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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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위 2013. 1. 23. 16:23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작성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상황도.
 인천상륙작전 성공 소식을 들은 낙동강의 미8군과 국군은 9월 16일 오전 9시 일제히 반격으로 전환했다. 인천상륙작전 날짜인 15일 반격을 시작하지 않고, 하루 늦은 16일을 반격 시점으로 잡은 것은 인천상륙작전 소문이 북한군 내에 충분히 퍼져 사기가 떨어지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만뜻밖에도 낙동강전선에 포진한 북한군 주력의 방어태세에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불운하게도 기상 상황마저 악화돼 아군의 항공지원도 원활하지 않았다. 17일에도 상황 변화가 없었다. 맥아더 원수는 처음으로 자신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상륙에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륙전으로 기대했던 효과인 ‘북한군의 붕괴’가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마지막 고비

 인천상륙작전에 반대하던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은 “인천에 상륙해 봐야 2층에서 떨어지는 안약 한 방울의 효과밖에 없을 것”이라고 극언한 적이 있었다. 인천상륙전에도 불구하고 낙동강의 북한군이 건재하다면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과 낙동강 두 곳에서 북한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할 위험마저 있었다. 인천상륙전 직후 전선의 상황은 맥아더의 예측보다는 콜린스의 예상에 더 가깝게 돌아가는 듯했다.

 맥아더는 이날 오후 낙동강의 미군과 국군을 후방 데이비드 선으로 후퇴시켜 전선을 축소하고, 미 육군1기병사단을 전선에서 빼내 군산에 2차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방안을 놓고 고민했다. 이처럼 맥아더 원수가 말 못할 고민으로 고심을 거듭하던 그날 저녁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반가운 보고가 올라왔다. ‘적의 저항이 약화되고 있음. 대도박은 대성공이라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음.’ 워커 장군의 보고에 따라 맥아더 원수는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특히 9월 18일 국군1사단이 다부동 동쪽에서 북한군 방어선 후방 깊숙이 진출해 퇴로를 차단한 것은 반격 성공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었다. 창령 방면의 미2사단 예하부대도 낙동강 서쪽으로 도하에 성공해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날부터 미 공군은 6·25전쟁 개전 이래 최대 규모의 근접항공지원작전(CAS)을 감행해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지원했다. 21일까지 낙동강선 일대에서는 개전 이래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3일이 더 지난 9월 21일부터 낙동강의 팽팽한 균형이 급속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날 북한 13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가 아군에 투항했다. 이학구는 이날까지도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상륙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 후에도 며칠간 방어태세에 흔들림이 없었던 것은 북한군 내부의 입단속에 따른 ‘무지의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북한군의 입단속도 한계는 있었다. 이날부터 북한군 내부에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급격하게 퍼져 나갔다. 9월 22일부터 정찰에 나선 유엔군 항공기들이 북쪽으로 철수하는 북한군의 무리를 곳곳에서 포착했다. 23일에는 낙동강 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저항이 뚜렷하게 약해졌다. 기세등등하던 낙동강전선의 북한군 주력부대에 최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반격작전의 틀

 인천상륙작전 1주일 전쯤인 1950년 9월 11일 하달된 유엔군의 반격 작전명령의 핵심 개념은 미1군단을 주공으로 삼아 대구ㆍ김천ㆍ대전ㆍ오산으로 연결되는 경부축선으로 진격해 인천에 상륙한 미10군단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신설한 미9군단 예하의 미 2ㆍ25사단이 지리산 부근을 거쳐 금강하류로 진격, 경부축선 서쪽의 한반도 서남부 지역의 북한군을 섬멸하는 것이 목표였다. 경부축선 동쪽에는 국군 2개 군단을 투입해 2군단은 원주를 거쳐 춘천을 향해 추격하고, 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38도선을 진격하도록 했다.

 일단 북한군의 공격에서 아군의 반격으로 전쟁의 큰 국면이 전환되자, 북한군은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했다. 반격이 시작될 당시 낙동강전선의 아군 병력 규모는 국군 7만2730명, 미군을 주력으로 하는 유엔군이 8만4480명에 달해 7만여 명에 불과한 북한군보다 2배 이상이었다. 화력도 6대1로 아군이 월등히 우세했다. 더구나 8ㆍ9월 동안 병력과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신들린 듯이 대공세를 지속하던 북한군은 방어나 후퇴에 대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북한군의 속사정

 북한군의 전선사령부는 애당초 인천상륙에도 불구하고 대구 또는 부산 점령이라는 망상을 단념하지 못한 듯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하지만 인천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계속 탈환지역을 늘려가고, 다부동과 창령에서 전선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면서 결국 북한도 후퇴를 고려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 무렵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군 지도부의 의도는 낙동강에 배치된 북한군 주력부대를 축차적으로 철수시켜 금강과 소백산맥 선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전선사령관은 대전에 전선예비, 김천에 서부지역 예비를 확보하고 북한 2군단으로 하여금 왜관을 사수하고 동부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전진을 견제하는 동안 북한 1군단을 포함, 서부지역 부대를 우선적으로 전환한다는 큰 틀 아래 9월 19일부터 주력부대의 철수작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20일 왜관이 미군에 점령당하고 국군 3사단이 포항에 진입하면서 북한군의 방어전환 계획은 출발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21일에는 인천상륙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감언이설의 선전과 가혹한 독전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됐다. 결국 북한군은 새로운 전선 형성이라는 작전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9월 23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 전 부대에 전면적인 후퇴명령이 하달됐다. 이제 낙동강의 북한군 주력은 독안에 든 쥐의 꼴이 되면서 전세는 완전히 180도 역전됐다.   

 ▶서울 탈환  

 이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남침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다시 북쪽으로 치고 올라갔다. 반격의 선두부대인 777특수임무부대는 미 1기병사단 7연대 3대대를 핵심으로 8야전공병대대 B중대, 미 70전차대대 C중대의 M4전차 7대, 미 77야포대대, 중박격포중대 3소대와, 7연대 수색소대로 구성된 부대였다. 777특수부대는 26일 오산까지 진격해 인천상륙부대인 미31연대와 연결 작전에 성공, 북한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 무렵 미10군단 예하 해병1사단과 국군 해병대, 미 육군7사단 병력은 영등포 외곽과 강북쪽 신촌 일대에까지 진출하는 등 서울 탈환 작전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을 방어하던 북한군 18사단은 거센 저항을 계속했지만, 9월 28일 국군과 미군은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5000분의 1이라던 맥아더 원수의 대도박은 미군과 국군의 선전으로 마침내 눈앞의 현실이 됐다.

 서울 탈환 전투가 일주일가량 시일을 끈 것은 북한군 전력이 예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미군은 인천상륙 이전 서울에 주둔한 적 병력을 약 5000명으로 봤다. 그러나 실제 서울에만 약 8000명, 영등포 지역에도 5000명의 적 병력이 있었다. 인천상륙이 감행된 뒤에 증원된 적 부대가 적어도 2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외에도 한강과 수원 사이에 최소 1000명, 그리고 수원 남쪽 오산 일대에 2000~3000명이 있었다.

 결국 서울ㆍ인천ㆍ수원 일원에서 전투에 가담한 적 부대는 3만 명 이상이었다. 인천에 상륙한 미10군단을 비롯한 국군 해병대는 이처럼 수많은 적의 저항을 뚫고 서울 탈환에 성공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북진 명령서.
1950년 10월 초  `국군 3사단 38선 통과 중'이라고 적힌 영문 현판 앞에서 국군과 미군 장병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1950년 9월 29일 정오 서울 중앙청 청사에서 서울 환도식이 열렸다. 맥아더 원수는 특유의 화려한 수식어를 동원한 연설로 그 특별한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의 상징인 유엔 깃발 아래에서 싸우는 우리 군대는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시켰습니다. 나는 대통령 각하에 대해 귀국 정부 소재지를 회복하고 이에 따라 각하가 헌법상의 책임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뒤이어 연설에 나선 이 대통령의 연설문 첫 마디는 “나 자신이나 한국 국민의 끝없는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는지”라는 구절이었다. 더없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신생 대한민국은 국가 존망의 위기에 몰렸다. 9월 공세 당시 낙동강 방어선 붕괴 위기에 몰렸을 때 “결국 패망할 것”이라는 섣부른 패배감이 퍼진 적도 있었다. 그 완전한 절망의 늪에 빠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켜 대한민국을 구해낸 것이다.

 
 ▶38선 넘느냐, 마느냐

 하지만 이 같은 화기애애한 서울 환도식의 겉모습은 당시 한미 수뇌부가 처해 있던 복잡한 상황 중 일면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환도식이 끝난 후 이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에 “지체 없이 북진을 해야 한다”라고 단호하게 요구했다.

 맥아더의 대답은 “나에게 아직 38선을 돌파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돼 있지 않다”는 것. 이 같은 모호한 대답을 들은 이 대통령은 38선 돌파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유엔이 이 문제를 결정할 때까지 장군은 기다릴 수 있겠지만, 국군의 북진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특유의 압박을 시작했다.

 사실 이 대통령은 이미 7월부터 북진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7월 13일 미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먼저 침공한 이상 38선은 없어졌다”고 선언했다. 7월 19일에는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은 38선 유지를 요구할 권리를 잃었으며,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발언도 했다. 이 대통령에게 38선 돌파와 북진은 당연한 것일 뿐,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미국의 내부 논쟁

 38선 돌파 문제는 지연전이 한창이던 7월 중순부터 워싱턴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이 무렵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에 “북한군이 38도선 북쪽으로 다시 격퇴된 후에 채택할 정책을 제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책 검토 과정에서 국방부는 북한군을 격멸한 38선을 돌파해 북한을 점령한 후 유엔 주도로 통일 문제를 최종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을 단순히 38선 남쪽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분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미 합참과 미 국방부도 동조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에서 중지하면 북한군이 군사력을 정비해 재침할 수 있으므로 38선에서 전쟁을 멈추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는 조치였다. 더구나 미 해ㆍ공군은 이미 북한 지역에서 작전을 전개 중인데 지상군만 38선 돌파를 제한하는 것도 비현실적이었다.

 이에 대해 조지 케넌을 비롯한 정책기획국 중심의 국무부 다수파들은 중국과 소련의 개입이 없을 때에만 유엔의 결의에 따라 북진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이들은 섣부른 38선 돌파는 제3차 세계대전을 부를 수 있다고 걱정했으므로 38선 돌파에도 유보적이었다.
 

 ▶타협의 결과 `NSC 81'

 양자의 견해 차이는 9월 7일 채택된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NSC 81)로 최종 정리됐다. NSC 81은 “북한군 격퇴 후 중ㆍ소의 개입이 없을 때에만 북진하고, 군사적 승리 후 유엔 주도 하에 한국 문제를 해결하되, 중·소의 개입 여부에 대한 정보가 확인될 때까지 유보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NSC 81은 38선 돌파 찬성파와 유보파의 주장을 적당하게 뒤섞은 모호한 지침이었다.

 NSC 81에 따라 미 합참은 맥아더 원수에게 9월 27일 훈령을 하달했다. 이 훈령은 “귀관의 군사적 목표는 북한군의 격멸이고, 이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38선 북쪽에서 상륙ㆍ공중작전을 포함한 군사작전을 실시하도록 인가됐다”고 언급, 38선 북쪽에서의 지상작전을 사실상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훈령에는 “소련이나 중공 주요부대가 북한에 진입하지 않고, 그러한 의도의 발표도 없는 조건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또한 “귀관은 만주나 소련의 국경을 넘어서는 안 되며, 한국군이 아닌 어떤 지상군도 소련에 접한 북동지역이나 또는 만주 경계선에 접한 지역에서 운용해서는 안 된다”는 제한도 걸려 있었다.

 
 ▶38선 돌파 명령

 당시 유엔에서는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찬성하는 자유진영과 이에 반대하는 공산진영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단 유엔 논의 상황을 지켜보며 38선 돌파를 최종 결정할 생각이었다. 미국의 반응에 상관없이 이 대통령은 나름의 복안이 있었다.

 이 대통령은 38도선 돌파가 주권 국가의 합법적 권능에 속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에 이양된 상황이었지만, 유엔군 계통에서 북진 명령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독자적으로 북진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복안이었다. 이 대통령이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에 이양한 것은 한국을 방어하는 데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군사에 관한 모든 결정을 유엔에 위임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치열한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국군은 맹렬한 속도로 38선 방향으로 접근해 가고 있었다. 9월 29일 국군 3사단이 강릉에 도달하고, 수도사단도 38선에 인접한 위치까지 진출했다. 마침내 이 대통령은 대구의 육군본부에 들러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 대통령의 첫 질문은 “국군의 통수권자가 맥아더 원수이냐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의 대통령이냐”는 것. 이어 이 대통령은 북진에 대한 지휘관들의 생각을 물었다.

 정일권 육군총참모장은 그 같은 결정이 작전통제권 이양 조치에 반할 뿐만 아니라 외교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우려했다. 하지만 그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께서 명령을 내리신다면 저희는 오직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라는 것이 마지막 대답이었다.

 다른 참석자들도 동의하자 대통령은 품 안에서 명령서를 꺼내 건네며 “북진을 하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서에는 “내가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하라”고 쓰여 있었다. ‘대통령비서실전용문구’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힌 원고지 형식의 이 문서 끝에는 대통령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만(晩)’자의 서명이 있었다.

 
 ▶38선 돌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정 총참모장은 묘안을 짜냈다. 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그는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 원활한 협조를 유지할 책임이 있었다. 동시에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명령에 완전히 복종해야 할 의무도 있었다.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약간의 기술적 접근이 필요했다.

 정 총참모장은 9월 29일 1군단장 김백일 준장에 연락해 “38도선 북쪽에 어느 요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아군이 큰 손실을 입게 될 만한 고지가 없느냐”고 물었다. 1군단 측의 답변은 3사단 정면 38도선 북쪽 하조대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

 정 총참모장은 즉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을 만나 “3사단이 38도선 바로 북방에서 적의 치열한 사격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고 있으니 부득이 이 고지를 점령해야겠다”고 말했다. 이어 “38도선에 기하학적으로 뚜렷한 선이나 장벽이 있는 것도 아니니 문제 없을 것”이란 말로 미군 측을 안심시켰다.

 국군 측의 신중한 접근 덕분인지 “재편성과 돌파명령 대기를 위해 38도선에서 정지할 예정”이라고 공언하던 워커 장군도 한국군의 공격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9월 30일 정 총참모장은 38선에 최초로 도달한 3사단 23연대를 직접 둘러본 뒤 38도선 돌파를 구두로 명령했다. 이에 따라 국군은 1950년 10월 1일을 기해 역사적인 38선 돌파작전에 돌입했다.


>북 진 -국군 1군단, 미군 상륙 전 먼저 원산 탈환|

국군1군단의 동부전선 돌파작전.
국군수도사단과 3사단 의 원산 입성.
 10월 1일 새벽 5시 국군3사단은 38선을 돌파해 일제히 북진을 개시했다. 3사단은 2일에 양양, 3일에 속초를 돌입하는 등 순조롭게 진격을 개시했다. 맥아더 원수는 3일 국군3사단의 38선 돌파를 정식으로 발표해, 국군의 38선 돌파에 대해 충분히 양해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미국은 내부적으로 유엔의 동의가 있어야 북진을 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있었지만, 맥아더 원수는 국군에 대해서는 그런 전제조건을 적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런 맥아더 원수의 결심은 국제정치적으로 민감한 논란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으나 의외로 국내외 반응은 조용했다.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흐름을 순식간에 바꾼 직후였기 때문에 미국을 포함한 유엔 참전국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렬히 맥아더의 판단과 결심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군의 북진 작전에 정치적 장애가 없어지자 국군3사단은 이후에도 4일 고성, 6일 통천을 차례로 탈환해 진격을 계속했다.

10월 7일에는 유엔에서 마침내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북진을 뒷받침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통과된 유엔 결의안 1항은 전 한국에 안정 상태를 보증(ensure)하기 위해 적절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고 돼 있고, 2항은 한국에 통일ㆍ독립ㆍ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해 유엔 감시 아래 선거를 실시하는 것 등을 포함하는 모든 안정적인 조치를 취한다고 규정했다. 이어 3항에서는 유엔군은 상기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는 한국의 어떠한 지역에도 더 이상 주둔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결의안의 내용은 다소 추상적이어서 정확한 의미를 금방 이해하기 어렵게 돼 있지만, 결국 이 결의안은 한국의 안전 상태를 보증하고 유엔 감시 아래 통일ㆍ독립ㆍ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한국의 어떤 지역에서도 유엔군이 주둔할 수 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처럼 북진에 대한 외교적 걸림돌이 제거되자 10월 9일 미 1기병사단이 공격을 시작하는 등 미군의 38선 돌파도 시작됐다.
 

 ▶북진계획의 큰 틀

 맥아더 원수는 실제 미군들이 38선 돌파를 시작하기 7일 전인 10월 2일에 이미 미8군에 북진계획을 하달했다. 북진계획의 요지는 미1군단이 임진강선에서 공격 준비를 마친 후, 공격명령이 하달되면 1군단 예하 1기병사단이 주공부대 자격으로 사리원을 거쳐 평양을 공격하도록 돼 있었다.

 미1군단 예하 24보병사단은 주공부대의 왼쪽을 보호하면서 해주ㆍ사리원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 임무였으며,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국군1사단은 미1군단에 배속돼 1기병사단의 오른쪽에서 고랑포ㆍ시변리ㆍ신계를 거쳐 평양을 공격하도록 했다. 미 2사단과 25사단으로 구성된 미9군단은 북진작전에 참여하지 않고,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 철도와 도로를 보호하면서 후방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여기에 신설된 국군9사단과 경찰을 투입해 미군과 함께 후방의 북한 게릴라와 패잔병을 소탕하려 했다.

 이미 공격을 시작한 국군1군단 예하 3사단은 양양과 고성을 거쳐 원산을 공격하고, 수도사단은 인제, 회양을 거쳐 동쪽에서 원산을 공격하도록 돼 있었다. 동해안으로 진격하는 국군1군단과 달리 6ㆍ7ㆍ8사단으로 구성된 국군2군단은 철원·김화·화천 등 중부전선이나 중동부전선에서 한반도의 중심지대를 가로지르며 북진하도록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원산상륙전 계획

 하지만 이 계획에는 중요한 미군 부대 하나가 빠져 있다. 다름 아닌 인천상륙전의 주역인 미10군단이다. 맥아더는 이미 서울까지 진출한 미10군단을 그대로 북진시키는 대신 원산에 재차 상륙작전을 감행하려 했다. 원산상륙작전이 성공하면 미10군단에 포함된 미 육군7사단이 원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전진해 미1군단과 함께 평양을 공격한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결국 지상으로의 북진은 워커 장군이 지휘하는 미8군단에 맡기면서, 미10군단은 8군의 지휘를 받지 않고 별도의 상륙작전을 맡도록 한 것이다.

 맥아더가 원산에 또 다른 상륙작전을 감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군수문제 때문이었다. 북한의 남침 기간 동안 미 공군과 해군은 전장차단작전의 일환으로 후방의 거의 모든 교량과 철교를 파괴했다. 도로나 철도도 정상이라고 말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맥아더 원수는 이런 교통망으로 야전군 급의 유류ㆍ탄약ㆍ식량ㆍ무기를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럴 바에야 보급물자를 한꺼번에 대량으로 수송할 수 있는 선박을 동원해 미10군단이 다시 원산에 상륙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하면 군수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을 다시 한번 앞뒤에서 포위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 맥아더는 10월 2일 원산상륙작전계획을 확정하고, 10월 7일에는 원산에 상륙하기 위한 부대이동을 개시했다.

 
 ▶워커 장군의 구상  

 이 같은 맥아더 원수의 계획에 대해 워커 중장을 비롯한 미8군 수뇌부의 생각은 회의적이었다. 우선 워커 장군이 보기에 미10군단이 서울에 있는 반면, 미1군단은 아직 수도권 남부지역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미10군단이 그냥 지상 돌파로 38선을 공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작전이었다. 굳이 후방에 있는 미1군단을 38선 부근까지 재배치하면 그만큼 공격 일자가 늦어지고, 이는 북한군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결과가 될 터였다.

 더구나 동해안의 국군1군단과 원산과의 거리를 감안하면 국군1군단이 미10군단보다 먼저 원산을 점령할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10군단이 원산상륙전을 감행하기 위해 선박에 인원과 물자를 탑재하려면, 그 시간과 공간만큼 미8군은 항구를 통해 보급물자를 전달받을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평양과 원산 사이의 거리를 감안하면, 10군단이 평양 공략전에 참가하기 전에 이미 미8군 측의 평양 공격전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았다. 다시 말해 전력이 분산돼 버리는 결과가 될 가능성도 높았다.

 이 때문에 워커 장군은 서울의 미10군단으로 그대로 38선을 돌파하고, 미1군단이 그 뒤를 따르며 같이 평양을 함락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일단 평양이 함락되면 미1군단을 동쪽으로 전환시켜 동북쪽으로 진격시킨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미 국방부와 합참도 상대하기 쉽지 않았던 맥아더 원수를 워커 장군이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북한군의 저항

 이 같은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계획에 맞서 북한군은 필사적으로 활로를 모색했다. 최용건이 지휘하는 서해안 방어사령부는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 일대에서 북한군 19ㆍ27ㆍ43보병사단과 17기갑사단을 배치해 유엔군의 북진을 지연시키려 했다. 동해안에서도 김책이 지휘하는 전선사령부가 낙동강전선에서 간신히 탈출한 5ㆍ12ㆍ15사단을 지휘해 국군의 북진을 막으려 했다. 북한은 부분적으로 치열한 진지전 수준의 방어전을 펼치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북한군의 방어태세는 구멍이 너무 많았다. 38선이 무너지자 김일성은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며 “더 물러날 땅이 없다”고 화를 내며 예하부대를 독려했으나 북한군은 이미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었고 전력도 부족해 국군과 유엔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0월 10일 국군1군단은 원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동원 가능한 전력을 최대한 집결시켜 원산 일대에 배치한 병력은 12ㆍ42사단과 249여단 등 2만여 명이 넘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방어 결의는 국군의 거센 공격 앞에 단 반나절 만에 무너졌다. 국군 1군단이 이처럼 탁월한 전공을 세운 그 시간까지도 미10군단은 아직 원산 앞바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상륙 준비기간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을 뿐만 아니라, 북한이 원산 앞바다에 뿌린 기뢰를 제거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군6사단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도달

압록강 물을 담는 국군6사단 장병들을 묘사한 전쟁기념관의 디오라마.
 1950년 10월 10일,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국군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3사단은 공격 당일인 10일 시가지 대부분을 탈환했다.

국군1군단은 11일 북한군이 감행한 반격을 모두 격퇴해 원산을 안정적으로 장악했다. 북진을 명령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12일 원산을 직접 방문해 국군1군단 전 병사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겼다. 대통령의 격려를 받은 국군1군단은 15일 무렵 영흥과 안변을 연결하는 원산 주변 반경 30~50㎞ 지점의 외곽까지 점령했다.

  ▶서부전선의 북진

 비슷한 시기 서부전선의 미1군단과 1군단에 배속된 국군1사단의 작전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미1군단 예하 1기병사단은 10월 9일 38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을 시작했다. 국군1사단도 11일 임진강을 돌파해 북진에 동참했다.

 미군에 앞서 평양을 탈환하는 것이 국군의 명예를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백선엽 1사단장은 미 제10고사포단의 단장 헤닉(William C. Hennig) 대령의 건의에 따라 ‘보ㆍ전ㆍ포 협동 돌파작전’으로 진격 속도를 높이기로 결심했다. 백 장군은 미1군단 밀번 소장에게 미군 전차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0월 12일 국군1사단에 M-46 전차 21대로 편성된 미 육군 6전차대대 C중대가 배속됐다.

 기갑전력을 보강한 국군1사단은 빠른 속도로 진격을 계속했다. 10월 14일까지 미 기병1사단이 금천, 국군1사단이 시변리와 신계를 장악함에 따라 38선 일대를 방어하기 위한 북한군의 3중 방어선은 붕괴 상태로 몰렸다. 10월 17일에는 국군1사단과 미1기병사단이 평양에서 40㎞ 떨어진 곳까지 도달했다.

 이 무렵 미1군단은 평양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을 확정했다. 황주 일대의 미 1기병사단이 평양 남쪽으로부터 정면 공격을 가하고 국군1사단은 평양 동남쪽으로부터 측면 공격을 가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무렵 중부전선과 중동부전선을 돌파한 국군2군단도 평양 동쪽으로 서서히 접근하고 있어서 북한 정권의 수도인 평양은 서서히 3면 포위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이 대통령의 의지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 탈환이 임박할 무렵이었던 10월 17일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에게 “평양만은 우리 국군이 먼저 점령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이 보기에 평양 남쪽의 미1기병사단이 국군1사단보다 먼저 평양을 점령할 가능성이 커 보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정일권 총장은 17일 곡산에 있던 국군2군단 사령부를 방문,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같은 날 육본에는 육본작명 218호를 하달, 국군2군단에 미1군단과 협력해 평양의 동북쪽 방향에서 평양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 무렵 북한군은 평양방위사령부를 설치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방어하려 했다. 이미 평양 외곽 방어선에 해당하는 멸악산맥 일대의 황주~율리 방어선이 미1군단에 돌파당한 상태였으므로 대동강과 동평양 일대에 구축된 3중의 방어선에서 저항하는 것이 북한군의 기본 방어계획이었다.

 이에 맞서는 국군과 미군은 미1군단의 예하 1기병사단과 24사단, 국군1사단이나 국군2군단 예하의 7ㆍ8사단 등 총 5개 사단이 평양을 서서히 포위하기 위해 진격하는 국면이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격렬했으나, 이미 승기를 잡고 공격에 속도를 내는 2개 군단, 5개 사단 규모의 국군과 미군의 연합 공격을 북한군이 방어해 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북한 정권의 수도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국군의 평양 탈환

 차량만 1000여 대 가까이 보유한 미1기병사단에 비해 겨우 50대의 차량과 미군으로부터 배속받은 소량의 전차만을 보유했던 국군1사단이 진격 속도를 유지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사단장 백선엽 장군을 비롯한 국군1사단의 주요 간부들이 평양 일대의 지리에 밝았던 점을 활용해 과감한 작전을 감행, 미군 못지않은 진격 속도를 자랑했다.

 10월 19일 미1기병사단과 국군1사단이 대동강 남쪽의 동평양에 진입했다. 이날 오전 11시 국군1사단 12연대가 대동강을 건너갈 수 있는 대동교 교량에서 100m 떨어진 지점에까지 진출했을 때, 큰 폭발음이 주변 일대를 뒤흔들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 북한군이 대동강 위의 교량 3개를 모두 폭발시킨 것이다.

 하지만, 북한군의 교량 폭파도 아군의 진격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국군1사단 15연대는 이미 이날 새벽 대동강 상류에서 강을 건너, 대동강의 북쪽에 자리한 평양 본시가지 동쪽 방면에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군1사단과 함께 미1군단이 공격하면 국군2군단도 평양 동북쪽에서 평양 공격에 합류, 3면에서 포위를 가하는 것이 원래의 작전계획이었다. 하지만 국군1사단을 비롯한 미1군단의 공격 속도가 너무 빨라 국군2군단 예하 부대 중 평양 최초 공격에 직접 참가한 부대는 국군7사단 8연대 예하의 일부 대대급 병력뿐이었다.

 10월 20일 오전 7시 동평양까지 진출한 1사단 11연대와 12연대가 M-2 단정과 미군 공병이 대동교 부근에 부설한 부교로 도하를 개시했다. 이들 1사단 주력부대는 전날부터 평양 본시가지에 진출한 1사단 15연대와 합류해, 이날 오전 10시 무렵 평양 전 시가지를 완전 장악했다. 이 대통령의 의지대로 국군이 평양 탈환이라는 역사적 순간의 주역이 된 것이다.

 ▶압록강 도달

 국군의 진격에는 어떠한 한계선도 없었지만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달랐다. 맥아더 원수가 북진 작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10월 2일 확정한 작전계획에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진출 한계선은 평남 정주~군우리~평남 영원~함남 함흥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이상 북쪽으로 진격할 경우 중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월 17일 평양 탈환 직전 맥아더 원수는 새로운 진출 한계선을 설정했다. 이 한계선은 기존 선보다 북쪽인 평북 선천~고인동~평북 평원~함북 풍산~함북 성진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움직임이 별로 식별되지 않자 맥아더는 10월 24일 이 한계선마저 철폐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구별 없이 모든 지상군 부대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 경쟁을 벌였다.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 국군6사단 7연대가 마침내 초산까지 진출해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이는 듯했고, 이제 통일이 눈 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 맥아더 원수는 “11월 추수감사절이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낙관했다.
 

■ 기묘한 원산 상륙전

 전체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됨에 따라 원산 상륙전의 판단 실패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하지만 북진이라는 결정적 국면에서 1개 군단급 부대가 작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시간을 낭비한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미 1해병사단이 인천에서 상륙함정에 승선을 시작한 것은 10월 6일이었다. 차는 차대로, 장비는 장비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실으면 최단 시간 내에 승선을 끝낼 수 있다. 그러나 적진에 상륙작전을 감행할 때는 병력ㆍ장비ㆍ보급품을 세트로 싣는 전투적재를 해야 했다. 그래야 상륙 직후 부대 단위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투적재는 통상적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미 해병1사단의 전투적재 절차가 끝난 것은 10월 16일. 국군이 원산은 물론 그 주변까지 모조리 점령한 뒤였다. 이에 앞서 미 해군은 원산 앞바다에 기뢰가 많은 것을 알고 10월 10일부터 소해를 시작했지만 미 해병1사단이 원산 앞바다에 도착한 10월 19일까지도 소해는 끝나지 않았다.

 결국 미 해병1사단 장병들을 태운 상륙 함정은 할 일 없이 바다를 오가는 처지가 됐다. 장병들이 원산상륙 작전을 ‘요 요(Yo Yo)’ 작전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소해 완료를 기다리며 바다를 떠돌던 미 해병1사단이 원산에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10월 28일이었다. 이때는 이미 원산에 태극기가 휘날린 지 18일이 지났을 때였다.

공수작전에 투입된 미 공군 소속 C-119 수송기가 전투물자를 낙하산으로 투하하고 있다.                        자료 사진
1950년 10월 20일 미 육군 187공수연대 병력들이 낙하산으로 숙천 상공으로 강하하고 있다.                           자료 사진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는 6·25전쟁 개전 이래 항상 당장 눈앞의 전투상황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국군이 10월 19일 평양에 진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한 수 앞을 먼저 내다보던 맥아더에게 이미 눈앞에 다가온 평양 확보보다는 그 이후 작전이 더 중요했다.

 ▶회심의 공수작전

 평양 탈환이라는 그 역사적 순간 맥아더의 머릿속은 숙천·순천 공수작전의 성패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맥아더는 평양을 빠져나간 북한 수뇌부와 북한군 주력부대 상당수가 아직 멀리 도주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평양 후방에 공수부대를 낙하산으로 강하시켜 북한군의 후퇴를 차단하고, 북한군 수뇌부를 사로잡는 대담한 공수작전을 구상했다. 유엔군 포로 3000여 명을 구출하는 것도 작전의 또 다른 목표 중 하나였다.

 평양에서 압록강 한만 국경까지 교통로에는 두 개의 길이 있었다. 평양에서 의주로 향하는 경의선 철도와 국도는 평양 북쪽 45㎞의 숙천 분지를 거쳐 신안주에서 청천강을 건너는 길이었다. 평양에서 만포로 향하는 평만선 철도와 국도는 평양 동북쪽 45㎞ 지점의 순천 분지를 거쳐 청천강을 따라 동북 방향으로 올라가다 강계에 이르는 길이었다.

 우선 이 두 통로를 모두 차단해야 포위망 구축이라는 작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두 길 모두 평양에서 출발하므로 평양 북쪽 인접 지점에 공수작전을 감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평양은 너무 가까운 곳이라 작전을 감행할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 대안으로 청천강 선에 공수작전을 감행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지상에서 진격하는 유엔군 주력부대와 거리가 너무 멀어 각개 격파될 위험 부담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항공보급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결국 맥아더가 선택한 장소는 청천강과 평양의 중간지점인 숙천과 순천 두 곳이었다.

▶맥아더의 자신감

 10월 20일 미187공수연대 소속 4200여 명의 병력은 105㎜ 곡사포 12문과 각종 장비를 갖고 미 공군 C-119·C-47 수송기 113대에 나눠 탔다. 이날 오후 2시 강하 목표 윌리엄(William)으로 명명된 숙천과 목표 이지(Easy)로 명명된 순천에 미군의 낙하산 강하가 시작됐다. 다행스럽게 북한군의 대공 사격은 거의 없었다.

 이날 강하 후 약 3시간이 경과한 오후 5시 무렵 187공수연대는 목표로 했던 지점을 모두 안전하게 확보했다. 순천으로 투입된 187연대 2대대도 순조롭게 작전을 진행했다. 수송기를 타고 작전지역 상공에서 작전 진행 상황을 지켜보던 맥아더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맥아더는 기자회견 석상에서 자신만만한 어조로 작전 성공을 자신했다.

 “적의 의표를 찔러서 공정작전을 감행했다. 북한군 전 병력의 약 반수로 판단되는 3만 명이 평양의 미1기병사단, 한국 1사단 등 지상부대와 미187공정연대와의 사이에 포위됐다. 적이 택할 길은 전멸하느냐, 항복하느냐의 두 가지밖에 없다. 이 작전은 명인의 솜씨라고 할 만한 것이며 끝내 적을 함정에 몰아넣을 것이다.”

▶김일성의 도주 경로

 미187공수연대는 10월 21일 후퇴하던 북한군을 포착,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북한군 규모는 연대급에 불과하고 북군 정권이나 북한군의 수뇌부라고 할 만한 인물은 전혀 없었다. 22일 지상에서 북진하는 유엔군과 다시 만날 때까지 187공수연대는 사살 1000여 명, 포로 3818명이라는 전과를 거뒀다.

 하지만 약 3만 명으로 예상되는 북한군 주력부대의 포위 섬멸이나 수뇌부를 포로로 잡겠다던 원래의 작전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완전 실패했다. 원산상륙작전에 이어 맥아더가 또다시 야심차게 기획한 숙천·순천 공수작전도 기대했던 것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는 그 무렵 어디에 있었을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서상문 박사는 최근 발간된 ‘6·25 전쟁사 7권’을 통해 “스탈린의 탈출 지시가 있었던 10월 13일 밤이나 14일 새벽에 이미 김일성은 평양에서 벗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평양을 빠져나온 김일성은 소련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이날 순천·개천을 거쳐 덕천으로 갔다는 것이 서 박사의 추정이다. 187공수연대가 아군과 다시 합류한 10월 22일 시점에 이미 김일성은 평안북도 대동군(현 동창군)에서 중공군 지휘관인 펑더화이(彭德懷)와 만나 방어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공수작전이 비록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북한군에게 준 심리적 충격은 적지 않았다. 북한군은 이미 자력으로는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 국군의 진격을 막아낼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북한군 입장에서는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지원 병력을 보내기 전에 최대한 지연작전으로 시간을 끌어야 했다.

 평양을 잃은 김일성은 아군의 진격을 축차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해 숙천 남방 13㎞ 지점의 영유~어파리선을 첫 번째 방어지역으로 선정했다. 김일성은 이곳에 평양을 빠져나온 북한군 병력을 배치해 지연전을 치르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미군의 공수작전으로 북한의 지연전 기도는 출발선부터 뒤흔들렸던 것이다.

▶거침없는 북진

 유엔군 입장에서 공수작전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모두가 상황을 낙관했다. 국군1사단은 10월 24일 청천강 북안의 영변을 점령했다. 이날 맥아더가 전체 유엔군에 총추격 명령을 하달하면서 작전 제한 없이 북진을 허용했다.

 맥아더는 11월 추수감사절 이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고, 실제 미8군은 군수 지원 속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미8군은 이미 한국에 비축한 탄약만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해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던 탄약 운반선의 항로 변경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서태평양을 항해 중인 미국 탄약운반선 6척의 행선지가 한국이 아닌 일본과 하와이로 변경됐다. 동태평양을 항해 중인 미 보급선박도 본국으로 귀환시켰다. 또 본토의 미 육군에 이미 청구한 탄약보급도 모두 취소했다. 그리고 식량과 피복 이외의 보급품 수송도 중지시켰다.

 하지만 지휘부의 이 같은 여유와는 달리 일선에 있던 부대들의 보급사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오랜 폭격으로 철도 대부분이 파괴돼 38선 이북지역의 보급망은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국군6사단 등 상당수 국군 병력들은 이미 추위가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동계용이 아닌 하계용 군복을 입고 있는 지경이었다.

 전쟁이 길어진다면 보급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과 유엔군 수뇌부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전쟁은 곧 끝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운명의 10월 25일

 청천강을 건너 압록강으로 접근할수록 북한군의 저항 강도가 높아졌지만 북한군을 전멸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미국의 치밀한 항공정찰에도 청천강 이북 압록강 사이의 산지에는 별다른 대규모 병력이 보이지 않았다. 미군 정보당국은 중공군의 참전 여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넌 징후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10월 25일 오전 8시 30분 국군1사단 12연대와 15연대가 평안북도 운산에서 돌연 정체불명의 대규모 적 병력과 마주친 것은 누구도 예상 못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돌발 상황이었다. 같은 날 6사단 주변에도 정체불명의 대부대가 나타났다. 

 

>중공군 1차 공세 |

일본의 유명한 6·25전쟁 연구가였던 사사키 하루다카는 1950년 10월 25일을 ‘운명의 날’이라고 표현했다. 6·25전쟁 양상을 완전히 바꿔 놓은 운명의 25일, 전날과 달리 날씨는 갑자기 흐려졌다. 그해 따라 유달리 빨랐던 추위가 여름용 군복을 입고 청천강 동북쪽 일대에 전개하고 있던 국군의 뼈마디를 시리게 한 그날, 햇빛마져 가려져 전장의 분위기는 스산하고 침울하기까지 했다.

 
 ▶운명의 날  

 운산 북쪽에서 작전하던 국군 1사단은 이날 돌연 맹렬한 총격을 받았다. 6ㆍ25전쟁 당시 가장 안정된 전투력을 자랑했던 1사단답게 장병들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항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패주 직전에 몰려 있던 북한군치고는 저항이 강력했고, 전투방법도 무언가 낯선 느낌이 없지 않았다.

 1사단 15연대는 상부에 전방의 적이 “중공군 같다”는 보고를 했다. 전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한국어가 아니라 중국어였기 때문이다. 이내 말이 통하지 않고 군복도 색다른 낯선 포로 1명이 잡혔다. 1사단 15연대 3대대 예하 중대장이었던 김국주(전 광복회장, 예비역 소장) 대위는 중국 본토에서 활약하던 광복군 출신이었으므로 중국어가 가능했다. 김 중대장의 질문에 포로는 자신이 중공군임을 시인했다.

 포로는 후방으로 후송됐다. 역시 중국어가 가능했던 백선엽 장군은 며칠 뒤 이 포로를 직접 심문했다. 포로는 표준어인 베이징 관화(官話)에는 서툴렀고, 남방 사투리인 광둥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포로는 자신이 중공군임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토록 우려하던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된 것이다.
 

 ▶미군의 의심

 국군 1사단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부대 건제를 유지하면서 버텨냈지만, 국군 2군단 예하 사단은 상황이 달랐다. 평안북도 서쪽 지역의 넓은 지역에 분산돼 있던 국군 2군단 소속 6·8사단의 예하 연대ㆍ대대들은 곳곳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국군은 이들이 정규 중공군임을 확신했지만 미군은 달랐다. 미군 정보당국은 중공군의 6ㆍ25전쟁 개입을 사전에 예측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눈앞에 중공군 포로를 놓고도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미군은 중공군 포로로 알려진 자들이 원래 북한에 살던 화교이거나, 아니면 중국에서 살다 귀국한 한국인이거나 혹은 개별적으로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국인이 아닐까 의심했다.

 미군 정보당국자들은 항공기를 동원한 미군의 첨단 공중정찰을 완벽히 속이고 중공군 대병력이 한반도에 진입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미군의 그 같은 확신과 달리 중공군은 이미 10월 19일부터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 북쪽의 산악지대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26일 미8군 정기 정보보고는 “북한에 나타난 중공군은 부대 단위로 공식 참전한 것이 아니라 지원 형식으로 소규모 인원이 개인적으로 참전해 북한군에 증원된 것”이라고 수록했다. 그런 와중에 국군 2군단 예하 6ㆍ8사단이 중공군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일부 미군 정보장교들은 “한국군이 패전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중공군 대부대를 핑계 대고 있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오판

 국군 1ㆍ6ㆍ8사단 모두가 위기였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평북 초산과 온정리 방면에 포진해 있던 국군 6사단이었다. 6사단은 압록강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춘천 전투 이래 여러 전투에서 승리한 국군의 최정예부대였던 6사단 7연대는 10월 29일 부대 단위 철수를 포기하고 개별 탈출을 결정하는 비극이 연출됐다.

 이처럼 중공군의 압박으로 미8군의 우측방을 맡고 있는 국군 방어부대가 점차 밀리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미군은 비상사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의 의도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미군 정보당국은 이날까지도 중공군이 개입하고 있지만 중공군의 목표가 중국 국경 보호인지 아니면 북한 정권을 지원하기 위한 전면 반격인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이미 중공군은 날카로운 비수를 국군의 전선 곳곳에 찌르고 있었지만, 미군은 정말 상대방이 찌르고 있는 걸까를 의심하는 해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미군 고위 지휘관들 중 일부가 중공군이 부대 단위 공식 참전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10월 30일에 와서였다.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이 함경도 방면에서 작전하던 국군들이 잡은 중공군 포로 16명을 직접 만나본 것이 계기였다. 이들 중공군 포로들은 “자신들이 중공군 124사단 소속이며, 사단 전체가 참전했다”는 진술을 했다.

중공군의 조직적 참전은 이제 의심할 바 없었다. 맥아더 장군과 개인적으로 친했던 알몬드 소장은 즉각 이 같은 사실을 일본에 위치한 맥아더 원수에게 보고했다.

 미8군 정보 라인에서 공식적으로 중공군 공식 참전을 인정한 것은 11월 1일이었다. 하지만 이날 보고서에도 운산 정면의 적은 2개 연대급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실제 이 무렵 운산 정면과 측면에서 공격을 가하던 중공군은 39ㆍ40군 등 2개 군단급 부대로 미군 예상 전력의 10배가 넘었다.

 미군의 전체 중공군의 규모에 대해 2개 사단 정도로 생각하다가 조금 높여 4~5개 사단 정도일지 모른다고 갈팡질팡하던 그 순간 압록강 남쪽에는 중공군 38ㆍ39ㆍ40ㆍ42ㆍ50ㆍ66군 등 6개 군단급 부대가 침입한 상태였고 이 중 대략 4개 군단이 최일선에서 작전 중이었다. 이 무렵 청천강 북쪽에 포진하고 있던 국군과 미군의 최일선 전투병력은 5만 명에 불과했지만, 중공군은 12~15만 명을 전투 제일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공세를 시작한 후에도 병력이 계속 들어와 압록강 이남의 중공군 총병력은 10월 말쯤 29만 명에 육박했다. 미군 정보당국으로서는 사상 최악의 정보 실패이자 오판이었다.
 

 ▶발톱을 드러낸 중공군

 그도 그럴 것이 미군은 이날까지도 한반도에서 중공군과 진검 승부를 벌인 적이 없었다. 10월 25일 이후 11월 1일 이전에도 국군 2군단은 중공군의 맹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군은 아직 그 정도의 큰 타격을 입은 적이 없었다.

 중공군은 개전 초기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고 무기와 장비가 빈약한 국군을 집중 공격하는 ‘선택적 접근’을 통해 전체 유엔군 전선에 구멍을 만드는 전술을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군은 국군의 부족한 전투 능력 탓에 전선에 구멍이 나는 것이라고 오판했다.  미8군이 뒤늦게 공식적으로 중공군의 부대 단위 공식 참전을 인정한 11월 1일 전투양상은 빠르게 급변하기 시작했다. 6ㆍ25참전 중공군 지휘관이었던 펑더화이 지원군 사령원은 11월 1일 오전 결정적 국면이 왔다고 생각하고 평북 희천에서 개천 방향으로 진격 중이던 38군으로 하여금 청천강 방면으로 계속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그 방향으로 중공군 38군이 계속 공격하면 청천강 남안 입구를 장악할 수 있었다. 청천강 북쪽의 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전체를 포위망에 넣으려는 야심찬 작전이었다. 구성 동쪽의 중공군 66군은 미 24보병사단을 견제하는 동안 운산 서쪽·북쪽의 39ㆍ40군으로 하여금 국군 1사단을 공격하게 했다. 연어이 미 육군 1기병사단까지 공격하는 것이 39군과 40군의 임무였다.

 큰 틀에서 보자면 청천강 북쪽에서 39군과 40군이 정면에서 스트레이트를 날리면, 66군이 왼쪽 옆에서 잽을 날리고, 38군이 오른쪽 측후방에서 깊숙이 훅을 날려 승부를 보자는 계획이었다. 청천강 북방의 미군 중에서 최정예로 평가받고 있던 미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은 이제 중공군 39ㆍ40군의 스트레이트 연타를 막으면서 측방의 위협으로부터 버텨야 하는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정보의 오판은 일선 부대에게 가공할 재앙을 불러왔던 것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작성한 운산 전투 상황도. 지도 왼쪽이 미 8기병연대, 오른쪽 위가 국군
15연대다.

  11월 1일 오후 미 1기병사단장 호버트 게이 소장은 운산 일대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운산에 주둔하던 8기병연대로부터 특별한 보고는 없었지만, 아군 포병 통신을 통해 중공군이 포위망 형성을 시도하는 징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게이 소장은 직속 상관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에게 운산을 포기하고 8기병연대를 후방으로 철수시키거나, 그도 아니라면 신안주와 영변 등 곳곳에 분산 배치된 1기병사단의 예하 병력을 집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1군단장 밀번 소장은 게이 소장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1군단 오른쪽의 국군2군단 전선 곳곳에 구멍이 나서 그쪽 상황이 더 급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운산 포기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계속돼 온 유엔군의 공세작전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운산의 비극

 이렇게 결정이 지연될 동안 운산에 잔류하고 있던 미 1기병사단 8기병연대와 국군 1사단 15연대는 서서히 중공군 39군이 펼친 포위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게이 소장은 1일 저녁 6시 8기병연대에 철수준비 명령을 하달했다.

 운산 서쪽의 8기병연대가 먼저 빠져나가고, 운산 동북쪽의 국군 15연대는 8기병연대의 철수를 엄호한 후 뒤따라 철수하는 것이 철수작전의 기본 뼈대였다. 하지만 중공군이 대병력으로 거센 공격을 펼치자 국군 15연대가 전선에서 밀려나면서 철수작전은 대혼란 상태로 접어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국군1사단 15연대는 미 10 고사포병단의 조직적인 엄호사격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큰 피해 없이 후방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미 8기병연대의 사정은 달랐다. 8기병연대는 사단이 저녁 6시에 하달한 철수준비 명령을 받지 못해 사전 철수준비도 하지 않았다.

 11월 1일 저녁 8시부터 미1군단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군단장 밀번 소장은 1기병사단을 포함한 전체 군단 예하부대에 공격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하라고 명령했다. 1950년 9월 전면 반격이 시작된 이후 첫 번째 방어명령이었다.

 하지만 방어 결정은 너무 늦었다. 이날 밤 11시 정식으로 8기병연대가 철수 명령을 접수했을 때 중공군은 8기병연대의 북쪽, 서쪽뿐만 아니라 남쪽에도 파고들어와 이미 고리 모양으로 포위망을 형성했다. 여기에 국군 15연대 전선을 돌파한 중공군이 운산 동북쪽과 동쪽으로 파고들면서 8기병연대는 4면 포위상태에 빠져 버렸다.

 ▶ 가장 괴로운 결심

 뒤늦게 철수를 시작한 8기병연대 예하부대에 그때부터 대재앙이 벌어졌다. 통신은 단절됐고, 운산 일대에는 철수 중 낙오한 일부 국군과 미군 8기병연대, 중공군 39군 소속 병력이 뒤섞인 상태에서 혼전이 벌어졌다. 8기병연대의 예하 3개 보병대대 중 2개 대대는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동쪽으로 우회해 간신히 몸은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운산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8기병연대 3대대는 적 후방에 고립됐다. 8기병연대 3대대의 장병들은 아군의 구출을 기대하면서 사주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저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미 포위에 빠져든 그들을 구출할 방법은 없었다.

 미1기병사단은 예하 5기병연대 2개 대대를 투입해 포위망을 뚫으려 했지만 미군 주력과 8기병연대 3대대 사이에 파고든 중공군은 이미 깊이 2m의 참호까지 파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11월 2일 미 1군단장 밀번 소장은 1기병사단에 적에게 포위된 예하부대를 포기하고 후방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적 후방에 고립된 8기병연대 3대대는 아군 철수 후에도 고독한 저항을 계속하다 철수 중 11월 6일 오후 4시 결국 전멸하고 말았다. 비록 패전이었지만 미 8기병연대 3대대는 미 육군 정예부대로서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켰던 것이다.

 8기병연대 3대대에 대한 구출 포기는 3대대 장병들에게 청천벽력이었지만 다른 미군들에게도 회복하기 힘든 정신적 충격을 남겼다. 밀번 소장은 당시의 심정을 “군인의 생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슬픈 추억들이 있지만 그때처럼 괴롭고 고달프고 슬펐던 결심은 없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미 육군 역사상 굳건하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대대급 부대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고 주력부대가 철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중공군 개입 이후 전투 양상은 돌발적이고 이례적인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

 8기병연대 3대대의 포위 전멸뿐만 아니라 8기병연대 주력 자체도 입은 타격이 컸다. 11월 3일을 기준으로 8기병연대는 병력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고, 장비도 재보충이 없이는 전투를 더 이상 지속할 능력이 없는 상태가 됐다.

  ▶ 바위 같은 비호산의 국군 7사단

 이런 와중에도 미군 지휘부는 전면 철수보다 청천강 북쪽에 어느 정도 근거지를 남겨두고 싶어 했고, 그 같은 미련은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할 수 있는 공간적 틈을 만들어 줬다.

  11월 2일 베이징에서 상황을 보고받던 마오쩌둥은 청천강 상류 희천에서 군우리 방향으로 공격하던 중공군 38군에 신속하게 진격해 미2사단과 국군2군단을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마오쩌둥이 보기에 중공군 38군이 평북 개천 군우리, 안주 일대를 차례로 점령할 수 있다면 청천강을 차단, 강 북방의 유엔군을 완전 포위하는 것이 가능했다. 마오쩌둥은 이 같은 작전에 성공하면 전략적 승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흥분했다.

 중공군 38군이 마오쩌둥의 희망을 성사시키려면 개천군에 자리 잡고 있던 높이 622m의 비호산을 먼저 점령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미 1군단장 밀번 소장은 비호산의 전술적 중요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운산의 처절한 비극을 겪으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밀번 장군은 비호산 주변의 방어태세를 세심하게 점검했다.

 밀번 장군의 명령에 따라 미24사단 5연대 전투단은 11월 3일 비호산 후방 군우리의 방어진지에 포진했다. 비호산 정상과 주변 일대에는 국군7사단 예하 2개 연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비호산과 군우리 일대의 국군과 미군은 바위처럼 묵묵하고 굳건하게 버티며 중공군 38군의 거센 공격에 끝까지 맞섰다.

 38군 주력부대는 4일 오후 3시 비호산 정상을 잠시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미군의 화력지원을 받은 국군7사단의 반격에 다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미 8기병연대의 철수 실패 이후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던 아군에 비호산 전투의 승리는 다시 용기를 심어주는 원천이 됐다. 중공군은 비호산 점령에 실패하자 더 이상의 욕심은 무리라는 점을 인정하고 11월 5일 공격 중지 명령을 하달했다.  

 ▶ 거짓말처럼 사라진 중공군

 청천강 북쪽과 동쪽 일대에서 맹렬하게 공격하던 중공군은 11월 6일을 기점으로 일제히 후방으로 후퇴했다. 10월 25일 중공군의 첫 출현도 돌발적이었지만, 11월 6일 중공군의 철수는 더욱 돌발적이었다. 열흘여 만에 갑자기 사라진 중공군에 국군과 미군은 어리둥절해했다. 철수 직전까지도 중공군의 움직임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당초 중공군의 공식 참전을 의심하던 일부 회의론자들에게 중공군의 돌발적 철수는 자신의 판단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또한 중공군 참전 병력이 기껏해야 2~5개 사단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보던 일부 미군 정보 당국자들에게도 중공군의 돌발적인 철수는 당연한 상황 전개였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미군이 큰 심리적 충격을 받았지만, 그 같은 심리적 충격에 비해 의외로 미군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점도 중공군을 경시하는 일부 미군 관계자들에게 힘을 실어 줬다. 8기병연대의 전투 능력 일시 상실은 뼈아팠지만, 그외 사단은 그럭저럭 선방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같은 일부 당국자들의 낙관은 희망의 불씨라기보다 지옥문의 열쇠였다. 

 

>중공군 2차 공세 |

 11월 6일 중공군이 갑가지 사라진 이후 24일까지 18일 동안 청천강 일대의 전선에는 정적이 흘렀다.

중공군이 아직 압록강 남쪽에 남아 있는 것이 분명했으나 중공군 대부대의 뚜렷한 움직임은 식별되지 않았다.

 이 불안한 소강 상태에 대해 미군 내부의 해석은 엇갈렸다. 중공군 1차 공세 당시 8기병연대가 포위돼 상당한 손실을 입은 탓에 전선에 배치된 미 육군 야전부대에서는 중공군에 대한 경계감이 강했다. 국군도 2개 사단이 큰 손실을 당한 만큼 중공군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못했다.
 
 ▶엇갈린 판단

 하지만, 일본에 있는 유엔군사령부, 다시 말해 미 극동군사령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윌로비 장군이 이끄는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G-2)는 중공군이 갑자기 물러난 것은 싸울 만한 의지도 전력도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중공군의 기습에 8기병연대가 손실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기습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진 우발적 사태라고 확신했다.

 미군의 공군력과 강력한 화력을 경험한 중공군은 다시는 공세를 재개할 수 없을 것이며, 한번만 더 미군과 국군이 공세를 감행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 도쿄에 위치한 극동군사령부의 판단이었다.

중간에 위치한 미8군사령부의 판단은 엇갈렸다. 극동군사령부와 유사하게 중공군을 경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갑자기 나타나 맹렬한 공격을 가하다 갑자기 사라진 중공군의 움직임이 불길하다고 믿는 사람도 많았다.

 워싱턴의 미 합참은 야전부대의 입장에 가까웠다. 중공군 병력이 얼마나 많이 압록강 남쪽으로 들어와 있는지 모르는 마당에 미군이 전면 공세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지나치게 모험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인천상륙전 때부터 오랫동안 맥아더 원수와 의견 충돌을 경험했던 합참 요원들은 맥아더의 극동군사령부에 적극적인 지시를 하는 것을 주저했다.

 맥아더 원수는 이미 11월 6일 공격 재개를 결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합참의 조심스러운 입장을 일축했다. 이 같은 맥아더 원수의 방침에 따라 미8군은 약 1주일 동안 보급물자를 확보한 후 11월 15일부터 공격을 재개하려 했지만 보급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다.

북진작전에 원래부터 투입된 미1군단과 국군2군단에 더해 중공군 참전 이후 후방에서 북상한 미9군단까지 가세함에 따라 미8군이 지원해야 할 군단은 총 3개였다.

 이들 한ㆍ미 3개 군단의 1일 소요보급량은 4000톤에 달했으나, 철도와 공중수송을 포함한 미8군의 수송 역량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열차를 이용한 육로수송, 진남포항을 이용한 해상수송과 항공수송까지 총동원하고서야 보급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다.

 ▶크리스마스 공세

 이에 따라 11월 20일부터 전면적인 공세 재개에 대비한 소규모 공격이 시작됐다.

전체 유엔군의 공세가 재개된 것은 24일이었다. 24일 오전 10시 발표된 공식 성명을 통해 맥아더 원수는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했으므로 이때 시작된 공세를 흔히 크리스마스 공세라 불렀다.

 미8군의 작전 통제를 받는 한ㆍ미 3개 군단 중 미1군단은 신의주를 향해 서해안을 따라 진격하도록 계획했다.

중앙의 미9군단은 군우리에서 초산ㆍ벽동 방향으로 진격토록 했다. 국군2군단은 미9군단의 오른쪽인 희천ㆍ강계 방향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남쪽에서 바라보면 왼쪽부터 미1군단, 미9군단, 한국군 2군단이 배치되고 그 오른쪽에는 약간의 간격을 두면서 미10군단과 국군1군단이 진출하도록 돼 있었다.

특히 작전계획의 최종 수정 과정에서 맥아더 원수는 함경도에서 작전하는 미10군단 병력 중 일부를 서쪽의 평안북도 방면으로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이를 통해 미8군의 가장 동쪽에서 작전하는 국군2군단을 지원하면서 평안북도 일대에 몰려 있는 중공군을 포위하겠다는 것이 맥아더의 복안이었다.

 ▶대재앙의 시작  

 하지만 미군과 국군의 대공세는 첫날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곳곳에서 중공군의 움직임이 식별됐고 진격은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특히 평안북도 일대의 울창한 삼림지대 속에서 작전하던 미9군단과 국군2군단은 평안북도의 높은 산 깊은 계곡 사이에 펼쳐진 끝없는 숲속으로 진격하는 것에 서서히 불안감을 느꼈다. 그 같은 불안감은 유엔군의 전면 공세 재개 하루 만인 11월 25일 역으로 중공군이 공세를 시작하면서 눈앞의 현실이 됐다.

 중공군 38군은 이날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국군에 비해 3~4배나 되는 병력을 투입해 국군2군단 예하의 국군7사단을 포위했다. 중공군 38군 소속 113사단이 깊숙이 침투해 후방을 차단하고 나머지 2개 사단이 양 날개를 펼쳐 덕천 일대의 7사단을 완전히 포위망 속에 빠트렸다.

 11월 초 비호산에서 바위처럼 버티며 중공군 38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던 7사단도 이처럼 병력 열세 속에 포위망에 빠지자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비슷한 시간 국군7사단 오동쪽 영원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국군2군단 예하 8사단도 역시 3배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중공군 42군의 포위망에 빠졌다.

 ▶전선 전면 붕괴

 이날 국군뿐만 아니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공격 작전도 순조롭지 않았다.

25일 미1군단과 9군단은 정해진 목표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지만 좀처럼 공격은 속도를 내지 못했다. 26일 오전 2시부터는 상황이 역전돼 오히려 중공군이 공격을 감행하고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방어를 하는 상황으로 정세가 급변했다. 유엔군의 전면 공세 이틀 만에 공수가 뒤바뀐 것이다.

 이때부터 전선의 미군은 중공군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박천 일대의 영국군 27여단 지역에는 중공군 50군이 치고 들어왔다.

태천 동남방의 미24사단 지역에는 중공군 66군이 공격해 왔다. 영변의 미25사단 정면으론 중공군 39군이 공격을 감행했다. 청천강을 가운데 두고 배치돼 있던 미2사단은 중공군 40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공군의 군(軍)은 아군의 군단급에 해당하는 부대였으므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중공군은 아군 1개 사단당 중공군 1개 군단을 투입한 셈이다. 국군 1개 사단 방어지역에 중공군은 그 3배가 넘는 군단급 부대를 투입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미 전투의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결국 국군2군단 전체가 격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미군 1개 사단은 국군에 비해 병력이 2~3배 많았고, 곡사포 등 장비와 화력은 그보다 훨씬 더 강했다. 미군은 이 같은 화력과 장비를 바탕으로 중공군의 공세에 근근히 버틸 수 있었지만, 사단당 병력도 적고 장비도 열세인 국군은 사정이 더 급했다.

국군 방어지역은 미군과 영국군, 터키군을 포함한 유엔군 지상부대의 오른쪽 측면에 해당했다.

이 중요한 우측방으로 중공군 38군과 42군이 파고들면서 미8군 주력 부대 전체가 중공군의 포위망에 빠져들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다.

 ▶중공군의 함정

 사실 펑더후이(彭德懷)가 지휘하는 중공군은 미군과 국군을 유인하는 작전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펑은 10월 26일 1차 공세를 감행한 후 중공군이 후퇴해서 사라지면 미군이 금방 반격해 올 것이란 점을 사전에 예상하고 있었다. 미군이 중공군 전력을 오판해 깊숙이 진격해 오면 포위 섬멸하는 유인작전이었다.

 유엔군 입장에서 보자면 11월 24일부터 시작한 크리스마스 공세는 처음부터 중공군이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함정에 그대로 빠져든 완전히 실패한 작전이었던 것.

유엔군이 공격 첫날 공격이 잘 안 된다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중공군은 미군이 유인작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적절한 선에서 물러날 타이밍을 잡기 위해 고민하고 있을 정도로 크리스마스 공세는 시작부터 승패가 이미 결정된 비극적 전투였다.

 공군 정찰기를 동원해 전장 상황을 손금 보듯 들여다볼 수 있는 첨단 미군을 상대로는 좀처럼 성공할 것 같지 않은 소설 삼국지식의 고전적 구닥다리 유인작전은 그렇게 20세기 한반도에서 갑자기 부활했다.

1950년 11월 청천강 전선에 배치된 미 육군2사단 소속 장병들 모습. 2사단은 청천강 전투 당시 유엔군 본대의 철수를 엄호
하기 위해 후방에 남았다가 철수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미 육군 자료사진

 미 육군의 공식적인 6·25 전쟁사 시리즈 중의 한 권인 ‘한국전쟁의 서부전선’은 1950년 11월 26일 밤 청천강 전선의 기상 상태에 대해 “둥글고 찬란한 달이 땅 위에 은색 불빛을 비추는 차갑고 맑은 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둥근 달이 비치는 차가운 밤은 우리로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날 밤을 고비로 유엔군과 국군의 공세작전이 사실상 끝났기 때문이다. 11월 24일 시작된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사실상 한국의 통일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고비였다.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대한민국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손실을 당했지만, 크리스마스 공세에 성공해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이뤄낼 수 있다면 이 비극적인 전쟁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요한 역사적 갈림길에 나타난 장애물이 바로 중공군이었다. 유엔군이 중공군을 쉽게 물리치고 곧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중공군은 미군과 국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체크하며 오히려 국군과 유엔군을 유인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크리스마스 공세에 나선 국군과 미군이 아무런 의심 없이 깊숙이 진격해 와야 중공군이 파놓은 함정, 다시 말해 포위망이 더욱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25일부터 국군과 유엔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부분적으로 역습까지 펼치던 중공군은 26일부터 사전에 준비된 대대적인 전면 공세를 시작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이 사전에 준비해 놓은 함정에 걸린 것을 확인한 중공군은 주저 없이 2차 공세에 돌입한 것이다.

 ▶중공군의 2중 포위 기도

 26일 중공군 38군은 덕천, 42군은 영원 일대에 강한 압박을 가해 왔다. 이내 병력이 열세했던 덕천·영원 일대의 국군 전선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운산의 39군은 영변으로, 40군은 구장동을 거쳐 개천 방면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전선 서쪽 정주 방면의 50군은 박천으로, 태천 방면의 66군은 영변으로 공격했지만 동쪽 지역만큼 공세의 강도는 높지 않았다.

 공격이 중공군 의도대로 될 경우 미 24사단과 25사단은 중공군 66군과 39군에 포위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미 2사단 또한 중공군 40군과 38군 사이에서 후방 퇴로가 차단될 위험성이 매우 컸다. 특히 국군 전선을 돌파해 미8군의 옆구리를 강타한 중공군 38군이 계획대로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로 파고들어 오면 미 1기병사단을 제외한 미8군 주력 부대 전체가 중공군의 포위망에 빠져들 우려도 있었다.

 중공군은 이것으로도 모자라 42군으로 하여금 맹산을 거쳐 순천의 동남쪽으로 공격하도록 계획했다. 중공군 39, 40, 50, 66군 등 4개 군단이 정면에서 공격하는 가운데 38군이 1차 포위망, 42군이 더 후방에 2차 포위망을 구축하려는 의도였다.

 11월 27일 밤 중공군의 입장에서 모든 상황은 완벽해 보였다.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흥분해서 미군 2, 24, 25사단 등 3개 사단을 포위 섬멸하라고 지시했다. 1기병사단이 중공군 1차 공세 때 상당한 타격을 입어 크리스마스 공세 때는 후방 예비대로 잔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3개 사단은 실질적으로 미8군의 주력이었다. 마오쩌둥은 미군 3개 사단을 섬멸할 경우 군사적 승리 수준을 뛰어넘는 정치적 의미를 거둘 것이라고 확신했다.

▶유엔군의 대응

 1차 공세 이후 중공군이 스스로 물러나자, 중공군의 전력과 전투 의지를 과소 평가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이 이처럼 거친 공세로 나오자 경악했다. 유엔군사령부 기능을 맡고 있던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에게 이 같은 사태 전개는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직접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던 워커 장군의 미 8군사령부에도 이 같은 사태 전개는 충격이었다. 미8군은 일단 미군·영국군에 이어 셋째로 많은 병력을 보유한 유엔군이었던 터키여단을 덕천 방면에 투입해 전선에 뚫린 구멍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한국의 지형과 기후에 적응할 시간과 경험이 없던 터키여단이 소규모 병력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기에는 전반적인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았다.

 28일 무렵부터 유엔군은 이제 크리스마스 공세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아군의 철수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11월 28일 새벽 미8군은 예하 유엔군 각 부대에 일제히 청천강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서해안 가까운 곳에 주둔해 전체 유엔군 전선에서 가장 서쪽에 주둔하고 있던 미24사단은 비교적 순조롭게 철수에 성공했다.

 하지만 미25사단은 각 대대, 연대별로 운명이 엇갈렸다. 일부 미25사단 예하부대는 성공적으로 진지를 지탱해 국군1사단의 재편성을 도왔다. 재편성에 성공한 국군1사단은 전선을 지탱하면서 미25사단의 철수를 돕기도 했다. 

▶인디언의 태형장

 그보다 더 동쪽에 주둔하던 미2사단의 운명은 더욱 가혹했다. 미2사단의 동쪽과 동남쪽에 있던 국군 전선이 조기에 돌파됐기 때문이다. 차량을 타고 도로로 철수하던 미2사단은 군우리와 순천 사이의 좁은 협곡에서 중공군 42군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도로 양쪽 계곡 위에서 끊임없이 사격을 가하는 중공군 때문에 미2사단의 철수 차량 행렬은 수시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앞차가 공격을 받아 멈추기라도 하면 그 뒤의 차량 행렬도 도로에 갇힌 상태에서 꼼짝없이 적의 공격에 노출됐다.

 마치 인디언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채찍질 처벌을 받을 때 상황과 같다고 해서 군우리-순천의 협곡지대는 훗날 ‘태형의 계곡’ ‘인디언 태형장’이라는 기괴한 별명까지 붙여졌다.

수천 명의 사상자와 대부분의 중장비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미2사단은 분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국군 2군단 예하부대도 중공군의 집중공격 속에 어렵게 후방으로 철수해 재편성을 시작했지만, 기동장비와 화력이 부족했던 국군 부대들은 철수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가슴 아픈 패배였고 큰 손실을 입었지만 유엔군과 국군 부대가 대부분 포위망을 뚫고 철수에 성공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최악의 비극

 유엔군 예하부대들이 간신히 청천강을 건너 재편성에 주력하던 11월 28일 일본 도쿄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비롯해, 한국에서 급하게 일본으로 날아온 미 8군사령관 워커 육군중장, 극동사 정보참모 윌로비 육군소장 등 주요 지휘관과 참모들이 참가한 회의에서 내린 결론은 두 가지였다. 포위된 병력을 구출해야 한다는 것과 포위 위험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더 후방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것. 동시에 미 극동군사령부는 미 합참에 공세로부터 방어로 전환한다는 내용의 상황판단 보고서를 보냈다.

 미 합참은 이 같은 방어 전환에 동의했지만 평안도 일대에 포진하고 있는 미8군과 함경도 일대의 미10군단이 개별적으로 작전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전선을 연결해 하나의 방어전선을 만들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현재의 체제대로 미8군과 10군단이 분리해서 작전하면서 10군단이 미8군을 위협하는 중공군의 후방을 압박하는 것이 더 좋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8군과 10군단 사이로 파고든 적이 원산을 위협해 오면서 맥아더 원수가 아닌 미 합참의 판단이 옳다는 것이 확인됐다. 원산이 차단당하면 10군단 전체도 적의 포위망에 빠져들 수 있었다. 12월 3일 마침내 맥아더는 미8군은 현재의 전선은커녕 평양을 확보하기도 어려우며 서울 부근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미 합참에 보냈다.

 유엔군은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한 지 열흘도 안 돼 북한 전역을 포기해야 할 정도의 위기에 빠진 것이다. 12월 6일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 중공군과 북한군이 평양에 진입하면서 사실상 전선은 북진작전 이전 상태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로 시작해 중공군의 2차 공세로 끝난 이 전투를 흔히 청천강 전투라고 부른다. 이 전투의 결과로 유엔군이 사실상 북한 전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청천강 전투는 흔히 20세기의 대표적 결전(Decisive Battle) 중 하나로 손꼽힌다.
6·25전쟁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지만 가장 결정적인 국면을 꼽아 보라면 인천상륙전과 청천강전투 두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인천상륙전은 아군 반격의 계기를 마련해 북한군의 적화통일 기도를 분쇄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대로 청천강전투 또한 전체 전쟁 국면에서 그 중요성이 대단히 크다. 청천강전투 이후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국군은 사실상 중공군과 접촉을 단절한 상태에서 38선 남쪽까지 후퇴했기 때문이다. 특히 결과라는 측면에서도 청천강전투는 우리에게 너무도 통한의 전투였다. 청천강전투 패배는 특정 지역을 잃는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인천상륙전 이후 북진을 통해 수복한 북한 전 지역을 상실하는 뼈아픈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전쟁사 연구에서는 승리만큼이나 패배에서 배우는 교훈도 크다. 실제 ‘전투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얼마나 실수를 적게 하느냐에 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승리한 쪽이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패배한 쪽이 실수를 범했기 때문에 승패가 갈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전문가들은 “청천강전투는 겸허한 마음으로 패전 원인을 분석해 교훈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우리가 어떤 실수를 범했는지 되짚어 봐 그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승리의 길을 찾자는 것이다.

 또한 청천강전투는 항공력에서 열세이면서도 보병 병력이 더 많은 적이 첨단무기를 앞세운 아군을 상대로 어떤 방식으로 싸울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 한 사례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대목이 많다는 의견이다. 그 점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아군 패전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청천강전투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도 많다. 

 ▶정보의 실패

 청천강전투의 승패를 가른 가장 큰 요인은 정보의 실패였다. 유엔군은 10월 25일 중공군 1차 공세가 시작될 때 그들의 공세 작전 개시는커녕, 중공군 정규군이 한반도에 배치된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유엔군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중 정찰로 적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공군 6개 군단급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에 포진할 때까지 유엔군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중공군 개입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 이후도 문제였다. 중공군이 대공세를 펼치는 와중에도 중공군 규모를 수 개 사단으로 오판하거나 정규군이 참전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추정을 놓고 논란을 거듭하는 등 정보 오판을 수정하는 과정이 너무 느렸다.

 중공군은 도대체 어떻게 유엔군을 속였을까. 중공군은 흰색 설상 위장복으로 유엔군의 항공 정찰에 완벽하게 대비했다. 부대 이동은 항공 정찰을 방해하기 위해 주로 야간에 실시했다. 해가 뜨기 전에 행군을 마치고 주간에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철저한 행군 군기와 숙영 군기로 항공 정찰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 중공군은 1차 공세 작전 동안 유엔군의 항공 정찰과 근접항공지원을 방해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지르는 수법도 사용했다. 자욱한 연기를 이용해 항공기가 지상을 정찰하거나 지상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다시 말해 청천강전투는 첨단 정보자산을 활용한 정보의 우위를 너무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통신정보와 인적 정보 등 다른 정보 수집 수단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항공 정찰이나 위성 감시만으로 적의 동향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있다는 뜻이다.

 ▶보병의 중요성

 6ㆍ25전쟁 당시 미군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앞세우고 제공권·제해권을 장악했다. 지상 화력에서도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이 같은 무기의 질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1ㆍ2차 공세 당시 미군들은 고전을 피할 수 없었다. 산이 많은 한국의 특유한 지형에서 제한 없이 기동할 수 있는 중공군 보병은 주로 도로로만 기동하는 미군 차량 보급부대와 포병부대들을 요소요소마다 차단하며 포위를 시도했다.

 미 5공군 소속 전투기와 폭격기,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폭기는 청천강전투 과정에서 지상군의 작전에 큰 도움을 주고, 철수 작전에도 아군 피해를 줄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이들 항공전력이 전투의 승패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달리 말해 복잡한 한국의 산악지형은 단순히 화력으로 커버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산악지형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적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체계가 있어야 하지만, 6·25전쟁 당시 아군의 감시체계는 그 정도 수준이 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산길을 타고 침투한 중공군이 아군 후방으로 침투해 결정적인 교통로를 차단하고 갑자기 아군을 포위하는 사태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것이 청천강전투에서 아군이 고전한 결정적 이유가 됐다.

 전문가들은 “오늘날 첨단무기의 발달로 항공전력의 중요성은 6·25전쟁 당시보다 더욱 높아졌지만, 산악지형이 많은 한반도의 지리적 환경에서 보병의 역할이 적지 않다는 기본 전제는 현재도 유효하다”고 평가한다. 특히 북한이 최근 경보병 전력을 중시하는 것도 종심이 짧고 산악지형이 많다는 특수성을 활용해 보병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기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임은 누구에게

 모든 사건이 마찬가지지만 청천강전투에서도 책임 논란이 있다. 유엔군사령부 기능을 수행했던 미 극동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장인 윌로비 육군소장에게 화살을 돌리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혹은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책임을 거론하는 견해도 있다. 6ㆍ25전쟁에 대한 미 육군의 공식 전쟁사 중의 하나인 ‘한국전쟁의 서부 전선’(원제 Disaster in Korea)에서도 워커 장군의 평양 방어전 포기 등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 11월 25일 중공군 2차 공세로 위기가 조성된 것은 사실이나, 평양이나 그 주변에서 병력을 수습해 유엔군이 방어전을 펼칠 여지는 있었음에도 너무도 쉽게 평양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미8군과 10군단의 지휘가 분리되고 양 부대가 단일 전선을 형성하지 않은 점 등이 청천강 비극의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혹은 워싱턴의 지휘부와 맥아더 원수를 대표로 하는 극동군사령부의 불화를 실패의 원인으로 주목하는 견해도 있다. 맥아더 원수의 명성과 경력에 눌려 상급부서에서 위기 회피에 필요한 적절한 통제를 하지 못했고 그것이 참화로 연결됐다는 해석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미국에서 출간되는 저서에서는 미묘한 증언도 나오고 있다. 크리스마스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미군 안팎에서 “지금 상황에서 공세를 재개하다가는 위기를 맞을 것”이란 경고가 여러 경로로 나왔음을 보여주는 증언이 대표적이다.

 물론 맥아더 원수를 옹호하는 견해도 있다. 중공군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려는 워싱턴 당국은 적 전투기가 압록강 북쪽으로 도주할 경우 아군의 추적을 금지하는 등 맥아더 사령관에게 각종 제한사항을 주지시켰다. 맥아더 원수는 그처럼 제한사항이 많은 상황에서는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하기 전에 신속하게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판단했고, 그 점에 집중하다 보니 무리해 보이는 크리스마스공세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사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한두 명에게 책임 지우는 식의 접근은 복잡한 역사적 진실을 너무 단순화시킬 위험성이 높다. 더구나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전을 성공시켜 대한민국을 기사회생하게 만든 주인공 중의 한 명이다. 또한 워커 장군은 불굴의 의지로 낙동강방어전을 이끌어 우리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한 주역 중 한 명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전사 전문가들은 “청천강전투의 승패에 따른 교훈은 앞으로 냉정하게 분석해야겠지만 맥아더와 워커 장군이 6·25 당시 대한민국을 구하는 데 기여한 점은 그것대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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