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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1사단 장병들이 장진호 전투가 시작된 11월 27일 전차와 함께 눈 덮인 벌판을 횡단하고 있다. 미 해병대 자료사진 |
미10군단의 주축인 미 해병1사단이 장진호를 거쳐 서북쪽으로 진격, 중공군에 압박을 가하면 미8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잘하면 미 해병1사단이 중공군을 거꾸로 포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27일 미 해병1사단이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무언가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을 때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선두부대인 미 해병1사단 5연대가 함남 장진군 유담리에서 27일 오전 8시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중공군의 박격포와 수류탄 세례를 받았다.
▶ 중공군의 노림수
27일 밤부터 상황은 악몽으로 변했다. 중공군이 미 해병5연대가 포진한 유담리를 포위했고, 미 해병1사단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후방의 장진군 하갈우리 주변의 도로도 차단했다. 상황은 분명했다. 미8군처럼 미 해병1사단도 포위를 당한 것이다. 미 해병1사단으로선 중공군 병력이 얼마나 많은지, 중공군의 포위망이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미 해병1사단은 황초령 고갯길 전후부터 장진호까지 좁고 험한 산길을 따라 부대가 분산돼 있었다. 이렇게 분산 배치된 미 해병1사단 예하부대들이 압도적인 수의 중공군에 의해 포위당한 것이다.
미10군단이 공세작전을 시작할 무렵 중국은 장진호 주변 일대에 9병단장 송시륜 장군이 지휘하는 20ㆍ26ㆍ27군 등 3개 군단급 부대를 투입했다. 이들 중공군 3개 군단 예하의 총 12개 사단 중 8개 사단이 실제 포위 작전에 투입됐다. 중공군 편제에서 병단은 우리나라의 야전군을 의미하므로 미 해병1사단을 잡기 위해 중공군은 야전군 규모의 부대를 투입한 셈이다. 중국은 미국 지상군 중 최정예 사단 중 하나로 평가받는 미 해병1사단을 포위ㆍ섬멸해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싶어 했다. 중국이 미국의 최정예 사단 하나를 잡을 수 있다면 단순히 1개 사단을 격파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 의미가 큰 일대 사건이 될 터였다.
▶ 사상 최악의 악조건
28일 미 해병1사단은 우선 저 멀리 동해안 함흥까지 이어지는 총 56㎞에 이르는 기나긴 보급로의 상황을 먼저 체크해야만 했다. 이미 공격은 불가능했고, 보급로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이틀 뒤인 30일 결국 미 해병1사단은 후방으로의 철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함흥으로 철수하는 작전은 공격만큼이나 어렵고 위험한 임무였다. 유담리·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 등 이름조차 생소한 작은 마을들을 따라 함흥까지 이어지는 도로 주변의 산들은 높았고, 계곡은 깊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곳곳에서 길을 가로막았다. 휘어지고 굽이치는 길은 간신히 통행할 지경이었고, 그나마 대부분 갈림길도 없는 외길이었다. 더구나 이미 5연대와 7연대 등 해병1사단 주력병력이 위치한 유담리부터가 포위당한 상태였다. 당장 눈앞의 적을 뚫고 후퇴하더라도 고개마다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의 4중ㆍ5중 포위망을 차례로 돌파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더욱 고약한 것은 살인적인 추위였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추위 속에 동상 환자는 속출했다. 전사한 시체는 순식간에 벽돌처럼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시체를 방어진지 보강용 엄폐 벽으로 사용할 만큼 철수 작전의 상황은 처절했다.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전사자가 쏟아졌지만 미 해병1사단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미 해병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누구보다 의연했다. 스미스 소장은 “후퇴가 아니라 또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이라며 철수 작전에 명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 미 해병대의 자존심
중국은 12월 4일 관영언론을 동원해 “미국 해병1사단 포위 섬멸 임박”이라고 선전을 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언론도 미 해병1사단의 위태로운 운명에 대해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1개 사단의 철수 작전이 아니라 미ㆍ중 양 강대국의 자존심 싸움으로 판이 커졌다.
하지만 미 해병1사단 5연대와 7연대는 1차 포위망을 뚫고 12월 4일 천신만고 끝에 사단본부가 위치한 하갈우리에 도달했다. 12월 5일 미군 지휘부는 미 해병1사단에 하갈우리에서 항공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하갈우리에 건설된 야전 비행장을 통해 수송기로 철수하자는 것이 지휘부의 의도였다.
하지만 미 해병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항공 철수 제안을 거부했다. 항공 철수를 위해서는 이륙하는 항공기를 엄호하기 위해 최후 순간까지 비행장 외곽을 방어할 1개 대대의 병력이 필요했다. 아군 본대의 철수를 기다리며 후방 고토리에서 도로를 확보하고 있는 1개 대대도 문제였다. 사단 본대가 항공기로 철수해 버리면 마지막까지 남게 될 2개 대대의 운명은 전사냐 혹은 포로냐 하는 선택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2개 대대 병력을 희생양 삼아 사단 본대가 비행기로 철수하는 방식은 명예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미 해병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 큰 희생이 있더라도 미 해병대는 명예로운 방식의 철수 작전을 원했다. 결국 스미스 소장은 지상 돌파를 결정했다. ‘철수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향한 공격’이라는 명예로운 다짐과 함께 미 해병대는 철수 작전을 계속했다.
12월 7일 고토리에 도달한 미 해병1사단 주력부대는 마지막 고비인 황초령에서 또다시 좌절을 해야 했다. 황초령의 험준한 계곡도 문제였지만 수문교가 붕괴돼 차량통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송기를 동원해 철제 부교를 공중 투하하는 등 결사적인 지원 노력으로 마침내 미 해병1사단은 포위망을 뚫었다.
미 해병1사단이 12월 11일 함흥에 도달할 때까지 전사 463명, 실종 182명, 부상 2872명, 동상 등 비전투 손실 3695명의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지만 미 해병1사단은 결국 명예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오히려 중공군은 9병단 전체가 재편성을 해야 할 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당했다. 양 강대국의 자존심을 건 대결은 결국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린 것이다.
■ 이모저모-중공군 대규모 피해 … 전쟁 향방에도 영향
미국에서는 장진호 전투를 초신 전투(Battle of Chosin)라고 부른다. 초신이라는 이름은 전투가 벌어진 장소의 지명인 장진(長津)을 일본식 발음으로 부른 데서 유래했다. 당시 미군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작성한 지도를 토대로 군사지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한국식 발음이 아닌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지명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1사단이 압도적으로 병력이 많은 중공군을 상대로 싸워 포위망을 뚫은 전투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이처럼 장진호 전투는 워낙 상징적이고 유명한 전투여서 미 해군 군함 중에도 초신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군함들이 많다. 미국의 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 순양함인 CG-65 초신함이 대표적이다.
장진호 전투는 전쟁 자체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결과적으로 1개 사단이 야전군 규모의 중공군이 다른 작전에 투입되지 못하게 붙들었다는 점에서 전쟁의 향방에도 큰 영향을 미친 전투로 평가되는 것이다.
최용호 박사 등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전문가들은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인해 그해 12월 31일부터 시작해 이듬해 1월 4일 서울을 점령했던 제3차 공세에 참가하지 못했다”며 “그 점을 고려하면 장진호 전투의 전략적 의미는 더욱 크다”고 평가한다.
>1·4후퇴
■ 매튜 리지웨이 8군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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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는 바로 미 육군행정참모부장 매튜 리지웨이(Matthew Ridgwayㆍ1885~1993) 중장이었다. 미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정통파 장교였던 리지웨이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82공수사단장과 18공수군단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벌지전투에도 참전한 역전의 장교였다.
그는 야전군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도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다닐 만큼 독특한 캐릭터를 갖고 있었다. 마치 스파르타군인 같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엄격한 군인정신을 지닌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작전과 전술에 탁월한 감각을 지닌 장군이었다. 한마디로 명장 같은 면모와 용장 같은 면모를 동시에 지닌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
워커 장군에서 리지웨이 장군으로 미 8군사령관이 바뀐 것은 단순히 지휘관 한 명이 교체된 그런 수준의 사건이 아니었다. 맥아더 원수가 지휘하는 미 극동군사령부, 브래들리 합참의장을 비롯한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 애치슨 장관이 통제하는 미 국무부의 의견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에서 유엔군과 미군의 지상군 주력부대를 통제하는 미8군사령관이 교체된 것이다.
워커 장군도 제2차 세계대전 중 패튼 장군 휘하에서 명성을 떨친 역전의 용장이었지만, 그는 맥아더 원수 휘하의 참모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맥아더의 미 극동군사령부에는 오랫동안 맥아더와 함께 근무한 참모들로 가득 차 있어 이방인에 가까운 워커 장군은 사령부 참모들과의 의사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리지웨이도 그런 점에서는 사정이 비슷했지만 그는 워싱턴과 강력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미 육군의 행정참모부장(Deputy Chief of Staff for Administration)이었던 리지웨이는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미 워싱턴 근무시절부터 6ㆍ25전쟁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리지웨이는 맥아더 원수와 자주 의견 충돌을 벌였던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에게 실무적인 조언을 하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한국에 온 것이다.
2월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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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중공군 2월 공세 당시 최대 격전지이었던 지평리 전투 장면을 묘사한 미 육군의 기록화. 자료 사진 |
1951년 1월 중동부전선의 사정은 다른 곳보다 위태로웠다. 서부전선의 미 1군단과 9군단은 경기도 평택과 안성을 연결하는 선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미 10군단이 담당한 중동부전선은 강원도 영월 남방 일대에 돌파구가 형성된 상태였다. 공산군 일부는 충북 단양에까지 밀고 내려왔고, 북한군 10사단 등 일부 부대는 산악지대를 통해 경북 안동ㆍ의성 일대까지 침투한 상태였다. 1월 말에 와서야 유엔군과 국군은 전선 후방으로 침투한 적을 섬멸하고 강원도 영월과 삼척을 연결하는 선으로 북상해 서부전선의 아군과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라운드업 작전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1951년 2월 초 서부전선에서 썬더볼트 작전이 진행되고 있을 때 중동부전선에서는 라운드업(Round Up) 작전이 계획되고 있었다.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이 참가한 라운드업 작전의 목표는 중공군의 의도와 병력 배치를 파악함과 동시에 중동부 지역의 전선을 홍천 부근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모든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미 1군단과 9군단이 맡은 서부전선, 국군 1군단이 맡은 동부전선과 연계해 전체 아군의 전선이 한강 하류-홍천-대관령-강릉까지 북상할 수 있을 터였다. 2월 3일 국군 1군단이 대관령과 강릉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고, 5일에는 미 10군단의 라운드업 작전이 시작됐다.
같은 날 국군 3군단 소속 5ㆍ8사단이 홍천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으며, 2월 7일에는 국군 1군단 소속 수도사단이 강릉을 탈환했다. 썬더볼트 작전 막바지인 9일 미 1군단에 배속된 국군 1사단이 관악산 점령에 성공해 한강선 도달의 발판을 마련했다.
10일에는 미 1군단과 9군단이 한강 남쪽에 도달했다.
이처럼 서부전선의 썬더볼트 작전이 마무리될 무렵 중동부전선의 라운드업 작전은 홍천 주변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착 국면에 빠져들었다. 아군 공격이 속도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오히려 중공군과 북한군이 홍천 북쪽 일대로 집결하는 징후가 연달아 식별됐다.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이처럼 전선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자 미 10군단 소속 부대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미 2사단에 더이상 북진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당시 미 8군 정보 관계관들은 중공군이 모종의 공세를 다시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적 중 일부는 원주-충추로 파고 들어와 아군을 포위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중공군 2월 공세
휴전 후 밝혀진 공산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같은 미 8군의 정보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당초 중공군과 북한군은 유엔군과 국군이 1951년 1월에 감행한 울프하운드 작전과 1월 하순부터 2월 초까지 감행한 썬더볼트, 라운드업 작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엔군과 국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후퇴를 멈추고 공격으로 전환하자 공산군 측은 당황했다.
한반도에 주둔한 중공군의 지휘관이었던 펑더화이는 1월 27일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에게 전보를 보내 “일부 부대의 철수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동시에 국군 일부를 공격해 북진을 멈출 수 있는지 여부를 시험해 보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다. 또 “정치적으로 서울 포기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반격을 해야하는데 반격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무리하다”는 자신의 판단도 첨부했다.
다음날인 28일 마오쩌둥은 서울을 확보하도록 요구하면서 주력으로 강원도 원주를 공격해 경북 영주ㆍ안동으로 돌파하는 작전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펑더화이는 역습 작전을 감행해 상황을 타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중공군과 북한군은 양평 남동쪽·원주·횡성지역의 아군 부대를 역습하기로 2월 7일 결정한 상태였다. 미 8군이 라운드업 작전 중 식별한 공산군 측 병력 이동 징후는 이 같은 2월공세 준비를 위한 병력 이동이었던 것이다.
■고난의 횡성전투
2월 7일 펑더화이는 예하 부대 지휘관들에게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와 횡성 중 어느 곳을 먼저 공격할 것인지를 예하 부대 지휘관들에게 질문했다. 두 곳 모두 전선에 구멍을 내어 동서로 아군을 분할하기에 좋은 지점이었으나 병력이 부족해 선후를 판단해야 했던 것. 이 같은 논의 끝에 중공군은 횡성을 먼저 노리기로 결정했다. 지평리의 미군을 먼저 공격해 성공하지 못할 경우 주변에 증원할 수 있는 유엔군 병력이 많아 위험 부담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2월 11일 중공군은 무려 11개 사단에 달하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해 그 중 9개 사단을 국군 1개 사단 규모가 방어하는 횡성과 그 이북 일대를 집중 공격했다. 중공군은 이처럼 결정적 지점에 압도적인 병력을 집중하는 방법으로 확실한 승리를 담보하려 했다.
1대 9의 싸움이었으니 결과는 중공군의 의도대로였다. 횡성 일대에 배치된 국군은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 고위 지휘관 중 일부는 국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한 것에 불만을 표시했으나 무기와 장비가 중공군과 별 차이 없는 국군이 9배나 많은 중공군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공군은 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장비가 빈약한 국군을 철저히 노리고 있었으나 유엔군 지휘부는 이 같은 중공군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평리전투의 서막
횡성의 국군이 후퇴함에 따라 경기 양평의 지평리에 자리 잡은 미 2사단 23연대의 오른쪽 공간이 열려 버렸다. 양평읍에서 동쪽, 횡성에서 서쪽, 남한강 북쪽에 자리 잡은 지평리는 동서로 놓인 중앙선 철도와 홍천에서 여주로 가는 도로가 교차하는 요충지였다.
이처럼 횡성 일대의 전선이 붕괴된 이상 지평리의 23연대도 후퇴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2월 12일 23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은 직속상관인 2사단장에게 철수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2사단장은 뜻밖에도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리지웨이는 이미 며칠 전 지평리 일대의 미 2사단에 진격 정지를 명령할 때부터 이 같은 상황을 예상했던 것인지, 횡성이 무너진 위기 상황에서도 지평리의 미군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리지웨이는 지평리의 미군으로 하여금 끝까지 버티게 하면서 화력으로 중공군을 강타할 생각이었다. 마침 지평리 주위는 280미터 내외의 고지가 둘러싸고 있어 사주방어진지를 편성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준비된 전장
리지웨이는 의도적으로 지평리에서 결전을 준비했으나 중공군은 이 같은 미군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지 못했다. 의도뿐만 아니라 미군의 정확한 전력도 파악하지 못했다. 중공군은 지평리에 있는 미군이 4개 보병대대, 다시 말해 순수하게 보병으로 구성된 증강된 연대 규모로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지평리에는 미 2사단 23연대 외에도 프랑스군 대대, 105㎜ 곡사포대대 1개, 155㎜ 곡사포 중대 1개, 전차 중대 1개, 고사포 중대 1개 등 600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장비도 곡사포가 24문, 전차도 21대가 있었다. 편제와 상관없이 실제 장비와 전력을 따져보면 국군 1개 사단급을 훨씬 상회하는 전력이었다. 그럼에도 지평리에 투입된 중공군의 실제 병력 규모는 횡성전투 때보다 오히려 더 적었다. 중공군은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던 것.
더구나 23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과 프랑스군 대대장이었던 랄프 몽클라르 중령은 모두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특히 몽클라르 중령은 제1ㆍ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6·25전쟁 발발 당시에는 이미 프랑스군 중장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1개 대대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그는 지휘계통이 애매해지지 않도록 중령으로 강등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참전을 자원한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중공군은 참전 이래 계속 미군을 속이고 유인했으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미국은 지평리 전투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점은 알았으나 잘만 한다면 오히려 중공군을 화력으로 격멸할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경기 양평군 지평리(현 지평읍)에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던 1951년 2월 13일 에드워드 알몬드 미 10군단장은 헬기를 타고 급하게 23연대로 향했다. 지평리를 방어하던 23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은 늦어도 14일에는 철수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알몬드 군단장에게 건의했다.
알몬드 군단장은 연대 전력을 감안할 때 철수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리지웨이 미 8군사령관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리지웨이의 입장은 여전히 단호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적이 이번 공세를 성공시키려면 지평리를 꼭 점령해야 한다”며 “아군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평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프리먼 연대장의 구상
이 같은 상황에서 23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지평리에서 전후좌우를 모두 방어할 수 있는 사주방어선을 편성해 방어전을 펴는 것 외엔 대안이 없었다. 원래 지평리 주변 직경 5㎞ 내에는 300m 내외의 고지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방어선을 펴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방어선은 둘레 18㎞에 달해 4개 보병대대만으로는 배치할 병력이 모자랐다.
결국 프리먼 대령은 길이 1.6㎞의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북쪽에 1대대, 동쪽 3대대, 남쪽 2대대를 배치했으며 서쪽에는 몽클라르 중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대대를 배치했다. 물론 이 진지도 둘레가 6㎞나 돼 4개대대로 완벽하게 방어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프리먼 23연대장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예비대를 최대한 축소했다. 연대 전체 예비대로서 단 1개 중대만 확보하고, 각 대대의 예비대로 각 1개 소대만 할당했다. 그 외 병력은 모조리 방어진지의 제1선에 투입했다.
▶중공군의 포진
이에 앞서 2월 12일 중공군 총사령원 펑더화이로부터 작전지휘를 위임받은 덩화 부사령원은 126사단을 투입, 지평리 남쪽 곡수리를 점령해 여주 이포리와 이천으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토록 했다. 116사단도 양평 단석리를 점령해 여주와 원주 문막리로 연결되는 도로를 막도록 조치했다.
이 같은 중공군의 계획에 따라 13일 주간 무렵에는 중공군 116사단과 126사단이 지평리 주변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차례로 차단했다. 13일 오후 5시 30분부터 40군 119사단의 3개 연대, 42군 126사단의 2개 연대 등 총 6개 연대가 공격을 위한 이동을 개시했다. 해가 지자 지평리 주변의 중공군은 일제히 횃불을 올려 미군을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미군들로 하여금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됐다”고 심리적으로 압박할 의도였다.
▶13일의 대혈전
13일 저녁 해가 지자 중공군은 특유의 피리 소리에 맞춰 돌격을 감행해 왔다. 미군은 105㎜와 155㎜ 곡사포로 1문당 250발에 달하는 맹렬한 포격을 감행했으나 중공군은 좀처럼 공격의 파도를 멈추지 않았다. 격퇴했다 싶으면 또 어느새 접근한 중공군이 미군 진지로 접근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 와중에 중공군도 미 23연대 지휘소(CP) 주변에 300발의 포격을 감행해 프리먼 23연대장이 부상을 입었다. 프리먼 23연대장은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부대 지휘를 계속했고, 평소 연대장을 믿고 따르던 23연대 장병들은 그런 상관의 모습에 오히려 더욱 힘을 내어 전투를 계속했다.
미군이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하자 중공군은 39군 115사단 소속 2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했지만 진지 일부를 탈취했을 뿐 지평리 전체를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14일 아침 해가 떠오르고 미 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이 재개되면서 23연대는 고비를 넘기게 됐다.
▶G중대의 위기
중공군의 덩화 부사령원은 14일 밤 계획을 일부 조정해 115사단 2개 연대, 119사단 3개 연대와 126사단 1개 연대 등 또다시 6개 연대 규모의 공격부대를 편성해 공격을 재개했다. 밤 10시 무렵부터 아군이 쏘는 조명탄과 중공군이 쏘아대는 신호탄이 전투 지역 상공을 온갖 색깔로 물들이는 가운데 대혈전이 벌어졌다.
14일 자정이 다가오면서 진지 남쪽을 담당하고 있는 23연대 2대대 G중대 정면으로 중공군이 맹렬한 육탄 돌격을 거듭했다. 철조망이 모자라 G중대 정면에만 철조망을 설치하지 못했는데 중공군이 이를 알고 집중적으로 노린 것이다.
G중대에 인접한 프랑스군 대대쪽으로도 중공군은 마치 인명의 손실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로 반복적으로 병력을 투입해 공격을 거듭했다. 15일 새벽 2시 G중대의 일부 진지가 마침내 붕괴되기 시작했다. 새벽 3시에는 G중대 진지 전체가 중공군에 점령됐다.
▶프랑스군의 분전
프리먼 대령은 병력 부족으로 대부분의 병력을 최일선에 배치하고 예비대는 소규모로만 보유했기 때문에 G중대 진지의 붕괴는 곧 전체 방어선의 붕괴로 연결될 위험이 있었다. 프리먼 대령은 2개 소대 규모의 예비대를 투입했지만,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이미 빼앗긴 G중대의 진지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 결국 G중대 잔존 병력과 예비대들은 G중대 후방 200m에 새로운 진지를 편성해 저항을 계속했다.
G중대가 후방으로 물러나자 바로 옆에서 방어전을 펴던 프랑스군 대대도 위기에 빠졌다.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에서도 중공군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중공군 나팔에 대응해 사이렌을 울리는 등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방어선을 지켰다. 실제 계급은 중장이면서도 대대급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중령 계급으로 한국에 파병된 몽클라르 프랑스군 대대장은 부하들과 함께 소총에 착검을 하고 백병전으로 중공군에 맞섰다.
백병전을 불사하면서 버텨내는 미 23연대와 프랑스군 대대의 결사 항전에는 중공군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15일 아침 중공군은 또다시 공격을 멈추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5기병연대의 도박
미23연대가 지평리에서 혈전을 계속하자 리지웨이 8군사령관도 초조해졌다. 미23연대의 방어전은 단순한 1개 연대의 방어전이 아니라 유엔군이 과연 중공군의 포위 공격에 버텨낼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시험대였다. 의도적으로 철수를 승인하지 않은 23연대가 적에게 포위 섬멸될 경우 아군에게 미칠 심리적 악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23연대를 구원하도록 지시했다. 몇 차례의 구출 시도가 실패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구출 책임을 맡게 된 부대는 미 5기병연대였다. 5기병연대장 마르셀 크롬베즈 대령은 사력을 다했으나 15일 정오께 지평리에서 6㎞ 정도 떨어진 양평 곡수리에 겨우 도달했다.
크롬베즈 대령은 현재의 진격 속도로는 15일 해가 질 때까지도 23연대로 향하는 길을 뚫을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고민했다. 해가 지면 중공군은 또다시 공격을 재개할 것이고 16일 새벽까지 23연대가 버틸지는 아무도 몰랐다. 고민하던 크롬베즈 대령은 전차 23대에 병력 160명을 탑승시켜 적진을 돌파하기로 했다. 한국처럼 도로 주변에 산이 많은 지형에서 전차를 일렬 종대로 돌격하는 것은 무모한 작전이었으나 달리 대안이 없었다.
▶지평리 전투의 의미
15일 오후 3시 45분 미 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을 받으며 크롬베즈 대령이 지휘하는 전차 종대는 돌격을 시작했다. 중공군은 박격포와 로켓포 사격을 퍼부으며 전차들의 돌격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무기로는 전차 위에 탑승한 보병들만 제압할 수 있었을 뿐 전차 자체를 막을 순 없었다.
결국 이날 오후 5시 크롬베즈 대령이 지휘하는 전차 23대는 위풍당당하게 23연대의 방어진지에 도착, 23연대의 전차와 합세해 진지 주변의 중공군에게 맹렬한 전차포 사격을 가했다. 미군 증원 병력이 도착하자 15일 밤 중공군은 더 이상 공세작전을 포기하고 포위망을 유지하다 다음날 철수하고 말았다. 지평리를 결전장으로 삼은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의 결단이 중공군 2월 공세를 결국 무산시킨 것이다.
지평리 전투의 승리는 중공군 참전 이후 사기가 떨어진 미군이 자신감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인천상륙작전, 중공군 2차 공세에 이어 6·25 전쟁의 흐름을 다시 바꾼 결정적 전투가 됐다. 전선 붕괴의 위기 속에서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지휘 능력을 입증한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미 2사단 23연대가 약 72시간에 걸친 처절한 사투 끝에 양평군 지평리를 지켜내면서, 전선에 구멍을 내려던 중공군의 기도는 물거품이 됐다. 지평리 전투가 끝난 직후인 1951년 2월 16일부터 중공군은 2월 공세를 중단하고 후방으로 병력을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틀 뒤인 18일 중공군은 서부전선 한강 남쪽의 유일한 거점이었던 남한산성도 자진 포기하고 강북 쪽으로 철수했다.
중공군도 지평리 전투의 패전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유엔군이 51년 1월 하순부터 순차적으로 울프하운드ㆍ선더볼트ㆍ라운드업 작전을 감행할 때부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중공군이 전력을 투입해 방어전을 수행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평리 전투는 달랐다. 중공군으로서도 지평리 전투는 진검승부였다. 압도적인 병력 투입으로 포위 섬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지평리의 미 23연대를 격파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중공군은 모든 상황을 원점부터 다시 점검해야 했다.
반대로 유엔군과 국군 입장에서도 지평리전투의 의미는 컸다. 51년 1월 최악의 경우 부산까지 후퇴하면서 방어전을 계속하고, 끝내 한국을 지킬 수 없다면 유엔군을 부산으로 철수시키려는 계획까지 세웠던 미 합참도 한숨을 돌리게 됐다. 50년 12월 한국에 도착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을 때 “철수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한국에 머무르기 위해 왔다”고 호언장담한 리지웨이 8군사령관에게도 지평리 전투의 의미는 남달랐다.
■ 중공군 부대 교체 추진
화력과 기동력이 우수한 미군을 밀어붙이는 데 한계가 왔다고 생각한 공산군 측은 51년 2월 17일부터 이른바 ‘운동방어’로 전환했다. 유엔군이 공격해 오면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결사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설정한 방어선에서 일정한 기간만 방어하다 뒤로 물러나는 것이 방어계획의 골자였다.
공산군은 이 같은 방침 아래 현재의 전선에서 38선 사이에 방어선 3개를 선정했다. 한 개의 방어선마다 20~30일을 지탱한 후 물러나는 식으로 38선에 도달할 때까지 약 2개월 정도 버티면서 부대들을 추스리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다시 말해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벌자는 것이 공산군 측의 의도였다.
2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는 중공군의 부대 교체 계획 때문이었다. 50년 10월 한반도에 침입한 이래 5개월 동안 격전을 치른 중공군 13병단 소속 6개 군단, 18개 사단은 피해와 피로가 누적돼 더 이상의 연속 작전은 무리였다.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해 중공군 부대 교체 계획을 검토하던 중국 중앙군사위는 지평리 전투 패전을 계기로 부대 교체 계획을 최종 확정했다. 이 같은 계획에 따라 51년 2월 16일부터 19병단 소속 3개 군단, 9개 사단은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2월 18일에는 9병단을 전쟁에 투입할 계획도 확정했다.
전쟁 중에 전선에 배치한 20여 개 사단을 한꺼번에 교체하는 것은 통상적인 국가에서도 꿈꾸지 못할 사치다. 하지만 병력이 남아도는 중공군에게는 문제가 없었다. 새로운 부대가 최전방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3~4월까지 2개월이라는 시간만 벌면 되는 일이었다.
■ 킬러 작전
유엔군은 중공군의 이 같은 속사정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이 보급과 전력 재편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공산군 측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보름이나 20일 정도면 작전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 연속적인 작전을 수행할 보급 능력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이 같은 공산군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신속하게 후속 작전 준비를 시작했다. 작전명칭은 킬러 작전(Killer Operation)이었다. 작전 명칭에서 풍기는 뉘앙스에서 알 수 있듯이 작전 목표는 공산군 측이 점령한 땅이 아니었다. 공산군 병력을 소모시키는 것이 작전 목표였다.
서울 남쪽의 서부전선은 별다른 공격을 계획하지 않고, 중공군의 2월 공세로 후방으로 밀려난 횡성·평창 방면이 주된 공격의 목표였다. 하지만 공격 시작과 함께 여름철 장대비를 연상시키는 강수량 수백 ㎜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공격 계획은 초반부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꽁꽁 얼어붙어 있던 비포장도로는 하루아침에 진흙탕으로 엉망진창이 됐고, 겨울철 말라붙은 강 주변에 흔히 설치했던 각 부대의 지휘소들은 갑자기 허리 깊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흙탕물 때문에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공격은커녕 장비 수습도 힘든 상황이었고, 각 사단은 보급망을 유지하기 위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며칠 뒤 동부전선에서는 폭설이 쏟아져 작전 개시 전에 제설 작업부터 해야 했다.
악천후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과 국군 지상부대는 공격을 계속, 3월 4일에는 횡성을 점령했다. 6일 작전 종료가 될 무렵에는 양평~횡성~평창~강릉을 가로지르는 목표선까지 도달, 중공군 2월 공세 이전 상태로 전선을 회복했다.
작전 중 미9군단 지역에서만 적 79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원래 목표였던 적군 격멸에도 적지 않은 전과를 거뒀으나 기대했던 것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킬러작전은 절반의 성공이었던 셈이다.
■ 리퍼 작전
킬러작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후속 작전을 계획했다. 작전명 리퍼 작전(Ripper Operation)으로 명명된 이 계획은 이름 그대로 적의 방어선을 절단하는 것이 목표였다. 서울 동쪽인 남양주 덕소리부터 가평, 춘천 북쪽을 연결하는 선까지 북진해 전선 중심부를 두 토막 내 적에게 큰 피해를 주겠다는 의도였다. 한강을 건너 직접 서울의 적을 공격할 계획은 없었지만, 수도권 동북지역까지 아군이 진출하면 서울을 좀 더 용이하게 탈환할 수 있으리란 것이 리지웨이의 기대였다.
앞서 진행된 일련의 작전에 비해 리퍼 작전은 상당히 야심만만한 목표를 잡고 있었던 만큼 아군의 기도를 숨기기 위한 조치도 취해졌다. 리지웨이 미 8군사령관은 작전의 주목표인 중부 내륙지방으로 적 병력이 집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북한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마치 상륙작전을 할 듯이 양동작전을 펼쳤다.
미 소해정이 서해안을 따라 기뢰를 제거하다 진남포 외곽의 대동강 입구로 진입했으며,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해안을 함포 사격했다. 병력을 실은 수송선들이 인천항을 떠나는 모습도 연출했다. 동해안에서는 미 해군 함정이 함포사격을 가했다. 국군 해병대는 중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원산 근처의 섬을 점령하기도 했다. 모종의 상륙작전이 준비되고 있는 것처럼 소동을 벌여 중공군과 북한군이 전선 부근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
51년 3월 7일 마침내 리퍼 작전이 시작됐다. 작전 초반의 고비는 미25사단이 맡은 양평 양수리 도하작전이었다. 원래 이곳의 도하작전은 보병이 고속단정으로 도하해 교두보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미군 셔먼 전차가 도하하기에는 한강의 수심이 깊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2인승 공격단정으로 한강을 건너간 중대급 병력의 미군 보병들이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오도가도 못 하는 처지에 빠지자 미군 전차부대가 자진해 지원에 나섰다. 아직 부교가 설치되기 전이었지만 미 89전차대대 소속 셔먼 전차들은 손실을 각오하고 강속으로 뛰어들어 파괴된 교량의 잔해를 이용해 기적적으로 도섭하는 데 성공했다. 양수리 도하작전이 성공하면서 수도권 동북 쪽으로 치고 올라가 서울을 압박하려는 유엔군의 작전은 순조롭게 출발선을 통과했다.
■ 서울 재탈환
수도권 동북 쪽에 미군이 진출하자 서울의 적은 별다른 전투 없이 철수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강 남쪽에 포진한 상태에서 마치 도하작전을 할 것처럼 양동작전을 펼치던 국군 1사단은 3월 14일 정찰대를 투입해 서울 시내에 별다른 병력이 없음을 확인했다. 다음 날인 15일 국군 1사단은 정식으로 도하작전을 개시,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같은 날 미 24사단은 청평호, 국군 6사단은 홍천강 남쪽의 고지군에 도달했다. 미 기병사단은 21일 처음으로 춘천시내를 정찰한 후, 22일에는 춘천 시가지 전역을 확보했다. 킬러ㆍ리퍼 작전으로 38선을 회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1951년 3월 15일 국군이 서울을 재탈환했지만, 1950년 9월 서울을 처음으로 수복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서울 재탈환은 1ㆍ4 후퇴 이후 유엔군과 국군이 최악의 위기 상황을 넘겼음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신호였지만 번번한 기념식 하나 열리지 않았다.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은 3월 17일 한국을 찾았지만 서울을 방문하지 않고, 춘천 공격을 앞둔 미 해병1사단만 격려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서울에 다시 태극기를 올린 감격보다는 중공군 참전 이후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게 된 전쟁의 향방에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탓이었다.
■ 문산공수작전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도 서울 재탈환 자체보다는 그 이후 후속 작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리퍼작전의 핵심 목표 중의 하나는 춘천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계획대로 춘천을 탈환하면 공산군 병력에 큰 손실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산군 보급기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역에서 적지 않은 보급품을 탈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3월 20일과 21일을 거치면서 춘천 일대의 공산군이 조기 철수하는 조짐이 뚜렷했다. 원래는 미 187공수연대를 춘천 북쪽에 투입해 후방을 차단할 계획이었지만 공산군의 예상보다 빠른 철수로 공수 작전은 취소했다. 22일 미군과 국군은 춘천을 탈환했지만 기대했던 공산군 보급기지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춘천 탈환 후 새로운 작전 목표를 물색하던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서울 북쪽, 의정부 서쪽의 북한군 1군단 예하 병력을 주목했다. 이들이 후방으로 철수하려면 1번 국도를 지나 임진강 위를 지나는 다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리지웨이가 보기에 미 187공수연대를 투입해 후방을 차단한다면 북한군 1군단과 중공군 26군을 포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코레이저스(Courageous) 작전으로 명명한 이 같은 공수작전 계획에 따라 미 187공수연대와 제2레인저 중대, 제4레인저 중대 병력들은 23일 아침 대구 기지에서 100대 이상의 C-46, C-119 수송기를 타고 문산 상공으로 이동, 낙하산을 타고 강하했다.
밀번 장군이 지휘하는 미1군단이 24시간 안에 미 187공수연대와 연결해 2개 군단급 규모로 추정되는 공산군을 섬멸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공산군은 유엔군의 예상보다 빠르게 철수했다. 작전 중 미 187공수연대에서 전투 중 사상자는 단지 19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강하 중 부상당한 장병은 84명이나 됐다.
평양 탈환 직후 단행한 숙천 공수작전과 마찬가지로 문산 공수작전도 뚜렷한 성과 없이 끝난 것이다. 미 1군단에 배속된 국군 1사단이 신속하게 진격해 187공수연대 병력과 만났지만 문산 일대에서 공산군 대부대의 흔적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의정부 일대에서 중공군 26군이 저항을 했지만 그 또한 오래 끌지 않았다.
이처럼 문산공수작전의 전과는 제한적이었지만 이 작전 결과 서부전선에서 아군은 임진강에 도달하게 됐다. 2월 이후 3월 하순까지 킬러ㆍ리퍼ㆍ코레이저스로 이어지는 세 번의 작전으로 38선을 회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3월 말까지 국군과 미군은 서부전선에서는 임진강, 중부전선에서는 38선 부근에 사실상 도달했고, 동부전선에서는 부분적으로 38선을 넘은 상태까지 회복했다.
■ 38선 돌파 논쟁
국군과 미군이 다시 38선에 접근하면서 38선 재돌파 문제는 또다시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은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38선은 사실상 무의미한 선이 됐으므로 1950년 10월의 유엔 결의에 따라 북진을 계속해 한국의 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엔결의는 ‘통일, 독립, 민주 대한민국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확고했다.
하지만 미국 행정부는 적정한 상태에서 휴전으로 전쟁을 종결하고 싶어 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38선 돌파는 다른 6·25전쟁 유엔군 측 참전국들과 협의를 통해 결정해야 할 민감한 정치적 문제였다.
킬러 작전이 진행 중이던 1951년 2월 에치슨 미 국무장관은 38선 문제에 대한 국무부의 입장을 각서 초안으로 정리해 마셜 국방장관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 각서 초안은 유엔이 한국에 의한 통일을 지지하고 있지만 이는 정치적 목표이고, 전쟁목표로서의 통일은 반대한다는 의견을 담고 있었다.
리퍼 작전이 진행 중이던 1951년 3월 15일 미 국무부는 한반도 상황에 대한 새로운 정책 초안을 작성해 합참에 의견을 구했다. 이 초안의 내용은 ‘정치적으로는 통일독립국가를 이룩하고, 군사적으로는 침략을 격퇴하고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골자였다.
외교관과 고위 관료 특유의 신중하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 문서의 진짜 의미는 ‘군사적 수단으로 한반도를 통일하는 것을 포기하고, 군사적으로는 단지 한국을 방어하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즉 ‘정치적으로는 통일독립국가를 이룩한다’는 것은 통일 문제는 외교협상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의미였다. 공산군의 침략을 격퇴하면서 동시에 군사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미국이 기존 입장에서 후퇴한 것이다.
국무성의 초안에는 ‘유엔 지상군이 38선 이북으로 10~20 마일 정도는 공세적 방어 작전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거나 ‘38도선 북으로 제한된 기습을 가할 수 있으나 전면적인 진격을 하거나 북한의 영토 확보를 시도해서는 안 된다’ 같은 표현도 들어갔다.
■ 군사적 대안들
다시 말해 부분적으로 38선을 넘어 진격할 수 있으나 압록강ㆍ두만강을 향한 진격 같은 전면적인 진격을 포기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같은 국무성의 의견에 미 국방성과 합참, 각 군은 다소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유엔군이 공산군의 주저항선을 확인하기 전에 이 같은 새로운 지침을 확정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었다. 반대로 국무부의 의견이 건전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 같은 정책들은 아직 최종 확정된 안은 아니었으나 이 무렵부터 사실상 미국의 전쟁 목표는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38선 회복 후 휴전’으로 고착돼 가고 있었다.
순수하게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38선 돌파 후의 뚜렷한 대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계속 북진해 압록강-두만강 선으로 진격하는 것이 한국을 위해서는 최선의 대안이었지만 그 같은 공격의 결과로 중국과의 전쟁이 끝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맥아더 원수는 제공권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대략 청천강~함흥 선까지는 북진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고 그 밖에 한반도에서 허리가 가장 가는 평양~원산 선도 선택 가능한 후보지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청천강의 참패를 기억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 등 유엔참전국 수뇌부는 이 같은 선택을 망설였다. 더구나 1951년 1월 후퇴 시 김포·수원 등 수도권의 공항이 파괴된 마당에 38선 북쪽 100㎞가 넘는 지역에 안정적인 항공전력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맥아더는 대만 국민당 군대의 참전, 중국 해안 봉쇄, 중국 본토 폭격 같은 보다 강경한 수단으로 중국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제3차 세계대전으로 전쟁이 확대될 것을 우려했던 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이 같은 확전책을 선호하지 않았다.
■ 맥아더의 성명
이처럼 전쟁의 방향을 놓고 워싱턴에서 숨 가쁜 논의가 이이지고 있던 1951년 3월15일 트루먼 대통령은 38선 돌파 문제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것은 야전지휘관의 전술적 문제”라고 답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7000마일이나 떨어진 통수권자가 야전의 작전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며 “유엔군이 38선을 처리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말도 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38선 돌파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 이 발언도 실제로는 ‘전술적 문제’라는 표현에 숨긴 의미가 담겨 있었다. 군사적으로 38선을 돌파할 수 있겠지만, 38선 돌파는 전략적 수준의 목표가 아니라 전술적 수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상황에서만 이뤄질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트루먼은 유엔군이 38선에 도달했을 때쯤 성명을 발표해 공산군 측에 휴전을 제안할 생각이었다.
3월 20일 미 합참은 휴전 제안에 대한 미 정부의 움직임을 전하며 휴전 조건과 38선 돌파와 관련한 맥아더 원수의 의견을 구했다. 맥아더의 답변은 냉소적이었다. “현재 이상의 제약을 가하지 말기 바란다. 현재의 제약만으로도 적을 북한으로부터 축출하기에 곤란을 느끼고 있다는 점은 누차 건의한 바와 같다.”
문산공수작전이 진행되던 1951년 3월 23일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돌연 성명을 발표했다. 맥아더의 성명은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맥아더가 첫째로 강조한 것은 유엔군 전력의 우위와 중공군의 한계였다.
“제공권ㆍ제해권을 우리들이 장악하고 있다. 더구나 적은 지상화력에서조차 열세하기 때문에 여기서 생기는 전력의 격차는 적이 아무리 광신적으로 용감하고 인해전술을 취한다 하더라도 없애지 못한다.”
유엔군이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이와 함께 맥아더는 이 같은 제한이 풀릴 경우 중공군이 군사적으로 완전히 붕괴할 것이란 경고도 성명에 담았다.
“현재 유엔군은 그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중공군은 국제법을 무시한 기습을 가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력으로 한국을 정복하려는 그들의 기도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만일 유엔이 현재의 제한을 풀고, 유엔군의 군사행동을 중국의 연안과 내륙으로 넓힐 것을 결정한다면 중국은 곧 군사적 붕괴의 위기에 빠진다는 사실을 중국 자신이 통감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맥아더는 한국과 한국인을 더 이상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인 접근으로 전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이를 위해 적 사령관과의 회담도 제안했다.
“무참하게 폐허가 된 한국과 한국민을 더 이상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이 고려는 어느 것보다도 우선한다. (중략) 그러나 이 문제의 본질은 전과 다름없이 정치적인 것이며, 그 해결은 오로지 외교를 통해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내가 군사령관으로서의 권한 내에서 언제든지 적의 사령관과 전장에서 만나 논의할 용의가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맥아더 성명의 파장
맥아더 원수는 훗날 그의 회고록에서 이 성명이 “사령관으로서 일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상당수 유엔군 참전국 정부를 비롯한 워싱턴의 미국 수뇌부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맥아더는 성명에서 유엔이 중국의 연안과 내륙으로 군사행동의 범위를 확장하도록 결정한다면 중국은 군사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당수 국가들은 맥아더의 이 같은 성명이 6ㆍ25전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정책 변경을 시사하는 것인지를 궁금해했다.
비록 맥아더가 외교적 수단을 동원한 해결을 언급하고, 공산군 사령관과의 회담 용의도 밝혔지만 이 또한 워싱턴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 형태로 전쟁 상태 종식을 위한 협상 내지 휴전 제의를 준비하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미 합참은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 준비 사실과 그 내용을 이미 3월 20일 맥아더에게 통보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 정부 입장에서 맥아더의 단독 성명 발표는 일종의 항명으로 받아들여졌다.
훗날 트루먼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맥아더의 성명이) 외교정책에 대한 그 어떤 선언도 자제하라는 지침을 전적으로 무시한 행위”라고 간주하면서 “그것은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군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라고 표현했다.
1951년 4월 5일 미 하원에서 마틴 주니어 의원이 맥아더 원수로부터 받은 편지를 공개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마틴 주니어 의원은 6·25전쟁에 대만군을 투입하자는 주장을 펼치면서 이에 대한 맥아더의 견해를 질문했다.
맥아더는 평소 대만군을 6ㆍ25전쟁에 투입하자는 주장에 찬성했으므로 당연히 마틴 주니어 의원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내용과 함께 “전장에서 승리에 대체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답장을 마무리했다.
맥아더는 그 편지에 대해 “일상적인 의견 교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틴 주니어 의원이 미 의회 공개 석상에서 맥아더의 편지를 공개 낭독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의 대한 정책을 비판함에 따라 상황은 명백하게 정치적인 사건으로 돌변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이자 미 국민은 물론 한국ㆍ일본인들로부터도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는 맥아더를 해임하는 데 부담을 느꼈지만 해임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맥아더는 이미 전설적인 영웅이자 신성불가침의 인물이었지만 문민통제의 원칙을 위배하고, 외교적 정책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의사표시를 자제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어긴 이상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 트루먼의 생각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4월 6일 애치슨 국무장관, 마셜 국방장관, 헤리만 특별보좌관,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가졌다. 헤리만 특별보좌관은 즉각 해임을 주장했고, 애치슨 국무장관도 생각이 같았다. 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이미 1945년부터 맥아더와 충돌해 왔다.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 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 사령관 자격으로 일본 점령업무까지 총괄한 맥아더는 대일 정책을 놓고서도 미 백악관이나 국무부와 매끄러운 관계가 아니었던 것. 1945년 이후 훈장 수훈이나 정책 자문을 위해 일시 귀국해 달라는 백악관의 요청에 대해서도 맥아더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중공군의 참전 이후에도 중국 해안 봉쇄와 만주 폭격 등 확전을 주장하는 맥아더와 제3차 세계대전 예방을 초점에 둔 백악관과 국무부의 의견이 갈렸다. 맥아더는 1951년 이후의 전쟁 상황에 ‘아코디언 전쟁’이라고 비유했다. 현재의 전쟁 방식으로는 아코디언처럼 전선이 아래로 갔다 위로 갔다 밀려 갈 뿐, 궁극적인 승리를 달성할 수 없다는 비판이었다. 그런 모든 갈등 관계가 3월 23일의 성명과 4월 5일 편지 공개 사건으로 폭발한 것이다.
4월 9일 맥아더 해임 문제를 놓고 국가안전보장회의가 또다시 열렸다. 참석자들은 모두 맥아더 해임에 동의했고, 대통령의 해임 결정은 한국시간 4월 11일 오후 공개됐다. 원래 미 백악관과 국방부는 한국을 방문 중이던 페이스 육군장관을 일본의 미 극동군사령부로 보내 정중하게 맥아더에게 해임 결정을 통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통신시설의 고장으로 전문 수신이 늦어진 상황에서 언론이 먼저 맥아더 해임 사실을 보도해 버렸다.
전쟁의 방향을 결정
이에 따라 맥아더 원수가 맡고 있던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의 후임에는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이 임명됐다. 미8군사령관 후임에는 제임스 밴블리트(James Van Fleetㆍ1892~1992) 장군이 오게 됐다. 맥아더의 퇴장은 전쟁 방법을 둘러싼 논쟁이 배경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특정한 지휘관의 교체만을 의미하는 사건이 아니었다.
맥아더는 완전한 승리를 꿈꾸고 있었다. 맥아더는 중국을 공격해서라도 한반도 전역에서 공산군을 축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한국에 더 많은 병력을 보내면 소련이 그 틈을 타서 유럽으로 침략할 수 있으므로 한국에 병력을 더 보낼 수 없다”는 미 국무부와 합참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아시아에서 공산세력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는 오판이라고 맥아더는 믿었다.
맥아더는 오히려 아시아에서 이번 기회에 공산군의 침략을 완전히 격퇴해야 소련의 야망을 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 맥아더를 해임한 것은 사실상 6ㆍ25전쟁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현 상태에서 마무리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북한이 불법 남침을 시작한 이상 한국 정부는 무력을 동원해 북한을 응징하고 통일을 달성하기를 원했다. 맥아더의 해임은 그 같은 희망이 사실상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맥아더의 행동은 문민통제의 대원칙을 어긴 사건으로 간주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미국에서도 논란이 격렬했다.
또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1950년 가을 미8군과 10군단을 분리 진격하도록 한 것, 중공군 개입 사실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던 것 등 군사적 측면에서도 맥아더가 일부 실수를 범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윌로비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를 비롯한 맥아더 예하 참모에 대한 비판 중에 일부는 맥아더에게도 화살이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맥아더 원수에 대해 보다 긍정적이고 온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반도 전역에서 공산 세력의 완전한 축출을 원했던 맥아더의 희망에 한국인들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공산세력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추구하다 해임당한 비극의 영웅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1951년 3월 24일 확전의 필요성을 시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4월 11일 해임당하는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은 멈추지 않았다. 유엔군과 국군은 이보다 앞선 1951년 3월 하순에 리퍼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이미 38선 코앞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작전의 흐름만으로 보자면 북진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38선을 또다시 돌파해 북진할지 여부를 놓고 미국 지휘부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전면적인 북진이 아니라 38선 주변 일대에서 적절한 방어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제한적인 북진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 미국 수뇌부의 일치된 판단이었다.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맥아더 원수가 해임되기 직전인 3월 하순 38선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지점을 장악하기 위해 38선을 돌파해 약 32㎞(20마일)까지 북진하겠다고 보고했고, 맥아더는 그 같은 보고를 주저 없이 승인했다.
▶ 러기드 작전
아군이 전반적으로 정세가 복잡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러기드 작전으로 북진을 계속한 데는 사정이 있었다. 러기드 작전은 기본적으로 ‘미래의 방어 지역 확보를 위한 공격 작전’이었다. 공산군이 비록 지금은 후퇴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 다시 강력한 공세를 감행할 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아군이 안정적으로 싸울 수 있는 방어선을 확보하는 것이 러기드 작전의 실질적 목표였기 때문이다.
아군이 1951년 3월 리퍼 작전으로 확보한 지역은 방어에 부적합한 지역이 적지 않았다. 미8군은 중공군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공세를 재개할지 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공산군이 언젠가 공세를 재개할 것이 분명하다고 예측했다.
미8군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임진강 하구에서 출발해 판문점을 거쳐, 연천 북쪽을 통과한 후 화천을 지나 동해안 간성을 연결하는 선까지 북진을 계획했다. 이 선이 바로 캔사스선(Kansas Line)이었고, 이 선 이남 지역의 확보가 1951년 4월 초순 단행한 러기드 작전의 목표였다. 작전명 ‘러기드’는 ‘기복이 심한’ 혹은 ‘울퉁불퉁한’ ‘요철’이란 뜻을 가진 단어였는데, 러기드 작전이란 명칭에는 울퉁불퉁하게 복잡한 전선을 정리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1951년 4월 3일 본격적으로 시작한 러기드 작전은 9일 미 1군단과 9군단, 한국군 1군단이 캔사스선에 도달하면서 순조롭게 끝났다. 러기드 작전으로 아군은 38도선을 기준으로 서부전선은 약 3~9㎞, 동부전선은 최대 16㎞까지 북상했다.
▶ 예성강 공격 포기
1951년 당시에는 별 의미 없이 사령관의 일상적인 결심 중 하나로 치부하고 넘어갔으나 오늘날 생각하면 결코 사소하게 넘길 수 없는 사건 아닌 사건도 이 무렵 일어났다. 1951년 3월 말 러기드 작전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원래 리지웨이 장군이 생각했던 최초의 주공격 목표는 캔사스 선이 아니라 서부전선의 예성강이었다.
아군이 임진강을 건너 예성강을 목표로 진격해 아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후방으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는 북한 1군단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리지웨이 장군의 목표였다. 하지만 미8군 정보참모는 북한군 1군단이 뒤로 물러났고 오른쪽 측면에 중공군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자칫 잘못 공격하다간 이 지역의 아군이 포위당할 염려가 있다고 보고했다.
이 같은 참모의 보고에 따라 리지웨이 장군은 별다른 미련 없이 예성강 공격 계획을 포기했다. 이후 유엔군과 국군은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다시는 서부전선에서 예성강 방면으로 공격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예성강을 확보하는 것이 전쟁의 흐름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군사분계선이 서울에서 너무도 가깝다는 문제 때문에 장사정포의 위협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 현재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예성강 공격 작전 포기는 그 자체가 6ㆍ25전쟁에서 하나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리지웨이 장군의 예성강 공격 계획 포기는 안타깝게도 6ㆍ25전쟁 이전 대한민국이 관할하던 개성을 되찾지 못하고, 서쪽 끝은 38선 남쪽에서, 동쪽은 38선 북쪽에서 군사분계선이 만들어지는 출발점이 돼 버린 것이다.
▶ 철의 삼각지대
예성강을 공격 후보지에서 제외한 리지웨이 장군이 새로운 공격 목표로 정한 것이 바로 훗날 기자들이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라고 이름 붙여준 평강ㆍ철원ㆍ김화 일대였다. 북쪽의 평강을 꼭지점으로 남쪽의 철원과 김화를 연결하는 삼각지대는 킬러작전과 리퍼작전 이후 후방으로 점차 물러나고 있는 중공군과 북한군이 주방어지대로 선택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는 도로망과 철도망이 위치하고 있었다. 서북쪽으로도 동서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통해 시변리ㆍ사리원을 거쳐 평양으로 연결되는 교통망이 이 지역에 존재했다. 한마디로 이곳은 적의 핵심적인 병참선이 통과하는 지역이었고 전방지역 일대에서 공산군의 병력 이동과 보급, 측면 공격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충지였다.
러기드 작전으로 캔사스선을 확보한 후 중부지역에서 공격을 계속해 철의 삼각지대를 부분적으로 넘겨 볼 수 있는 중부지역의 산악지대를 공략하는 것이 리지웨이가 구상한 작전의 큰 틀이었다. 이 작전 계획이 바로 맥아더가 해임되던 1951년 4월 11일 시작한 돈틀리스(Dauntless) 작전이었다.
임진강∼철원∼김화∼화천저수지까지 진격해 철의 삼각지대를 파고 들어가는 돈틀리스 작전의 목표 지점은 와이오밍 선(Wyoming Line)이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돈틀리스 작전의 목표인 와이오밍 선은 훗날 1953년 정해진 휴전선과 상당 부분 겹치는 곳이 많았다.
전쟁은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체결하고서야 사실상 끝났지만 이미 그보다 27개월 앞선 1951년 4월부터 큰 틀에서 피아의 영역은 서서히 정해지고 있었던 것. 남쪽으로 낙동강까지 북으로는 청천강까지 널뛰기를 하던 전선은 이제 서서히 고착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 돈틀리스 작전
돈틀리스 작전이 진행 중이던 4월 14일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에 도착해 미8군사령관에 취임했다. 밴플리트 장군에게 8군의 지휘권을 넘긴 리지웨이 장군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원래 맥아더 원수가 맡고 있던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에 정식으로 취임했다.
신임 유엔군사령관이 된 리지웨이 장군은 14일 오후 5시 밴플리트 장군에게 미 8군과 유엔군 지상군 전부에 대한 지휘권을 넘기면서 와이오밍 선 이북으로 병력을 보낼 때는 반드시 자신의 승인을 받도록 지시했다. 동시에 리지웨이 장군은 조이 제독이 지휘하는 극동해군과 스트레트메이어 장군이 지휘하는 극동공군에 대해서도 전쟁을 확대하는 어떤 조치도 삼갈 것을 주지시켰다.
1951년 4월 중순 리지웨이 장군 취임 직후 돈틀리스 작전에 따라 북진을 계속하는 아군 앞에 갑자기 때 아닌 연기의 장막이 나타났다. 비가 간간이 내리고 안개까지 자주 끼는 상황에서 공산군은 잡초와 관목을 불태워 전방지역 일대에 엄청난 연기를 뿜어댔다.
연기가 얼마나 많은지 아군은 지상 관측은 물론 항공기를 이용한 항공 관측에도 지장을 받았다. 보이는 것이 없었으므로 포병을 동원한 포격은 물론이고 항공 폭격까지 포기할 정도로 연기는 혹심했다. 1950년 10월 중공군이 청천강에서 최초로 공세를 감행할 때도 산에 불을 질러 연기를 이용한 장막을 친 전력이 있었다. 다시 말해 전방에 연기의 장막이 나타난 것은 공산군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불길한 신호였다.
적은 여전히 방어 지향적이었으나 19병단을 시작으로 3병단과 9병단 등 중공군의 새로운 야전군 규모의 부대가 차례로 전선에 도착하고 있는 것도 공세 시작 가능성을 보여주는 불길한 조짐이었다. 1951년 2월 17일 이후 중공군은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4월 중순을 넘어가면서 전선에는 불길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15일 지평리에서 패전한 중공군은 4월 21일까지 두 달 가까이 북으로 물러나기만 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공세에 대응해 방어전을 펼치기는 했으나 땅을 꼭 지키겠다는 집착은 없었다.
어느 정도 싸우다가는 뒤로 후퇴하는 것이 전형적인 작전 패턴이었다. 2월 지평리전투 패전 이후 중공군이 4월 하순까지 수세 국면을 지속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1950년 10월 중공군 참전 이후 연속된 격전을 치른 주역인 구(舊) 13병단 소속 6개 군단급 부대의 병력으로는 더 이상 적극적인 작전을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중공군은 2개월 동안 휴식을 취하면서 옛 13병단 소속 부대를 후방으로 철수시키고 그대신 중국 본토의 3병단과 19병단을 한반도 전선 전방으로 투입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공산군 내부의 남진 논쟁
사실 2개월 동안 휴식하자는 결정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의 남침을 분쇄하고 북진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38선 돌파 여부, 북진 한계선 설정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듯이 중공군이 1950년 12월 3차 공세로 38선을 재돌파하는 과정에서 공산권 진영 수뇌부 사이에 남진 논쟁이 벌어졌다.
펑더화이(彭德懷ㆍ1898~1974)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은 이미 1950년 12월부터 공격 지속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1ㆍ2차 공세에서 중공군이 압승을 거두긴 했지만 중공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으므로 급하게 유엔군을 추격해서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
하지만 라주바예프 북한 주재 소련 대사의 생각은 달랐다. 소련 대사는 “미군이 신속하게 퇴각하면, 우리 군도 신속하게 진격해야 한다”며 “이것은 내 의견일 뿐만 아니라 조선노동당 중앙 당수 동지의 요구다”라고 압박을 가했다.
이처럼 추격 문제로 의견이 엇갈리자 펑더화이는 1950년 12월 8일 베이징에 전보를 보내 38선 부근에서 진격을 멈추겠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보고를 받은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ㆍ1893~1976)은 13일 “38선을 넘어야 한다”며 “38선 이북에서 정지한다면 정치적으로 크게 불리하다”는 답변을 펑더화이에게 보냈다.
마오쩌둥의 의견에 따라 펑더화이는 결국 38선을 돌파하기 위한 3차 공세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12월 31일 시작된 3차 공세는 이처럼 현장의 군 지휘관이 아닌 국가지도자인 마오쩌둥의 판단과 소련, 북한 정권의 희망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중국과 소련의 견해 차이
비슷한 논쟁이 1951년 1월 8일 중공군 3차 공세가 끝난 후 또다시 벌어졌다. 펑더화이는 3차 공세로 서울을 점령했지만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으려 했다. 펑더화이는 결코 미군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미군을 상대로 단기간에 승리를 거두려고 서두르다가는 오히려 1950년의 북한군처럼 미군의 반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펑더화이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중공군의 대승리에 고무된 북한 지도부는 이대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믿었다. 북한 지도부는 이런 결정적 순간에 중공군이 공세를 중지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가졌다.
소련군 장교 출신인 라주바예프 북한 주재 소련 대사도 중국의 펑더화이보다는 북한 지도부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기갑부대를 이용한 전선 돌파와 추격에 익숙한 소련 측 인사들은 유엔군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중공군이 자발적으로 추격을 멈추는 것은 군사적으로 오류라고 생각했다.
논쟁은 확대돼 자하로프 소련군 총참모장과 니에롱쩐(攝榮臻ㆍ1899~1992)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대리가 서로 전보를 주고 받으며 토론을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니에롱쩐은 잠정적인 공격 중지와 휴식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으나 자하로프는 “이기고 있는 군대가 적군 추격을 중지해 전과를 확대하지 않은 사례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자하로프는 1951년 1월 9일 “그 같은 추격 중단은 적군에게 숨돌릴 기회를 제공하고 기회를 상실하게 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펑더화이와 김일성의 논쟁
이 같은 논쟁에 소련 지도자 스탈린(1879~1953)까지 끼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묘하게 돌아갔다. 1951년 1월 9일 스탈린은 “중공군은 38선 북쪽과 해안에서 대기하더라도 북한군은 계속 남진하게 하자”는 제안을 담은 전보를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보냈다.
이 전보가 아직 펑더화이에게 전달되기 전인 1월 10일 김일성과 펑더화이는 남진할지를 놓고 일대 논쟁을 벌였다. 김일성은 2개월을 쉬지 말고 바로 추격하든가 아니면 휴식시간을 1개월로 줄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2개월 동안 휴식과 정비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펑더화이는 지금 계속 유엔군을 추격한다면 일부 지역을 추가 점령할 수 있겠지만, 유엔군 섬멸이라는 본질적 목표에는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유엔군이 좁은 지역에 몰리면 분산 섬멸하는 것보다 격파하기 더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점령지역 확보도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김일성은 만약 전쟁이 끝나고 선거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상황이 왔을 때 많은 점령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펑더화이는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으며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에 승리하고 적을 섬멸하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1월 11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제안에 기초해 ‘중공군 주력은 38선 이북에 포진하면서 일부 부대로 서울을 방어한다. 필요하다면 북한군은 계속 남진하도록 하자’는 타협안을 담은 전보를 펑더화이에게 보냈다.
하지만 김일성은 “아군의 휴식 시간이 길면 유엔군이 한숨돌려 장비를 보충할 것”이라고 공격 재개를 채근했다. 박헌영도 공격을 재개해야 미군이 철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격분한 펑더화이는 고함을 질렀다. 내전과 항일전을 통해 수십 년간 전투 일선을 누빈 펑더화이가 볼 때 김일성은 제대로된 대부대 운용 경험이 전혀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당신들은 틀렸다. 당신들은 과거에도 미군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군이 개입할 경우 어떻게 할지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지금도 미군이 반드시 철수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군이 철수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신속한 승리를 기대하면서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데 그 결과는 전쟁의 연장일 뿐이다. 전쟁의 승리를 운에 맡기고, 인민의 사업을 갖고 도박을 한다면 전쟁에 실패할 뿐이다. (중국) 지원군은 2개월의 휴식과 정비가 필요하며 단 하루도 줄일 수 없다. 나는 적들을 경시하는 당신들의 태도에 반대한다. 펑더화이가 이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내 자리를 박탈해라.”
▶2개월의 비밀
펑더화이의 직설적 비판에 결국 김일성은 자신의 주장이 무리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며칠 뒤 김일성에게 다시 전보를 보내 북한군 단독 공격도 위험하다며 신중한 대응을 주문했다. 이 같은 논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15일 리지웨이는 위력수색을 목적으로 한 울프하운드 작전을 통해 남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군의 행군 방향을 북쪽으로 돌렸다.
유엔군의 갑작스러운 후퇴 중지에 충격을 느꼈는지 다음날인 16일 김일성은 펑더화이를 찾아갔다. 김일성은 북한군의 단독 남진은 위험하다는 점과 중공군이 2개월 동안 휴식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에 동의한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이 울프하운드 작전에 이어 썬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을 연속적으로 감행하자 중공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이 생각보다 일찍 반격으로 전환하자 어쩔 수 없이 미군의 반격 기세를 꺾기 위해서라도 조기 대응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2월 공세였다.
하지만 2월 공세의 핵심 요충지였던 지평리를 중공군이 점령하는 데 실패하면서 2월 공세는 좌초했다. 누가 봐도 중공군은 한계점에 왔고, 이제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것이 중공군이 4월까지 2개월 동안 방어전만 계속한 이유였다.
1951년 4월 22일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봄날의 태양이 뉘엿뉘엿 서쪽 하늘에서 사라져 가던 황혼 녘, 마침내 중공군과 북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국은 그들의 공식 전사에 당시 “산을 밀치고 바다를 뒤엎는 기세(排山倒海)”로 공격을 재개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51년 2월 15일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이 미 2사단 23연대를 공격하다 실패한 이후 2개월여 동안 후퇴만 거듭하던 중공군과 북한군이 다시 공세작전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미 미군 지휘부는 중공군의 새로운 병력이 전선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적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으므로 적의 공세 전환 자체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2개월여 만에 다시 정면 승부를 걸어오는 중공군의 공세에는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다.
리지웨이를 대신해 미 8군사령관에 취임한 밴플리트 장군은 어느 선에서 방어를 해야 할지, 만약 적의 공격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뒤로 물러난다면 어디까지 후퇴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중국 스스로는 제5차 전역, 우리쪽에서는 흔히 중공군의 4월 공세, 혹은 춘계대공세로 부르는 일대 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의 상륙 공포증
1951년 4월 중순을 넘기면서 펑더화이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원이 휴식과 전력 재정비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했던 2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중공군이 공세를 재개한 것은 아니었다.
중공군은 북한군이 남침 초반 기세등등하게 승리하다 인천상륙전 ‘한 방’으로 전세가 역전된 상황을 계속 의식했다. 미군이 언제 어디서 다시 상륙전을 기도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에 대해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은 펑더화이뿐만 아니라 중국 국가 지도부의 공통적 관심사였다.
펑더화이는 1951년 4월 당시에도 미군이 조만간 동해안의 원산이나 통천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미군과 국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동해안 상륙으로 중공군의 측면과 배후를 강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
펑더화이는 경우에 따라 미군이 서해안 진남포에서도 상륙할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미군과 국군이 동서 해안과 38선 중심부에서 동시에 밀고 들어와 39도선, 즉 평안도 안주에서 함경도 원산을 연결하는 선까지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상륙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공격 재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개월 여의 휴식에도 불구하고 전투물자는 여전히 부족했고, 후방의 교통망 복구도 지지부진했지만 공격 재개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 중공군의 생각이었다.
○오판 vs 오판
중국 측은 유엔군이 상륙전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중공군이 전면 공세를 재개해야 유엔군이 상륙전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동시에 양면작전의 위험 부담도 덜 수 있으리라 계산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불리하다. 그것이 중공군이 4월 공세를 시작한 가장 중요한 동기 중 하나였다.
이런 상황 판단 때문에 중공군은 4월 공세에 참가하는 부대 외에 유엔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별도의 전력을 할당했다. 상륙전에 대비하기 위해 중공군 42군을 동해안 원산과 양덕 지구에 포진시켰다. 북한 6군단 주력은 사리원, 재령지구에 주둔하도록 했다. 평양에도 47군을 투입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토록 했다. 유엔군이 공수작전을 병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38군을 숙천 일대에 배치했다.
사실 유엔군은 당시만 해도 상륙작전을 결행할 계획이 없었다. 38선을 회복하기 위한 북진 과정에서 공산군 측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상륙작전을 할 것처럼 위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중국은 북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긴장하다 상황을 오판한 것이다.
미군 지휘부도 실체도 존재하지 않던 상륙작전에 대한 염려 때문에 중공군이 공세를 앞당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만 유엔군은 중공군이 공세를 취할 줄 알면서도 방어전을 준비하지 않고 북진을 계속했다. 그냥 기다리면 중공군과 북한군이 대공세를 준비할 여유만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이나 중공군이나 모두 미묘하게 상황을 오판하는 중에 4월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의 작전 기도
중공군은 4차 공세에서 전역 분할과 전술 분할을 결합해 전역 포위와 전술 포위를 결합하기로 결정했다. 국지적인 돌파와 포위, 전체 전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돌파와 포위를 동시에 구사하려 했던 것. 한마디로 전선 중앙을 찔러 유엔군과 국군의 방어선을 반토막 내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전선을 반토막 낸 중공군 39군과 40군이 동부전선의 미군과 국군이 서부전선 쪽을 증원하지 못하게 견제하는 동안 서울 북방에 3개 야전군급 부대를 투입해 승부를 볼 심산이었다. 이를 위해 새롭게 한반도에 투입한 야전군급 부대인 3병단과 19병단을 모두 서부전선에 투입하기로 했다. 장진호 전투 이후 휴식을 취해 전력을 회복한 9병단도 서부전선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서부전선의 중앙에서 3병단이 연천-동두천 축선으로, 좌익의 9병단이 포천-의정부 축선으로, 우익의 19병단이 문산-봉일천 축선으로 각각 공격 경로를 잡았다. 이런 공격으로 서부전선에서 국군과 미군 각 2개 사단을 섬멸할 심산이었다.
○전선 중앙의 균열
4월 22일 오후 철원과 화천 사이에서 작전 중이던 국군6사단은 전방에 중공군이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다는 미군의 연락을 받았다. 미 육군의 포병 관측용 항공기가 전달해 준 정보였다. 6사단은 진격을 중지하고 방어진지 구축을 시작했지만, 이날 밤 방어선은 결국 뚫리고 말았다.
중공군은 돌파할 필요성이 있는 지점에 과감하게 병력을 집중했고, 이처럼 집중된 병력을 방어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국군6사단 방어지역이 바로 중공군이 계획한 전역 분할의 목표 지점이었다. 국군6사단 서쪽에는 미 1군단, 오른쪽에는 미 9군단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그 사이를 갈라놓겠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중공 측의 의도는 그대로 성공했다. 중공군 40군이 공격개시 후 이틀째에는 전선 후방 50㎞까지 뚫고 들어와 경기도 가평 부근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은 이처럼 전선의 중앙부를 분할한 상태에서 서부전선 정면으로 거센 공격을 가했다.
두 달 만에 재개된 중공군의 공세는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예상된 공세였지만 미군은 방어에 부담을 느꼈다. 1951년 4월 14일 미 8군사령관으로 취임한 밴플리트 장군은 사령관이 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위기를 맞은 것.
○밴플리트의 결단
불안감을 느낀 미 8군사령부 참모들과 미군 군단장 중 1명은 미 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에게 서울 북방의 골든선(Line Golden)으로 즉각 철수하자고 건의했다. 현재의 방어선에서 대략 45㎞ 정도 후방으로 물리자는 이야기다. 하지만 밴플리트는 부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싸우다 물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싸우지도 않고 적에게 작전지역을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돼 여차하다간 서울까지 위험할 지경이었다. 밴플리트는 고민했다. 지난 1·4후퇴처럼 싸우지 않고 물러나는 것은 작전상 필요하다고 해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와서, 다시 한번 이 나라의 수도 서울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밴플리트의 직속상관이었던 리지웨이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도 밴플리트에게 후퇴를 권고했다. “빨리 저 강(한강)을 건너야 할 걸세.” 하지만 이때도 벤플리트의 답은 ‘아니오’였다. 그는 서울을 사수할 수 있고, 사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과거의 경험을 볼 때 대대적인 후퇴 중에는 군수지원에 어려움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후방으로 철수하면 병력 피해는 줄이겠지만 보급품과 군수품 손실이 발생할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세 번째로 서울을 잃어야 하는 대한민국 국민과 국군의 사기도 걱정거리였다.
반대로 적이 공격할 때마다 후퇴한다면 적을 기고만장하게 만들 염려가 있었다. 밴플리트가 보기에는 서울을 지키는 것이 옳았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밴플리트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 북방의 골든선과 노네임선에 방어진지를 강화해 끝까지 버틸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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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 전투
▶3중 포위 시도 저지 한계 전투 상황도:흰색은 미 2사단 예하부대의 배치를, 붉은색 실선은 중공군의 공격 상황을 보여 준다. 지도 왼쪽 △778 >용문산 전투 “너희들은 지금부터 나가 죽어라.” 1951년 5월 초 인사말이나 서두도 없이 바로 내지르는 국군 6사단장의 거친 연설에 장병들이 어리둥절해할 때 사단장이 이어서 꺼낸 말은 다음의 두 문장이었다. “사단의 명예를 회복하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마라. 나도 너희와 같이 죽겠다.” 사단장이 이런 말을 꺼낸 데는 사연이 있었다. 그 사연을 이해하려면 전쟁 개시 후 국군 6사단의 화려한 전적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국군6사단의 용문산 전투 상황도. 아래쪽의 점선이 아군의 주저항선이다. 6사단 2연대는 주저항선 전방에 위치한 353고지와 ▶사단장의 분노=사창리의 고전도 이런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전투였다. 심지어 사단 전진지휘소가 적 후방침투부대의 기습을 받아 사단장이 부상을 입을 만큼 격전이었다. 6사단이 후퇴하다 전선에 공백이 발생해 인접 지역의 미군도 어려움을 겪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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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23일 이후 아군의 전면적인 반격 상황. XXX는 군단, XX는 사단을 의미한다. 아군의 거침없는 진격에 적은 곳곳 |
경기도 양평 용문산 북쪽에서 국군 6사단이 북진을 시작한 1951년 5월 20일, 힘의 균형은 이제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적은 마지막 최후의 힘을 쏟아내며 공격을 계속했지만 용문산에서 패전하고 홍천, 한계·대관령에서 연이어 돌파에 실패하면서 공세작전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 이제 남은 관건은 국군 3군단이 방대산으로 철수하면서 형성된 인제 남방의 적 돌파구를 언제쯤 다시 완전히 틀어막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 밴플리트의 회전문 공세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이미 이틀 전인 5월 18일, 미 8군 예비대 격인 미 3사단을 강원도의 동부전선으로 투입해 돌파구를 봉쇄하는 동시에 서부전선에서의 공세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중공군 주력부대가 동부전선의 국군 지역으로 집중한 빈틈을 역으로 이용해 상대적으로 중공군이 많지 않은 서울 북방의 서부전선에서 공세작전을 벌일 요량이었다.
이렇게 서부전선에서 아군이 반격을 가하면 동부전선의 적 공격 기세가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도 했다. 전체 전선으로 보자면 전선의 서쪽이 위로 올라가고, 동쪽은 아래로 내려온 회전문 같은 전선 구도가 형성되는 셈이었다.
미군 지휘부는 원래 단순히 서부전선에 한정된 공세만을 생각했었지만, 미 2사단이 홍천에서 버텨내고 국군 1군단이 동부 해안지역에서 돌파구 확대를 막고 있는 만큼 좀 더 모험적인 공세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모험적으로 전력을 과도하게 동부전선에 집중해 깊숙이 내려온 것을 역이용해 아군이 전선 중심부를 치고 올라가 동부전선의 중공군 주력을 포위망에 잡아 넣으려는 야심적인 계획이었다. 리지웨이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과 호그 미 9군단장, 알몬드 미 10군단장 등 주요 지휘관은 1951년 5월 19일 한자리에 모여 이 같은 반격 계획을 확정했다.
반격 개시 시간은 부대별로 차이가 있었지만 서울 북방의 서부전선에서는 바로 다음날인 20일부터 반격을 개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서부전선의 국군 1사단은 20일 반격을 개시, 임진강변으로 쇄도했다. 같은 날 미 1기병사단은 의정부 북방 동두천을, 미 25사단은 포천을 회복했다. 미 24사단도 이날 가평 부근에 도달했다.
▶ 미 3사단 긴급 투입
같은 날 강원도 평창 속사리 일대에서는 미 3사단이 중공군과 공방전을 주고받고 있었다. 미 3사단의 임무는 인제 남방에서 형성된 돌파구를 막는 것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미 3사단은 애당초 서부전선 서울 동남쪽 경기도 광주에 주둔 중이었지만 18일 명령을 받은 후 동부전선까지 100㎞의 거리를 단 10시간 만에 이동을 완료하고 19일부터 적 주공부대의 오른쪽 측면을 강타했다.
방어태세가 아니라 공격 대형을 갖추고 기동 중이던 중공군은 미 3사단의 예상치 않은 측면 공격에 상당한 타격을 입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미 3사단의 이동과 전투 참가는 중공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이뤄졌고, 중공군이 회심의 카드로 생각한 동부전선의 돌파구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다시 막히기 시작했다. 미 3사단 주력은 20일부터 평창 북쪽의 돌파구를 틀어막았고, 미 3사단 15연대는 횡성 북쪽을 봉쇄했다.
마침 국군의 전략 예비대 격이던 8사단도 후방에서 북상해 평창·제천 일대에 배치돼 아군의 방어 배치를 두텁게 만들었다. 뒤이어 미 3사단은 22일 저녁 운두령을 점령함으로써 적 선두부대의 퇴로를 오히려 차단했다.
▶ 아군의 공세 전환
22일 인제 남쪽의 돌파구가 완전 봉쇄되자 이미 이틀 전부터 공세로 전환한 미 1군단에 이어 미 10군단, 국군 1군단도 본격적으로 공세에 가담할 채비를 갖췄다.
23일 오전 대관령과 강릉 북쪽 일대에서 방어전을 수행 중이던 국군 1군단은 미 해군 함정의 함포 지원 사격을 받으며 북진을 개시했다. 같은 날 오전 8시 미 2사단과 미 해병1사단을 주축으로 한 중동부전선의 미 10군단도 반격을 시작했다.
국군 6사단도 상급부대의 명령에 따라 23일 새벽 4시 홍천강을 건너 가평 오른쪽을 통과하면서 북진을 이어갔다. 국군 6사단의 상급부대였던 미 9군단의 기본 공격 의도는 차량에 탑승한 보병과 전차의 빠른 속도를 이용해 양쪽에서 미군이 포위망을 먼저 형성하면 6사단이 가운데서 밀어붙이는 방식이었다.
경기도 가평에서 강원도 춘천 사북면 방향으로 향하는 포위망의 왼쪽 날개는 미 24사단 21연대가 맡고, 춘천 시내를 통과해 북한강 오른쪽 연안을 따라 올라가는 포위망의 오른쪽 날개는 미 7사단 7연대가 맡는 방식이었다.
▶ 지암리의 포위 섬멸전
이렇게 여러 경로로 북상한 미 9군단 예하 아군의 공격 부대들이 합류할 목표 지점은 춘천 사북면 지암리였다. 중공군은 아군의 빠른 공세 전환 때문에 아직 이 지역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주력부대의 후퇴를 보장하기 위해 중공군 20군 180사를 투입해 지암리 남쪽의 가덕산·북배산 등 몇몇 산악지대를 근거로 저항을 계속하도록 했다.
포위망 내의 중공군 중에서 일부는 강력히 저항했으나 상당수의 부대들은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토끼처럼 이리저리 내몰리며 우왕좌왕했다.
보병으로 완전하게 구성된 포위망이 아니라 특수임무부대의 기동력에 바탕을 둔 포위였으므로 포위망을 벗어나는 중공군도 있었으나 탈출을 시도하는 중공군 부대들은 예외 없이 미군의 강력한 화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미군은 포위망 안에서 중공군이 식별될 때마다 포병 사격과 항공 폭격으로 사정없이 강타했다. 이렇게 획득한 전과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참전 이후 포위전을 마치 자신들의 특기인양 상투적으로 구사하던 중공군은 오히려 자신들이 포위망에 빠진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소대·중대·대대급이 줄지어 항복하는 등 중공군은 심리적 패닉 상태에 빠진 징후가 뚜렷했다.
29일 작전이 완전 종료되는 시점까지 지암리 포위전을 통해 국군 6사단이 잡은 적 포로 수는 26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중 19연대가 잡은 중공군 포로만 1700여 명이었다. 국군 6사단 서쪽에서 작전한 미 24사단도 2000여 명의 포로를 잡았다.
▶ 화천 추격전의 서막
강원도 홍천과 인제에서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을 공격하던 적의 5~6개 군단급 부대들도 중부전선 가평에서부터 중동부전선을 지나 동부전선에까지 넓은 지역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아군의 대포위망에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 9군단의 특수임무부대와 동일하게 전차와 보병부대를 조합해 만든 10군단 예하 특수임무부대들이 화천과 양구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미 9군단 예하 부대들의 반격 속도는 아군이 원래 목표로 했던 것보다 느렸지만 적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애당초 중공군이 너무 깊게 남쪽으로 내려온데다 도로가 많지 않은 이 지역의 특성상 퇴로 확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군을 포위 공격하던 바로 그 상황이 그대로 적을 상대로 재현된 것이다. 결국 중공군 27군을 비롯한 상당수 군단급 부대들도 포위당하기 직전의 상황으로 몰려 지휘체계가 흔들리는 상태에서 탈출로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화천 남쪽에도 최소 3만 명이나 되는 중공군의 철수 병력이 퇴로를 찾아 우왕좌왕했다. 이 지역 적의 탈출을 막기 위해 아군은 화천발전소 부근을 최대한 빨리 점령하는 것이 중요했다. 25일 이 같은 중요한 임무는 바로 국군 6사단에 부여됐다. 이에 따라 국군 6사단 19연대는 지암리 포위 섬멸전을 계속하고, 국군 6사단 2·7연대가 화천호를 향해 또 다른 추격전을 개시했다.
애당초 중공군 63군은 국군 6사단을 공격해 2~4개 대대를 섬멸한 후 원주 방면으로 공격할 계획이었지만, 국군 6사단은 그 같은 적의 의도를 완전 분쇄한 후 오히려 역포위망 구축의 선봉에 나선 것. 중공군이 전선 돌파의 제물로 삼으려 했던 국군 6사단은 반대로 포위된 적 대부대의 심장부를 찌르는 칼날이 돼 북으로 진군해 갔다.
>화천 추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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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추격전의 대미를 장식한 화천(구만리)발전소의 위치(사진 위)와 실제 모습(아래). |
1951년 5월 25일 춘천과 화천 일대의 중동부 전선에서 작전 중인 국군과 미군에게 화천발전소가 관심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일명 구만리발전소로 불리던 화천발전소는 북쪽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왜 화천발전소 일대가 중요했는지는 주변 지형을 보면 자명해진다. 발전소 상류에는 발전을 위해 많은 물을 저장하고 있는 파로호(당시 명칭은 화천저수지)가 있었다. 동서 길이가 21㎞, 남북 폭이 1㎞에 이르는 파로호는 그 자체가 부대 기동에 장애물이었다.
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파로호를 맨몸으로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다. 별도의 도하 장비를 보유하지 않은 적 부대라면 북으로 도주하기 위해 반드시 화천발전소 부근을 경유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아군의 경우에는 이곳을 가능한 한 빨리 점령해야 이 지역에서 도주하는 중공군의 퇴로를 끊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지역 작전을 책임진 미 9군단장은 이 같은 중요한 화천발전소 점령 임무를 국군 6사단에 부여했다. 사단은 부대 배치 상황을 고려해 이 임무를 다시 2연대에 맡겼다.
적의 퇴로 차단이 목적인만큼 당연히 ‘시간’이 작전 성공의 최대 관건이었다. 다시 말해 2연대에 부여된 발전소 점령 임무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해 정면에서 적을 밀어붙이는 방식의 작전이 아니었다. 소규모 부대로 바늘을 찌르듯 적의 틈새를 가급적 신속하게 파고 들어가 적 후방의 요충지를 조기에 점령함으로써 적 포위망의 발판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 야간에 8부 능선으로 침투
최선봉에서 화천발전소 점령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된 6사단 2연대 3대대는 27일 오전 7시부터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3대대 장병들은 아직까지 부근에 중공군 대부대가 출몰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적과 교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긴장했으나 실상 전투는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이날 오후 늦게 아군이 용화산을 점령할 때까지 막상 중공군은 눈에 띄지 않았던 것.
용화산을 점령한 3대대장은 저녁 7시부터 야간행군으로 공격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이날 아침부터 전투 대형을 갖추고 하루 종일 접적 지역에서 행군한 점을 생각하면, 바로 이어지는 야간행군은 무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대장은 이번 작전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은 오직 ‘시간’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행군을 결단한 것이다.
대대장은 행군 경로로 산악지대의 8부 능선을 택했다. 평지를 통과하는 길은 너무 우회하는 코스여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단점이었고, 산 정상의 능선을 이용할 경우 중공군과 마주쳐 아군의 움직임이 노출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 산악행군을 도운 노새의 힘
물론 특수부대도 아닌 일반 보병부대가 야간에 험악한 강원도의 산악지형에서 정상의 능선이 아닌 8부 능선으로 기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어려운 코스를 선택할 경우 적에게 노출되지 않고 적 후방으로 무사히 침투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마침 6사단 2연대 3대대의 일부 중대에는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노새가 있었다. 중공군은 부대를 이동할 때 노새를 즐겨 활용했다. 도로로 기동할 경우 미군에 폭격당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중공군은 주로 산줄기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산악지형 이동에 노새는 큰 도움이 되는 동물이었다. 노새는 탄약이나 중화기를 짊어지고도 산을 너끈히 오를 수 있었던 것.
3대대 일부 중대에서는 이를 알고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노새를 분대당 1마리씩 지급했다. 부대의 기대에 부응해 노새는 탄약을 짊어지고 험준한 산을 올라갔고, 그 덕에 아군은 야간행군의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그래도 길도 없는 8부 능선의 산길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3대대 9중대 병력은 한밤중에 노끈을 잡고 행군할 정도로 사투를 벌였고, 10·11중대도 소로 손을 잡다시피 밀고 당기면서 행군을 계속했다. 용화산에서 중간 목표인 매봉까지의 거리는 약 4㎞에 불과했다. 하지만 길도 없는 지역에서 야간 산악행군으로 기동하다 보니 27일 밤 11시에야 3대대 병력이 매봉에 도착했다.
○ 미 공군 화력으로 적 강타
매봉에 도착한 아군은 일단 진지를 구축한 후 공격 타이밍을 노렸다. 매봉에서 발전소까지 거리는 약 2㎞에 불과했지만 적의 배치를 알 수 없어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다음날인 28일 매봉에서 대기 중인 3대대 병력은 무려 4000~5000명의 중공군이 대낮에 북쪽으로 행군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항공 전력이 미약한 중공군은 일반적으로 주간행군을 하지 않았지만 아군의 추격 속도가 너무 빠르자 대낮에도 행군을 계속하는 무리수를 범한 것이다. 아군은 기껏해야 수백 명의 대대급에 불과했으므로 적들에 대한 공격은 미 공군이 맡았다.
이 같은 화천 추격전 최종 단계에서 국군이 미 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을 유도한 실적은 미군 측 전사에서는 분명히 확인되지 않지만, 당시 참전용사들은 6사단과 미 8군을 거쳐 미 공군에 근접항공지원을 요청했다는 증언을 공통적으로 남기고 있다. 미 공군의 전폭기는 아군의 통보에 따라 네이팜탄까지 동원해 북으로 철수하는 중공군의 대규모 행군 대형을 집중 공격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군 6사단 2연대 병력이 북상하면서 미 공군의 폭격을 유도할 동안, 7연대는 그보다 더 동쪽에서 기동하면서 진격했다. 7연대는 27일 정오쯤 부용산을 점령하고 정상에 관측소를 설치, 인접 지역에서 후퇴하는 중공군의 상황을 상급부대에 보고했다.
이 지역에서도 중공군은 대낮에 2000명, 3000명 단위로 철수하는 광경이 여러 차례 목격됐다. 이 같은 상황은 7연대를 통해 미 공군에 최종적으로 전달됐고, 그때마다 미 공군의 F-80·84 전폭기들이 출격해 무지막지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강타했다.
○ 화천발전소 점령
29일 새벽 3시 30분 2연대 3대대는 은밀하게 공격을 재개, 화천발전소를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이 지역에 이렇게 빨리 아군이 진출하리라고는 예상 못한 듯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중대 단위로 항복했다. 막상 발전소 주변에서는 적이 대규모로 확인되지 않았으나 중공군 군복·내의·농구화·돼지고기 통조림·미숫가루 등 적의 보급물자가 트럭 50~60대 분량으로 쏟아져 나와 아군을 놀라게 했다.
2연대 3대대는 화천발전소 부근 461번 도로를 차단해 화천 방면으로 탈출하는 통로를 봉쇄했다. 이때만 해도 아군 병력보다 적 포로가 더 많아 항복한 적 포로를 창고에 임시로 가둘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 벌어졌으나 29일 오후 늦게 2연대 주력이 화천발전소에 도착하면서 상황이 안정됐다.
중공 측 기록으로는 철수부대를 엄호하던 20군 58사단이 이미 27일 화천에 도달한 것으로 돼 있다. 이 기록만으로 보자면 적 철수부대 주력을 포착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트럭 수십 대 분량의 보급물자를 방치하고 후퇴해야 할 정도로 중공군의 철수 상황은 다급했다.
또 중공군은 지휘통제가 와해된 상황에서 수많은 낙오병과 패잔병이 발생했다. 그들 대부분은 미 공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거나 무리하게 파로호를 건너 가려다 익사했다.
전투가 종료된 지 며칠 후인 1951년 6월 2일부터 파로호에 익사한 중공군의 시체가 부패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체가 너무 많아 별도의 인력을 동원해 수거하고 나서야 식수로 이용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용문산전투 이래 지암리 포위전, 화천발전소 점령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전투에서 국군 6사단이 거둔 승리를 기념해 그때까지 화천저수지 혹은 화천호라고 부르던 곳을 파로호(破虜湖)라고 명명하며 국군의 선전을 치하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국군 6사단이 화천발전소 점령 과정에서 거둔 전과는 숫자만으로 보자면 용문산전투나 지암리 포위전에서 거둔 전과보다 크지는 않았다. 또 적 주력부대의 철수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한계도 있었다. 하지만 중대 혹은 대대급 보병부대가 8부 능선을 이용해 은밀히 적 후방으로 기동해 들어가 적이 미처 철수시키지 못한 대량의 보급물자를 노획하는 등 적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음미할 대목이 많은 전투라 할 수 있다.
국군6사단이 화천발전소를 점령한 1951년 5월 말 시점에 아군은 서해안의 임진강 하구부터 동해안의 강원도 간성에 이르기까지 전체 전선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이 때 아군은 38선 북방의 연천 북방을 지나 화천호를 거쳐 양구를 지나가는 선까지 확보했다.
이 같은 전선의 위치는 공산군 측이 4월 공세를 시작하기 이전 단계와 비슷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4월 공세와 5월 공세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손실을 감수하면서 아군 전선을 뚫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모두 원상태로 되돌아 간 것이다.
○ 공산 측의 피해
5월 공세 때 공산군 측이 입은 피해는 매우 컸다. 1950~60년대 홍콩 언론들은 1951년 5월 공산군 측의 대공세에 맞선 국군과 미군의 반격으로 중공군 3병단이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했다. 최대 10여만 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지난 2000년 중국 군사과학원이 발간한 공식 전쟁사 중 하나인 ‘항미원조전쟁사’는 1951년 5월 전역 당시 중공군과 북한군의 전투 손실 인원이 8만5000명 수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홍콩 언론이 추정한 10만 명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육박하는 대규모 인명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중국 측도 인정한 것이다.
중국은 5월 전역에 대해 “비록 승리는 했지만 아주 원만한 승리는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작전지도면에서 좀 급하게 타격했고, 좀 크게 타격했고, 좀 멀리 타격했다”는 미묘한 평가를 하고 있다. 이어 보충 설명하기를 “급하게 타격한 것은 공격 준비가 너무 성급하게 진행됐다”는 의미라고 부연 설명한다.
또 “좀 크게 타격했다는 것은 작전 기도를 너무 거창하게 잡아서 적을 물지도, 씹지도 못한 상태가 됐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마지막으로 “좀 멀리 타격했다는 것은 보급 수송이 공격을 따라잡지 못했고, 공격을 중지한 후에는 적의 반격을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해설하고 있다.
공산군의 인명 손실이 8만5000명이었다고 그들의 공식 전쟁사에서 스스로 인정한 점, 너무 성급한 공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을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는 점까지 명시했다는 점 등을 볼 때 1951년 5월 공산군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5월 공세의 교훈
적의 5월 공세와 이에 대한 아군의 반격 과정은 전쟁사 연구나 교리 발전 차원에서도 음미할 대목과 교훈이 많다. 1950년 6월의 북한의 최초 남침 단계나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아군의 반격, 1950년 10월 중공군 개입 초반의 전투들은 아군과 적군 사이에 힘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전투가 벌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1951년 적의 5월 공세와 이에 대한 아군의 반격은 서로의 힘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정면 대결을 펼친 전투여서 한반도 지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전투 양상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적이 서부전선 대신 동부전선을 주공으로 선택한 것 자체부터가 흥미로운 대목이다. 공산군 측은 5월 공세 당시 서부전선을 1개 병단(아군의 야전군) 급의 조공부대만 투입했다. 대신 동부전선을 주공으로 선택해 2개 병단을 동원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를 기준으로 따져봐도 적이 남쪽으로 공격한다면 서부전선을 선택하리라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더구나 동부전선의 험준한 산악지형과 상대적으로 부족한 도로교통망을 생각했을 때 이곳에 야전군 2개급의 부대를 동원해 공격하리라고 예상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공산군 측은 1951년 5월 동부전선을 주공으로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아군의 적의 공세를 막아내기는 했지만, 적이 작전 초반 아군의 허를 찌른 것은 사실이다. 또한 한때 아군이 위기 직전의 상황으로 몰린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도로가 부족한 산악지형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칠 수 없다’라는 상식적 판단은 실제 전투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다. 전장 상황에 대해서 지나치게 고정 관념에 빠지거나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위험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적의 5월 공세 기간 중 벌어진 인제 현리 전투는 우리 군으로서는 가슴 아픈 비극이었지만 승패를 떠나 깊이 성찰할 요소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산악지형으로 돌파한 소규모 보병부대가 주요 지형을 선점할 경우 전투 상황을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 뼈아픈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전투 양상의 실험실
나아가 이 같은 적의 기동방식에 대해 ‘보병을 이용한 기동전’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사 연구가들도 있다. 6ㆍ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작전 운용을 본다면 기동전이 꼭 기갑부대와 기계화부대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방어전의 측면에서도 무수한 교훈이 있다. 미 2사단이 승리한 한계 전투는 산악지형에서 시시각각 급변하는 전투 양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방어에 성공할 수 있는지 보여준 종합 전례로서 의미가 크다. 국군6사단의 용문산전투는 일반전초와 주저항선 방어부대, 예비대라는 전통적인 방어 부대의 운용 개념을 벗어나고도 방어에 성공한 사례라는 측면에서 역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전투다.
아군의 반격 단계에도 교훈이 적지 않다. 반격 작전시 미군은 소규모 기계화부대와 자동차에 탑승한 보병으로 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편성해 적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리 적을 추격해 들어갔다. 비록 적 주력을 아군 포위망 안에 집어넣어 완전 섬멸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적에게 수만 명 이상의 인명 손실을 강요하면서 적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역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다.
적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아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주력부대 철수에 성공한 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역시 연구할 가치가 있다. 아군의 반격 단계에서 중공군은 180사단이 거의 괴멸하고 공산군 전체로 봐서 8만 명이 넘는 치명적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했지만, 만약 적이 후위(後衛)부대를 조직적으로 운용하지 못했다면 적의 피해는 8만 명 수준이 아니라 10만~20만 명 수준으로 더 커졌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5월 공세 실패 이후 아군의 반격 단계에서 중공군이 후위 부대를 운용한 방식은 산악지형에서 야전군 단위 부대가 철수 작전을 할 때의 한 모델로 분석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즉 적의 5월 공세와 이에 대한 아군의 반격 과정은 한반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전투 양상에 대해 지금도 살아있는 교과서이자 실험실이고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 소련, 휴전 협상 카드를 들다
이렇듯 5월 공세와 이에 대한 아군의 반격 과정은 적에게 8만5000명이라는 치명적 인명 손실, 지금도 살아있는 생생한 전훈을 남겼다는 점에서 6ㆍ25 전쟁의 결정적 국면 중 하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더욱 극적인 결과물까지 바로 남겼다. 바로 휴전 협상 논의의 시작이다.
적의 5월 공세를 분쇄하고 반격까지 성공시킨 직후 메튜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미 합참에 “(이번) 유엔군의 승리가 적을 휴전 협상의 무대로 불러 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 같은 리지웨이 장군의 장담은 오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소련의 유엔대표인 야코프 말리크는 1951년 6월 23일 유엔이 후원하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소련은 한국에서의 무력 충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며 “회담은 교전 당사자들이 서로 군대를 철수할 수 있게 하는 정전과 휴전에 목표를 두고 시작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겉으로 드러난 형식상 소련이 6·25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이 같은 제안은 교전 당사자인 중국과 북한의 공식 휴전 회담 제의나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애당초 북한의 불법 남침을 사전에 협의하고 계획한 국가 중의 하나였고, 북한군이 침략할 수 있게 무기를 제공한 국가였으며, 무엇보다 중국과 북한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주의권 국가 중 최고의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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