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7>휴전천막과 싸우는 전선 |

구름위 2013. 1. 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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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천막과 싸우는 전선
1951년부터 2년간 치열한 고지전 이어져
1951년 미군들이 한 최전방 고지 능선에 설치된 교통호를 따라 기동 중이다.                                              자료사진

 1951년 하반기부터 한쪽에서는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한쪽에서는 전투를 계속하는 기묘한 국면이 시작됐다. 미 육군은 훗날 이 시기를 다룬 미 육군의 공식 6ㆍ25 전쟁사 서적을 펴내면서 제목을 ‘휴전 천막과 싸우는 전선(원제: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으로 정했다. 1951년 7월 이후 1953년 7월 휴전까지 만 2년 동안의 전쟁 양상은 미 육군의 책 제목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휴전 천막과 싸우는 전선’의 공존, 바로 그 자체였다.

 51년 7월 이후 전쟁 양상

 1950년 6월부터 1951년 6월까지의 전쟁 양상은 기본적으로 기동전이었다. 하지만 1951년 7월부터 전쟁양상은 진지전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것도 단순한 진지전이 아니라 휴전 협상의 판을 흔들 만한 대규모 작전을 스스로 포기하는 상태의 진지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1951년 7월 이후부터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전투가 줄어들어 전쟁이 완전히 소강 상태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전선이 아래 위로 크게 요동치지 않았지만 일선 부대가 겪는 전투의 격렬함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더 격렬했다. 바로 여기에 6ㆍ25 전쟁의 또 다른 비극이 있었다.

 이 시기 전쟁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지전, 갱도진지, 정찰전이란 세 가지 코드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당시 전투는 기본적으로 어느 한쪽이 참호와 벙커, 혹은 동굴진지로 철저히 요새화시킨 산 정상을 향해 격렬한 포병 사격을 가한 후 보병소대, 혹은 중대, 대대를 돌격시키는 방식의 전투였다. 흔히 고지전(高地戰)으로 표현하는 산 정상과 능선을 둘러싼 전투가 끝없이 이어졌다.

피차 상대방 후방으로 깊숙이 돌파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므로 이 시기 전투는 대병력이 기동할 수 있는 도로나 철도 주변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 일대 지형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고, 적의 공격을 최대한 회피하고 지연시킬 수 있는 산 정상에서 주로 벌어졌다. 

참혹했던 고지전

 고지전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적은 아군의 공격을 예측할 수 있었다. 포병사격부터 시작해서 박격포ㆍ기관총ㆍ소총 등 온갖 종류의 화기와 수류탄 세례까지 퍼부어지는 정면을 향해 돌격해야 하는 전투 상황이 끝없이 반복됐다.

 앞에서 적군이 높은 산 위에서 아군의 공격 상황을 지켜보고, 뒤에는 아군 상급부대 지휘관이 관측소에서 아군 예하부대의 진격 상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소위ㆍ중위ㆍ대위ㆍ소령급 지휘관들은 부하들을 격려해 적이 장악하고 있는 산꼭대기로 내달려야 했다.

 때로 능력이 뛰어난 일선 지휘관은 적이 방어하고 있는 고지의 옆이나 후방으로 침투하거나, 아군의 포병 준비 사격 없이 기습을 감행해 적이 장악한 고지 정상을 손쉽게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행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기에는 지형사정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적의 대비 수준도 편차가 심했다. 그 때문에 많은 일선부대들은 적의 공용화기나 개인화기가 정면에서 계속 불을 뿜는 와중에도 정면 공격을 계속해야 하는 혹독한 현실과 직면해야 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 같은 공격 방식은 아군의 대규모 인명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어렵게 고지 위에 있는 적의 진지를 점령해도 전투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고지 점령에 성공했으나 고지 점령을 위해 체력과 탄약을 거의 다 소모한 상태에서 적 예비대의 강력한 역습을 받으면 모든 전과는 거짓말처럼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이 같은 사정은 적군도 마찬가지였다. 잘 방어된 고지 정상의 적 진지를 향해 서로 돌격해야 하는 매우 힘들고도 위험한 전투, 바로 그런 고지전이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한반도의 허리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방어전이라고 해도 쉬울 리가 없었다. 중공군은 미군과 국군이 방어하고 있는 정면 폭 1㎞ 지역을 돌파하기 위해 최대 100~120문의 야포와 박격포를 집중했다. 이 중 42~56문을 아군의 진지 일대를 타격하는 데 사용하고, 24문 정도를 통로 개척, 16문을 진지 내 토치카를 집중공격하는 데 할애했다. 대포병 사격과 박격포 제압을 위해서도 별도로 16문 정도를 할당했다.

 미군도 1951년 피의 능선 전투 과정에서 적 정면 4㎞에 최대 200문의 포병 화력을 집중한 사례도 있었다. 좁은 지역에 이 정도로 엄청나게 화력을 집중시킨 사례는 제1ㆍ2차 세계대전에서도 쉽게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고지를 사수해야 하는 병력들은 이 같은 엄청난 포병 화력을 견뎌낸 후 몇 차례나 반복되는 적 보병들의 돌격에 맞서야 했다.

 휴전협상으로 전쟁을 종결시킨다는 데 미중 양 강대국의 입장이 사실상 일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같은 고지전의 양상 때문에 최전선 전투는 여전히 치열했다.

 공산군 땅굴 거미줄처럼 연결

 고지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요소 중에 하나는 공산군 측의 동굴진지, 혹은 갱도진지였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우세에 견뎌내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진지로는 부족했다. 공산군은 전 전선에 걸쳐 땅굴을 파고들었다. 소대ㆍ중대ㆍ대대 병력이 들어갈 수 있는 갱도와 이와 연결된 참호ㆍ교통호가 서해바다로부터 동해바다로까지 이어졌다.

 갱도진지의 형태는 팔(八)자형, 정(丁)자형, 말발굽형, 방사형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병력이 먹고 잘 수 있는 공간, 기관총을 쏠 수 있는 공간, 유사시 병력이 탈출할 수 있는 보조 출입구 등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었다. 심지어 갱도 내에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시설도 설치했다.

 아군의 155㎜ 곡사포는 최대 3.6m 깊이의 흙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적은 이 같은 아군 화력을 감안해 갱도진지의 천장 높이에 여유를 두었다. 또한 3~5m 정도 땅을 판 이후에는 90도로 방향을 전환해 아군 포병의 화력으로부터 갱도 내부를 보호하려 했다.

 적의 갱도진지는 기본적으로 고지 정상 부근에 설치됐지만 고지와 고지 사이의 계곡으로 아군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지점에는 산기슭에도 소규모 갱도진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여기에는 경기관총과 무반동총, 로켓발사기 등으로 무장한 병력이 배치돼 아군이 적의 고지를 우회해 측면이나 후방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았다.

 이처럼 철저하게 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은 중공군이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에 대비하려 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동굴진지를 기반으로 한 방어 시스템을 ‘갱도를 기반으로 한 지탱점식 방어체계’라고 불렀고, 그 기본 개념 자체는 북한군으로도 전수돼 북한군 방어체계의 뼈대를 이루기도 했다.

 공산군 측의 반영구적 갱도진지에 비해 아군의 전방 진지는 상대적으로 임시적인 시설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미국은 기동력과 화력을 중시했을 뿐 전반적으로 야전 축성 특히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군대였고, 그 같은 미군의 특성은 한국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찰전이 반복된 이유

 피차 더 이상 상대방의 고지를 점령할 수 없을 만큼 방어태세가 굳어져 고지 점령ㆍ방어전이 벌어지지 않는 지역이라고 해도 전선의 상황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대규모 공세 작전을 포기한 상태에서 고지에 구축해 놓은 진지에서 안주해 아군의 전투 기세가 약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전투정신이 왕성한 전형적인 야전 군인이었던 밴플리트 장군은 전선 바로 북쪽의 북한군이나 중공군 진지를 향해 소규모 아군 정찰대를 침투시켜 적 포로를 잡아오도록 했다. 이 같은 소규모 작전을 통해 아군의 전투감각과 야전성을 유지하고 포로를 통해 적의 정보를 얻을 수 있으므로 전투효과만으로 보자면 1석2조나 다름 없었다. 1951년 12월 기준으로 아군이 실시한 정찰 횟수는 247회에 달했다.

 적도 아군과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같은 방식으로 아군 진지에 침투했다. 적의 정찰대는 보통 소대와 중대급이었으나 드물게는 대대급 정찰대를 침투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정찰전이 빈번하게 벌어져 아군의 경우 연대급 부대에서 매일 밤 최소한 1개 조의 정찰대를 투입하기도 했다.

 이처럼 양측 침투작전이 일상화되자 적의 정찰대를 잡기 위한 매복조를 고지 주변의 길목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고지 주변 길목에 적 정찰대의 침투를 막기 위한 철조망, 조명지뢰, 부비트랩을 설치하기도 했다. 결국 포로 획득을 목적으로 한 소규모 정찰전도 마치 고지전처럼 서로 상대방의 수를 훤하게 읽고 있어 인명 손실은 피할 수 없는 형태가 돼 버렸다. 그럼에도 한번 시작한 소규모 정찰전은 관행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1951년 하반기 전투
방어선 안정화 목표 `진군가'는 계속됐다
6ㆍ25전쟁 고지전 기간 중 미 2사단 포병이 곡사포로 북측 지역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하고 있다.               자료사진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처음으로 시작됐을 무렵,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평양∼원산 선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공격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이 작전은 동해안 원산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해 적을 양면에서 포위하고 캔자스 선과 와이오밍 선에 배치된 아군을 일제히 진격시켜 서부지역은 평양, 동부지역은 원산까지 밀어붙인다는 야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잠정적으로 1951년 9월 1일 실시하는 것으로 정해진 이 작전 계획의 이름은 ‘제압작전계획(Plan Overwhelming)’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휴전회담이 부진해 현 전선에서의 방어가 아니라 공격작전으로 상황이 변동되거나, 적이 북으로 철수하는 등 전략 환경이 급변할 경우 이 작전이 실행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의 상급자인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이 작전을 실제로 실행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미국 국가 수뇌부가 휴전으로 전쟁을 종결하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 같은 작전을 실제로 감행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 제한목표 공격전략

 결국 밴플리트 장군은 현 방어선에서 방어에 취약한 지점 주변에서 제한적인 공격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 같은 공격으로 아군의 공격 기세를 유지하면서 적에게는 혼란을 줄 수도 있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우선 중동부전선에서 복잡하게 ‘W자’형으로 형성된 전선을 일직선으로 정리하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서는 펀치 볼(Punch Bowl:해안분지) 북쪽 일대의 고지군을 점령해야 했다. 또한 그 오른쪽 지역 동부전선에서도 강원 고성군 남강까지 아군이 확보하자는 것이 밴플리트의 생각이었다.

 중동부전선에서 가장 큰 관심사항은 펀치 볼 일대의 확보였지만, 이곳은 단 한 번의 작전으로 확보할 수는 없었다. 아군은 1951년 8월 펀치 볼을 확보하기 위한 전 단계의 작전으로 크리퍼 작전(Operation Creeper)을 감행했다.

 크리퍼 작전의 원래 목표지점인 펀치 볼 동쪽 지역의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펀치 볼 서남쪽 피의 능선 일대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단계에서 미 8군은 새로운 작전을 계획했다. 탈론 작전(Operation Talons)으로 이름 붙여진 이 작전은 1951년 9월 5일 원산에 대한 상륙작전과 함께 동해안을 따라 기갑부대가 북진하고, 동시에 미 10군단이 펀치 볼을 향해 북진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제압작전계획에 반대한 것과 같은 이유로 탈론작전도 거부했다. 결국 밴플리트 장군은 탈론 작전에서 원산 상륙 부분을 제외한 후 이를 아파치 작전(Operation Apachi)으로 새롭게 명명했다.

 ◆ 피의 능선

 막상 예정된 작전 개시일인 1951년 9월 5일이 되자 밴플리트 장군은 아파치 작전마저 자진 취소했다. 피의 능선을 비롯해 펀치 볼 서남쪽 일대에서 벌어지는 격전이 문제였다. 공산군은 아군의 접근로에 지뢰를 집중 매설해 아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또한 아군은 처음으로 마주한 적의 본격적인 갱도진지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군 포병의 맹렬한 공격 준비 사격이 가해질 때 적은 갱도진지 안으로 숨어 버렸다. 갱도진지 자체는 고지 북쪽의 후사면까지 연결돼 아군의 포병 사격으로는 좀처럼 적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없었다. 아군 포병의 사격이 멈추면 갱도에서 나와 아군에게 기관총 사격과 수류탄 세례를 퍼부었다.

 아군은 혈투 끝에 남쪽 고지 중 일부를 점령했으나 연결되는 고지에서 북한군은 여전히 저항을 계속했다. 산 정상은 아군과 적의 시체로 뒤덮였다. 종군취재 중이던 미국 기자가 이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피의 능선(Bloody Ridge)’이라고 탄식을 뱉었다.

 1951년 9월 5일 아군은 최종적으로 피의 능선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2000여 명을 훌쩍 넘는 국군과 미군의 전사장자가 문제였다. 물론 공산군 측은 이보다 훨씬 많은 전투원이 전사 혹은 부상했으나, 여론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공산군 측에 비해 아군은 사정이 달랐다. 언론 보도와 사회 여론의 향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자유진영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천 단위가 넘는 사상자를 설명하기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단장의 능선

 밴플리트 장군이 기획한 아파치 작전은 군사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그 같은 적극적인 작전은 어떻게든 대량의 인명 피해를 피할 수가 없었다. 피의 능선에서 고지전의 어려움을 절감한 밴플리트 장군은 결국 아파치 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9월 중 동부전선에서 제한목표 공격(Limited Objective Attack)을 광범위하게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을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요청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 같은 미 8군의 계획을 큰 틀에서 승인했다.

 이에 따라 펀치 볼을 중심으로 문등리ㆍ가칠봉ㆍ백석산 등 중동부전선과 동부전선 최전방 일대에서 9월부터 10월 초순까지 격전이 이어졌다. 특히 미 2사단은 강원도 양구와 인제의 중간지역인 단장의 능선 일대에서 피의 능선 이상의 혹독한 전투를 치렀다.

 특히 미2사단은 작전 초반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은 끝에 제한적인 공격으로는 목표를 탈취할 수 없다고 판단해 10월 초부터 3개 연대를 동원한 대대적인 공격을 펼치는 것으로 작전방침을 변경했다. 결국 1951년 10월 23일 미 2사단은 3700여 명에 달하는 아군 희생자를 낸 끝에 마침내 단장의 능선을 장악, 중동부전선 일대를 직선에 가깝게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비슷한 시기 동부전선의 국군 1군단도 월비산ㆍ고성ㆍ남강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전선을 북상,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확보했다.

◆ 금성·역곡천의 혈전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이 중동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좀 더 안정적인 방어선을 확보할 동안, 그보다 서쪽의 철원 금성 일대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당시 미 9군단과 예하 미군ㆍ국군은 당시 방어선에서 12km 정도 북상해 금성천 주변 분지를 장악하려 했다. 아군은 이 정도 전선을 북상시킬 경우 적의 요충지인 오성산을 견제하면서 철의 삼각지대에 대한 통제권을 아군 측이 좀 더 강하게 장악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작전에 투입된 미 24사단과 아군 2ㆍ6사단은 성공적으로 공격 임무를 완수, 1951년 10월 21일 무렵 목표선을 안전하게 확보했다.

 이와 발맞춰 서부전선의 미 1군단도 공격을 개시했다. 10월 3일 개시된 코만도 작전(Operation Commando)은 서부전선을 10km 북상시켜 임진강 북쪽의 고왕산∼마량산을 지나 한탄강과 철원 남대천이 합류하는 지점까지 확보하는 것이 작전 목표였다.
 이렇게 전선을 북상시킬 경우 아군 방어선을 좀 더 안정시킬 수 있고, 적의 방해 없이 연천∼철원, 철원∼김화로 이어지는 병참선을 아군이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다. 미 1군단 예하 국군과 미군, 영국군, 캐나다군, 터키군, 태국군, 그리스군은 격전 끝에 10월 19일 무렵 목표지점을 확보했다.

 하지만 중공군은 아군에게 잃은 진지를 탈환하기 위해 계속 반격을 감행해 왔고, 특히 마량산 일대에서는 다섯 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격전이 벌어졌다. 중공군은 특히 11월 23일 아군의 진지교대를 이용해 대대적 반격을 가해 고왕산도 잃을 위기에 처했으나 캐나다군의 분투로 고왕산은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당시 전선 상황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서부전선에서 고왕산은 아군 측이, 마량산은 적군이 관할하는 지역이 됐다.

 이처럼 아군은 1951년 하반기 동안 전선을 안정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목표를 차례로 공략, 서쪽에서부터 고왕산∼금성 남쪽∼펀치 볼∼고성군 남강 일대로 이어지는 요충지를 차례대로 확보했다. 오늘날 우리 국군이 철통같은 경계에 임하고 있는 전방 방어선은 1951년부터 혈전 끝에 그렇게 하나둘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52년 전반기 전투
밴플리트 공세작전 계획 연이어 무산
국군(철모 쓴 병사) 장병들이 인민군 포로들을 후방으로 압송하기에 앞서 몸을 수색하고 있다.            자료사진

 1951년 하반기에 국군과 유엔군이 방어에 유리한 전방 주요 지형을 장악한 것은 휴전회담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산군 측은 38선을 경계로 휴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북의 주요 방어 요지를 장악하자, 1951년 11월 27일 기준 현 접촉선을 경계로 휴전을 하는 데 잠정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접촉선은 임진강 하구에서 시작해 판문점 서쪽, 삭녕 북쪽, 철원 서북쪽, 김화 북쪽, 금성 남쪽, 어운리, 문등리를 이어 강원도 고성까지 총 237㎞에 달했다. 현 접촉선을 토대로 휴전하기로 잠정 합의가 이뤄지자 전선 상황은 그 이전보다 다소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우선 휴전 회담이 점차 구체화되는 마당에 양쪽 모두 대규모 작전을 자제할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아군 측이 방어에 유리한 지역을 확보했고, 적들도 그 북쪽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한 상태여서 양쪽 모두 공격작전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전쟁 상황에 잠시나마 숨고르기에 들어간 상황을 이용해 공산군 측은 전방 진지 구축에 전력했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1952년까지 중공군은 갱도진지 7789개 198.7㎞를 구축했으며, 엄체호가 75만 개, 교통호 길이는 3420㎞에 달했다. 북한군도 총길이 88.3㎞에 달하는 갱도진지 1730개를 건설하고, 구축한 교통호 길이도 260㎞나 됐다.

 또한 아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해안지대에도 지하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또한 해안 내륙지역에도 수많은 진지를 구축해 일단 아군이 상륙작전에 성공해도 내륙으로 진출하는 것을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도록 했다.


 ▶계속 무산된 공세 작전

 이처럼 전체적으로 소강 상황에 직면한 가운데도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좀 더 능동작전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휴전회담이 확실하게 성립하기 전까지는 전투가 실질적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진행 중인 휴전회담의 큰 틀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용한 전력을 동원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이 군의 기본 임무라고 생각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 같은 판단에 따라 빅 스틱 작전(Big Stick Operation)을 구상했다. 1952년 4월 5일 감행하기로 한 이 작전은 서부전선의 미 1군단 방어선을 현재 임진강 북안 일대에서 예성강 방면으로 북상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동시에 미 해병1사단을 동원해 동해에서 양공을 목적으로 한 상륙작전도 계획했다. 하지만 빅 스틱 작전에서 최대 1만1000명 정도의 아군 손실이 예상될 뿐만 아니라 1951년 하반기 이후 미 8군이 수립했던 공세 계획을 유엔군사령부가 대부분 승인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빅 스틱 작전이 무산될 경우에 대비해 상륙작전을 제외한 홈 커밍 작전(Home Coming)을 예비 작전으로 마련해 두었다. 하지만 이 두 작전계획은 모두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의 거부로 실행되지 못했다.

 
 ▶52년 전반기는 소강 상태

 이처럼 야심차게 수립했던 공세 작전이 연이어 무산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밴플리트 장군은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작전을 구상했다. 클램 업 작전(Clam up Operation)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작전은 아군이 전선에서 일제히 소극적이고 철수하는 것처럼 가장한 다음, 적이 아군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할 때 이를 포위 섬멸하거나 포로를 획득하는 일종의 유인작전이었다. 하지만 클램 업 작전도 의도했던 만큼의 두드러진 전과는 거두지 못한 상태로 종결됐다.

 이처럼 양측의 작전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사상자 수도 두드러지게 줄어들었다. 유엔군사령부가 추정한 적의 사상자는 1951년 10월 8만, 11월에 5만, 12월에 2만으로 줄어들었다. 1952년에 접어들자 적의 추정 사상자는 더욱 급감해 매달 1만1000명~1만3000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아군의 피해도 1951년 10월에 2만, 11월에 1만1000명으로 줄어들었으며 12월부터는 월 3000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그 이후 2월부터 4월까지는 2500명 수준으로 머물렀다.

 
 ▶서남부지역 공비 무력화

 이처럼 전선 상황에 약간이나마 여유가 생기자 아군은 후방에서 활동 중인 적 무장공비를 섬멸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로를 잃은 적 퇴잔병과 토착 좌익으로 구성된 무장공비들은 아군의 후방 병참선을 방해하거나 지역 관공서를 습격하고, 주민들로부터 생필품을 강탈하고 양민을 납치했다.

 우리 군은 1950년 10월부터 1951년 5월까지 2사단ㆍ8사단ㆍ11사단 등 3개 사단을 투입한 1차 소탕작전으로 상당수 공비를 격멸했으나 1951년 말 이후에도 지리산을 중심으로 일부 공비들이 잔존해 있었다. 마침 1951년 11월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군은 백선엽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백야전전투사령부를 설치해 수도사단과 8사단, 서남지구전투사령부, 경찰 등의 전력으로 공비를 토벌하도록 했다.

 1951년 12월 초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백야전전투사령부는 지리산을 포위한 후 전면공격을 감행하는 등 대대적인 작전으로 공비 1700여 명을 사살하고, 1700여 명을 생포하는 등 적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국군은 12월 중순부터는 운장산ㆍ장안산ㆍ회문산ㆍ장군산 등 지리산 주변의 공비 근거지도 공격해 1952년 2월까지 공격을 이어갔다.

 1952년 2월 초 백야전전투사령부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전방으로 이동해 재창설되는 국군 군단의 모체 역할을 했다. 후방에 잔류한 수도사단과 서남지구전투사령부는 3월까지 잔존 공비 토벌을 계속했다. 작전이 마무리될 때까지 사살ㆍ포로ㆍ투항을 포함해 아군이 거둔 전과는 만 단위가 넘었으며 노획무기도 3000정이 넘었다.

 
 ▶손발 묶인 밴플리트 장군

 공비 토벌로 후방 상황이 안정되던 1952년 4월 1일 밴플리트 장군은 또다시 2건의 공세작전을 구상했다. 밴플리트 장군이 구상한 촙 스틱 6 작전(chop stick 6 operation)은 미 9군단 정면에서 국군 1개 사단을 동원해 북한의 강원도 평강까지 진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또다른 공세 구상을 담고 있는 촙 스틱 16 작전(chop stick 16 operation)은 강원도 동해안에서 국군 1군단을 진격시켜 고성군의 남강 하구를 장악하는 것이 작전 목표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반대와 수정 의견을 제시했다. 촙 스틱 6작전은 작전이 성공해도 방어에 유리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고, 촙 스틱 16작전은 국군 단독작전으로 한정할 경우에만 작전을 승인한다고 밝혔다. 밴플리트 장군은 결국 촙 스틱 16 작전만 추진하려 했으나 1952년 4월 말 휴전회담 분위기가 호전되자 작전 속행을 포기했다.

 1952년 6월 10일 밴플리트 장군은 평강으로 진격해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대를 완전 장악하는 작전을 재차 구상했다. 그러나 그 역시 리지웨이 장군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처럼 1951년 하반기부터 1952년 상반기까지 아군 지상군의 작전은 휴전회담이라는 정치적 환경 때문에 번번이 제한을 받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공산 측인 임진강 지류 사천강을 비롯해 곳곳에서 제한적인 공격을 감행해 왔다. 적의 공격 목표는 아군과 유사하게 방어진지 확보에 유리한 최전방 전초 진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공산 측은 군사적인 공격과 함께 선전 효과를 노린 사건을 여러 방식으로 일으켰다.

 1952년 5월 아군 후방에 위치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 포로들이 수용소장 돗드 미 육군준장을 납치하고, 정치적 요구 사항을 제시하는 등 대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미군이 세균전을 감행한다고 강변하면서 엉터리 증거물을 제시하고 사회주의권 관변 기자들을 초청해 연이어 보도했다. 이 같은 행동은 국제 여론을 공산군 측에 유리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공산군 측이 꾸민 치밀한 심리전이었다.   

1952년 후반기 작전
백마고지서 날마다 주인 바뀌는 대격전

 

6ㆍ25 전쟁 당시 국군 포병의 화력지원 장면을 재현한 전쟁기념관의 디오라마. 백마고지에서 아군 포병은 20만4000발에
 달하는 구경 105·155㎜ 포탄을 집중 사격해 보병의 작전을 지원했다. 자료사진

1952년 5월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겸 극동군사령관 후임으로 마크 클라크 육군 대장이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클라크 대장이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1952년 6월 말 판문점의 휴전협상이 일시적으로 결렬되자 그 파장은 전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1952년 상반기 동안 서로 적극적 작전을 자제하면서 한때 소강 상태에 빠졌던 전선은 이해 여름부터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처럼 전쟁 상황이 다시 격화되는 상황에서 클라크 장군은 맥아더 원수, 리지웨이 대장 등 전임자들이 겪었던 것과 비슷한 딜레마에 처했다. 휴전 협상이 시작된 이후 미국과 유엔참전국 수뇌부들은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작전을 희망하지 않았다. 결국 현재의 전선을 방어하면서 휴전협정 체결을 기다리는 것이 클라크 장군에게 주어진 실질적 임무였다.

 ◆ 클라크의 고민

 클라크는 이 같은 제약 속에서도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우선 항공전력을 동원해 적의 수풍댐의 수력발전소를 공격하는 방안이 있었다. 수력 발전소를 폭격하면 만주 지역의 중국 군수공업에 공급되는 전력을 차단할 수 있었다.

 1951년 7월 대폭격 이후 폭격을 하지 않던 북한의 평양을 폭격하는 것도 대안이었다. 평양에서 개성에 이르는 적의 보급선을 공격하는 것도 하나의 카드였다. 마지막으로 북한 전 지역의 소규모 군사 표적을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방법은 적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휴전협상에 나오게 압력을 가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같은 방안들은 하나같이 미 공군이나 해군의 항공전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는 점이다. 클라크는 고민 끝에 한국인 반공 포로 석방, 회담 중단 선언, 한국 육군의 전력 강화, 대만군 투입 등 네 가지 카드까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들 카드는 정치적으로 민감해 본국의 승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미국의 국가 수뇌부는 한국 육군의 전력 강화 방안만 뒤늦게 허용했을 뿐, 나머지 방안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결국 클라크가 바로 쓸 수 있는 카드는 공중전력을 동원한 작전뿐이었다. 마침 미국은 1952년 5월까지 적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데 항공전력을 집중했으나 효과가 제한적이어서 방향 전환을 모색 중이었다. 클라크가 새로운 작전 방안을 들고 나오면서 미국의 항공전력의 주 운용 목표를 적 보급선 차단에서 적 고정 표적에 대한 직접 파괴로 바꾼 셈이었다.

 1952년 6월 19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수풍댐을 공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미 합참은 7월 3일 평양 시내에 위치한 군사표적에 대한 폭격 재개도 승인했다. 이처럼 1952년 6월부터 시작된 새로운 방식의 항공 폭격은 9월까지 계속됐다.

 ◆ 중국의 대응

 이 같은 미국의 활발한 항공 폭격에 대항해 중국은 1952년 10월 신형 MiG-15 제트 전투기를 한반도 작전에 투입했다. 또한 지상군이 운용하는 각종 곡사포ㆍ산포 등 포병 전력을 강화했다. 1951년 7월부터 9월까지 약 2개월 동안 중국군의 곡사포 수량은 1141문에서 1493문으로 늘어났다.

 1951년 하반기 이후 계속해 오던 전방 동굴 진지 공사도 계속해 방어 능력도 높아졌다. 심지어 전방 동굴진지에서 3개월 분량의 식량을 비축한 사례도 있어 보급 문제로 7일 이상 연속 작전이 불가능했던 1950~51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이 맹렬하게 항공 폭격을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력을 보강한 중국은 1952년 9월부터 국지적인 공세 작전을 재개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1952년 9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 전선의 특정한 지점 몇몇 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물론 1950년과 1951년 상반기처럼 전선 전체를 뒤흔드는 격렬한 열전은 아니었지만, 특정한 고지를 놓고 벌어지는 전투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 백마고지의 가치

 이 시기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철원ㆍ김화ㆍ평강을 연결하는 철의 삼각지대 일대였다. 그중에서 1952년 10월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백마고지와 저격능선, 삼각고지였다.

 백마고지는 강원 철원군 중심지. 9사단의 방어 정면은 왼쪽으로 백마고지부터 오른쪽으로 중강리까지 약 11km였으며, 백마고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야지역이었다.

 백마고지는 철의 삼각지대 전체 지형에서 본다면 그렇게 높지도 않고, 제일 요충지라고 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군이 장악한 곳 중에서는 관측과 방어에 유리한 곳이었다. 만약 백마고지를 잃는다면 아군이 평야지대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상황이 되면 3번 국도를 이용할 수 없게 돼 병참면에서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같은 백마고지의 가치를 알고 있던 중공군은 1952년 10월 6일 아침 마침내 공격을 개시했다.

적은 국군 9사단 정면에 대대적인 포격을 한 데 이어 작전 지역 전방의 봉래호 둑을 파괴해 아군 후방의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어 적 38군 114사단 예하부대가 저녁 7시 9사단 30연대가 방어하고 있던 백마고지 일대를 공격했다. 다행스럽게도 아군은 중공군 공격이 예상된다는 첩보를 사전에 입수한 터라 평소보다 방어 태세를 강화시킨 상태였다. 그 덕에 연대는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시켰다.

 ◆ 열흘간의 혈전

 하지만 적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7일 아침 적이 2차 공격을 가해 온 데 이어 저녁에 적 2개 대대가 세 번째로 백마고지를 공격해 왔다. 결국 30연대는 고지에서 일시 철수했다. 그러나 9사단 예비대였던 28연대가 역습에 나서 8일 새벽 2시40분쯤 탈환했다.

 10월 8일 새벽 적은 1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해 공격을 재개했다. 불행하게도 우군 항공기의 오폭 사건까지 일어나면서 이날 아침 8시10분 28연대는 백마고지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군은 포기하지 않고, 이날 오후 5시 9사단 28연대 3대대를 투입해 반격을 가했다. 항공지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아군은 해가 질 시간에 공격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았으나 9사단은 야간전투를 감수하고 과감하게 공격을 감행해 이날 밤 11시 무렵 백마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적들도 8일 밤 파상공격을 감행해 자정이 지난 시간 백마고지를 탈취했다. 아군은 적의 공격을 예상하고 손실이 적은 29연대를 예비대로 확보하고 있었다. 10월 9일 아군은 총 1만7700발에 달하는 막대한 포탄과 항공폭탄을 백마고지 정상에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사전에 준비해 놓은 29연대를 투입해 백마고지 정상을 향해 재공격을 감행했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나 아군은 9일 오전 백마고지 정상을 장악했다.

 하지만 다음날인 10일 하루 동안 무려 4~5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격전이 벌어졌다. 10일 이른 새벽 적은 재차 공격을 감행해 왔다. 29연대 1대대는 백병전까지 불사하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10일 새벽 3시 무렵 정상을 포기하고 9부 능선까지 물러나야 했다. 아군은 새벽 6시에 2대대의 증원을 받아 백마고지 정상을 재탈환했지만, 오전 8시에는 중공군이 다시 고지를 점령했다. 오후 1시쯤 아군 특공대가 고지 탈환에 성공했지만, 저녁 7시부터 다시 중공군의 반격으로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11일 밤 오후부터 적은 맹렬한 공격을 가해 저녁 8시쯤에는 백마고지를 점령했다. 아군은 이날밤 29연대를 투입해 격전을 벌이다 다음날인 12일 아침 그동안 전력을 보충한 30연대를 투입해 오후 1시 20분쯤 백마고지를 되찾았다. 그 뒤에 밀고 밀리는 치열한 근접전투를 치른 끝에 15일 고지를 탈환했다. 뒤이어 29연대가 395고지 북쪽까지 밀고 올라가 낙타능선 위의 전초진지까지 탈환함에 따라 열흘 동안 격렬하게 벌어졌던 백마고지 전투의 종지부를 찍었다.

 395고지를 기준으로 열흘여 동안 최소한 고지의 주인이 13번 이상이 바뀌고, 계산법에 따라서는 흔히 작전 중 총 24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하는 대혈전이었다.

아군은 9사단 예하 3개 연대를 투입해 3400여 명의 인명 손실을 당했지만, 중공군은 작전 기간 중 38군 소속 3개 사단 예하의 총 9개 연대 중 총 7개 연대를 투입해 약 1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고지전에서 아군이 거둔 가장 기억할 만한 승리 중 하나였다.  

상감령전투의 진실
한-중 서로 `승리한 전투'로 기억

지난 1월 19일 오바마 대통령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환영하기 위해 백악관에서 개최한 만찬에서 연주된 음악 하나가 논란이 된 일이 있다. 미국은 중국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랑랑 씨를 초대해 음악을 연주하도록 배려했는데, 그 랑랑 씨가 직접 선택한 곡이 바로 ‘나의 조국’이었다.

 ‘강대한 조국이여(這是强大的祖國)’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나의 조국’은 6ㆍ25전쟁을 다룬 1956년작 중국 전쟁 영화 ‘상감령(上甘嶺)’의 주제가로 사용되면서 유명해진 노래다. 결국 ‘나의 조국’이란 노래는 전쟁영화 상감령을 거쳐, 6ㆍ25전쟁 당시 미국과 중국이 맞서 싸운 상감령전투로 연결되는 셈이다. 당연히 행사 후 외교 무대에서 연주할 만한 성격의 곡이 맞느냐는 논란이 벌어지게 됐다.

중국 측의 상감령전투 선전 사진. 중국 측은 자신들이 대승했다고 선전하지만 과장된 측면이 많다.             자료사진

○ 상감령전투

 ‘나의 조국’이란 노래는 중국이 온 국력을 기울여 개최한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도 등장한 일이 있다. 그만큼 중국인에게 친숙한 노래이고, 그 노래만큼이나 상감령전투도 중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한국인들이 6ㆍ25전쟁이라면 춘천ㆍ다부동ㆍ낙동강ㆍ백마고지 전투나 인천상륙전을 떠올리고 미국인이라면 장진호 전투와 인천상륙전을 떠올린다면 중국인들은 예외없이 상감령전투를 기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은 6ㆍ25전쟁을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부른다. ‘미국에 대항해 북한(조선)을 도운 전쟁’이란 뜻이다. 중국은 6ㆍ25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것을 애써 무시하고 자신들이 기억하고 싶은 형태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중국 기준의 6ㆍ25전쟁 인식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상감령전투다. 중국은 1952년 하반기 미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상감령에서 의지와 끈기로 버텨내 결국 북한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관점에서 상감령전투는 흔했던 고지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중국이 북한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결정적 전투였다.

 중국군사과학원에서 출간한 항미원조전사는 상감령전투에 대해 ‘1952년 10월 14일에서 11월 25일까지 43일간의 전투’라며 ‘전투가 전역(戰役) 규모로 발전되었다’고 설명한다. 또 유엔군과 국군의 전투 참가 병력은 6만 명이라고 주장하면서 기간 중 190만 발의 포탄을 쐈다고 간주한다. 포병 화력 운용 밀집도에 관한 한 제2차 세계대전 수준을 넘는 격전이었다는 것.

 이에 비해 중국은 4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 포탄 40여 만 발을 소모했다고 소개하면서 ‘전에 없던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전과에 대해서는 유엔군과 국군 2만5000여 명을 살상 또는 포로로 잡은 데 비해 중공군 손실은 1만1500여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저격능선 전투

 냉전 종식 후 1991년부터 상감령전투에 대한 중국 측의 주장이 처음으로 한국에 전해졌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 상감령전투는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상감령이란 지명 자체부터 생소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상감령전투가 6ㆍ25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적 전투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 

 1990년 중반부터 관심을 갖고 상감령전투를 연구한 우리나라 전문가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중국에서 말하는 상감령전투는 바로 한국에서 말하는 저격능선 전투에 해당하는 전투였기 때문이다. 우리 군의 공식 전사들은 저격능선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했다고 간주해 왔다. 같은 전투를 놓고 양측이 모두 승리한 전투로 기억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생각해 왔던 저격능선 전투는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 남쪽에 있던 저녁능선에서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국군 2사단이 중공군 15군과 치열한 격전 끝에 아군이 승리한 전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일단 전투의 범위부터 분명히 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측이 말하는 상감령 전역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가 말하는 저격능선 전투와 삼각고지 전투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철원 오성산(1062고지)과 남대천 사이에 상감령과 하감령 등 2개의 고개가 있다. 두 고개 사이에 남북 방향으로 산줄기가 2㎞ 간격으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이 삼각고지(598고지)이고 동쪽에 있는 것이 538고지다. 그 538고지에서 북쪽으로 연결된 고지군이 바로 한국에서 저격능선, 미국에서 스나이퍼 리지(Sniper Ridge)라고 부르는 능선이다.

 ○ 진실은 무엇?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1952년 10월 초 소규모 공격으로 중공군의 기선을 제압할 생각으로 공격을 준비했다. 미 7사단은 삼각고지,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이 목표였다. 소규모 고지였기 때문에 큰 피해 없이 단기간에 공격이 끝나리란 것이 미 8군의 기대였다.

 하지만 실제 전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특히 미국 언론이 “큰 의미도 없는 전투에 많은 미군이 죽어가고 있다”고 보도하는 바람에 여론이 좋지 않았고, 결국 미 7사단은 작전 개시 12일 만에 삼각고지 탈환임무를 국군 2사단에 인계했다.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에 더해 삼각고지에서도 격전을 치렀으나 고지 전체를 완전히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아군은 11월 5일 삼각고지 작전을 중지하고 저격능선 방어에 주력하기로 했다. 즉 삼각고지에 관한 한 중공군 측이 승리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저격능선 전투의 경우 조금 더 복잡하다. 저격능선의 고지 중 A고지, 돌바위 고지는 최종적으로 국군 2사단이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Y 고지의 경우 중공군이 점령한 상태에서 전투가 끝났다. 즉 목표의 절반이라도 탈취한 아군의 승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 국군의 입장에서 저격능선 전투를 승리로 기억할 만한 뚜렷한 근거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기억 전쟁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따져 본다면 과연 누가 승리한 전투이고, 패배한 전투일까. 일단 중국 측 선전이 과장된 것은 분명하다.

중국은 삼강령전투에 참전한 유엔군과 국군이 6만 명이라고 주장했으나, 실제로 국군 2사단과 미 7사단의 병력 합계는 2만 명 내외 수준이었다. 즉 아군 병력은 중공군 전투 참가 병력 4만 명의 약 절반에 불과했다.

 당연히 중공군 측이 주장하는 전과 2만5000명도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된다.

삼각고지 전투에서 미군의 피해는 분명하지 않으나 당시 국군 참전자들은 “미군의 사상자가 3000명 수준”이라는 증언을 남긴 일이 있다. 이 지역 일대의 전투에서 국군이 입은 손실은 4800여 명 수준이었다.

 저격능선 전투에서 국군이 거둔 전과에 대해 우리는 1만4000여 명 수준으로 보고 있는데, 중국 측은 상감령전역 전체에서 약 1만1000여 명 내외의 손실이 있었다고 자인하고 있다. 즉 아군보다는 중공군의 인명 손실이 더 컸던 것이다.

이 밖에도 중국 측이 주장하는 이른바 ‘상감령전역 영웅’들의 전공도 과장됐다는 다수 연구자들의 평가다.

 다만 전문가들도 종합적인 작전 평가 측면에서는 미묘한 구석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우리나라의 한 연구자는 “아군은 저격능선 전투로 전초 진지 하나를 탈취하는 전과를 거뒀으나, 중부전선에서 주도권을 탈취하겠다는 유엔군 차원의 작전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한 일이 있다.

 중국 측이 상감령전투에 대해 그토록 높은 평가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약간 다른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군사편찬연구소의 남정옥 박사는 “중국은 오성산을 반드시 확보해야 중부전선을 안정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중국은 미국의 원래 목표가 저격능선과 삼각고지를 거쳐 오성산을 탈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오성산을 지켜냈으니 스스로 대승리로 평가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요약하자면 중국이 주장하는 전과는 터무니 없는 과장이 분명하고, 국군 2사단의 저격능선 전투는 전술적 승리로 평가할 여지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작전적으로 평가해 보면 누가 승자인지 획일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미묘하고 애매한 구석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총성이 오가는 전투는 멈췄지만 머릿속 기억과 평가의 전쟁은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1953년의 주요 상황
美 휴전 직전 `한미 상호방위조약' 보장

1952년 12월 전선 상황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중공군은 그 해 11월 저격능선과 삼각고지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를 놓고 상감령 전역의 대승이라고 선전했지만 고지 하나, 능선 하나를 두고 1만 명 이상의 전사상자가 발생하는 식의 전투는 중공군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더구나 백마고지를 비롯해 중공군이 먼저 공격을 감행한 전투의 성적표도 초라했다. 중공군만큼 많은 인명을 손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군과 미군의 입장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1952년 10월 국군 9사단은 중공군의 거센 공격을 분쇄하고 백마고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같은 달 국군과 미군은 저격능선과 삼각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지만 11월 저격능선의 절반 가량을 점령한 상태에서 작전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백마고지 전투와 저격 능선 전투 같은 고지전ㆍ진지전의 전투양상은 얻는 것에 비해 인명 손실이 너무 컸다. 서로 철저하게 대비해 놓고 방어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은 상대방 진지 정면에 뛰어드는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한 작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6·25전쟁이 끝난 1954년 유엔군 소속 참전용사들을 초청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 대통령은 휴전협상이
 진행될 때 휴전협상보다는 미국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집중했다. 자료사진

 ○ 외부적 요인

 결국 전선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국지적으로 전초진지를 놓고 여전히 전투가 벌어졌지만 적의 방어선을 깊숙이 뚫고 들어가는 식의 대규모 작전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1953년에 접어들면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전쟁의 흐름을 좌우하는 것은 개별 전투가 아니라 외부의 국제 정치적 요인이었다.

 미국에서는 새롭게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후보자 신분으로 “한국전쟁 조기 종결”을 강도 높게 주문하면서 종전 압력이 더욱 높아졌다. 1953년 2월 2일 신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중국·대만 사이에서 미국이 취하던 모호한 중립정책을 포기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직설적인 언급은 아니었으나 이 같은 아이젠하워의 입장 표명은 중국에 압력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6·25전쟁의 향방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3월 5일 소련의 조세프 스탈린 수상이 사망한 것이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함께 사실상 6·25전쟁을 시작한 주모자 중의 한 명이었다. 전쟁의 주모자가 사라진 것은 전쟁의 조기 종결 가능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소련 정부는 3월 19일 중국과 북한에 “전쟁의 종결은 세계 각국은 물론 중국과 북한 인민의 이해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통보했다. 전쟁을 가급적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 반공포로 석방

 휴전협상의 진행 속도는 여전히 지지부진했으나 1953년 4월 부상당한 포로를 서로 상대방에게 돌려보내는 상병포로송환이 시작됐다. 끝이 안 보이는 휴전 협상의 성사 가능성이 서서히 가시권 내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포로 송환이었다. 특히 반공포로가 협상의 걸림돌이었다.

 아군의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는 북한군 포로 중에 상당수는 38선 이남의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강제 징집된 사람들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에서 강제로 끌려가 북한군이 된 사람을 북한으로 돌려보낼 이유는 없었다. 북한 지역에서 북한군에 입대한 사람 중에 상당수도 공산 치하인 북한으로 돌아가길 꺼리는 반공주의자들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들 반공포로들을 공산 치하로 돌려보내는 것은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은 반공포로를 석방할 경우 이를 핑계로 북한과 중국이 억류하고 있는 미군이나 국군 포로를 송환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더구나 중국이나 북한이 무조건 송환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원하는 사람만 송환할 경우 휴전협상이 파탄나 전쟁이 더 길게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걱정했다.

 이처럼 관련 당사국의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헌병사령관에게 반공포로를 석방할 것을 지시했다. 원 사령관은 미군들이 알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준비를 진행한 끝에 6월 18일 이른 새벽 전격적으로 반공포로들을 석방했다.

 ○ 한미의 입장 차이

 미국은 이 같은 반공포로 석방이 사실상 휴전 협상을 방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 ‘어정쩡한 상태’로 봉합되는 것을 우려했다. 사실 이 대통령은 전후 한국의 안보에 대한 어떠한 보장도 없고, 불법 남침으로 전쟁을 먼저 시작한 북한에 어떠한 구체적도 응징도 없는 휴전에 반대해 왔다. 이 대통령이 보기에 휴전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여기에 반공포로를 북한에 송환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는 개인의 소신이 더해져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반공포로 석방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한국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휴전협상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반공포로 석방은 윤리적 차원에서 당연한 일이었으나, 미국은 반공포로 석방이 가져올 휴전 협상 방해 내지 중단 가능성에 관심을 집중했다. 더구나 미국은 한국군이 유엔군 지휘부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 석방에 개입한 것은 1950년 7월 이후 국군의 전작권을 미군에 이양하도록 한 양국 합의를 위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 문제는 휴전협상을 앞두고 한미 관계에는 균열의 징후가 보였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전부터 한국 정부의 강경한 입장에 우려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크 클라크 장군이 지휘하는 미 극동군사령부 겸 유엔군사령부 지휘부는 만약 한국 정부가 휴전에 반대해 한국군을 유엔군 지휘에서 벗어나 다시 독자적으로 지휘할 경우에 대비한 비밀계획까지 수립했다.

 일명 에버레디(Everready) 계획이라고 불린 이 비밀계획은 1953년 5월 22일 작성되어 워싱턴으로 보내졌다. 에버레디 계획에는 필요한 경우 유엔의 이름으로 군정을 실시한다거나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철수까지 포함한 매우 민감한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 대통령의 승부수

 이 대통령은 이미 1953년 6월 6일 미국에 휴전협상을 체결하려거든, 먼저 한국과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미국 같은 초강대국에 한국 같은 신생독립국이 먼저 군사동맹 체결을 요구하는 것은 통상적인 외교 상식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여기에 더해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두어 버린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미국 정부와 미군 지휘부는 격분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휴전 반대 데모를 찬성하는 등 더욱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이처럼 한미 간에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하자 미국은 최종 협상을 위해 로버트슨 미 국무부 차관보를 한국에 급파했다. 로버트슨 특사는 6월 24일 도쿄에 도착해 유엔군 지휘부와 의논을 마친 후 26일에는 이 대통령과 만나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미국이 한국에 경제지원을 계속하고 국군 20개 사단을 추가로 창설하는 방안을 계속 지원해 줄 것, 상호방위조약 체결 약속 등 4개 항의 요구를 내놓았다. 로버트슨 특사는 이 같은 이 대통령의 요구를 즉각 워싱턴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보고했다. 다음날인 27일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경제원조, 20개 사단 창설 지원 등을 약속하고 상호방위조약 체결의 경우 기꺼이 조약 체결을 위해 협상하겠지만 의회의 비준이 필요하므로 대통령 자격으로 조약 체결을 보증할 수 없다는 회신을 보냈다.

 이 같은 결단에 따라 한미 양국 모두를 위태롭게 했던 신뢰의 위기가 수습될 길이 열렸다. 그렇지만 양국 간 합의를 구체화하기 위한 협상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7월 12일에야 최종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이때는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전 불과 보름 전이었다.

 합의문의 첫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휴전 성립 후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한다. 이를 위해 미국 측은 국무장관 덜레스가 상원의원들이 조약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갖도록 설득한다.”

 이 대통령은 휴전 협상이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 현실주의자였다. 공산주의자들이 합의를 깰 경우 휴전협정은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는 휴전협상이 아니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더욱 중요하다는 객관적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결국 그것을 성취해내는 데 성공해 낸 것이다.

금성전투
무승부로 끝나가는 전선서 최후의 결전
1953년 7월 13일 전선에서는 돌발적인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인 철원과 화천 사이 중부전선에서 이날 밤부터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된 것. 한국과 미국 외교 당국이 7월 12일 휴전 후 양국 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방안에 최종 합의한 지 단 하루 만의 일이었다. 당시 아군은 중공군의 대공세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었으나, 막상 시작된 적의 공세 강도는 예상하던 것 이상으로 격렬했다. 유엔군 지상군을 지휘하고 있던 미8군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장군을 긴장시킬 정도로 사태는 급박하게 흘러갔다.

 ‘최종공세’ 혹은 ‘하계공세 3차 공격’으로도 불리는 적의 이 마지막 공격은 1951년 여름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규모와 강도를 갖고 있었다. 최종공세에 투입된 중공군의 규모는 무려 1개 병단(아군 기준 야전군), 5개 군(아군 기준 5개 군단)이나 됐다. 1951년 하반기부터 전선을 지배한 진지전이나 고지전이 아니라 마치 1951년 상반기까지 전투를 보는 듯한 적의 격렬한 야전군급 공세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공산군 포로들이 소독을 받고 있다. 중공군은 1953년 7월 13일 반공포로 석방에 불만을 품고
 철원~화천 일대에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자료사진

 ○달아오르는 금성 돌출부

 1953년 6월 10일 중공군은 ‘하계 2차 공격’을 통해 철원과 화천 북방의 국군 2군단을 공격했다. 이 같은 공격을 통해 휴전회담에 소극적이던 한국 정부의 태도를 바꾸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시켰다.

 체면을 중시하는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속성상 한국 정부의 반공포로 석방에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해올 것이란 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규모와 강도였다. 6월 20일 중공군 지휘관이었던 펑더화이는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에게 대규모 공세를 건의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승인하고 7월 13일부터 국군이 점령한 진지를 대상으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할 것을 지시했다. 한국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항해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휴전 이전 마지막 전투를 대승으로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1953년 5ㆍ6월 두 차례의 공격으로 철원 금성 주변 국군의 방어진지는 상당수가 손상된 상태였다. 여기에 이 지역의 국군은 전체 방어선에서 전방으로 돌출한 형태로 배치돼 있어 측면 공격에 취약했다. 중공군은 이 같은 약점을 파고들어 20병단 예하의 54ㆍ60ㆍ67ㆍ68군 등 4개 군에 21군을 추가, 총 5개 군으로 아군의 금성 돌출부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했다.

 공격 범위는 현 휴전선 이북에 위치한 김화군 근동면 아침리부터 화천군 간동면 간천리까지 폭 약 22㎞의 지역이었다. 철원 고암산과 봉화산 정면에선 중공군 67군 예하 사단들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밀고 들어가는 임무를 맡았다. 그 서쪽 아침리에서 68군 예하 3개 사단이 서북쪽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포위하고, 화천 간천리쪽의 60군이 동북쪽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포위하는 것이 큰 그림이었다. 이 같은 작전이 성공할 경우 국군 2군단 전체를 포위망에 넣겠다는 계산이었다.

 ○절정의 위기

 중공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파악한 미8군의 대응도 급박해졌다. 6월 26일 국군 5사단을 이 지역에 추가로 투입해 방어능력을 강화했다. 7월 11일에는 일본에 있던 미24사단을 다시 급하게 한국으로 복귀시켰다. 12일에는 미8군 예비로 있던 국군 11사단 9연대를 국군 2군단에 배속시켰다.

 이렇게 해서 국군 2군단 예하에는 서쪽부터 동쪽으로 6ㆍ8ㆍ3ㆍ5사단 등 4개 사단이 전방에 차례로 포진했다. 그 뒤로 화천 일대에 11사단이 예비로 대기 중이었다. 국군 2군단 서쪽으로 미9군단 작전통제하에 수도사단이, 2군단 동쪽으로는 미10군 작전통제하의 7사단이 포진했다.

 작전 초반 위기가 시작된 곳은 미9군단 통제하에 있던 수도사단 지역이었다. 상황은 초반부터 불길했다. 아군 복장으로 위장한 적 203사단 609연대 2대대는 14일 새벽 2시 아군 수도사단 예하 1연대의 지휘소를 급습해 지휘체계를 마비시켰다. 수도사단 26연대의 방어 상황도 위태로웠다.

 아군은 사단 예비대로 남아 있던 기갑연대에서 1개 대대씩을 차출해 1연대와 26연대의 돌파구를 봉쇄하려 했다. 하지만 역습방향, 예비대의 증원 지역을 놓고 여러 차례 계획을 변경하면서 아군의 대응 속도가 느려졌다. 설상가상으로 역습을 위해 기동 중이던 아군 예비대가 후방으로 침투한 중공군 609연대 2대대에 기습당해 연대장이 전사하고, 부사단장이 포로가 됐다.

 다른 지역에도 조금씩 돌파구가 형성돼 자칫하다간 국군 2군단 전체가 포위당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결국 아군은 7월 14일과 15일에 걸쳐 2군단 예하 부대들에 금성천 이남으로 전면 철수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대신 그 남쪽의 적근산과 백암산을 연결하는 고지군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

 ○위기 극복의 열쇠

 전반적인 전선 상황이 극히 위태로웠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아군 각급부대들은 1950년 말이나 1951년 상반기처럼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국군 6사단의 경우 중공군 공세 직전 예비대로 보유하고 있는 2연대를 교암산에 투입한 것이 아군 진지의 연쇄적 붕괴를 막는 데 기여했다. 특히 교암산 주진지에 배치돼 있던 6사단 2연대 2대대 6중대는 13일 밤 무려 6차례나 진내 사격을 요청하며 처절하게 분투하다 대부분 전사했다. 갑작스러운 아군 배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중공군 67군은 교암산에서 9시간 이상 공격이 지연되면서 방어선 후방 깊숙이 뚫고 들어오는 데 실패했다.

 탄약이 1인당 15발 정도만 남은 상태에서 적 후방에 홀로 대대 단위로 고립된 국군 3사단 22연대 2대대는 적 포위망을 뚫고 후방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철수작전 중 적 700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까지 거뒀다. 3사단 23연대 수색중대도 철수작전 중 도하하는 적 부대에 공격을 감행하는 등 소부대들의 적극적인 공세 행동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적지 않은 힘이 됐다. 이처럼 3사단 예하 부대의 선전으로 중공군 주공의 동쪽에서 아군을 포위하려 했던 60군의 시도는 실패했다.

 국군 8사단 21연대 3대대도 적 후방에 포위된 상태로 24시간이나 버티면서 아군과 다시 연결될 때까지 진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8사단 10연대 3대대의 9ㆍ11중대는 아군 주력부대가 철수하는 와중에도 오히려 적이 점령한 고지에 역습을 감행해 사단 주력의 철수를 보장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최초 위기가 시작됐던 수도사단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책임을 다한 장병들이 위기 극복에 공헌했다. 1연대 탄약장교 보좌관 정준영 소위는 아군 탄약운반 차량을 되찾기 위해 자원해서 적 점령지역으로 침투해 차량을 회수해 오는 기적적인 활약을 펼쳤다. 26연대 1대대 예하의 한 소대는 최후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후방에서 전투를 계속하다 소대장 이하 장병 전원이 전사한 가슴 아픈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승자와 패자

 국군 2군단은 이처럼 효과적인 철수를 통해 전력을 보존한 예하 국군 8사단과 11·5사단을 동원해 16일부터 반격에 나섰다. 여기에 수도사단을 대신해 투입된 미3사단이 합세했다. 아군은 적근산에서 백암산을 연결하는 선상에서 반격을 개시해 19일 무렵에는 금성천과 북한강 이남 지역 상당수를 회복했다. 애초 적의 공격으로 아군은 동서로 22㎞에 달하는 방어 정면에서 후방으로 최대 9㎞까지 후퇴한 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군의 반격작전으로 지역에 따라 1~6㎞까지 다시 전선을 끌어올린 가운데 전투가 종료됐다.

 결과적으로 아군은 금성전투가 시작되기 전 확보하고 있던 지역에서 3~8㎞ 뒤로 물러난 셈이었지만 어느 한쪽의 승패를 말하기에는 전체적인 전투양상이 무척 복잡했다. 중공군은 1개 야전군급 부대를 동원해 기세 좋게 공격해 왔으나 공격을 개시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오히려 아군의 군단급 역습에 되밀리는 신세가 됐다.

 참전병력으로 볼 때 중공군 병력이 아군보다 2~3배나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공군의 전과는 초라했다. 전사상자로 보자면 중공군이 오히려 패전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적의 최후 공세이자 6ㆍ25전쟁의 마지막 결전은 그렇게 승패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애매한 사실상의 무승부로 끝난 것이다.

전차전
“北 개전 당일 T-34 전차 120대 중 90대 포천에 집중"
6·25전쟁 전투사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간 흐름순으로만 살펴봐서는 부족할지 모른다. 6·25전쟁을 세부 분야별로 살펴봐야 한다면 가장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분야는 전차전 혹은 기갑전일 것이다.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남침’은 지금도 6·25전쟁의 대표적인 상징코드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당시 파괴된 북한군 전차. 아직 6·25전쟁 당시 북한군 전차 파괴 원인에 대한 통계가 엇갈릴 정도로 연구는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리델 하트의 평가

 영국의 군사평론가 리델 하트는 북한군의 기갑부대 운용 방식에 대해 혹독한 평가를 한 일이 있다. 리델 하트는 “만약 북한군이 기갑부대를 종심 깊게 돌파하고 전과 확대를 할 수 있도록 편성하고 독일의 구데리안 장군 방식으로 대담하게 운용했더라면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에서 병력을 증강하기 전에 한반도를 석권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북한은 기갑부대를 아군 후방에 깊숙이 돌파할 수 있도록 편성하지 못했고, 추가로 전과를 확대할 수 있도록 부대를 조직하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다. 또 기갑부대 운용도 소극적이어서 기동력을 활용한 극적인 전과를 거두지도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리델 하트는 개전 당시 북한의 대표적인 기갑부대인 105기갑여단이 전차·포병·보병 등 제 병과를 단일부대 내에 편성했던 것은 사실이나 규모가 너무 작았고, 지원 체제가 미흡해 장거리 작전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또 북한은 기갑여단의 전차연대를 전 전선에 걸친 수 개의 공격 축선에 분산해 결정적인 지점에 압도적으로 집중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한다. 결과적으로 북한군은 여기저기서 보병을 근접지원을 했을 뿐 전략적인 장거리 작전은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 리델 하트의 결론이다.
 

 ▶전차 집중운용 논란

 리델 하트의 이 같은 평가는 오늘날에도 각종 6·25전쟁사에 자주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냉전 이후 공개된 구 공산권 자료를 토대로 본다면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만한 대목도 적지 않다. 우선 북한이 전차 전력을 집중해 운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구 소련의 자료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개전 당일 출동시킨 T-34 전차 120대 중 90대를 포천에 집중시켰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거 러시아 측 자료가 공개되기 전에는 북한군 105전차여단 소속 203전차연대가 서울 서북쪽으로 공격한 1·6사단을 지원하고, 107전차연대가 동두천-의정부-서울 축선을 공격한 4사단을, 109전차연대가 포천-의정부-서울 축선을 공격한 3사단을 지원했다는 것이 한국 측의 인식이었다. 여기에 강원도에도 독립전차대대급이 투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리델 하트의 비판도 이 같은 추정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냉전 이후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강원도에는 단 1대의 전차도 출동시키지 않았다. 오직 Su-76 자주포만 투입시켰을 뿐이었다. 결국 최일선에서 운용하던 전차의 대부분은 서울 공격에 투입했는데 그것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에 집중 운용했다.

 즉, 임진강을 건너 서울 서북쪽으로 공격한 북한군 1사단에 전차대대 1개, 김포의 한강하구를 돌파한 6사단에 전차중대 1개, 동두천으로 공격해 온 4사단에 전차중대 2개, 포천으로 공격한 3사단에 전차대대 1개를 배속하고 나머지 105여단 전차부대 주력은 3사단을 후속해서 포천 축선으로 공격해 왔다.

 당시 북한 전차중대가 4대, 전차대대가 13대, 전차연대가 40대라는 견해에 따를 경우 전체 105여단 예하 120여 대의 전차 중 90여 대에 달하는 전차 대부분은 포천-의정부-서울 축선으로 투입됐음을 알 수 있다. 즉, 북한군이 전차를 집중 운용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서울 점령 이전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사실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종대로 진격한 전차

 이 때문에는 오히려 최근에는 북한이 개전 초반 포천 축선에 전차·자주포·야포 견인용 차량을 너무 많이 투입해 교통 체증이 발생해 공격이 지연됐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당시 한반도 도로 사정이 빈약해 어지간한 도로는 폭 4~5m 미만이었고, 그나마 비포장 도로가 많았다. 이런 도로에는 전차 2대가 나란히 전진하기도 힘들 수밖에 없다. 서울 동북지역의 도로에도 이 같은 협소 도로가 적지 않았다. 결국 이런 지역에서는 전차가 일선 종대, 즉 일렬로 나란히 열을 지어 전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동 시에는 일선 종대로 전진하더라도 전차부대가 보다 안정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려면 최소한 전투 순간에는 횡대 대형으로 변환해야 하지만 그조차 쉽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도로 좌우에 시가지가 있거나 아니면 도로와 높이 차이가 존재하는 경우도 많아 신속하게 도로 좌우 개활지로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대장들의 전투

 이 같은 지형 사정 때문에 미군들도 어지간한 지역에서는 하나의 공격 축선에 전차중대(미군 기준 20대) 1개나 2개 정도만을 운용했을 뿐이었다. 북한이 서울 점령 이후 전차를 지나치게 분산 운용한 것은 어쩌면 개전 초기에 포천 축선에서의 전차 집중 운용에 어려움을 겪은 결과 때문인지 모른다.

 이런 사정 때문에 미군 전차가 투입된 이후 북한군과 전차전이 벌어졌을 때도 기껏해야 소대(미군 기준 5대) 규모의 전차들이 교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6·25전쟁 당시 양측 전차끼리 교전한 전투사례 중 전차 대수가 분명하게 기록된 107회의 전투 중 양측이 5대 이하로 전투한 횟수가 95회로 전체 전차전의 89%에 달했다. 이 때문에 미군들 사이에선 ‘한반도에서의 전차전은 소대장들의 전투’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산과 구릉이 많은 특성 때문인지 전차끼리 마주쳤을 때 최초의 전차포탄이 발사되는 거리는 시계가 좋을 때도 평균 840m, 시계가 불량할 때는 620m 정도였다는 것이 전사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차전 유효 논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례만으로 한반도에서의 대규모 전차전 가능성을 부정하는 데 반대하는 전사연구가들도 많다.

 개전 이후 6월 28일 서울 점령까지 북한군의 1일 진격 속도는 평균 15마일 정도였으나, 서울 점령 이후 낙동강전투가 개시되는 50년 8월 4일까지의 진격 속도는 평균 5~7마일에 불과했다.

 이 같은 진격 속도는 제2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개전 초기 아르덴을 우회한 독일군 기계화부대가 대서양으로 진격한 속도인 1일 평균 39마일, 45년 8월 소련군이 일본 관동군을 공격한 속도인 평균 51마일, 67년 중동에서 벌어진 6일전쟁 당시 이스라엘 탈(Tal) 기갑사단의 평균 50마일보다 눈에 띄게 느린 것이다.

 이처럼 공격 속도가 늦어진 것은 단순히 지형만의 문제가 아니고 한반도 지형에 적합한 기갑부대 편제·전술·전략적 판단만 갖춰줬다면 북한군도 기갑부대의 적절한 운용을 통해 그들의 전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사연구가들도 많다. 전차 운용에 적합한 지형(Tank Country)는 단순히 지형으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차의 적은 전차?

 6·25전쟁 당시 전차전의 실상을 두고 논쟁이 진행되는 또다른 부분은 전과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6·25전쟁 당시 북한군 전차는 대부분 아군 항공기로 격파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의 자료를 기초로 60년대 일본의 전사연구자들이 정리한 통계에 따르면 적 전차 239대 중 102대가 항공기에 의해 격파됐다고 한다. 이 통계가 맞다면 전체 전차의 43%가 항공전력으로 격파된 것이다.

 아군 전차에 의해 격파된 적 전차는 39대에 불과해 17%에 해당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전후 54년 작전분석(OR) 차원에서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적 전차 256대 중 아군 전차포에 의해 파괴된 전차가 97대로 전체의 37.9%에 달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에 비해 항공기에 의한 파괴는 29대로 전체의 11.3%에 불과하다. 즉, 두 연구결과가 전혀 다른 것이다. 이처럼 가장 기초적인 통계에 대해서도 자료가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6·25전쟁 전차전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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