잠수함들은 3월부터 바렌츠 해에서 작전을 시작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먼 극동에서 2개의 대양을 건너 17,000 마일 떨어진 북극해의
  무르만스크까지 항해해 와서 진눈깨비가 내리는 바렌츠 해를 누비며 작전을 개시한 태평양 함대의 운명은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1943년 12월, S-55가 초계 항해 중 실종되었고 1944년 3월에는 S-54가 같은 해역에서 침몰하였다. 일본 잠수함에게 격침당한 L-16을 포함해서 먼 길을 온 잠수함대의 1/2이 손실된 것이다.



                                              블라디보스톡 해군 기지에 전시 중인 S-56


단, 슈체드린 중령이 지휘하는 S-56만은 북빙양 활동에서 14척을 격침하는 큰 성공을 거두어서 국민적 영웅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이 잠수함은 현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전시되어 있다.


소련의 잠수함대가 일본과 독일 잠수함들이 우글거리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통과하여 무사히 무르만스크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미국과 영국의 전폭적인 지원때문에 가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