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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추기경의 역사- 진짜 황제는 교황이다?|

구름위 2013. 2. 1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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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황제는 교황이다

 

천주교는 오랜 세월동안 “평신도 → 신부 → 주교 → 대주교 → 추기경 → 교황”의 피라미드식 성직계급을 유지하고 있다. 천주교의 성직계급은 고대 로마제국의 정치제도에서 유래했다.

 

가톨릭에서는 공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황(papst)을 부르는 칭호인 ‘파파’는 4세기 시리치오 교황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았던 초기 기독교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교황’이라는 제도를 두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이후 기독교가 국교가 되자 로마의 주교들은 ‘교황’이라는 특권계급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기발하거나 창조적인 것은 아니고 당시 로마의 황제 제도를 본뜬 것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교황 제도는 종교권력과 세속권력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묘책이었던 것이다.

 


▲ 위조 문서로 만들어낸 중세 교회의 역사
(왼쪽) 주교관을 쓴 베드로. 12세기 스페인의 카탈루냐에서 그려진 패널화. 교황(papst)을 부르는 칭호인 ‘파파’는 4세기 시리치오 교황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오른쪽)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Donatio Constantini). 교황의 이탈리아 통치권의 법적 근거가 된 이 문서는 15세기에 이르러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 『교황의 역사』(갑인공방, 2005)

 

 

교황은 6세기까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등 5대 주교 중 하나에 불과했다. 8세기 후반 로마의 성직자들은 가짜「콘스탄티누스의 증여」를 만들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경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여러 의식의 권리, 영토, 군주의 권리를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넘겨주었다고 조작했다. 이렇게 조작된 문서를 근거로 중세의 교황들은 세속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1160~1170년경에 제작된『파리대법전』에는 “진짜 황제는 교황이다.(Ipse est verus imperator)”라는 말이 적혀 있다.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퀼른 대법전』에도 “교황은 황제보다 위에” 있고 “진짜 황제”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교황은 지상의 권력자인 황제에게서 세속의 통치권을 얻은 것에 불과하였다.  

 

 

‘교황의 왕자’ 추기경 등장한 것은 6세기 이후

 

추기경이라는 새로운 특권계급은 교황보다도 늦게 발생했다. 추기경(Cardinal)이라는 말은 ‘돌쩌귀(경첩)’ 또는 ‘중추(中樞)’라는 뜻의 ‘카르도(cardo)'에서 유래했다. 처음으로 ‘추기경’이라 불렸던 사람들은 6세기 초 로마의 7개 지역에 있는 부제들이었다.

 

그레고리오 교황(590~604) 때 교회법 용어로 채택된 추기경은 8세기경 로마의 성직사들 사이에서 특권층으로 자리잡았다. 그들은 로마 교회의 행정과 교황의 전례에 참여했고, 교황이 살해당한 뒤 769년에 소집된 종교회의에서 오직 추기경만이 교황이 될 수 있도록 했다.

 

▲ 면벌부(indulgence)와 특전(Privilege)
(왼쪽) 면벌부(indulgence). 교황 레오10세가 1517년 성 페트루스 대성당 건립자금을 모으려고 면죄부를 대대적으로 팔자 루터는 공개적으로 이를 비난했다. 이후 교황이 1521년 루터를 파문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오른쪽) 교황 이노센트 3세가 1207년 10월 13일에 내린 특전(Privilege). 교황의 서명 아래 특전을 받는 당사자가 서명을 했다. ⓒ 바티칸 미술관
 

 

 

초기의 교황은 성직자나 일반 신도 가운데서 선출되었으며, 황제의 재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교황선거 기간 중에 뒷거래, 폭력, 뇌물 수수 등 부정부패도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교황 아가피토 1세(535~536) 같은 경우 부정 선거로 교황청 재정이 바닥나자 교회의 성기(聖器)들을 팔아치우기까지 했다.

 

1059년 교황 니콜라우스 2세는 추기경들에게만 교황선출권을 부여했고, 한동안 주교 추기경들이 교황선출권을 독점하기도 했다. 1179년의 제3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부터는 추기경 전체가 교황선출권을 가지게 되었다.

 

교황과 추기경이 강력한 특권을 가지게 됨에 따라 그들은 더욱 심하게 부패하고 타락해갔다. 성직을 수입의 원천으로 생각하여 매매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공공연하게 처(妻)를 거느리기도 했다.  
  

 

13세기 매춘부들의 단골 중 20%가 성직자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은 성직매매와 대처(帶妻)에서 멈추지 않았다. 13세기 프랑스 디종에서 매춘부들의 단골 중 20%는 성직자였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여 ‘성직자의 매춘부’라는 말이 생겼다.

 

심지어 포주로 나서서 매춘업을 일삼는 성직자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영국의 사우스워크에 있던 사창가 중 몇몇 업소는 윈체스터 주교 관할이었다. 이런 사실을 빗대어 셰익스피어는 사우스워크의 매춘부들을 ‘윈체스터의 거위’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의 은어로 매춘굴은 ‘수녀원’, 마담은 ‘수녀원장’, 그리고 매춘부들은 ‘수녀’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성직자들을 포함한 중세의 남성들은 틈만 나면 ‘수녀원’을 다녀왔다. 마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를 향해 ‘바빌론의 매춘부’라고 비난하면서 성직자들의 매춘을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져가자 오히려 매춘업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 그들은 틈만 나면 “수녀원을 다녀왔다”
(왼쪽) 루터의 초상화(1543). 루터는 가톨릭 교회를 향해 ‘바빌론의 매춘부’라고 비난하면서 성직자들의 매춘을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오른쪽) 1600년 파리에게 발간된「교황, 루터, 칼뱅」. 교황을 사이에 두고 칼뱅과 루터가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 Germanisches Nationalmuseum, Nuremberg
 

 

 

1600년 파리에게 발간된「교황, 루터, 칼뱅」이라는 그림을 보면, 교황을 사이에 두고 칼뱅과 루터가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칼뱅과 루터는 각각 교황의 양귀를 잡고 있고, 루터는 칼뱅의 턱수염을 당기고, 칼뱅은 성서로 루터의 머리를 내리칠 기세다. 당시 파리 사람들은 이 그림을 통하여 16세기를 휩쓴 종교전쟁이 얼마나 무지몽매하고 우스꽝스러운 밥그릇 싸움이었나를 냉혹하게 비판하고 있다.  
  

 

‘군주론’의 모델이 된 교황의 사생아 보르지아

 

많은 교황과 추기경들은 결코 도덕적으로 일반인들보다 뛰어나지 않았다. 살인을 통해 교황직을 얻은 세르기우스 3세(904~911)는 사생아를 낳았으며, 교황 요한 12세(955~963)는 호색을 일삼아 복상사했다.

 

교황 베네딕트 9세(1033~1045)는 백주 대낮에 살인과 간통을 자행했고, 순례자들을 강탈하다가 추방당했다. 교황 요한 23세(1410~1415)는 음행, 간통, 근친상간, 남색, 성직매매, 도둑질, 살인죄로 고소당했고, 300명의 수녀들을 겁탈했다. 바티칸 기록에 의하면 그는 자기 형제의 아내와 변태 성행위를 자행하였고, 수백명의 처녀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결혼한 여자들과 간음을 행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악마의 화신이라고 불렸다.

 

1471년 교황으로 선출된 식스투스 4세는 추기경이 된 후 끊임없이 인척들에게 직위와 돈, 토지, 권력 등을 베풀었다. 그의 조카 가운데 무려 여섯 명이 추기경이 되었고, 성직자가 아닌 인척에게는 교황령에서 이득이 많은 영주 자리가 부여되었다.

 


▲ ‘군주론’의 모델이 된 교황의 사생아 보르지아
마키아 벨리(왼쪽)와 체사레 보르지아(오른쪽)의 초상화. 보르지아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의 사생아로 태어나 발렌시아 대주교와 추기경이 되었다. 마키아 벨리는 야비하고 냉혹한 그를 이상적인 전제군주로 보고 『군주론』의 모델로 삼았다. ⓒ Uffizi 미술관
 

 

교황 이노센트 8세(1484~1492)는 여러 명의 정부(情婦) 사이에 16명의 사생아를 낳았다. 여러 명의 정부(情婦) 사이에 최소한 9명의 사생아를 둔 교황 알렉산드르 6세(1492∼1503)는 자신의 두 누이와 근친상간하고, 자기의 딸에게서 자녀를 두기도 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는 자신의 사생아 중에서 보르지아를 발렌시아 대주교와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보르지아 추기경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하고 냉혹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마키아 벨리는 그를 이상적 전제군주로 보고『군주론』의 모델로 삼기도 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교황권을 선물로 주셨으니 마음껏 즐기자

 

메디치 가문의 지오반니 추기경은 1513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레오 10세(1513∼1521)가 되었다. 그는 교황의 권좌에 오르자 사촌 동생 줄리아노 추기경에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교황권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을 즐기자!”고 말했다고 한다. 줄리아노 추기경은 훗날 220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된다.

 

바티간에서 행복한 쾌락을 누리며 엄청난 소비행각을 벌인 레오 10세는 로마의 모든 은행에 잔뜩 빚을 졌다. 또한 1517년 성 페트루스 대성당 건립자금을 모으려고 면벌부(indulgence)를 대대적으로 팔기도 했다. 루터는 공개적으로 교황 레오 10세의 이러한 행위를 비난했으며, 1521년 루터가 파문당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이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면벌부 판매 등에 뒤이은 종교개혁으로 끝났다고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가 기록해둔 교황과 추기경의 부패와 타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 “하느님이 우리에게 교황권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을 즐기자!”
라파엘로,「추기경 줄리오와 루이지 데 로시와 함께 있는 교황 레오 10세」(패널에 유채, 155×119cm, 피렌체, 우피치) ⓒ Uffizi 미술관
 

 

 

1831년 조선교구 창설을 지시한 교황 그레고리 16세(1831~1846)는 철도 개설을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던 보수주의자였다. 그 뒤를 이은 비오 9세(1846~1878)는 ‘교황의 무오류성(無誤謬性)’을 주장한 반역사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인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 베를린 주재 로마교황대사였던 케사레 오르세니고 대주교와 로마 소재 독일 대학 학장이었던 알로이스 후달 대주교는 나치의 동조자였다.

 

또한, 바티칸 주재 독일대사이자 교황 비오 12세와 오래도록 친분을 유지해왔던 에른스트 폰 바이츠자케(Ernst von Weizsacker)도 자신이 1943년 바티칸에 부임할 때 교황의 리무진이 와서 그를 태우고 교황 깃발과 나치 십자기장을 나란히 펄럭이면서 ‘화기애애하게’ 알현장으로 향했다고 자랑스럽게 토로하기도 했다.

 

 

특권을 없애고 포용과 관용의 정신으로 시민 곁으로
 
 

▲ 추기경의 문장(紋章)
김수환 추기경(왼쪽)과 정진석 추기경(오른쪽)의 문장. 추기경의 문장은 5단이다. ⓒ 천주교 서울대교구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사제들은 미사에서 라틴어를 사용함으로써 주술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천주교 성직계급의 상징들을 통하여 여전히 특권을 유지하고 있다.

 

원시 기독교에서 미사에 사용된 언어는 아랍어, 그리스어, 곱트어 등 그 공동체가 사용하고 있던 언어였다. 라틴어는 로마에서만 사용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는 전례가 첫 번째 주제로 선택되어 라틴어 대신 자국어를 사용하자는 사안을 논의했지만 바티칸 관리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천주교에선 성직계급에 따라 교황은 흰색, 추기경은 빨간색, 주교는 진홍색, 일반 사제는 검정색(혹은 흰색) 수단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장(紋章)의 술의 숫자에 따라 성직자의 직책이 구분되기도 한다. 술이 3단이면 주교, 4단이면 대주교, 5단이면 추기경을 가리킨다. 교황은 술이 없는 대신 예수가 제자인 성(聖) 베드로에게 준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두 개의 열쇠가 있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사제들은 일반인들과 똑같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오락을 하거나 영화 구경을 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제들이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으며, 멋진 차에 값비싼 음향기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의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은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의 부정적인 측면과 비교해 볼 때 그다지 심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종교가 당대의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도 남미, 필리핀,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천주교는 특권을 폐지하고 관용과 포용의 정신으로 시민들 곁으로 다가가고 있다. 천주교가 지닌 진정한 종교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서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