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을 에스파냐, 동쪽을 포르투갈
법률에 밝은 로드리고(알렉산드르 6세)는 외삼촌 알폰소 보르자가 교황 칼릭스투스 3세로 즉위하자, 자기 성을 보르자로 바꾸었다.
교황은 1492년 유대교도와 이슬람됴도를 추방할 목적으로 종교재판을 열었던 '가톨릭 군주' 페르나도 왕과 이사벨 여왕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당시 그 부부는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도 그들 편에 서야 했다.
교황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경계선은 북아프리카 대성양의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100리그(약 400마일) 떨어진 지점을 기준으로 정해주었다.타협을 위해 에스파냐 북서쪽의 작은 도시 토르데시야스에서 포르투갈 측과 에스파냐 측이 만났다. 협상 과정을 능란하게 주도한 포르투갈대표는 그 경계선을 서쪽으로 270리그 정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경계선은 제도 서쪽 370리그 지점, 서경 46도 30분 위치로 옮겨졌다.
1700년대가 될어서야 유럽은 경도를 젤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집대성한 수학적 , 천문학적 계산법은 수백 년 동안 외면당하다가 1410년에 뒤늦게 재발견 되었다.
두 종류의 지도가 세상에 나와 발전해 나갔다. 하나는 실제 항해사들의 관찰과 측량에 따른, 단순하지만 정확한 '포르톨라노'해도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론자들이 만들어낸 좀더 정교한 지도이다.
항해사들은 대부분이 문맹이었고 하층 계급 출신으로 고용된 인력이었다.
육로를 통해 향료를 거래해온 아랍 상인들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동나아시아가 원산지인 계피와 후추와 정향과 육두구를 아프리카에서 구해왔다고 속이며 정확한 장소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들의 매매가를 올려 부를 챙겼다.
명성은 몰라도 부를 누릴리면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야한다. 금이 있으면 왜 부를 누리는가? 그 통용되는거사 사회의 돈 구조 금이 돈으로 바뀌어 지ㅡㄴ것, 그럼 왜 다른이는금을 구입하려 했을까? 왜 금에 대해 많은 액수의 돈을 해당한다고 하지..
엔리케 왕자가 설립한 곳에 모인 학자,전문가들은 아랍인들의 범선을 참고해 삼각범선(삼각돛을 뜻하는 단어 lateen은 'Latin'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을 디자인했다. 내항성이 강하고 흘수가 얕고 돛이 움직이는 이 돛배는 바람을 이용해 자유롭게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질에네스 , 알폰소 곤살베스 발다야
디아스는 희망봉을 발견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대가로 그가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10년 뒤, 마누엘 1세가 즉위했을 때, 바스코 다 가마는 디아스의 항로를 따라 아프리카 남동쪽 해안에서 모잠비크를 발견했다. 거기서 식량을 발견한 뒤에 동쪽으로 더 나아갔고, 그렇게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마누엘 왕은 다 가마에게 인도의 총독 자리만을 내주고, 그의 몫으로 약속했던 부와 명예를 독식하며 스스로를 '기니, 에티오피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의 제왕'으로 칭했다. 유럽의 다른 왕조에선 그런 마누엘을 '잡화상 왕'이라 업신여겼고, 다 가마도 자신이 충성을 바쳐온 왕실로부터 푸대접받는 현실에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당시 많은 탐험가들이 그랬듯이, 몰인정한 마누엘 왕에게 질려서 조국을 등졌다.
마누엘 왕은 과학자, 숙련공, 상인, 학자, 의사, 우주론자로 활약하던 포르투갈 내의 유대인에게 가혹했다. 1496년 마누엘 왕은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딸을아내로 삼으려 했는데, 결혼의 조건은 1492년 에스파냐 처럼 유대인을 추방함으로써 포르투갈을 '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귀중한 유대인 인력을 잃고 싶지 않았던 마누엘 왕은 기독교 개종을 권장했다. 사실 권유라기보다는 강압에 가까웠다. '신기독교인' 으로서 포르투갈의 유대인들은 사회에서 여전히 높은 지위를 차지했고, 특히 부라질 무역 일을 도맡았다. 이런 원만한 조정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는 극성을 부렸고, 급기야 1506년 리스본에서는 유대인 대량학살이 벌어졌다. 마누엘 왕은 이 사건의 책임자들을 처벌했지만, 고통과 슬픔에 젖은 유대인들은 대거 네덜란드로 떠났다.
마젤란의 어머니 알다 데 메스키타로 모스크(이슬람 사원)라는 뜻이 담긴 '메스키타'는 유대계 혈통을 숨기려는 개종자들 사이에 흔한 이름이었다. 그녀가 유대인이었다면, 유대인들의 법에 따라 그 아들 역시 유대인으로 간주해야 했다. 그러나 마젤란과 그의 가문은 독실한 가톨릭임을 네세우며 이런 의혹을 부정했다.
1504년 11월 13일 마누엘 1세는 신대륙 발견과 탐사 계획을 발설하는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1500년에서 1550년 사이 포르투갈에서는 발견과 탐사에 대한 어떤 서적도 출간되지 않았다.
1513년 모로코의 도시 아자모르에서 매년 포르투갈에 바치기로 했던 공물 납부를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모로코의 통치자 물리 자얌은 막강한 군대를 동원해 이 도시를 수비했다. 이를 일종의 도전으로 간주한 마누엘 왕은 500대의 군함, 1만 5천명 군이으로 구성된 사상 최대 최강의 군대를 파견했다.
전쟁은 거듭됐고, 아랍인들은 20만 마리의 염소와 낙타와 말을 포르투갈에 넘겨줬다.
포르투갈 동부의 산악도시코빌라에서 태어난 팔레이로는 무척 명석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미치광이로 보였을 만큼 정신 상태가 불안정했다. 그 시대 다른 학자들 처럼 그도 개종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쉰한살의 마누엘 왕은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조만간 왕좌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랑하던 아내를 출산중에 떠나보냈고, 아들 주앙을 위해 퇴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들에게 배신감을 느껴 왕위를 지키기로 했고, 아들의 스무살 짜리 약혼녀이자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의 여동생인 레오노르왕의 결혼을 서둘렀다. 이 와중에 레오노르가 옛 정혼자인 주앙 왕자와 은밀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1517년 9월, 마젤란은 최후의 수단으로 다른 나라에게 일해도 괜찮냐고 물었는데 놀랍게도 마누엘 와은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답했다.
1517년 10월 20일, 그는 에스파냐 남서쪽에 위치한 안달루시아 지방 최대의 도시 세비야에 도착했다.
마젤란은 에스파냐어가 유창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주로 필담으로 의사 소통을 하였다.
마젤란과 결혼한 베아트리스는 60만 마라베디(1마라베디는 약 12센트)의 지참금을 가져왔다.
1518년 카스티야의 수도는 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어린 왕 카를로스를 보좌하던 섭정 시메네스 데 시스네이로스 추기경이 죽었는데, 독살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추기경은 3만 2천명의 군사를 배치해 호위하는 등 왕의 안위를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었었다. 그의 공백이 두려웠던 카를로스는대신 플랑드르 성직자들에게 모든 걸 의존했다.
세랑은 마젤란에게 보낸 편지에서 향료 제도의 위치를 실제보다 훨씬 더 동쪽에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정의된 대로, 향료 제도가 에스파냐의 반구에 있다고 했다.
마젤란에게는 10년간 향료 제도의 독점 관할권이 주어졌다.
세비야는 당시 무역 중심지였던 제노바나 밀라노와 견줄 만한 곳이었고, 런던보다 인구가 2배나 많았다. 그러나 항구로서 세비야의 한계는 과달키비르 강이 매우 좁다는 것이다. 대서양으로 나아가려는 배는 먼저 이 강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작고 가벼워야 했다.
마젤란과 팔레이로 두 사람을 모두 선장으로 임명했다. 당시의 항해는 워낙 큰 일이라서 선장이 두엇 존재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공동 선장
임용은 예기치 않게 분쟁의 씨앗이 됐다. 이들 선장에게 부여된 권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포르투갈 왕실에선 마젤란이 왜 그들은 배신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마누엘 왕은 마젤란을 비방하면서도 포르투갈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래서 대사인 알바로 다 코스타를 비공식적으로 파견했다. 이때는 마누엘 왕이 카를로스의 누이 레오노르와 결혼하려는 시점이었다.
마젤란은 포르투갈로 돌아가는 순간, 감옥에 갇히고 사형당할 것라고 여겼다.
코스타는 마누엘 왕에게 쓴 편지에서 마젤란과 팔레이로가 포르투갈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카를로스 왕이 그들의 귀향을 막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코스타는 편지 내용이 비밀에 부쳐질 거라고 믿었지만, 소문은 멀리 퍼져 카를로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마젤란은 여느 선장과 달린 물품을 배에 싣는 것과 같은 말단 선원의 일까지 직접 관리했는데, 그러 깐깐하 스타일이 말썽이 됐다. 항해사는 물론 부두 노동자들과도 얼굴을 맞대고 일을 풀어가던 마젤란은 그 과정에서 그들이 비협조적이고 무례하다고 느꼈다.
마젤란은 돛대에 문장(포르투갈 왕의?)을 달았다.
에스파냐의 관리들에게 수난당한 마젤란의 항해사 중 하나는 칼에 찔리기도 했다. 그의 체면과 권위는 손상될 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공공장소에서 이런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리스본으로 이런저런 소식을실어 나르는 포르투갈첩자에게 현장을 들키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1519년 4월 4일, 왕은 또다른 관리 후안 데 카르타헤나를 마젤란 프로젝트에 합류시켰다. 그는 대주교 폰세카의 조카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폰세카의 친아들이다. 이 탐사에 사비를 투자하기도 한 그는 마젤란보다 더 많은 급료인 11만 마라베디를 받게 돼 있었다. 무엇보다 카르타헤나는 항해 과정의 모든 상업적 결정권을 갖고 있엇다. 그는 왕실의 수석 회계사이자 국고 대리인이었다. 게다가 그의 임무는 또 함대가 추진한 통상 거래가 국가 수익을 최대한 고려하는 것인지를 세세히 감독하고 기록하는 것까지 포함돼 있었다. 그는 모든 물품 거래 내역을 점검하고, 일일이 승인 해야 했다. 사실 카르타헤나에게 하달된 명령은 기존의 모든 계약을무효화하는 것이었다.
마젤란과 팔레이로를 신임하지 않는 에스파냐 부하들은 함대의 최종 결정권자가 카르타헤나라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부족한 음식과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라도 워쥔에게 우호적일 필요가 있었다. 마젤란은 포르투갈 반구에서라면 아랍인을 잡아들이고 노예로 팔아버릴 수도 있었는데, 이는 토르에시야스 조약을 슬그머니 위반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반면 에스파냐 반구로 넘어오게 되면, 원주민들을 예우하고 그들의 지도자와 정식으로 협상을 해야 했다. 상대가 지나치게 호전적으로 나오는 경우에만 경고 차원에서 무력을 가할 수 있었다.
카를로스는 마젤란에게 워주민을 경계하라면서도("절대로 그들을 믿어선 안된다. 무장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예의를 갖추라고 전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속여선 안 된다........ 또한 약속을 깨서도 안 된다......그들을 해쳐선 안 된다....다만 너희를 해치는 자는 처벌하라."
민감한 사안이 하나 더 있었다. 마젤란과 팔레로이는 부하들이 원주민 여성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감시해야 했다. "누구도 워주민 여성과 관계하지 않도록 하라....원주민들이 반발하고 공격할 수도 있다."
팔레이로를 내치기로 한 결정은 사실상 카를로스가 아니라 대주교 폰세카가 내린것이라 할 수 있다.
선원들의 필수 폼목은 와인이었다. 와인은 대개 코르크와 송진으로 마감한 파이프가 달린 커다란 나무 통에 담았다. 선원들의 요긴한 식량인 건빵은 겨가 섞인 거친 밀가루를 뜨거운 물(찬물은 절대 안 쓴다)로 반죽해 두 번 구운 과자이다. '비스코초'라 불리기도한 딱딱한 비스켓은 판매하기 한 달 전쯤 만들어 저장해둔 것이었다.
고급 선원들은 사과와 비슷한 과일인 퀸스(유럽산모과, 괴혈병에도 효과가 있다)로 만든 잼, '카르네 데 멤브리요'를 따로 준비해왔다. 항해 도중 식량이 떨어지면 퀸스 젤리가 괘 유용했는데, 마젤란의 함대도 예외도 아니었다. 항해 필수품 중에는 식음료의 방부제로 쓰이는 식초도 있었다.설탕은 무척 귀해서 음식에 쓰진 않았다 단맛을 내려면 설탕보다 훨씬 저렴한 꿀을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세비야에는 유능한 선원이 드물었고, 길고 험한 항해를 희망하는 사람은 더 드물었다.
에스파냐 선원들은 포르투갈 사령관 밑에서일하고 싶어하지 안는다는 사실을, 마젤란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같이 탑승한 보조 선원중에는 마젤란의 사생아인 크리스토방 레벨로가 있었다.
과달키비르는 강을 내려오면 무어인의 집단 거주지인 히오안 데 파락스가 나온다.
마젤란은 선원들이 이견이나 불만을 품을까봐 항해의 진짜 목적을 발설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출신의 탐험가로서 마젤란은 탐사의 중요한 사항들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게 바로 포르투갈식이었다.
인도는 괴이한 생명체들이 넘쳐나는 곳으로 소개됐다.
프레스터 존 전설은 1165년 기도교 지도자들을 흥붕시킨 장문의 편지로부터 비롯됐다.
"텐둑이라고 불리는 프레소터 존의 광대한 평야에서 벌어졌고," 역사상 가장 맣은 병사가 싸운 전쟁이었다고 소개했다. 이곳에서 프레스터 존은 칭기즌칸과 전쟁을 했다고 마르코 폴로는 얘기한다.
'인도는' 단순히 인도 대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세 시대 사람들에게는 인도를 북동 아프리카까지 포함하는지역으로 생각했다. 인도는 몇몇대륙을 포함할 만큼 넓은 개념이었다.
콤바르라는 네버랜드 후추 숲이 이야기가 있다.
1567년에 마젤란의 후계자들은 그의 재산을 둘러싸고 싸움이 일어난적이 있었다.
18세기 이전만 해도 포르투갈에서는 남자는 아버지의 성을 따랐지만 여자들은 마음대로 성을 정했다.
유럽 지역에서 새 달력으로 교체하는 데는 2세기가 넘게 걸렸는데, 개신교 국가들이 변화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10일을 삭제해야 했다. 율리우스력에서 1582년 10월 5일은 그레고리력에서 1582년 10월 15일로 바뀌었다.
함선에서는 정오를 하루의 시작으로 생각했다.
1패텀=6피트=1.8미터 , 1에스파탸리그(리과)는 약4마일(6.4킬로미터) , 정향 1바아르는 406파운드(184킬로그램), 1킨탈=100파운드(45킬로그램)
1카티(중국식단위)=1.75파운드(794그램), 옷감 1브라사=5.5피트(1.6미터), 1마라베디는 약12센트(117원)
과달키비르 강은 세비야의 해운업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항해가 수워하지 않은 위험한 강이다.
소변을 볼 때에는 바다를 보고 서서 누고, 좌변기는 배의 앞뒤 난간 위에 있는데 좌변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꽃을 의미하는 '하르디네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최말단 계급은 2인 1조로 이뤄진 급사들이었다. 급사는 대개 여덞 살 정도의 어린애로 여다섯 살을 넘지 않았다. 고아들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출신이 다 같지는 않았다.
급사 바로 위의 계층이'그루메테스'라는 견습 선원으로, 하는 일이 가장 많았다. 대부분이 열일곱에서 스무 살 사이의 청년들이었는데, 닻줄을 감거나 풀고, 주돛에 올라가 망을 보며, 보트의 노를 젖고, 도르래와 기중기 케이블과 닻 드의 장비를 다루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첫 항해를 무사히 마친 견습사원은 항해사와 갑판장과 지휘관이 서명한 '선원' 자격증을 받았다. 그 순간부터는 '프로' 선원으로 일할 수 있었고 보증 기간은 20년이나 됐다.
전문가로 이발사가 있었다. 사실 머리와 수염을 다듬는 것은 그가 맡은 가장 사소한 일이고, 그는 치과 의사로서, 또 내과 의사로서 선원들을 돌보고, 온같 야품과 민간 요법을 썼다.
요리사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는 건 뱃사람들이 요리사라는 직업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보통 선원으로 높이 진급하더라도 항해에 꼭 필요하고 희귀한 이력이었던 포수 같은 전문가보다 지위가 낮았다. 포수는 대포와 화약과 포탄을 안정하게 관리하고, 녹슬지 않게 닦으며, 불시의 전투에 대비했다. 포수는 플랑드르인, 독일인, 이탈리아인이 많았다.
왕의 대리인으로서 선상의 치안을 책임지는 알과실(하사관) 등은 관리자 그룹에 속했다.
선원들의 일상에 지침이 된 것은 에스파냐의 항해법인 콘술라도 델 마레 이다. 이 지침에는 선원들은 일주일 '일요일, 화요일, 목요일' 에 고기를 먹게 돼 있었다. 그밖의 다른 날은 '오트 밀죽과 빵을, 고기를 먹는 사흘은 아침과 저녁에 와인을 배당한다'고 정해 두었다.
마젤란이 부하들에게 나눠준 와인의 양은 아마 1인당 하루 2리터 정도 였을 것이다.
카나리아 제도에 머무는 며칠 동안 마젤란은 서둘러 식량을 보충했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비열한 현지 상인들이 선적 물품을 속인 것도 몰랐다. 그들은 함대에 넘긴 물품의 양을 터무니없이 부풀렸고, 품질도 기준 미달인 것을 내보냈다.
마젤란은 마누엘 왕이 그를 잡아들이려고 두 척의 쾌속선을 급파햇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젤란의 장인 디오고 바르보사는 함대의 선장들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고, 그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띄었다.
뒤에 발란의 주동자는 우려했던 대로 폰세카 주교의 조카(사실은 친아들인) 카르타헤나 이게 된다.
마젤란은 쉬지 말고 가라고 재촉했다. 뒤쫓아오는 포르투갈의 쾌속선을 다돌리려면 최대한 멀리 빠르게 가야 했는데, 이러다 보니 계획도 바뀌었다. 함대는 대서양 서쪽으로 건너가지 않고, 아프리카 해안을 끼고 그냥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마젤란의 배를 뒤따르던 산안토니오 호의 선장 카르타헤나는 이 결정에 반발했다.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이 포르투갈 추격대를 따돌리고 함대를 구하려고 항해를 바꿨다는 사실을 몰랐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자 기상에 문제가 생겼다. 날씨가 변덕스러워 진것이다. 참고할 항해도도 없었고, 암초의 위치와 기상 상황도 알 수 없었다.
마젤란은 배급을 줄이기로 했다. 1일 식수는 4파인트(0.473리터)로, 와인은 2파인트로 줄였다. 건빵도 1파운드 반(1파운드는 456그램)으로 줄였다. 다른 사항을 결정했을 때처럼 마젤라는 배급량을 줄이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서 선장들과 선원들은 분노하고 동요했다.
에스파냐 선장들은 본격적으로 반역을 계획했다. 그들은 노골적인 무력 충돌을 피하는 대신 마젤란의 열등감과 무력감을 자극하기로 했다. 마젤란은 왕에게서 절대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내세워 선장들의 반감을 샀고, 그러게 스스로 폭동의 빌미를 주고 있었다.
한편 빅토리아 호의 지휘관인 시칠리아 출신의 안토니오 살라몬이 급사인 안토니오 히노베스(소년임)를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본래 선원들 사이에서 은밀히 일어나는 이런 것에 문제 삼아 처벌하는 선장을 드물었다. 함대의 법정에서는 법정이 열렸고 살라몬을 교수형에 처하기로 했다. 사형 집행일은 몇주일 뒤인 12월 20일로 결정됐다.
산티아고 호의 선장 세라노을 제외한 나머지 선장들은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다.(산안토니오 호의 카르타헤나, 콘셉시온 호의 케사다, 빅토리아 호의 멘도사)
12월 13일, 함대는 풀숲이 무성하고 아름다운 세인트루시 만으로 들어가 제뉴어리 강 어귀로 다가섰다. 리우데자네이루를 찾은 것이다.
마젤란이 도착했을 무렵에도 여러 가지 방언을 쓰는 과라니 인디언이 40만 명가량 존재했다. 안데스 지역은 물론 남아메리카 대륙에 널리 퍼져 있던 과라니 인디언들은 오두막에서 살았고 12세대 정도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뤘다. 일부 다처체가 도입돼 있긴 했지만 한 일은 아니었다. 참고로 전에 베스푸치가 만났던 부족도 과라니 부족인듯하다.
'과라니' 인은 스스로를 '사람'을 뜻하는 말 '아바'로 불렀다.
살라몬의 목을 매달았다. 이 소름 끼치는 광경을 접한 뒤에 마젤란에 대한 선원들의 반감은 더욱 커졌다.
마젤란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동성애 관계가 드러날 경우 항해의 전통이 그렇듯 알고도모른 척 눈감아 주기로 했다.
마젤란은 리우데자네이루를 떠나기 전에 카르타헤나가 반여괴로 물러난 자리를 대신하던 안토니오 데 코카를 몰아내고, 항해 경험이 별로 없는 알바로 데 메스키타를 선장으로 임명했다. 세비야를 떠나올 때만 해도 보조 선원에 불과했던 메스키타에게 밀려난 코카와 카르나헤나는 이 파격적인 임용에 심한 모욕을 느꼈다. 그들은 마젤란이 '족벌주의'에 치우쳐 있다고 비난했는데, 그도 그걸 것이 메스키타는 마젤란의 사촌이었다.
선체에 서식하는 배좀벌레는 배를 약하게 만드는 해충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실제로 마젤란 일행의 배 한 척도 이 때문에 심각하게 부식돼가고 있었다.
세인트줄리앙 항에서 길고 추운 겨울을 보낼 일이 걱정이었던 마젤란은 선원들의 배급량을 줄여나갔다. 배에는 '거위'와 '바다늑대' 고기가, 항구연아에는 물고기가 넘쳐났는데도 말이다.
4월 1일 부활절 미사시에 마젤란은 빅토리아 호의 선장 멘도사 역시 반역의 편에 섰음을 확신하게 됀다.
멘도사를 사체를 갈가리 찢은후에도 마젤란의 잔인무도한 행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권위와 카를로스 왕의 명예를 욕보인 반역자들에 대한 마젤란의 복수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고문을 시도하였다.
에르난도 모랄레스에게 가한 고문은 더 가혹했다.
청소를 마치고 식량을 다시 실으려던 순간, 그들은 세비야와 카나리아 제도의 상인들에게 속아서 식량을 부족하게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거래명세서만 보며 1년 반은 버틸 수 있고, 향료 제도까지 항해를 계속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 분량의 3분의 1을 받은 것이다.
산티아고 호가 난파되고 선원들이 조난당한 일은 마젤란에게 부활절 반란보다도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세인트줄리앙 항에는 겨울이 빨리 왔다. 마젤란은 부하들을 시종 바쁘게 부렸고, 여가는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에겐 살아남는게 문제였다.
부하들을 바쁘게 부릴 일을 찾던 마젤란은 해안에 사람을 보내 돌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대장간을 만들어 함선의 금속 부품들을 수선하고 정비하게 했다.
마젤란 함대가 만난 '거인'은 테우엘체족 이다.
마젤란은 승객, 노예, 밀항자를 태워선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기고, 원주민 인질 2명 카를로스 왕의 노예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마젤란은 세인트줄리앙 항에서 8월 24일 닻을 올렸다.
수백만 년 전, 두개의 지반은 남극과 가까운 남아메리카 최남단에 특이한 지형을 만들어냈다. 오랜 세월 동쩍의 지반과 충돌한 서쪽의 지반이 밑으로 내려가, 동쪽 바다는 1500피트 깊이였지만, 서쪽 바다는 훨씬 더 깊어지게 되었다.
안데스 산맥의 남단에 있는 서쪽 땅은 습기를 많이 머금었고, 동쪽 땅은 지형이 부드럽고 대기가 건조한 편이었다.
날씨는 풀려가고 있었지만, 8월 내내 너무 많은 손실과 고통을 겪은 나머지, 두려움을 모르는 마젤란도 위축되고 말았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젤라은 적도 부근에서 봄이 올 때까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마젤란은 또 한번 도중 하차를 결심했다. 이어진 6주일 동안 선원들은 낚시를 하고, 잡은 고기를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 저장하느라 바빴다.
1520년 10월 18일, 마젤란은 다시 대양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향료 제도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러다가...마침내 해협을 발견했다.
10월 21일
사실, 마젤란 일행은 지난 수개월 동안 그곳(해협)을 배회하고도 그냥 지나쳤었다.
그는 이 해협(1만 1천 처녀봉:마젤란이 해협에 붙인 이름)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리스보아의 항로정보를 갖고 있었을 것이고, 이 전설적인 해협의 위치를 지도에서 보았을 것이다.
마젤란이 베하임의 지구본(최초로 지구본을 만든 항해가이자 지리학자)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요하네스 쇠네르는 1515년과 1520년에 지도를 제작했는데, 쇠네르의 지도는 아메리카 대륙을 통과하는 해협의 위치를 대략이나마 암시하고 있다. 지도에 표시된 파나마 해협은 실제 해협에서 수마일 북쪽에 그려져 있다. 쇠네르는 남아메리카의 서해안만은 제대로 묘사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여기서부터는 알려지지 않은 땅(terra ulterior incog.)' 이라고 적었다.
쇠네르는 당대의 다른 지도 제작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광대한 태평양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작은 만으로 축약 묘사했다. 중국을 아메리카 대륙 지척에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지도에는 향료 제도가 에스파냐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표시해놓았다.
마젤라 일행은 비롯 이곳의 원주민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훗날 찰스 다윈은 남아메리카 남단의 푸에고 인디언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
고무된 선장들과 항해사들은 밀고 나가자고 결의했지만, 그중 한 사람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산안토니오 호의 항해를 맡게 된 에스테방 고메스였다.
포르투갈 출신의 고메스는 마젤란과 더불어 1517년에 포르투갈을 저버린 인물이었다. 그는 마젤란이 신임하는 최측근 중 한 사람 이었지만, 자기 야심을 위해 마젤란과의 관계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세비야에 도착하기 몇달 전, 항해사 자격을 인정받는 그는 자체적으로 몰루카 함대를 꾸린 바 있다. 그런데 성사 일보 직전에 항해 경험도 더 많고, 베아트리스 바르보사와의 결혼으로 막가한 인맥을 갖게 된 마젤란이 카를로스 왕 앞에 나타난것이다. 1519년 4월 19일, 고메스는 마젤란 함대의 수석 항해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함대를 이끌고자 하는 욕망이 커졌고, 마젤란에게 복종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마젤란은 고메스의 야심을 알아챘기 때문인지, 부활절 반란이 일어난 뒤에도 산안토니오 호의 선장 자리에 그를 임명하지 않았다. 항해사로서 경력이 일천한 알바로 데 메스키타를 임명한 것이다. 고메스는 그를 보좌해야 했다.
산안토니호 호의 항해는 산 너머 산이었다. 선장인 메스키타는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기 대문에 고메스가 항해를 주도하다시피 했다. 가예고의 증언에 따르면, 고메스와 그의 선원들은 "이 지루하고 회의적인 항해에 진저리를 냈다"
1520년 10월 28일 몰루카함대는(이번 마젤란이 이끄는 함대의 본래 이름)엘리자베스 섬이나 도슨 섬에 함선을 정박해 두었다.
산토니오 호는 마그달레나 만으로 들어갔다. 마젤란은 나흘 안으로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산안토니오 호는 엿새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마젤라은 안트레스 데 산 마르틴을 부러 자문을 구했다. 별자리를 살펴본 그는 산안토니오 호가 에스파냐로 가고 있으며, 선장이자 마젤란의 충신인 메스키타는 감옥게 갇혀 있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그의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산안토니호가 그냥 에스파냐로 가버린 것이었다.
마젤란은 이런 사태를 예측하지도 대비하지도 못했다. 산안토니호와 그 선원들이 그렇게 사라져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산안토니오 호는 함대에서 가장 큰 함선이어서 식량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산안토니오 호의 사정은 마젤란이나 산 마르틴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선장 메스키타는 다시 돌아가려고 애를 썼지만, 해협의 복잡한 지형 때문에 일행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 함선에 배치된 헤로니모 게라의 임무는 아로(이번 몰루카 함대에 카를로스 왕에게 돈을 대준 자)의 관심사를 찾아서 보고 하는 것이었다.
자신감을 잃은 마젤란은 항해를 계속할지, 고메스가 주장한 것처럼 에스파냐로 돌아가야 할지 부하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11월 2일, 마젤란은 빅토리아 호의 선장 두아르테 바르보사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부하들을 불러모으면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집 센 마젤란은 세인트줄리안 항에서 행한 오랜 재판과 잔인한 처형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젤란은 자신이 완전히 고립돼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11월 23일 몰루카 함대는 다시 닻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진했다.
드디어 태평양이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중국 땅에 닿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항해 막바지에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이뤘는지 알지 못햇고, 결국 일행을 엉뚱한 데로 이끌었다. 반면 마젤란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태평양은 당시에 서해라고 불렀다.
마젤란은 머쟎아 향료 제도에 닿을 것이고 그 다음엔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기만 하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12월 18일 마젤란은 마침내 항로를 바꾸었다. 그즈음 그들은 칠레 산티아고 근방의 후안페르난데스 제도와 대륙 사이을 통과하고 있었다.
남반구에서 코리올리의 히이 적도 쪽에서 강해진다는 원리는 마젤란 일행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들은 북진할수록 가장 안전적인 덕을 보게 될것이다.
코리올리가동에서 서로 분고 남쪽에서는 바람이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불었다.
그 무렵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병약해지고 있었다. 그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원인은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다. 병이 깊어 갈수록 그는 십자가에 의지했다. 피가페타가 지니고 다니라고 준 십자가에 입을 맞추며, 그는 자신의 병이 치유되기를 기원했다. 그는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대화가 점점 신앙에 국한되면서 피가페타는 그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권했다. 본명을 알 수 없는 그는 바울로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함대는 부족한 식량과 물을 보충할 만한 섬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비키니 섬등 마셜 제도의 북쪽으로 배를 몰았다.
파타고니아에서도살해 소금에 절인 물개고기는 썩어서 구더기가 들끓었다. 구더기는 돛과 장비를 갉아먹었고, 선원들의 옷도 못쓰게 만들었다. 피가페타는 식량이 얼마나 부족하고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쥐는 한 마리에 1.5다가트에 거래됐는데, 그조차도 없어서 못 먹었다. 선원들 사이엔 쥐고기가 귀혈병을 예방한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에 비싸게 거래되었다. 괴혈병은 선원들을 가장 심하게 위협하는 질병이었다.
1521년 1월 24일 처음 섬을 발견해 상륙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실패했다.
2월 4일, 마젤란은 작은 섬 하나를 하나를 또 발견했다. 미크로네시아의 캐롤라인 섬인듯 하다. 함대는 섬으로 다가가서 정박할 곳을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쇠약해진 선원드른 무시무시한 상어의 출연에 참담한 심경이었다. 평소 대담하고 단호하고 도전적이던 마젤란도 태평양 횡단이 길어지면서 절망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급기야 그는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지도들을 바다로 던져버렸다.
빠르게 북진하던 그들은 2월 13일 적도를 넘어섰다. 이 즈음 마젤란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예정대로라면 그들은 오래 전에 향료 제도에 도착했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마젤란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규정한 포르투갈의 영해로 진입하고 있었다.
3월 6일 새벽 6시경, 수평선 너머로 두 개의 섬이 나타났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세번째 섬이 나타났다.
드디어 상륙한 섬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이 정박한 섬은 지금의 괌이다.
이곳에서 보이는 배 프로아(proa)는 '나는 프로아'로 알려진 기동성이 있는 카누로서 20노트까지 속력을 낼 정도로 매우 빨랐다.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생겼다.
이런 난리가 벌어지는 동안 두 번째 원주민 무리들이 푸른 물결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음식을 가득 실어온 그들은 굶주린 마젤란의 선워들에게 나워주기 시작했다. 지치고 굶주린 유럽인들은 배불리 먹은 뒤, 그들은 다시 창을 치켜들었고 전보다 더 원주민과 격렬히 싸웠다.
차모로 원주민들은 거래와 소유에 대해 유럽인들과 다른 개념이 있었다. 그들이 유럽인들에게 아낌없이 음식을 대접했던 것처럼 유럽인들 배에 실린 물건들을 그들 마음껏 가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마젤란의 보트도 훔쳐 달아났다.
다음날 마젤란은 '몹시 화가 나서' 복수를 결심했다.
함선에 남아있는 선원 대부분은 괴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마을로 떠나는 동료들에게 원주민의 내장을 가져다달라고 애원했다. 괴혈병 치유 효과가 있다고 믿었서 이다.
급습에 당황한 차모르 원주민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마젤란 일행과 차모르 원주민들의 첫 대면은 유쾌하지 않았지만, 이후의 교류는 만족스러운 것 같다.
차모르 원주민들에게 제대로 된 문기가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들과의 첫 만남이 유혈사태로 번진 것은 그저 충격과 오해 때문이었던 것이다.
차모르 원주민들에게 사유재산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방문객들의 물건이 곧 자기들의 물건이라고 믿은 것이다.
3월 9일, 마젤란 일행이 섬을 떠나갈 때 차모르 원주민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 아마도 유럽인들의 갑작스런 등장과 퇴장에 모욕과 배신을 느꼈던 듯 하다. 100대가 넘는 카누가 그들을 따라 붙었다.
무역풍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태평양의 섬에는 유난히 구름과 안개가 짙었다. 마젤란의 망루지기도 처음 괌을 발견했을 때 섬과 구름을 분간하지 못했다. 구름은 그 아래 펼쳐진 바다를 닮는 법이기 때문에 구름 아래쪽의 빛깔은 중요한 정보가 됐다. 만약 구름이 옥색을 띠고 있으면 그 밑에는 산호초나 모래톱을 푸은 얕은 녹색 바다가 있다.
일주일 동안 그들은 최고 속도인 7~8노트로 달렸다.
3월 16일, 망루지기는 바다 멀리 아스라히 솟아 있는 섬을 발견했다. 필리핀 제도의 동쪽 끝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드디어, 필리핀에 도착했다.
정화가 이끈 명나라 함대는 콜럼버스의 것보다 8~9배는 더 컸고, 마젤란의 것들보다는 5~6배는 더 컸다. 함선의 규모로 그들을 능가한 예는 19세기 영국 함대 이전에는 없었다.
정화는 1500대의 함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조직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마젤란의 몰라카 함대는 260명인데 반해 이 함대는 무려 2만 7800명이었다. 하먼도 500피트로 마젤란의 함선보다 훨씬 컸다. 한척에 천명은 너끈히 탔다.
명나라 함대는 남십자성을 기준으로 위도를 재는 '치엔싱반(qianxingban)' 이라는 기기도 있었다. 정화는 항해를 하는 동안 21피트 길이의 항해도를 참고했다. 이 지도는 1세기 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사용한 포르톨라노 해도처럼 이런저런 대륙과 방위가 표시돼 있었고, 한 지역에서 또 다른 지역까지 항해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준다. 명나라 함대의 별자리의 기준은 초롱성과 직녀성이었다.
캘리컷에 도착한 명나라 함대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황금소가 나오는 신비로운 전설을 접하기도 했다. 이 신비로운 전설에 대해서는, 마젤란 일행의 피카파테 처럼, 저화 함대의 공식 기록자였던 마환(명나라 함대의 항해 시대를 기록한『하서양』을 기록한 저자)이 들려주었다. "성자 모우시(모세)는 자신의 종파를 이뤘다. 사람들은 그가 천상에서 왔다고 믿었고 그를 숭배했다." 그 성자에겐 '타락한 ' 동생이 하나 있었다.
이는 물론 기독교에 등장하는 모세와 아론 이야기가 변주된 것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인들은 이야기의 기원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그 이야기를 이도에서 처음 들었기 때문에 인도의 전설이라고 여겼다.
명나라 함대는 좀더 멀리 내다보는 편이어서 가는 곳마다 무여소와 창고를 만들어놓았다. 이 함대는 매번 2년은 족히 걸리는 항해를 3회 넘게 진행했는데, 국제적인 무역을 위해 연락소를 만든 것은 명나라 함대가 처음이었다.
1431년, 함대느 300척의 함선 그리고 2만 7500명의 선원으로 7번째 항해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북쪽에까지 닿았다. 중국의 유물이 오스트레이리아에서 발견된 사링이나 원주민들 사이에 전해내려오는 실화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500년 황제는 돛대가 둘 이상인 함선을 만드는 것을 법적으로 금했고, 1525년(에스파냐에서 향료 제도로 함대를 파견할 때) 나라의 관리들은 함대 소속의 대형 함선들을 폐선시켰다.
3월 18일 술루안 섬에서 아홉 명의 원주민을 실은 보트가 다가 오고 있었다. 마젤란은 이번에는 여유있게 대처했다. 이들은 일주일 머무는 동안 매일 새로운 발견을 했고, 원주민들과도 친밀해졌다.
그러나 마젤란이 원주민들을 함선 트리니다드 호로 초대하는 순간 상황을 달라졌다. 마음이 급했던 마젤란은 원주민 손님들에게 "정향, 계피, 후추, 호두, 육두구, 생강, 황금 등 함선에 실린 모든 귀한 물품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도둑이나 강도를 당할 염려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믿음에 부응하기라 하듯 이국적이고 진귀한 향료들을 알아본 원주민들을 어디서 그 작물들을 재배하는지 친절히 알려주었다.
축하와 감사의 의미였는지 마젤란은 사수들에게 신호를 보내 화승총을 쏘게 했다.
3월 26일 밤, 그들은 섬 하나를 발견했다. 캠프파이어가 열리고 있는 것으로 봐서 사람이 사는 섬이었다. 3월 27일 아침, 마젤란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섬으로 다가갔다. 작은 보트가 나타났는데, 속을 알수 없는 여덟명의 전사가 타고 있었다. 마젤란의 노예 엔리케(오래전에 포르투갈인 어느지역이더라 아무튼 동남아시아지역에서 잡혀왔는데 마젤란의 노예로서 이번 함대에 탔다.)가 말레이 방언으로 말을 걸자, 놀랍게도 그들은 알아듣고 대답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의 광란의 시간 이래도 가장 평화롭고 성공적인 만남인 듯 싶었다.
3월 29일, 필리핀 제도의 레이테 남부에 위치한 리마사와 섬으로 갔다. 이 섬은 6평방마일의 외딴 모래사장인데, 오늘날까지도 근접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운 좋게도 무역의 거점을 찾았다. 지난 5세기 동안 중국의 무역상들은 도자기와 실크와 납으로 된 추를 싣고 이 섬을 줄기차게 드나들었다.
1225년, 송나라 무역상 차우주쿠어는 당시 그들이 원칙적으로 일하는 무역 파트너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리마사와 사람들은 송나라 사람들이 실어온 물푸을 능숙하게 운반했고, 항상 약속한 대가를 지불했다.
마제란은 리마사와 왕에게 파견적인 제안을 했다. 의형제를 맺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젤란은 이 섬의 왕과 피를 나누는 의식을 했다.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마젤란이 화승총 사격 시범을 지시한 순간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젤란은 리마사와 왕에게 우리의 "한 명의 무장 병사가 당신 백성 100명의 몫을 한다"면서, 자신에게 그런 갑옷과 무기-검, 미늘창, 단도-를 갖춘 병사가 200명은 된다고 허풍을 떨었다.
마젤란이 가져온 무기 중 가장 위력적인 거슨 세 대의 무쇠 대포 롬바르다(lombardas)였다. 해전에 유용하도록 디잔인된 롬바르다에는 고리가 달려 있어서 함선에 걸고 뗄 수 있었고, 평소엔 갑판의 나무틀에 단단히 매어 두게 돼 있었다. 이 대포는 돌, 쇠, 납 무엇이든 발사할 수 있었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납을 씌운 육방체의 쇳덩이였다.
또다른 무기들로 경포 일곱 대가 있었다. 이건 롬바르다보다 작고 가벼워서 보트에 실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파사무로라는 또라는 종류의 총 3개, 돌을 넣어 쏘는 소총 베르소 60정, 엽총 50정, 포탄용으로만 최소 3톤의 화약을 가지고 왔다.
화승총은 위험했다. 총신 뒤에 화약을 넣은 자리가 있는데, 9피트 길이의 화승이나 기폭장치 항상 불을 붙여야 했고, 야간 전투에는 불리했다. 화승이 워낙 길기 때문에 포수는 손으로 직접 발사시키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숙련된 사수가 쏘아도 총탄이 갑옷을 뚫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거리는 몇백 피트 이내였다. 당시 총기 제작자들은 성능이 떨어지는 화승총 대신 바퀴식 방아쇠 총을 만들고 있었다.
마젤란은 왕에게 적이 있는지 물었다. 만약에 적국이 있다면, "함선을 몰고 가서 적들을 물리쳐 그들에게 복종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총사령관은 신이 허락한다면 다시 돌아올 때 더 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와서 왕의 적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건 불필요한 제안이었다. 카를로스 와이 마젤란에게 내린 사명에는 부족 싸움에 참견하거나 선교하거나 개종시키라는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개종과 정복에 몰두하면서 상업적인 목표를 등한시하고 있었다.
할일을 다 했다고 판단한 마젤란은 아침 무렵 떠나기로 했다. 왕들이 돼지와 쌀과 와인을 충분히 바쳤는데도 마젤란은 더 많은 음식을 요구했다. 그러자 왕들은 더 많은 음식이 필요하다면 세부 섬을 둘러보라고 권했다. 이에 마젤란 세부 섬에 가기로 결정한다.
에스파냐는 부르고스에 국가 지원의 화약공장을 세웠다.
에스파냐는 창제련 기술이 뛰어났다.
고고학적 물증에 따르면, 아시아 본토와 필리핀과의 무역 활동은 서기 1000년경부터 시작됐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이 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하던 무렵, 처음으로 괴혈병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잇다.
1795년, 영국 왕립 해군은 선원들의 괴혈병을 예방하기 위해 매일 레몬 또는 라임 주스를 배급하기 시작햇고, 이 관행을 가리키는 '라이미'는 영국 선원을 뜻하는 용어가 됐다. (당시에 '라임'은 레몬과 라임을 모두 지칭하는 말이었다)그러나 이것은 과학이 아니라 맹신에서 비롯되었다. 레몬, 라임, 오렌지 등의 과일과 야채가 괴혈병이 예방에 왜 좋은지는 여전히 알아 내지 못했다.
열이 나고 음란스러운 한창일때 안경을 가운데 손가락으로 올릴 수 없었다. 뒷감당을 할수 없었다. 만약 올린후....버틸 수 없다.
친한 청년들끼리 와서 문화회관에서 공부하는 모습이 좋다.
한 선원이 바닷가로 물을 구하러 갔을 때, '유리구슬 목걸이 여섯 개'를 주고 커다란 금관을 받을 뻔했는데 마젤란이 이 거래를 막았다. "원주민들에게 우리 물건이 그들의 황금보다 더 귀하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물론 금이 유리구슬보다 훨씬 값진 것이었지만, 마젤란은 원주민들이 유럽에서의 금의 가치를 모르길 바랐다. 그는 부하들에게도 그들앞에서는 금을 그저 그런 금속으로 여기는 척하라고 가르쳤다.
세부 섬의 원주민의 왕 후마본은 방문객들을 환영한다면서, "이 항구에 들어오는 모든 함선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규칙을 일러주었다. 나흘 전에 이 섬에 '황금과 노예를 가득 싣고'들어온 시암의 상선도 세금을 바쳤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를 대기 위해 원주민 왕은 아직 그것에 머물러 있는 시암 출신 아랍 상인을 불러냈다. 상인은 그곳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지도자에게 조공을 바치는 게 당연하다면서 마젤란측에게도 법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마젤란은 원주민의 방식의 따랐다는 아랍 상인을 비웃으며, 자신은 누구에게도 세금을 바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평화나 전쟁, 둘 중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시암 상인이 마젤란 일행에게 던진 조언을 피가페타 이렇게 받아 적었다. "신중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이들의 와은 캘리컷과 말라카, 인도를 정복한 자다. 그들을 잘 대하면 무사하겠지만, 그들에게 잘못 하면 몇 배의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이다." 노예인 엔리케가 상인의 충고를 통역해 들려주었지만, 마젤란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만일, 왕이 그들을 건드린다면 총사령관(마젤란)은 "부하들을 보내 왕을 죽여버리겠디"고 경고했다.
후마본 왕은 조공을 바치라는 요구를 철회한 것은 물론, 오히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에게 조공을 바치렜다는 제안을 해왔다. 또한 왕은 마젤란과 동행한 리마사와 왕이 부추기는 대로 마젤란과 혈맹관계를 맺기로 했다.
"우리가 이교도인 그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죄악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마젤란이 세부섬에서 부하들에게 한말)
마젤란은 자신이 이룬 성과에 도취된 나머지, 종교에 무모할 정도로 과도한 열정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마젤란은 그동안에 항해중에도 종교에 편향돼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종교혁명에 협조하지 안흔 자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할 정도로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마젤란은 그 협박을 실행에 옮길 태세였다.
마젤란은 세례를 거부하는 족장들에게, 당장 개종하고 카를로스 왕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유럽에서나 통하는 사유재산의 개념은 그들에게 무의미했다. 그들은 죽음으로 응징하겠다는 마젤란의 경고를 무시했다. 마젤란은 자신의 협박이 빈말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부하들을 마을로 보내 헤집어놓았다.
마젤란은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보여주려는 듯, 병상에 놓여있는 왕의 아들중 한명에 대해 만일 세례를 받았아도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목을 쳐도 좋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라푸라푸 와 마젤란 사이에서 막탁섬의 족장 술라는 나름의 외교를 펼쳤다.
마젤란이 호전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술라는 자신의 병사가 아니라 마젤란의 병사들을 이용해 전쟁을 벌이고 그 덕을 볼 수 있게 됐다.
전쟁을 하겠다는 결정이 함대에 전해지자 모두들 경악했다. 그들은 이성적이지 못한 마젤란의 결단에 불만을 떠뜨렸다.
라푸라푸는 무의식적으로 마젤란을 자극해 전쟁을 앞당기고 있었다.
함대의 선원들은 마젤란이 전처럼 이번에도 하늘이 도울 거라고 낙관하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래서 마젤란을 따르기로 했지만 형식적인 복종에 불과했다. 그들은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구경말 할 셈이었다.
라푸라푸는 공격 개시는 '사람을 더 모을 수 있도록 아침 무렵까지' 유보해달라고 요구했다.
그고 그날 4월 27일이 되었다.
바로 그 순간 세부 섬 전사들이 뒤늦게 몰살직전의 마젤란 측을 돕기 시작했다. 그드른 물속으로 뛰어들어 검을 휘들렀는데, 막탄 섬 사람들은 이웃 섬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내켜하지 않았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자주 무기를 동원해서 자신이 전지전능한 것처럼 보이려 했다.
전투를 위해 해안에 상륙하면서 마젤란과 그의 친위대는 함선의 포병들이 뒤에서 당연히 그들을 엄호해줄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세부 섬에서는 그동안 마젤란측들이 섬 여자들을 함부로 다룬 데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이런 보잡한 상황에서 후마본 왕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마젤란의 부하들에게 보복하기로 한다.
5월 1일 수요일, 후마본 왕은 함대 지도자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이에 30여명이 이 초대에 응했다.
만찬이 끝나갈 무렵, 무장한 원주민들이 야자수 숲에서 뛰어나와, 초대받은 손임들을 공격해 27명을 죽이고, 그 자리에 있던 신부와 늙은 항해사 후안 세라노를 붙잡았다.
마제란은 이미 뒤졌다니까??? 라푸라푸 측과 싸우다가
세라노는 함선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했지만, 죽음이 두려웠던 그들은 함선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에스파냐를 떠나온 260명 중에서 이제 115명만 남아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세부 섬을 돌아보았을 때 성난 원주민들은 선원들이 산꼭대기에 세웠던 십자가를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5월 1일의 학살로 함대는 가장 유능하고 성실한 인력들을 잃게 되었다.
한편, 남아메리카 남단 해협에서 에스파냐로 돌아갔던 산안토니오 호가 1521년 5월 6일 세비야 항에 닻을 내렸다.
이들을 조사하던 당국은 짧은 시간동안 산안토니오 호의 반란의 내막을 들춰내는 데 성공했다.
대주교 폰세카는 마젤란의 측근과 산안토니오 호의 반란파 모두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고메스와 게라, 그리고 다른 반란 주동자들을 은밀히 불러들였는데, 그들이 미리 입을 맞추지 못하도록 따로 오게 했다.
반란자들의 갑작스러운 귀환으로 세비야가 동요하고 있었지만, 2년전 항해를 허락했던 어린 왕은 그 어떤 탄원과 서신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왕의 어머니 후아나 마드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28세에 죽은 남편 펠리페 1세가 부활할 거라는 믿음으로, 시신을 몇 년째 침상 평에 두고 산다고 했다. (어 내가 왜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내지??)
카를로스가 황제선출권이 있는 자들에게 바친 뇌물은 자그마치 85만 다카트에 이르렀고, 그중 54만 다카트는 푸거 가문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카르로스 왕의 제국에 대한 야심은 독일인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카를로스 왕은 조국 에스파냐가 모든 빚을 갚아줄 것으로 믿었고, 이베리아 반도는 분노로 들끓었다.
1517년 레오 10세는 추기경들 사이에 자신을 독살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음모에 연루됐던 페트루치 추기경은 사실을 시인하고 옥중에서 목을 매달았고, 다른 이들도 추방되거나 처형당했다.
레오 10세는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지원(자금)을 끌어낼 수 있었지만, 그의 조직은 붕괴되고 있었다. 막시밀리안 1세가 죽자 레오 10세는 카를로스 왕을 제쳐두고,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의 지지였을 뿐, 사실 그는 두사람을 꼼꼼히 재보고 있었다. 경재이이 강하고 자금도 많이 끌어들인 카를로스 왕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을 때, 레오 10세는 유럽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 이 젊은이의 편으로 마지 못해 옮겨 섰다.
에스파냐에서는 카를로스 에 대한 반감이 높아가고 있었다. 외국인에게 에스파냐 통치를 맡기지 않겠다는 애초의 약소과 달리, 카를로스는 과거 스승이었던 위트레흐트의 아드리안을 에스파냐의 섭정으로 지명했다.
세비야에서는 매년 1만 8천명이 왕립 형무소를 드나들었고,안 그래도 어려운 지역 경제는 나날이 쇠락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세비야의 독재 정치가들은 농민에게 땅을 빌려주고, 와인과 기름과 비누를 들여와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있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그들은 웅장한 성과 정원과 마당을 지었다. 도시에 범죄가 들끓고 경제가 힘들어지는 동안에도, 세비야의 귀족들은 사치스러운 생황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반역의 기운이 퍼져가는 가운데, 귀족을 싫어하는 시골에서는 오히려 카를로스 왕을 지지하고 보호하려는 반혁명의 움직임이 일었다.
다시 필리핀에서 후다닥 도망쳐 나온 자들을 보자.
필리핀에서 연달아 비극적인 사고를 당한 함대원들은 오직 상업적 목표와 기준에 따라 결단하고 행동하기로 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이국의 땅에 십자가를 세우거나 집단 세례를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민다나오 섬에 도착했다.
함선의 정찰대는 평화주의자인 지역 지도자 카라노아를 만나 사귀기까지 했다. 피가페타에 따르면, 칼라노아는 "왼손에 피른 내서 몸에 바르고 혀 끝에 묻히며 우정의 맹세를 했고, 우리도 똑같이 했다"고 썼다. 반갑게 환대하긴 했지만, 그는 함대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의사가 없었고 그런 형편도 못 됐다. 의식이 끝나고 칼라노아는 존경의 뜻으로 피가페타 한명만 해안에 초대했다.
굶주린 함대원들은 식량을 찾아내지 못해 절망스런 심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함대는 북서쪽으로 25리그나 우회해, 이미 향료 제도를 지나쳐 와봐렸다.
함대는 향료제도로가는길을 알기 위해 다시 길잡이들 구하려고 커다란 발랑가이(이곳에서 사용하는 배 이름) 한 대를 포위했다. 그러고는 우호적인 척 접근해서 발강가이의 항해서 세명을 잡았다. 그들이 향료 제도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서였다. 그러나 현지 원주민이 아니라 아랍인인 그들은 몰루카 제도가 있는 남동쪽 대신, 아랍인 거저인 브루나이가 있는 남서쪽으로 이끌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7월 8일, 브루나이 항에 닻을 내렸다.
이렇게 후한 대접한 데는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지역은 이미 포르투갈 선원들이 다른 루트로 넘나들던 곳으로, 아랍 혈통 지도자들과 포르투갈 상인들은 무역 파트너 였다. 헌데 이들은 에스파냐 함대가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그날의 가장 큰 수확은 그들이 2년 가까이 찾아 헤맸던 향료, 그중에서도 계피와 정향 약간씩을 얻은 것이다. 계피는 정향 다음가는 값진 향료이다.
그러나 아직 향료 제도에 온 것은 아니다.
바스크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으로, 구석기 이래 따로 떨어져 나왔다. 이들은 고유한 언어를 썼는데, 방언이 8종이나 되었다. 수세기 동안 여러 왕국에서 이 바스크 공동체 병합하려 시도한 끝에 1512년 페르난도 왕이 그들을 정복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 바스크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고수해왔다. 바스크인들의 삶은 바다에 기반을 두었다. 그들은 바다를 마주보고 태어나 자랐고 바다에서 죽었다. 바스크의 어업 중심지는 기푸스코아 이다.
무기와 당비를 갖춘 에스파냐 함대를 파는 것은 불법이었다. 근데 엘카노가 이짓을 했다. 바스크인 엘카노(항해 일주한 몰루카 함대 후반부를 이끈 사람)는 세비야로 숨어들었고, 카사 데 코트라타시온의 항해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항해 수련 과정을 수강했는데, 당시 수석 심사관으로 재직하며, 자주 구설수에 올랐던 아메리고 베스푸치에게서 사사받았던 것 같다. 학생들은 스승에게서 점수 대신 콩을 받는 전통이 있는데, 과정을 제대로 이수하면 마른 콩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엔 시든 콩(깍지)을 받았다. 항해 과정을 이수한 엘카노는 베스푸치의 콩을 받아 수석 항해사가 되었다. 엘카노는 자격 증명서를 들고, 몰루카 함대에 일자리를 얻으러 갔지만,잘 푸리지 않았다. 카사 데 콘트라티시온의 고위 관리 중에는 바스크인이 더러 있었는데, 그중 수석 항해사는 엘카노와 같은 지방 출신이라서 그가 과거에 저지른 범법행위를 알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카사에서 일하는 친척이 그의 불리한 경력을 덮고 마젤란에게 추천해주어서, 그는 한 달에 3000마라베디의 급료를 받는 콘셉시온 호의 지휘관이 되게 해주었다. 그는 6개월치 급료 1만 8천마라베디를 선불로 받았는데, 바스크 출신의 평범한 청년에게는 대단히 큰 목돈이었다. 장비를 구입하느라 지출이 많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큰 돈이 남았다.
최초로 항해 일주를 한 함대를 이끈 사람이 누군지 알아? 엘카노야 엘카노
브루나이에서 35일을 보낸 함대는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심본본 섬에 머물며 함대는 함선 수리에 꼬박 42일을 들였다.
9월 27일, 함대는 다시 향료 제도를 찾아나섰다.
그들은 계피나무를 보고 재빨리 불법 거래를 제안했다. 커다란 칼 2개와 계피 17파운드를 맞바꾸는 것으로, 그 정도 향료면 세비야에서는 배 한 척은 살 수 있었다.
원하는 것을 쉽게 얻는 방법을 깨우친 함대원들은 몰루카 제도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지나가던 커다란 프로아 한 척을 습격했다. 실랑이를 벌이던 그들은 배에 타고 있던 18명의 원주민 중에서 7몀을 살해했다.
그들은 프로아(이곳에서 사요하는 배 이름)에서 민나나오 섬 지도자의 동생을 발겨하고는 살려주었다. 몰루카 제도로 가는 길을 잘 안다고 주장한 그는 이제껏 함대가 거쳐온 항로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북동쪽으로 배를 잘못 몰아 왔지만, 그는 몰루카 제도가 있는 남동쪽으로 함대를 이끌었다.
고지를 눈앞에 둔 그들에게 불행이 연달아 닥쳤다. 11월 2일, 트리나다 호에 승선한 포수 페드르 산체스가 화승총을 쏘려다가 총기 오발로 사망했다. 11월 4일엔 트리니다드 호의 또다른 포수인 후안 바우티스타가 화약 폭발로 사망했다.
그러나 11월 6일, 1521년 11월 6일 이들은 향료 제도의 입구에 다다랐다.
1521년 11월 8일, 몰루카 함대는 환희의 축포를 떠뜨리며 티도레 항으로 들어갔다.
중국 일본등은 쉽게 공격 점령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을 식민지배 당한 것이것은 중국 등을 이들보다 더욱 긍하다는 우월감 아닌가?
리더쉽, 불평등 TV 제단 실수해도 괜찮아 순발력 왜 대중에게 너가 꾸민것을 보여주지
별로 내려온것은 아니라고 하나 그것을 올리지 못하고 4시간 동안 성저인 것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때까지 기다린 것은 강바증 기세를 더욱 크게 할 것이다.
반투어 열대 서남부 언어 만지 중국 일본의 무화를 보면서 놀라지 않으니 원.....
1.자꾸 끊어진다 안경을 안올려서이다. 근데 안경을 오리면 더 큰문제가 생긴다.
1521년 11월 8일, 몰루카 함대는 환희의 축포를 떠뜨리며 티도레 항으로 들어갔다.
10년 전쯤에 티도레 섬 지도자 알만소르의 아버지는 그들의 수확물을 독접하는 아랍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무역소를 세우라고 부추겼다고 했다. 그러나 그일을 서로에게 안 좋은 기억만 남겼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버림받으 연인의 심정으로 몰루카 사람들을 증오하게 됐다. 처음에 포르투갈은 중국과 아랍이 독점하고 있던 이 지역의 향료 무역에 동참해, 이웃이자 경쟁자인 에스파냐를 제치고, 부자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서 국제 무역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점차 이 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잔인하고 교활한 면을 보았고,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운반할 배를 갖고 나타나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향료를 팔았다. 포르투갈은 결코 독점 무역권을 갖지 못했고, 그럴수록 섬의 섬의 지도자와 원주민들이 야속하기만 했다.
티도레는 이웃 섬인 테르나테와 갈등 관계에 있었고, 테르나테는 포르투갈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래서 알만소르는 곧 닥쳐올 테르나테와의 대결에서 에스파냐 함대가자신의 막강한 지원군이 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함대의 관리들은 향료를 실으러 가기 전에 알아볼 것이 있었다. 마젤란에게 편지를 보내 향료 탐험을 부추긴 프란시스코 세라오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찾을수 없었다. 알마소르는 세라오가 8개월 전, 그러니까 마젤란이 숨을 거둘 무렵,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세라오가 왜 죽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지상은 이랬다. 1512년 세라오는 향료 제도에 도착해 티도레와 테르나테의 권력 갈등을 보았고, 결국 테르나테의 해군 장군으로 힘을 보탰다. 이들 두 왕국은 수년동안 끊임없이 싸웠는데, 세라오가 이끈 테르나테 군이 번번이 승리했다. 휴전을 위해 세라오는티도레 지도자의 자제들을 인질로 잡아두었고, 알마소르의 달을 적국인 테르나테의 왕에게 시집보내 아이를 낳게 했다. 알만소르는 세라오가 준 끔찍한 모욕을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라오가 정향을 거래하러 티도레 섬에 왔을 때, 티도레 섬의 왕은 그를 구장(야자수 잎같은)잎으로 독살했다. 세라오는 그후 나흘 뒤에 죽었다.
복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열흘 뒤. 테르나테의 왕은 "싸움 걸 구실을 만들기 위해, 딸을 시켜 사위인 바칸(티도레의 이웃 섬)왕에게 독을 먹이 뒤 추방했다." 추방당한 그는 이틀 더 앓다가 죽었다. 뒤에 교전하던 두 부족은 화해했다. 두 섬의 불행한 원주민들은 막강한 에스파냐 왕이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향료 무역 사업은 노라운 속도로 진행됐다. 티도레 왕은 그들을 위해 무역소를 열었다.한때 포르투갈 사람들이 사용하던 곳을 이제 에스파냐 함대에게 제공했다. 11월 12일 화요일, 티도레 항구에 닻을 내린 지 나흘 만에 몰라쿠 함대는 사업을 개시했다. "우리는 갖고 온 물건 전부를 그곳에 옮겨다놓고, 세 병사에게 보초를 서게 했다. 우리는 바로 거래를 시작했다. 고급스런 빨간 천 10브라사(1브라사=5.5피트)와 정향 1바아르(406파운드)를 맞바꾸는 식이었는데, 1바아르는 4킨탈(1킨탈=100파운드)과 6리브라(1리브라=1파운드)에 해당된다." 1킨탈의 정향은 100파운드였고, 이는 향료 거래의 주요한 측량 기준이 되었다.
'정향(clove)' 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손톱을 뜻하는 프랑스어 '클루(clou)' 이다. 꽃봉오리를 말렸을 때 그 모양이 손톱 갔다고 해서 붙여지 것이다. 정향은 아주 더디게 자라는 나무로, 어린 묘목에서 수확까지 보통 7~8년이 걸린다. 25년째까지 정향나무 하 그루에서 기후 조건에 따라 한 해에 약8파운드의 향료를 얻을 수 있다.
티도레의 왕 알만소르는 유럽인들이 향료를 손에 넣은 이 순간을 높치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이웃 섬에 들르고 싶다고 제안하여, 이들을 외교 분쟁에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선원들은 경솔하게도 알마소르를 돕겠다고 약속해버렸다.
모든 걸 챙기고 준비도 끝마쳤다. 고향이여 기다려라
출발하던 날, 트리니다드 호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호도 망가진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대원들이 승선을 거부했다. 그들은 차라리 트리니다드 호를 고칠때까지 티도레 섬에 남는 게 좋겠다고 여겼다.
피가페타는 엘카노가 이끌 빅토리아 호를 선택했다. 여기에는 그와 16명의 워주민을 포함해 모두 60명이 타기로 했다.
12월 21일 정오 무렵, 빅토리아 호는 비로소 향료 제도를 떠날 수 있었다.
선원들에겐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었다.
의욕을 잃고 있었다.
말루아라고 알려진 이 섬 부족의 모습과 행태는 산전수전 다 겪은 선원들들마저 충격에 빠뜨렸다.
선원들 대다수가 함선을 수리하는 데 매달렸다.
몰루카 제도에 머무는 동안 매독의 징후들이 곳곳에서 보았는데 이곳 티모르섬은 특히 심각했다.
유럽인들 이전에 중국인들이 이곳을 정규적으로 드나들 때 매독이 발생했다는 기록도 있다.
1521년 2월 11일 수요일 오전, 빅토리아 호는 닻을 올리고, 남서쪽으로 움직여 티모르 섬에서 멀어졌다.
희망봉은 제 아무리 튼튼한 함선과 숙련된 항해사도 항해사지 못할 만큼 위험한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쌀과 물밖에 먹을 게 없었다. 소금이 다 떨어져서 고기는 썩어갔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아프리카 구간에서 빅토리아 호는 심하게 물이 새기 시작했다.
한편 혼자 남겨진 트리니나 호는 어찌 됐을까?
4월 6일 트리니다드 호도 닻을 올리고 활짝 폈다. 이들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지않고 동쪽으로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에서 에스파냐로 가기로 빅토리아 호와 헤어지기 전에 정했다.모두 1000킨탈(50톤이나 된다)의 정향을 싣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그동안의 항해에 쓰인 경비와 모든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는 가치가 있었다.
동풍이란 뭐냐? <---- 서쪽으로 바람이 부는 것
서풍이란 뭐녀? -----> 동쪽으로 바람이 부는 것
트리니다드 호의 선원들은 차라리 죽기를 바랄 만큼 고통스러웠다. 괴혈병으로 죽어나간 사람은 모두 30명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선원은 20명에 불과했다.
5월 13일, 일곱 척의 포르투갈 함대가 마젤란과 몰루카 함대를 찾아 티도레 섬에 도착한다. 함대의 지도자는 향료 제독의 총독으로 임명된 안토니오데 브리토 이다.
할수 없이 트리니다드 호는 다시 빠꾸해서 티도레 섬으로 왔는데 함선을 지휘한 에스피노사는 깜짝 놀랄 소식을 듣는다.
에스피노사는 브리토 선장에게 동정을 구하려고 편지를 써서 보트 편에 보냈다. 그는 지금의 비참하 상황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나 에스피노사가 기대한 연민이나 동정은 없었다. 그의 편지를 읽은 브리토는 뛸 듯이 기뻤다. 지난 3년 동안 인도 제도를 샅샅이 뒤지고 다닌 끝에 이제야 몰루카 함대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알아낸 것이다. 그는 그들을 잡아드이기만 하면 최대한 가혹하게 다룰 생각이었다. 며칠 뒤, 20명의 무장 군인을 태운 포르투갈 쾌속선이 에스피노사가 정박한 베나코노라 항에 도착했다.
트리니다드 호는 거센 풍랑에 방차돼 산산이 부서졌고, 거기에 실렸던 값진 정향도 가라앉아 버렸다.
브리토는 항해 일지를 읽으면서 에스파냐 함대가 포르투갈 영해를 항해했을 뿐 아니라 포르투갈령의 향료 제도를 침탈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설상가상으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정한 포르투갈 반구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 그 일지에 몇몇 지형의 위치를 바꾸어 적은 것도 알게 되었다.
함대가 처름 향료 제도에 와서 난나 합류하게 됐던 포르투갈의 변절자 페드르 알폰소 데 로로사는 브리토에 의해 참수 당했다. 브리토는 트리니다드 호의 선원과 항해사 네댓 명을 더 처형하려다가, 열대의 더위 속에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굴라스 해류는 아프리카 대륙을 따라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데, 최고 속도가 6노트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해류는 바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빅토리아 호는 북동쪽에서 다음 순간 남서쪽으으로, 시시각각으로 급변하는 바람과 싸워야 했다.
남아프리카 주변을 휘도는 바람은 남대서양 고기압과 인도양 고기압이 만들어낸 아열대 기압의 영향을 받는다. 코리올리의 힘의 영향으로 남반구의 바람은 왼쪽으로 편향돼, 시계 반대방향으로 분다. 이런 원리를 '고기압'이라 한다. 이때 바람은 최고 시속 100마일로 불기도 하는데, 그래서 빅토리아 호의 주돛대와 앞 갑판이 부서져나갔다.
바람이 잠잠해진 것은 1522년 5월 22일이었다. 빅토리아 호는 마침내 북쪽 항로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카노는 폭풍에 시다린 함선과 선원들을 훗날 살다나 만으로 알려진, 케이프타운 북쪽 지점으로 데려가 쉬게 해주었다.
1522년 6월 8일, 그들은 다시 적도를 넘었다.
짧은 기간동안 21명이 죽었다.
7월 9일 서아프리카 해안에 위치한 카보베르데 제도의 가장 큰섬 상티아구 섬에 도착했다. 이섬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정한 경계이기도 했다. 이 제도는 포르투갈의 거점이었고, 물물 거래와 노예 거래의 중심지였다.
빅토리아 호는 상티아구 섬의 리베이라그란데 항에 닻을 내렸다. 엘카노를 곧바로 보트를 보내 식량을 구해오게 했다. 그는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잡힐 경우를 대비해서, 연민을 자아낼 만한 이야기를 미리 지어냈다.
상티아구 섬을 벗어나려던 순간, 엘카노는 치명적인 실수를 해버렸다. 쌀을 얻으러 육지로 들어간 네명읜 원주민은 교환 물품으로 정향을 가져갔던 모양이다. 포르투갈 선원들은 향료 제도에서만 구할 수 있는 이 밀수품을 보고 빅토리아 호의 정체를 의심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상티아구 섬에 머누는 동안 함대원 중 누군가가 총사령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죽었다는 사실을 퍼뜨렸다. 피가페타가 간략하게 기록한 바에 따르면, 마젤란의 죽음을 알린 자가 엘카노 일행이 에스파냐로 돌아가기를 주저한다는 사실까지도 알려 의혹을 부추겼다고 한다.
프로투갈 함대의 과격한 반응으로 미뤄보면 몰루카 제도에 다녀왔고 포르투갈 영해를 넘나들었다는 등의 민감하고 자극적인 사실이 알려졌나 보다.
이제 빅토리아 호의 인원수는 22명 뿐 이었다.
7월 15일 상티아구 섬을 떠났다.
그들을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행해해 나아갔는데, 익숙한 길이었던데가 지도상에 표기된 항로였기 때문에 수월하게 나아가면서도, 어떤 위안이나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빅토리아 호는 계속 물이 새고 있었다. 지친 선원들은 배와 함께 침몰하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펌프질을 해야 했다. 고새한 보람이 있었는지, 7월 28일경, 그들 눈앞에 테네리페 섬이 나타났다. 이는 아소레스 제도의 시작이자 북풍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엘카노는 그들에게 너무나 절실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아소레스 제도에 다가가려 했지만, 여긴 그들을 추적하는 포르투갈령이기 때문에 너무 위험했다.
9월 4일 북쪽으로 펼쳐진 상비센테 곶을 발견했다. 마지막 중요 관문인 이 곶의 오른쪽에는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의 아카데미가 위치한 사그레스가 가지한 곳이다.
그리고
9월 10일, 빅토리아 호는 힘겹게 강을 건너 세비야 항에 정박했다.
카를로스 5세(카를로스 왕은 이제 황제가 되었다.)의 대리인들은 정향이 최상품이라는 사실에 감격했다. 육로를 거치고 중개인을 통해서나 얻었던 정향과는 비교가 안 됐다. 비고리아호의 정향은 381포대가 넘고, 무게도 524킨탈이나 되며, 788만 8864마라베디의 가치를 지녔다. 황제는 이 화물을 곧바로 항해의 후원자인 크리스퇄 데 아로에게 전달하고 지시했다.
엘카노가 아직 세비야에 정박하기 전 황제에게 쓴 편지는 빅토리아 호가 세비야에 진입하기 전,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 항에서 띄어졌다. 그만큼 엘카노는 황제에게 서둘러 해명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마젤란이 어떻게 죽었는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바스크인인 자신이 어떻게 함대의 사령관이 될 수 있었는지도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마젤란의 종말과 엘카노듸 등장이 무슨 관계가 이쓴지, 편지 내용으로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엘카노는 편지에 드러난 것보다 감춘 것이 더 많았다. 그는 선상반란이나 방탕한 시간들, 이국 여인들과의 난교 파티 등 황제가 엄중히 금했으나 함대원들이 저지른 여러 가지 과오를 은폐했다. 마젤란이 어떻게 항해를 주도했고, 어째서 일부 함대원을 고문했는지에 대햏 함구한 것은 물론이다.
카를로스는 마젤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숱한 고난을 뚫고 에스파냐로 돌아온 소식을 오스트리아의 대공비이자 네덜란드 섭정인 숙모 마르게리테에게 전했다. 큰돈이 생긴다는 말에 흥분한 대공비는 플랑드르의 번화한 도시 브뤼헤를 향료 무역의 중심지로 정하고, 조카를 불러들이려 했다. 하지만 빚을 갚을 확실한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한 카를로스는 "이 물품은 이 왕국의 비용과 투자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에스파냐에 두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카를로스는 엘카노와 그가 지정한 두 사람을 바야돌리드의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엘카노는 자신의 해명을 도울 사람으로 항해사 알보와 이용사 부스타멘테를 동행하기로 했다. 여기서 마젤란에게 충성했던 피가페는 제외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10월 18일, 카를로스 는 세 명의 탐험가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생존자들에 대해서는 반역과 불충의 의혹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그들이 바야돌리드에 도착하기 직전에 카를로스의 귀에까지 들어갔었다.
카를로스는 비야돌리드의 시장에게 엘카노 일행을 심문해서 진상을 캐라고 했다. 심문은 바로 당일(10월 18일)시작했다.
카를로스는 이들이(엘카노 와 같이 온 두명) 각자의 몫으로 가져온 향료에 대해서 세금을 걷지는 않고, 이 항해로 자신에게(카를로스)에게 돌아온 4분의 1을 떼어 바야돌리드에서 조사를 받는 세 명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엘카노가 받은 보너스는 더 많았다. 그가 받는 연금은 500다카트가 넘었고, 기사 작위와 함께 세계 일주에 성공한 뱃사람에게 어울리는 문장 코트를 하사 받았다.
엘카노는 마젤란을 거역한 반란에 대해 면죄부를 받았다. 엘카노는 면죄부를 문서로 받아냈다. 그리고 다음에 또 항해를 주도할 권리도 따냈다. 부와 명예를 얻은 것은 물론, 엘카노는 두 명의 첩을 소개 받아, 두 여자에게서 각기 딸과 아들을 얻었지만, 그들과 함께 살지는 않았다.
엘카노의 홍보와 황제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의 비서격인 트란실바니아의 막시밀리아누스는 엘카노와 알보와 부스타멘테를 다시 불러 들어들여 오랫동안 면담을 했는데, 이때 마젤란의 공식 서기였던 안토니오 피가페타도 함께 만났던 것 같다. 빅토리아 호가 세비야로 들어온지 한 달 만에 그는 카를로스 왕에게 아주 긴 보고서를 올렸다.
세비야를 떠아온 피가페타는 곧바로 바야돌리드로 가서 젊은 황제를 만났다. "금은보화는 아니었지만 왕이 아주 기뻐하실 만한 물건들을 바쳤다. 무엇보다 내가 행해 내내 적은 일지를 바쳤다"
피가페타는 외교적 수완이 대단해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들도자유롭게 오가면서 군주들에게 자신의 기록과 증언을 전하기도 해다. "그런 뒤 나는 포르투갈로 가서, 주앙 왕에게 내가 본 것들에 대한 기록을 전했다.에스파냐를 지나쳐, 다음엔 기독교도 왕 프랑수아에게 다른 세상에서 가져온 희귀한 물품드을 전달했다. 그러고는 이타리아로 가서 로도스를 통치하던 부지런한 군주이자 몰타 기사단장인 필리페 빌리에르 데 라일아담을 만나 그가 원하는 정보와 선물을 제공했다."
그럼 여기서 포르투갈 함대에 붙잡힌 트리니다드 호의 선원들에 대해 보자
트리니다드 호에 올랐던 함대원 중에서 에스파냐나 포르투갈로 돌아온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 귀가 먼 마흔여덞의 최고령 생존자인 후안 로드리게스는 리스본으로 가던 프로투갈 함선에 끌려갔다. 그는 잠깜 감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서 세비야로 돌아왔는데, 나이가 맣고 체력이 안 좋은데다, 수년간의 항해로 숱한 고생을 했으면서도, 인도 제도 항해에 다시 참가하겠다고 신청했다.
에스피노사는 부하들과 함께 인도 서해안의 포르투갈 거점인 코친으로 끌려갔다. 그는 아랍인들과 싸우라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한 채, 카를로스 황제에게 현지 총독 바스코 다 가마의 만행을 고발하는 편지를 썼다.
사실 에스피노사는 세인트줄리안 항에서 반란이 벌어졌을 때 마젤란을 도와 함대를 평정하는 데 가장 큰 수훈을 세운 하사관 이다.
1527년 8월 24일, 카를로스 황제는 에스피노사에게 11만 2500마라베디라는 어마어마한 연금을 하사했으나, 에스피노사의 손에는 한품도 돌아오지 않았다.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이 연금을 거둬가버린 것이다. 냉담한 관료들의 가혹한 처사에 격분한 에스피노사는 정해진 금액의 2배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원래 금액의 절반을 받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그나마도 일부만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금액도 몰루카 제도 차기 항해에 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받아냈다. (황제는 한스 바르그가 남긴 1만 5000마라베디를 에스피노사가 갖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에소피노사는 다시 이국 땅에 가기를 거부했다. 1529년 카를로스는 그에게 3만 마라베디의 연금을 추가 지급했과, 연간 4만 3000마라베디의 연봉을 받는 조사관이라는 직위를 내렸다. 그는 이렇게 여생을 세비야에 보냈다.
데 마프라는 1542년에 다시 필리핀 제도로 떠났다.
1525년,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은 인맥이 많은 관료 프란시스코 가르시아 호프레 데 로아이사를 새로운 몰루카 함대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세계 일주에 성고한 엘카노는 부사령관을 맡았다. 두번째 몰루카 함대는 마젤란이 갔던 길로만 가면 안전하고 빠를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마젤란의 천부적인 항해 실력이 함께하지 안은 두번째 함대는 더 가혹한 운명을 맞았다. 일주 경험이있는 엘카노도 잘못된 선택을 해서, 마젤란이 발견한 해협에 늦게서야 도착했다. 이 저위도 지역의 폭풍은 너무 강력해서, 다섯 척의 함선 중 세 척이 난파될 정도였다. 태평양에서는 괴혈병의 습격을 받았는데, 이번엔 치료 효과가 있는 퀸스를 지닌 사람이 없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후임을 지명한 카를로스의 편지를 건네고, 로아이사는 죽었다. 후임자는 엘카노였다. 바스크인 선원은 드디어 소원 성취를했지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 자신이 괴혈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는 선실로 들어가 유서를 썼다. 그는 귀중품부터 옷가지나 서류뭉치까지 그의 재산 목록을 써내려갔다.
유서는 일곱 명의 부하들이 증인을 섰는데, 모두 바스크인이었다.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닷새 만인 이1526년 8월 4일, 세바스티안 엘카노는 바다에서 죽었다.
이 항해에서는 다섯 척의 함선 중한 척만 남아 향료 제도에 도착했다. 에스파냐를 떠나온 450명의 함대원 중,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8명뿐이었다.
카를로스는 향료 제도를 장악하겠다는 욕심을 접지 않았다. 그는 다시 세비야의 수석 항해사 세바스티안 카보트를 인도 제도를 보냈다. 하지만 불운한 카보트는 남아메리카 동쪽 해안의 엉뚱한 해협 리우데라플라타까지 가는 데 그쳤다. 에스파냐로 돌아온 그는 세번째 몰루카 함대를 이끌게 됐지만, 해협에 가까이 가서는 진입하지 못했고, 결국 임무 완수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비보를 접한 멕시코 정벌의 주역 에르난도 크네스는 멕시코 아과타네호의 전초기지에서 나름의 함대를 꾸려 출발했다. 이 경우는 혀협을 통과하기까지의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에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러저런 재난을 마나 지체됐다. 향료 제도에 닿은 함선은 딱 한 척뿐이었는데, 그나마도 포르투갈 함대와 마주쳐, 선원들은 포로로 잡히고 화물은 압수당했다.
실패가 거듭되면서 향료 제도에 에스파냐 본부를 세우고, 에스파냐 국고에 목돈을 보태겠다는 꿈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러나 카를로스의 무모한 꿈은 시들지 않았다. 그는 다섯번째 항해단을 꾸렸고, 마젤란처럼 포르투갈 출신인 시몬 데 알카시바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가장 야시만만하고 공세적인 이 함대는 여덟 척의 함선 가득 에스파냐 군사드을 태우고 향료 제도로 떠날 계획 이어싸. 하지만 배를 띄우기도 전에, 카를로스는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게 됐다.
20년 동안 푸거 가문은 실패한 함대의 투자 손실을 만회하려애섰지만, 지급 능력이 업던 에스파냐 왕조는 그 빚을 갚지 못했다. 돈이 없던 카를로스 왕은 향료 제도로 함대를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포르투갈의 제국주의적 야심에 훼방을 놓았다. 그는 향료 제도의 문제점을 연구하는 위원회에 포르투갈을 회부하고, 바티칸에 현재의 불공정하 상황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했다. 주앙 3세로서는 교황의 중재한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카를로스는 형료 제도에 대한 집착을 외교적으로나마 이어갔지만 이것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후원자들로부터 투자 유치에 실패하자, 카를로스는 포르투갈에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1529년, 그는 몰루카 제도와 그 동쪽 섬을 담보로 잡히고, 주앙 3세로부터 35만 다카트를 빌려 썼다. 양국 모두 사라고사 협약에 합의했고, 이렇게 해서 경제적 주도권을 두고 벌였던 오랜 싸움을 끝냈다. 마젤란의 항해가 이뤄진 지 7년 만에, 그리고 이어진 3년의 항해 실패 뒤에, 카를로스는 파산 직전에 몰렸고, 그 귀한 섬들을 포르투갈의 손에 넘겨주게 됐다.
빅토리아 호는 정비를 거쳐, 한 상인에게 10만 6274마라베디에 팔렸고, 이후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대륙 정벌 사업에 동원됐다. 1570년경 빅토리아 호는 대서양을 오가고 있었는데, 앤틸리스에서 세비야로 가는 길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1531년, 마젤란 해협의 위치를 정확히 표시한 지도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오롱스 피네는 남아메리카의 정확한 지점에 해협을 표시해놓았지만, 그 해협에 마젤란의 이름을 붙이지는 않고, 태형양을 '마젤라니쿰'이라고 명명했다.
플랑드르의 지도 제작자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는 1536년에 제작한 유명한 지도에서 그 해협을 마젤란에게 헌사했다.
물개는 몰루카 함대가 바이아 데 로스 파토스에서 본 것은 바다 늑트줄리안 지역에 살지않고 오스트레일리아나 베링 해협 쪽에 서식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마젤란을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것은 잉글랜드 였다.
이 당시엔 날짜 변경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의 어떤 우주론자나 천문학자도, 심지어 프톨레마이오스도 세계 여행을 하면서 날짜를 바꾸어야 한다고는 생각치 못했다. 24시간을 벌게 된 사실을 깨달은 것은 세계 일주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럽은 이상하게 16세기에 다소 발가벗고 소박한 외부인들만 만난다...
'시사.상식 > 시사.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래스카는 미국의 축복 (0) | 2013.03.05 |
---|---|
진시황의 자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0) | 2013.02.27 |
교황과 추기경의 역사- 진짜 황제는 교황이다?| (0) | 2013.02.16 |
[이탈리아군의 전설] (0) | 2013.02.16 |
알고 먹으면 더 맛있다…`덴뿌라`의 어원 (0) | 2013.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