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비운의 장진군 피난민들 - 제1편-

구름위 2013. 1. 15. 16:28
728x90

- 끝내 실패한 심야의 피난 길-



남부여대 - 6.25 피난 중 가장 참혹한 피난 길과 불행한 탈출 좌절, 그리고 공산당의 잔인한 보복 마수가 이들 자유를 찾아 해병들을 따라 나섰던 장진군민 피난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남부여대(男負女戴) : 남자는 짐을 등에 지고, 여자는 짐을 머리에 인다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이나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을 이르는 말

사진에 여자들과 아이들이 보인다. 이들이 해병들도  버티기 힘든 장진호의 추위와 총탄을 마다하지 않고 따라 나선 결사의 의지에 눈물을 금치 못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사진은 길이 기억 해두어야 할
6.25 비극의 사진이다.


앞에 포스팅 했었던 글들 중에 '장진호 혈전장의 전투 경찰'이라는 글을 기억하실 분들이 많이 있을 듯하다.

그 글에서 말했듯이 나는 장진호 북방 유담리에서 미 해병들과 함께
치열한 열전을 치렀던 한국 전투 경찰의 정체를 찾아 여러 곳을 찾아 다녔었다.


동계 악천후 해상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만들어진 해군 방한복도 해병들이 장진호 고원의 추위를 버티기에 역부족이었는데 이런 엄청난 추위 속에 피난을 떠난 장진군민들의 옷차림과 비교 해보면 그들의 고통이 어떤지 이해가 가시리라.


방문한 곳들 중에는 장진군 군민회가 있었다. 방문한 날 여러 군민회 원로들이 회의를 하다가 나를 반겨주었고 과분하게도 점심까지 대접받았다. 그런데 장진군 원로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들었다.

한 분이 말했다.[알고 보니 이북 5도청의 장진군수를 역임했던 분이었다.]

“참 이상해요. 장진호 전투 중에 해병대에 협조한 주민도 많고 해병대를 따
라서 피난 나온 분도 많았다는데 실상 남한 생활 중에 피난 나온 분은 한 분도 만난 일이 없었어요.“

그 분 말씀이 지금 남한에 있는 장진군민들은
모두 6.25 동란 전에 월남한 주민들이거나 후손이라는 것이었다.



                                        장진호 전투도.
장진호반 좌측 최 북단에 유담리가 있고 좌안에 전멸하다 시피한 육군 31연대가 있던 후동리가 있다. 호수 남단에 사단 사령부가 있던 하갈우리와 그 남쪽에 고토리가 있다. 대규모의 피난민들의 행렬은 하갈우리부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도 장진호에서 철수하는 해병을 뒤따라
수 많은 장진군 피난민들이 남하했던 것은 사실이다.

살이 저미는 것 같은 영하 30도의 강추위 속에서
이들은 주변 언덕에서 쏴대는 중공군의 사격과 틈만 나면 피난민 속에 끼어들어 해병대에 접근하려는 중공군들과 벌어진 사격전 때문에 죽음의 고비를 수 없이 겪으면서도 자유를 향해 김 일성 치하 공산 세계 탈출을 시도했었던 사람들이다.

장진호의 피난민들은 장진군의 중심지였던 하갈우리 일대 주민들과
그 아래 고토리 주민들이다.

6.25동란 중에 북에서 남으로 탈출해 나온 수많은 피난민들이
겪은 간난신고는 필설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혈전을 겪으며 살길을 찾아 해병들을 따라 나섰던
장진호 주민들의 존재는 우리 한국 동란사에서 특기 할 가치가 있기에 추가 조사를 해서 여기 소개한다.

장진군민의 피난은 총탄과 포탄이 난무하는 전장의 한 복판을
죽어 가면서 탈출하는 결사적인 탈출이었다.

그런데 이들 피난민들은 미 해병 1 사단이 중공군 6만 명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위기의 순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진흥리에서부터 유담리까지 허리띠같이 길게 배치되었던
해병 부대 중에 전략적으로 제일 중요하면서도 빈약한 병력으로 방어 되던 허리띠 중간 지점의 하갈우리에 있던 해병 1 사단 사령부를 중공군의 공격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해내는데 필요한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해병들에게 항복한 중공군들.
중공군은 장진호 전역에서 미군의 화력보다 얼어 죽은 병사가 더 많다는 말이 나올만큼 이들의 상태는 필설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누비옷 빼놓고는 별다른 월동 준비가 없었던 60,000 명의 중공군을 장진호반으로 보내 떼죽음을 하게 한 모 택동과 9병단 사령원 송 시륜은 저 세상에서 가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앞 황초령의 전차 육탄 공격과 장진호의 전투 경찰 두 글에서 당시 장진호로 진격했던 미 해병 1 사단사령부에서 통역 장교로 참전했던 이 종언 박사를 소개했었다. 고려대 2학년 재학중에 6.25 사변을 만나 통역 장교가 된 분이다.

제대 후 예일 대학에 진학하여 법학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변호사로
활동을 한 분이다.

이 박사는 장진군민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해병과 함께 장진호로 진격했을 때 중공군에게 포위된 위기 상황에서 현지민 접촉 업무[대민 업무]가 이 종언 박사에게 주어졌었다. 이 박사는 60년 전 아련히 떠오르는 기억에 각인 된 장진호 전사를 들려주었다.

미 해병 1 사단은 장진호 입구 황초령 못 미친 지점인 수동에서
중공군 124 사단을 대파하고 장진호에 들어왔다.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그의 직속 상관인 미 10군단장
아몬드 장군으로부터 좁은 산길을 통해서 평안북도의 미 육군과 연결하라는 맥아더 사령부의 명령을 하루 속히 달성하라는 닦달을 받았었다.


                             장진군으로 향하는 미 해병 1 사단.
11월 초순 - 이 때만 해도 별로 춥지가 않았지만 해병들이 후퇴 할 때는 북극의 날씨가 피아, 특히 가냘픈 피난민들을 덮쳤었다.


엄청난 숫자의 중공군이 참전 한 것이 분명한데도 아몬드는 해병대를 마구 몰아 부치며 산간 내륙 깊숙이 하루 속히 진격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는 중공군을 하잘 것 없는 후진국 부대로 평가했었다. [그는 인종 차별 주의자로서 흑인들을 무척 멸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중국에서도 근무했었고 태평양 전쟁에서도 일본군과 격전을 겪은 그는 동양인의 심리와 행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판단하고
진격을 최대한 늦추고 있었고, 아몬드는 그깟 중국 놈들이 뭐가 무섭냐고 비웃으며 빨리 진격해서 육군과 연결하라고 계속 채근해댔다.

내심 불안했던 스미스 소장이 자신의 판단이 맞다는 확신을 가진 것은 중공군이
후방과 연결된 외길의 시멘트 교를 폭파했을 때였다.

이 다리는 장진 발전소 도수관에 설치한 다리로서 장진군민회
원로에게
물어보니 수문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스미스 소장은 이 다리의 폭파를 심각한 징조로 받아 들였다.
그는 군사적 상식으로 해병대의 진격 저지를 위해 폭파하여야 했을 다리를 해병대 주력이 다 통과한 뒤에 폭파 한 것은 중공군이 해병사단을 완전히 포위망에 넣겠다는 야심의 노출이고 해병 1 사단을 포위 격멸할 거대한 대 병력이 해병대를 포위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스미스 소장은 이미 하갈우리에 도착했던 11월 15일부터 비상 활주로를
건설하면서 아직 차단되지 않은 수송로를 통해 수송되어온 엄청난 양의 보급물자를 하갈우리에 저장하기 시작했다. 완전 포위가 되어도 얼마든지 방어 할 만 한 보급 물자의 확보가 중요하다는 그의 계산이었다.

이 쯤 되면 전방으로 더 이상 군대를 보내지 말고 상당히 넓은 하갈우리
일대에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돌아가는 적정을 지켜보며 다음 행동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군대 지휘 체계의 테두리에 안에 있던 그로서는 뒤에서 들볶는
아몬드나 더 뒤에서 신속한 맹진[猛進]을 주문하는 도쿄의 맥아더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그는 느린 속도라로도 전진해갔다.
아몬드가 짖듯이 몰아 부쳤지만 선두의 해병들이 하루 1,500미터만 전진할 때도 있었다.

스미스 사단장이 예하 5연대와 7연대 주력을 장진호 좌안으로
진출 시키고 육군 31연대를 우안으로 진출시켰을 때 중공군 9병단 사령관 송 시륜이 설치한 "인해[人海] 덫"의 눌러진 스프링이 튀었다.

1950년 11월 27일 장진호 양안에 진격한 미 해병과 미 육군을
전격 포위한 중공군은 먼저 3개 사단을 동원해서 유담리의 미 해병 2 개 연대부터 쳤다.

그러나 유담리의 해병들은 귀신같은 전투력을 발휘해서 이들을 격퇴하였다.
특히 후방 하갈우리로 넘어가는 덕동고개에 배치했던 F 중대의 분전은 미 해병의 전설이 되었다.
 


     유담리의 해병 5연대 본부를 습격했다가 죽은 중공군 사체. 전에 이 불로그에서 소개했다.



연대 병력의 적과 며칠 밤을 맞서 적병 2,000명을
사살하고 연대가 철수할 중요한 목을 지켜냈다.

중공군은 유담리에 들어온 해병들을 1 개 연대로 판단했었지만
2 개의 해병 연대가 유담리까지 들어와 있었다.

유담리의 해병들을 공격했다가 코피가 터지고 물러난 전투 첫날
9 병단장 송 시륜은
자신들의 정보 판단과 이에 따른 작전에 실수가 있음을 알고 방향을 바꾸었다.

유담리의 해병들을 공격했다가 코피가 터지고 물러난 전투 첫날 9 병단장 송 시륜은 자신들의 정보 판단과 이에 따른 작전에 실수가 있음을 알고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유담리가 아니라 그 아래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로 공격 목표를 바꾸었던 것이다.

[후세의 사가들은 장진호 전역(戰役)에서 중공군 9 병단장 송 시륜이 적의 허리 격인 하갈우리의 해병 사단 본부를 먼저 쳐서 길게 배치된 해병 부대를 차단시키지 않고 선두의 유담리에 몰려있는 해병의 주력을 공격했던 것이 그가 범한 최대의 작전 실수라고 했다.]

하갈우리를 점령하면 해병 사단의 차단은 물론 사령부를 격멸했을 수도 있었고 미군 보급의 생명줄인 비상 활주로를 장악했을 지도 모른다.

모두 해병 1사단의 탈출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효과라고 하겠다.

유담리 공격에 실패한 송 시륜은 방향을 제대로 잡고
다음 날 작전에 2개 사단을 동원해서 공격을 재개했다.

1 개 사단은 장진호 서안의 미 육군 31연대를 공격하게 하고
1개 사단은 하갈우리를 공격하게 하였다. 하갈우리는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놓였다.



                                 장진호 전황도.  다시 올린다.
장진호 우안의 육군 31연대와 하갈우리를 공격한 사단들이 중공군 80사와 58사임을 알게한다. 일부 전사가들은 장진호 우안에서 섬멸 된 육군 31연대가 중공군의 병력 분산을 유도해서 전략적으로 최 요지였던 하갈우리를 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 


여기서 다시 이 종언 박사의 회상을 찾아가 본다. 이 박사는 장진호 전투에서 사단 사령부 통역 장교로서 하갈우리에서 활동했다.

대학교 2학년을 다니다가 전쟁 때문에 통역 장교가 된 이 종언 박사는 사단 사령부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요원이기에 공식적인 통역 외에 대민업무, 정보수집, 보급품 관리 등을 처리하여야 했다.

이 박사는 하갈우리 이장부터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고 협조를 당부했다.
이 박사는 하갈우리에서 처음 만난 장진 군민들의 인상은 독특했다고 이야기 한다.

주민들의 덩치가 컸고 피부가 대체로 백색이 강했으며 일부 주민들은
푸른 빛이 도는 눈동자를 가졌었다고 말했다. 북방의 혈통이 강하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주민들이 사단 본부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장진호 주변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었는데 수 많은 중공군들이 출현해서 동네 전체의 주민들을 내쫓아 버리고 사는 집들을 차지 해버렸다는 것이다.

중공군 9병단은 모 택동의 지급(至急) 출동 명령으로 한반도 전선으로 이동했지만
월동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부대들이었기 때문에 따뜻한 밤을 보낼 수 있는 가옥이 필요했었고, 게다가 촌락의 가옥들은 유엔군 항공기들이 잘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부대가 엄폐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그들이 중국 본토에서 생존의 조건[인민의 지지]으로 지키던 '민폐 절대 엄금'은 외국 땅인 한국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엄동설한에 살아남는 것이 당면한 긴급과제인데
공자 말씀같은 인민 친화적 말이나 늘어 놓으며 북한 땅 주민들의 사정을 봐 줄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

중공군의 출현은 24일 하갈우리에서 13 킬로 미터 떨어진 산하리라는 곳에 사는 주민들이 제일 먼저 제보 하였다.

'중공군 1 만 명을 위한 잠자리가 필요하니 주민들의
협조가 필요하다'며 북한에 협조적인 한 동네 간부가 주민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들은 중공군 58사단이었고, 이 제보를 받은 미군이 산하리를 공습으로 폭격하여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


여러 마을에서 졸지에 집을 빼앗기고 먹고 잘 곳이 없어진 주민들은 하갈우리 해병들의 주둔지로 몰려 왔다.

해병들은 이들을 주둔지 밖에 머무르게 했었지만 식량을 제공했었고
노동력이 필요하면 이들을 고용해서 후한 임금을 지급하였다. [하갈우리에는 여러 건설 일들이 많았었다.]

후방의 다리(수문교)가 파괴되고 유담리에 대한 적들의 공격이
가중되면서 환자 수송, 병력 보강 등을 위한 분주한 이착륙 때문에 활주로의 여유가 없게 되었다. 때문에 수송기들은 수많은 보급 물자를 항공 수송하여 낙하시켰는데 공중 투하 물자들은 하갈우리 해병 진지 안에 낙하 되기도 하였으나 상당수는 바람에 날려 방어 진지 외곽에 낙하되었다.

해병들은 야간 경계와 전투로 낮에는 휴식을 취하며 잠을 자야했기 때문에
이 박사는 흥남에서부터 데려온 노무자들뿐만 아니라 장진군 주민들을 동원하여 멀리 외곽에 까지 나가 낙하한 보급품을 챙겨야 했는데 주변 산에 둥지를 틀고 있는 중공군들은 이 보급품을 가져가게 그냥 놔두지 않았다.


             전황 급박한 유담리에 공중 투하 보급을 하는 미 공군 C-119 박스카.
                      전쟁 기념관에도 전시 된 쌍동의 수송기다.


중공군들은 회수 인원들이 분명 민간인인데도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세 명이나 사망하였다. 이 종언 박사는 이런 중요한 회수에서 장진군 주민들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재삼 강조했다.

하갈우리는 과거 장진군 읍 소재지로서 상당히 넓은
개활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학교는 물론 우체국과 군청 건물도 있었다. 장진호 건설과 함께 옆에 경하리라는 새로운 마을을 건설해서 이전했지만 아직도 1 천명 가까운 인구에 수백호의 가옥이 있었다.



하갈우리를 철수하면서 해병들은 집적한 막대한 군수품에 불을 질렀다. 이 불길은 사흘 간 계속되면서 하갈우리를 모두 태우고 옆 경하리까지도 소실 시켰다. 불길이 거세 1 km 남쪽의 고토리에서도 다 보였다.


중공군이 기동 공간으로 사용하는 산악이 동쪽 가까이에 이스트 힐이라는 산 하나만 있을 뿐 모두 멀리 떨어져 있어 기습의 가능성은 적었지만 반면 중공군이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해 오는 상황에서는 어느 곳에 주 방어선을 설정해야 하는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의 방어 사령관은 해병 1연대 1대대장
리에쥐 중령이었다.

그의 휘하 두 개의 보병 중대 H, I 중대와
비행장과 시설 공사를 위한 두 개의 공병 중대가 실질적인 전투능력을 보유한 부대였고 그 외 사단 군악대와 사령부 본부 중대, 그리고 각종 인원들을 합쳐 약 3,000명의 해병과 해군 파견 요원 300 명,그리고 500 명의 육군을 합쳐 총 3,800 명이 장진호 방어 병력이었다.

대대장 리에쥐 중령은 넓은 하갈우리를 전부 방어 할 수가 없었던
터라 선택과 집중의 방법을 택하게 되었는데 그런 결심을 한 그에게 병력과 화력을 집중하기위한 적의 예상 공격로에 대한 정보가 필수적이었다.

다행히 그의 정보과 소속 리차드 E. 케어리 소위에게 장진호반
진입 직전 현지민 12 명을 고용해서 편성한 정보 수집대가 있었다.

통역 장교인 이 종언 박사는 그의 정보 수집을 집중적으로 도왔다.
이 박사와 케어리 소위는 하갈우리 도로 봉쇄선 밖에 있는 피난민들에게 가서 정보를 얻었다.

엄동설한에 집을 빼앗기고 분노한 현지 주민들은
중공군의 정보을 풍부하게 전달해주었다. 이들은 집에서 강제로 추방 된 터라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은 중공군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 그리고 어디에 얼마가 있다는 것 등 모든 정보를 샅샅이 알려 주었다.

중공군이 있다는 지역으로 두 명의 현지 첩보원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현지 주민으로 가장하여 중공군에게 접근하여 대화를 할 수가 있었다.

중공군은 그날 해가 지면 공격을 위한 이동을 개시할 것이며
하갈우리의 해병들을 자정 전에 쓸어버리겠다는 작전 계획을 조심성 없이 떠벌렸다.

--------------------------------------------------------------------------------

공격 전 하급 병사에게까지 세세한 작전 계획을 알려주고 치밀한 설명을 해서 숙지하게 하는 것이 중공군의 공격 준비행동이다.

한국 전쟁 중 대 공격에 앞서 포로가 된 중공군 하급 병사들은
취득이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고급 정보들을 진술했었고 어리둥절한 유엔군은 이를 믿지 않았었다.

앞 유담리 전투 직전에도, 그 전의 수동 전투에서도,
그리고 국군 6사단 7연대가 크게 당했던 초산 전투에서도 잡힌 포로들은 한결같이 공격 계획을 통보했었고 공격 시간까지도 정확히 알려주었었다.

중공군 50만 명이 총 공세를 가한 1951년 4월 22일의 중공군
5차 전역[중공군 춘계공세] 직전에 획득한 포로도 공격 개시 시간을 정확히 자백했었다.

유엔군들은 처음에는 이런 고급 정보가 일개 사병들로부터
줄줄이 나오는 것을 적의 단순 모략이거나 거짓으로 무시했다가 큰 피해를 입었었다.

----------------------------------------------------------------------------------



참호 속에서 기어나와 미 해병들에게 항복하는 중공군들. 눈이 쌓인 것으로 보아 철수 중의 전투 사진이다.


하갈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중공군 대부대는 하갈우리에서 서남쪽 약 8킬로 지점에 집결해 있었다. 이를 근거로 계산해보면 이들이 이동하여 하갈우리를 공격하는 시간을 알 수가 있다.

리에쥐 중령은 이 정보에 근거해서 중공군이 공격해올 방향이
서남쪽임을 정확히 판단하고 이 방향에 병력과 전차와 포병의 화력을 집중시켰고 지뢰와 철조망까지 설치했다.

과연 예상했던 시간 조금 뒤에 중공군의 대 병력이 예상 방향에서
공격해왔다. 중공군 58 사단이었다.

해병들은 준비 된 방어선에서 총력을 다 해 이들을 격퇴했다.
다음 날인 29일 밤에도 또 이들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해병들의 막강한 화력에 격퇴 되었다.



            중공군은 악명 높은 인해전술을 하갈우리 공격 후반에 최초로 구사했다.
떼죽음 당한 중공군 중 한 불쌍한 사체. 이들이 입은 누비옷이 솜을 누빈 옷임을 알게 해준다. 대검을 보니 이 병사가 소지한 총은 일제 99식 소총이다.



이 종언 박사는 미약한 병력이 수비하던 하갈우리 방어가 성공한 것은 오로지 현지 주민이 정확히 전해준 중공군의 규모와 집결 위치에 대한 정보, 그리고 그에 기반해서 빈약한 방어 전력을 서남 방향에 집중했던 작전의 힘이 컸다고 단언하며, 현지 주민의 협조가 하갈우리 방어에 절대적인 공로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해병들은 일부 전사자 사체는 현지 매장했지만 일부는 트럭에 싣고 흥남으로 와서 집단 묘지에 매장했다.


하갈우리의 방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전방 유담리로
전개해 있던 해병 5연대와 7연대가 12월 1일 유담리를 출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하해서 12월 3일 하갈우리로 돌아와 해병 사령부와 합쳤다.

하갈우리에 집결한  해병들은 더 이상 겁낼 것이 없었다.
하갈우리의 해병들은 남쪽 고토리로 철수하여 해병 1연대와 다시 연결하여 흥남으로 탈출할 가능성을 높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