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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제1편-

구름위 2013. 1. 1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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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제1편-


이번 글은 조금 길다.
전투 경찰의 한 숨은 비사를 소개하면서 우리 전사에서 너무 가볍게 다루어지고있는 전투 경찰의 활약을 소개할 기회를 같이 마련했기 때문이다.

6.25 전사를 찾아보면 유감스럽게도 크게 저평가
받고 있는 두 참전 부대가 있다.

우리 전사에서 망각 되다시피 저 평가를 받는 부대는 UN 참전 군 중 
육해공군과 해병대까지 파견하고 미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전사자를 낸 영연방 군이고 국내의 전투 부대로는 한국 전투 경찰이다.

한국 전투 경찰은 해방 후부터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8년 간 반공 전투에서 무려 1만 명의 전사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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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숫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었다. 절대 과장 된 숫자가 아니다. 여기 아래 전북 남원 광한루에 있는 전투 경찰 충혼비가 이를 증명해준다.


                       1955년에 광한루에 건립 된 전투 경찰 충혼 불멸비.


충혼비는 지전사[智戰司-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1950년 12월에 창설]와 1955년 7월에 해체한 서전사[西戰司-서남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1953년 5월 창설, 지전사의 승계 조직임] 소속 6,333명의 희생 경찰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이다.

이 숫자는 오직 지전사 서전사 소속 전남북 경찰들의
전사자들만 말하니 위의 1 만 명이라는 숫자가 이해가 가리라 믿는다. 공비들의 활동이 왕성했었던 전남 도경 소속 전사자가 전국 경찰 중에 제일 많았었고 다음으로 많은 것이 전북 도경 소속 전사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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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전투를 거듭했던 8년간 월남전에서 발생했던 국군 전사자가 5,000명 수준이니 경찰이 6,25전쟁 중에 어느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겪었는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유해 발굴 작업 중에
지리산 지역에서 발굴된 다수의 유해가 국군이 아니라 전투 경찰의 것인 점이 위의 희생을 말없이 증명 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은 전투 경찰 체제가 따로 없었다.
지금 전투경찰들이 직원으로 부르는 순경이상 경찰들이 치안 행정도 보고 불시에는 모두 보병 부대로 편제되어 총을 들고 나가 전투도 했었다.


                                    전북 도경의 전투 경찰대.


이 태 선생의 저서 ‘남부군’에 보면 지리산 주변 공비들이
무장과 훈련이 잘 된 육군은 두려워했지만 장비나 훈련에서 훨씬 뒤쳐지는 전투경찰들은 우습게 보았다는 사실을 비치는 구절이 군데군데 보인다.

전투 경찰은 지리산 주변 공비들을 토벌한 부대로만
알려져있지만 사실 6.25 전사의 첫 페이지인 북한 침략 첫 날부터 한반도를 가로 지르는 전선 여기 저기서 북 침략 도배(輩; 함께 어울려 나쁜 짓을 하는 무리)와의 전투휘말려 얼굴을 내밀고 있다.

말이 전투 경찰이지 치안 업무를 보던 경찰들이 총을
들고 전투를 하러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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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시 당일 서울 시경은 전투 경찰 대대를 조직해서 포천 전선으로 급파했다. 각 개인 경찰들에게 지급된 실탄은 단 10발뿐이었다.

누구나 목숨은 중요한 것이다.
이 상태로 각종 북한군 중화기의 화력 앞으로 나가라고 했으니 경찰들이 총 몇 발 쏴 보고 도망친 것이 인간의 본성상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6.25 당시 위기의 포천 전선으로 출동하는 경찰들.
철모에, 전투모에,
정모에 가지각색의 차림새가 이 때 경찰의 전투 준비 상태를 말해 준다. 이들 중 상당수가 다시 돌아 오지 못했다.


앞서 말한대로 한국 경찰들은 북한군 침공 개시 순간부터 전투에 휘말렸다.

전쟁 개시 당일인 25일 새벽, 막강한 북한군 중부 방면 침공군의 정면에 위치해 있던 춘천시[현] 북산면 내평리 지서에서 지서장 노 종해 경위 이하 12 명이 결사 저항하다가 9명과 북산면 청년단장 김 봉림이 전사하고 3명만이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일이 있었다. 문자 그대로 옥쇄했던 것이다.

무너지는 서울 방어선 최후의 방벽이었던 미
아리 전선에서 육박해오는 북한 최강 4사단 18연대의 공격 전면에 투입되었다가 섬멸 당했었고, 동대문 경찰서를 지키다가 압도적인 전력의 북한군들과 전투를 하고 전사한 피해를 본 것도 전투 경찰대였었다.

전투 경찰들은 6.25동안 자신들만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적치하가 된 후 가족을 남겨놓고 부산으로 피신했던 경찰의 가족들은 빨갱이들에게 잔혹한 학살을 당하는 가족 소멸의 비극을 당하기도 하였다.

지방 빨갱이라고 불리던 토박이 부역자들이
경찰관 가족을 학살하는 사건이 다수 발생했었고 북한군 진주와 함께 산에서 내려온 공비들이 특히 경찰 가족을 찾아 죽이는 잔인한 짓을 많이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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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낙동강 지역으로 몰렸을 때 전투 경찰들도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전선의 전투에 투입되었었는데 무기가 빈약했었던 관계로 전투 경찰들의 피해가 컸었다.

이렇게 무장도 훈련도 군기도 시원치 않았던 전투 경찰대가
난데없이 저 북쪽, 지금은 전설의 전장이 되어 버린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 전사에서 그 얼굴을 내밀었다.
 

                                      장진호 전역도
           맨 위에 유담리와 공격해온 중공군 3 개사단의 공격 방향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도 미 해병 1사단이 최 북방으로 전진해 한국 전쟁 중 최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유담리에서였다.

당시 해병 5연대는 유담리 최 전방에서 진격하던 중 그 간
불길한 신호를
보내오던 중공군들에 의해서 전진을 차단 당하자 즉각 유담리 일대 고지에 방어 진지를 파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었다.


                     유담리의 미 해병들을 공격하는 중공군 79사단 병사들.
             유담리 북쪽의 정면으로 공격해온 사단으로서 5연대와 격돌한 사단이다.


인천 상륙작전에서 최초로 월미도에 상륙작전을 했던 5연대 3대대는 2대대 진지와 유담리 마을 사이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3 대대장 태프릿 중령은 자신 측면 고지에 배치되었을
이웃 리첸버그 대령의 7연대 E중대가 아무래도 그 곳에 배치되지 않았다는 의심이 들었다.


                                         태프렛 중령


태평양 전쟁부터 참전했었고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작전에서 큰 공훈을 세운 태프릿 중령은 전장의 냄새를 맡을 줄 알았다.

7연대 해병들이 배치되었다는 그 곳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것이었다. 고지를 향해
큰 소리로 불러 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연대 본부 참모와 5연대장 머래이 중령에게 거듭 확인해 보았으나 그들은 측면인 그 고지에는 7연대의 E중대가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태프릿 중령은 그 측면에 아무 부대도 없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부대를 배치했다.

이 대목에서 느닷없이 한국의 전투 경찰이 출현한다.
장진호 전투 기록의 결정판이라는 “브레이크 아웃”의 작가 러스 마틴[임 승균 번역]은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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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전투 경험과 자기 확신이 있는 보병 장교인 태플릿은
육감에 따라 산비탈 중턱에 전초(前哨; 군대가 주둔할 때 적을 경계하기 위하여 가장 앞쪽에 배치한 초소나 초병)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 전초에는 미 해병에 의해 훈련되어 군기가 있고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한국 전투 경찰 부대가 운용하는 기관총 진지가 함께 배치되었다.

태프릿의 3대대 진지를 내려다보는 그 고지에는
그가 믿던 대로 아무도 없었다.

그 때 태프릿의 고지에 배치되어야 할 7연대 E중대는 동쪽으로 800m 떨어진 1,282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1950년 11월 유담리 도로를 방어하고 있는 미 해병들


마틴 러스의 책에는 '곧 지옥과 같은 열전(熱戰)의 용광로가 되어
버릴 장소에 능력있는 한국 전투 경찰 기관총 반이 있었다'는 글 한 줄 만 남아있고 이후 전투 경찰에 관한 글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진지 구축 후 촬영한  호남 지역 전투 경찰들

유담리에 나타난 전투 경찰의 전투가 우리 전사에서 꼭 밝혀져야할 이유에 대해서 서술한다.


장진호 서안에서 미 해병들이 잘 싸운 반면 동안의 미 육군은 대패를 당했다. 사진은 미 육군 7사단 31연대가 중공군에게 당한 처참한 현장이다. - 항공 지원만 믿고 무턱된 행군 후퇴만 하다가 밤이 되자 속수 무책으로 공격당해서 섬멸되었다. 중공군들은 따발총과  백린 수류탄으로 트럭 20대에 나누어 탄 600여명의 미군 부상병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유엔군이 8군의 서쪽 평안도 지역과 미 10군단의 동해안 함경도 지역으로 북진하고 있는 사이에 큰 간격이 발생하게 되자 중공군은 한반도 중앙의 빈 곳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동서 양익의 유엔군을 격파하기로 하고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였다.

장진호에 투입한 중공군 9병단 6만 병력은 모 택동의
특별 지시로 만주 지역에서 은밀히 이동해왔다.

6병단은 동쪽에서 전진하는 미 해병 1사단과 서쪽 평안도 쪽으로
전진하는 미 1기병 사단과의 링크를 차단해버리라는 특명을 띄고 있었다.

유담리는 장진호반에서 평안북도로 나가는 갈림길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중공군은 해병들을 가로 막아 섰다.

6병단 사령관 송 시륜은 자신이 만주에서 데려온 60,000 명의 중공군이
장진호 주변에 설치한 겹겹의 포위 자루 안에 깊숙히 들어온 해병들을 도살할 칼을 높이 들고 드디어 살육의 굿판을 열었던 것이다. 때는 1950년 11월 27일 야간이었다.


                                           송 시륜
황포 군관학교 졸업. 모택동의 대장정 때 연대장. 나중에 상장으로 은퇴했다. 대단히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다가 1950년 11월 1일 장진호 입구에서 해병들에게 자신 휘하의 중공군 124 사단이 참패를 당한 복수심으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기도했다.


유담리를 공격한 중공군은 3개 사단, 30,000 명의 병력으로 유담리의 해병 5연대와 7연대 8천 병력을 기습했다.

그날 밤 첫 공격의 위기의 순간을 위의 글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과달카날, 타라와, 사이판 섬에서 광적인 일본군들과 싸웠었고 마산의 진동 전투와 인천 상륙전과 서울 탈환전에서 승리했던 백전노장 5 연대장 머래이 중령은 지옥에서 둑을 터뜨리고 내려 보낸 저승사자들처럼 출현한 어마어마한 중공군에게 적지 않게 놀랐다.

태프릿 중령의 3연대는 이 머래이 중령의 연대에 속했었다.
머래이 중령은 후에 한 작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당시의 감정을 술회하였다.

“ 교전이 발생한 첫 날 밤에 절망의 느낌이 있었습니다. 
적군이 사방에서부터 공격해 오는 가운데 부대가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이제 우리는 끝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레이몬드 머래이 중령 - 해병 소장시 촬영한 사진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세계 최강의 보병이라는 평가를 받은 해병 5연대와 7연대는 집단 도살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여러 번 겪었고 큰 피해는 보았지만 유담리에서 해병대 주력을 격멸해버리겠다는 송 시륜의 시도를 무력화시키고 남쪽 하갈우리 1 사단 사령부로 후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유담리 해병대의 예상 밖의 엄청난 저항에 주눅이 든 중공군은
뒤늦게야 전략과 정보 실수를 절감하고 각각 1개 사단씩을 동원해서 사단 본부가 있는 후방 하갈우리와 유담리에서 장진호 건너에 있는 미 7사단 31연대를 공격하였다.

하갈우리에 가한 중공군의 대공세는 격퇴되었지만 장진호 건너 편
신흥리 쪽으로 전개되었던 미 7사단 31연대의 2개 보병 대대와 1개 포병대대는 중공군 1개 사단의 공격에 풍비박산이 되어 버렸다.


         바늘귀처럼 기다란 장진호 동쪽 신흥리에서 미 육군 31연대를 공격하는 중공군.


연대장 맥린 대령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다가 죽었고
뒤를 이어 연대장 대리로서 철수작전을 지휘했던 패이스 중령도 전사했다.

31연대는
치욕스럽게도 연대기까지  탈취 당했다.
이 연대기는 지금 중국 북경의 군사박물관에서 미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맞서 위대한 승리를 거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대승의 상징으로 전시중이다.

                                       미 31연대기
          중공군 한 병사가 이를 주워서 보자기로
쓰다가 귀중한 전리품임을 알게 되었다.


미 육군 31연대의 전투의 시작과 끝을 보면 전술의 초심자라 해도 31연대의 전투 지휘의 졸렬한 수준에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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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반에서 같이 싸웠던 해병들은 볼썽사나운 졸전을 되풀이 하고 대패한 육군을 경멸하였고 장진호 전역내내 공공연하게 육군을 경멸하는 풍조가 해병들 사이에서 거의 공론화 되어 버렸기 때문에 미 해군 장관이 해병 부대에 타군을 비방하는 언행을 주의하라는 특별  지시까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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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 7사단 31연대 전투에서 한국인으로서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다.

미 육군의 각종 기록은 31연대의 섬멸적 붕괴의
원인을
당시 31연대에 배속되었던 700명의 한국 카투사 병들의 저질 전투력 때문이라고 변명을 해댄다.

카투사들이 전장 공포증에 떨며 전투를 기피하고 도망과
피신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철수 작전을 지휘하던 페이스 중령이 중공군의 거센 공격에 트럭 위로 피신하는 한국군 두 명을 권총으로 즉결처분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전황이 다급했었다지만 너무 가혹한 행위였다.

만약 대상이 미군 사병이라면
페이스 중령이 그런 잔혹한 즉결처분을 했을까하는 인종차별적 야만 행위였다.


                                        페이스 중령


페이스 중령의 졸렬한 지휘로 부대가 처참한 종말을 맺었지만 그가 전사했기 때문에 미 육군은 그를 만고에 없는 명 지휘관으로 만들어서 미국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받게 하였다.

미 육군, 아니 해병들의 모든 장진호 전투 기록을 찾아보아도
장진호 동안[東岸] 육군의 졸전이 오합지졸 한국 카투사 병들 때문이라는 궤변을 부정하는 글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한국 카투사의 탓으로 돌리는 말만 앵무새처럼 그대로 옮긴 글들만 보인다.

31연대 배속 한국인들이 정말로 비겁 행위를 했다면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이들 한국인들은 부산 지역에서 모병해서 미군에게 배속시킨
급조된 군대였다. 대부분의 카투사들은 일본에 가서 편히 지낼 수 있다는 말만 듣고 미군의 모병에 응했다. 이렇게 해서 미 7사단에 배속된 카투사 병은 8,000명이나 되었다.

미 7사단의 카투사들은 일본에서
기초 훈련만 겨우 받고 한반도로 재투입되었는데, 노련한 중공군의 공격 전면에 내세워진 한국 카투사 병들이 입대 4개월 남짓한 신병이라서 그렇게 약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짧은 군복무 기간만으로 그들을 오합지졸로
몰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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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역 2개월 뒤에 한국 훈련소에서 훈련 도중 뽑은 600명의 신병들로 구성된 육본 직할 유격대인 백골병단은 동부 전선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여 두 달 간 남한으로 침투하던 남부군 사령관 길 원팔을 잡아 죽이고 수백 명의 적병을 사살하였다.

비록 절반이 전사했었지만 목표는 달성하였다.

600명의 유격대원이 받은 훈련소 훈련은 단 3주 뿐으로
제식 훈련도 제대로 익힐 수 있는 기간이 아니었다. 이들 유격대원의 지휘관이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나중에 월남전에서 유명했었던 채 명신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실제 전투에서 병사들의 훈련기간 보다는 지휘관의 역량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1951년 4월 10일 강릉 도립병원에서 생환 기념사진을 찍은 백골병단원.
이들은 단 3주의 기본 훈련만 받고 북으로 파견되었다. 과반수가 돌아 오지 못했으나 60일간 보급도 없이 적진 300km를 기동하며 북한군  중장 길 원팔을 포함한 적 309명을 체포
처단하였고 적 174명을 사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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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1연대의 비참한 최후를 한국군 카투사 탓으로 돌렸던 미육군 전사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장진호 최고 격전지였던 유담리 전투장에 느닷없이 나타나 훌륭한 전투력을 발휘한 전투 경찰의 존재가 더욱 궁금했었다.

이들이 정말 그렇게 잘 싸워줬다면 미군 31연대 패배를 억울하게
한국군 카투사
에게 돌리는 미 육군 전사에 대한 반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막막하던 중에 생각지도 않게 장진호의 한국 전투 경찰에 대
해서 증언해줄 귀인[?]을 만났다.

미국에서 오신 이 종연 박사를 뵙게 된 것이다.
예일대를 졸업하시고 변호사로서 활동하신 분으로 이 분에 대해서 앞 글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고려대 2학년 재학 중 전쟁이 발발하자 통역 장교 시험에 합격해서 미 1사단에 파견되었었다.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에 존 Y. 리 중위로 소개된 이 종연 박사


남한 내의 작전에서는 머래이 중령의 해병 5연대 파견 연락 장교를 했었으나 장진호 진격 때는 이안 스미스 미 1 사단장의 명령에 의해서 하갈우리의 해병 사단 사령부에 근무했었다.

통역의 기본 업무는 물론 정보 수집도 했었고 포로의 심문과 호송
그리고 사단 지역에 투하된 공수 보급품의 수집 업무를 했었다.

비록 하갈우리의 사단 본부에 있었지만 하갈우리도 중공군의
되풀이 되는 심한 공격을 받았었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들을 겪었고 해병 사단 전체가 흥남으로 철수할 때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었던 장진호 전투 참전자이기도 하다.

이 박사와의 첫 대면에 나는 혹시 장진호반에서 한국 전투 경찰대가
미 해병들과 같이 압도적인 중공군에 대항하여 싸웠던 일이 있었나를 물었었다.

놀랍게도 이 박사는 그간 안개속의 물체처럼 그 존재조차
아리송했던 장진호반의 한국 전투 경찰대의 활약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다.

그 분은 전투 경찰대의 활약을 확인해주고 이들
해병대 배속 한국 전투 경찰대가 대단히 용감해서 미 해병들의 찬사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당시 장진호에서 싸웠던 미 해병 1사단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의 보병 사단이었다.

이들의 자존심은 대단해서 앞서 말했 듯 미 육군조차 내놓고 경멸했었는데
한국 전투 경찰대가 미 해병대와 어깨를 맞대고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고 싸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해병 5연대에서 싸운 한국 전투 경찰들의 분투는 그 장진호
건너편에서
미 육군 7사단 31연대가 당한 섬멸적 대패배의 핑계를 다 뒤집어썼던 카투사 병들의 억지 오명을 어느 정도 반박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제3편-

                             

이 박사는 한국 전투 경찰대가 언제부터 미 해병대와 같이 싸우게 되었는지 그 내력부터 설명해주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미 해병 1사단은
아직 체제가 완비되지 않은 상태여서 5연대가 주축이 된 1개 여단을 한국에 파병했다.(해병 5연대는 태평양 전쟁 초기 미군의 최초 대반격전이었던 과달카날에 상륙했던 부대였었다.)

5연대 연대장은 앞에서 소개한대로 아직 중령으로서 37세였던 머래이 중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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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텍사스 A&M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투신한 전형적인 텍사스 사나이로 호걸스런 풍모가 말해주듯 용감무쌍한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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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3일 부산에 도착한 5연대는 그 다음 날로
기차와 트럭을 이용해 북한군에게 고전하고
있던 마산 진동 전선에 급파되었는데

마산 서부 진동 전투에서부터 한국 전투 경찰이 해병 5연대에 배속되었다고 한다.


                    창원역에 도착한 미 해병 1 사단 1전차 대대 M-26 전차
미 본토에서 급히 출발한 전차대는 전차포의 영점도 제대로 잡지 못해서 역 구내에서 인근 산의 표식에 포사격을 해서 역 주변을 포성으로 뒤 흔들었다.



6.25 침략이 감행되자 각지의 경찰들은 단위 경찰서 별로 후퇴했었는데 가족들까지도 그냥 적 치하에 두고 낙동강까지 몰린 아군의 마지막 영토로 피신했었다.
 

                 서울을 빼앗긴 뒤 한강을 도하해서 후퇴하는 전투 경찰대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아 남행길을 탄 것이다.
운이 좋으면 기차도 타고 트럭도 이용했지만 도보로 걸어 부산까지 온 경찰들도 많았었다.


공비 토벌의 경험을 담은‘지리산 호랑이’의 저자
김 두운 총경은 이렇게 쓰고 있다.

6.25가 발발하자 전라북도의 모든 경찰들은 몰려오는
북한군을 피해서 남원 초등학교로 급히 피난해 일단 집합했다.

히룻밤 자고 나자 전북 도경의 이 기영 경무 과장은 그 곳까지 따라와
있던 전북 도경 400 여명의 인원들에게 전북 도경이 더이상 지탱할 능력이 없어 해산한다는 것과 각 경찰들은 재주껏 살아남아 다시 만나자는 비통하면서도 어이없는 지시를 했다.

지금의 거대 국립 경찰 조직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힘든 국란의 초창기 때의 이야기다.

김 두운 총경은 자서전에서 자신과 부하 경찰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생존 노력을 했는가를 회고하고 있다.

김 두운 씨와 그의 일본군 시절 학병 동기생 김 원룡 경감이 인솔하는 60명의‘순경’부대원들은 자연히 전투 경찰대가 되어 뜨거운 여름철에 일제 99식 총 한자루만 매고 남원에서부터 부산을 목표로 걷기 시작했다.

일주일간 주민들에게 구걸해서 얻은 밥을 빈 지서 마당에서 먹고 미군기의 오폭과 공비들의 기습으로 사상자를 내며 정부가 피난을 간 부산으로 걷고 또 걸었다.

기약 없는 길을 가던 전북 도경 경찰대는 경남 함안군 법수면에서
미 25연대를 만나 자연적으로 이 연대에 배속되었다.

전북 도경 본부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판에 미군에 붙어
있으면 밥은 구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김 두운 씨는 미군에 예속되어 있는 동안 있었던 사건을
자세히 쓰지는 않았지만 북한군 4사단을 상대로 싸우느라 3 명의 전북 도경 소속 경찰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무렵 미군 각 전투 사단에 배속된 전투 경찰들은 대부분
아군 영역으로 수도 없이 넘어오는 피난민 관리와 적성 분자 색출 등의 후방 임무를 맡았었다.


               전쟁 중 공비들의 국내 교통망, 특히 철도에 대한 공격은 집요했다.
미군이 운영하던 네 편의 병원 열차까지 습격을 당해 미군들은 열차에 호위 헌병들을 태우고 전방과 측방을 경계하며 운행했었다. 한국 전투 경찰들은 공비들을 격퇴하고 철도 교통망의 안전을 확보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는데 전쟁 수행과 국내 경제를 원활하게 한 또 다른 숨은 공로였다.


미군에 배속된 전북의 전투 경찰대는 전북 도경 본부가 부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연락을 계속 주고받았지만 도와 줄 길이 없는 도경에서는 직원들이 미군에게 배속되어서 밥은 굶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 안도하고 있어야 했다.

북진이 개시되면서 전북 도경은 미군을 따라 전주로 돌아와
재편성을 하고 아직도 적치하인 전북 지역 탈환에 나섰는데 무기가 부족하여 지역 유지들이 헌납한 쌀을 팔아 미군이나 암시장에서 총과 실탄을 사들여 무장하였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물자가 풍부한 미군들에게 배속된 전투 경찰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



                                     산속의 전투 경찰
원문에는 공비 소굴을 발견한 전투 경찰대라고 써있으나 잘 살펴보니 경찰 매복대가 산속에 은밀히 구축한 거점으로 보인다. 취사하는 연기와 우측의 식수 캔, 그리고 잘 구축한 총가와 정렬한 총기들이 이를 말해준다.


한편, 한국군에게 배속된 경찰들은 치열한 전투를 겪어야 했다. 전황은 낙동강 전선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국가 존망의 위기 순간에 있었다.

부산으로 피난 온 경찰들 중 상당수가 전투 부대로
급히 편성 되어 국군에 배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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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를 소개한다.

강원도경의 경찰들은 춘천에 집결하여 남쪽으로 철수했다. 전북 도경과 달리 이들은 끝까지 해산하지 않고 남으로 내려왔다.

먹을 식량이 없었던 강원도경 손 계천 경무 과장은
국군 1 군단에 가서 식량 도움의 요청을 했지만 1군단에 배속되지 않으면 쌀을 못주겠다는 무정한 응답에 할 수 없이 배속되어 전선으로 나섰다.

경찰관들의 나이는 20대 초반부터 50대까지도 있었는데
이들은 1군단에 배속되어 각 사단으로 흩어져 싸웠다. 그리고 국군으로부터 서러운 푸대접도 받았다.

강원 도경 소속의 일개 대대는 수도 사단에 배속되어 싸웠는데
이 전투 경찰 부대는 배속 초기 미군기의 오폭으로 20 여명의 피해를 보기도 했고 비봉산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대패하기도 하였다.

전사를 보면 패배한 강원 도경 전투 경찰 대대장 김 인호 총경이
유 흥수 기갑 연대장에게 크게 질책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경찰이 당한 수모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동해안 3사단에 배속된 강원 도경 경찰들은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했다.

경찰이 맡은 구역으로 적이 박격포를 쏘면서 포위망을
압축해 올 때 도경 유도 사범인 김 모 경위가 지휘하는 경찰 중대의 뒤에 헌병들이 M-2 카빈을 들이대고 전진하라고 무섭게 독전했었다.

그러자 김 경위는 "포탄이 비오듯
쏟아 지는데 헌병 각하,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하면서 주저 앉아 울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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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도배의 공격을 피해 가까스로 대구나 부산까지 피난을 왔는데
다시 전선으로 보내지니 겁을 먹고 도망친 경찰들도 많았었다.


전투가 한창이던 1951년 2월 3일 부산에서 발간된 신문을 보면 지난 반 달 간 체포 된 임무 이탈, 즉 탈영 경찰관이 무려 300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전투 경찰들이 이런 모습만 보인 것이 아니었다.
유 원식 소령은 포항 전투에서 목격했었던 한 용감한 전투 경찰을 회고한다.

“8월 중순, 해가 막 넘어가고 양쪽이 다 진지를 지키고 있을 때
인데 어느 경찰관이 단독으로 꼿꼿이 서서 능선 위를 걸어가며 서서 쏴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몇 번 쏘다가 적탄에 맞아 푹 쓰러집디다.
한참 있다가 또 일어나서는 비틀거리면서 능선 위로 올라가며 쏘다가는 또 쓰러지구요.

아마 그렇게 세 번은 되풀이 하다가 끝내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더군요.

석양 빛을 받아 피아가 다 이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 경찰관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혼자서 뚜벅뚜벅 걸으며 적 진지에 입사를 하던 그 무명용사의 모습은 언제나 내 머리에 박혀 있습니다.“



              라이프 지의 보도 사진 - 유명한 마가렛 히긴스 여기자가 촬영하였다.
공비의 전사체를 운반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잘 보니 아직 생명이 붙어 있다. 중상을 입은 공비 포로를 운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남 곡성 경찰서장 한 정일 경감은 서원 200명을 데리고
후퇴 하고자 했으나 길이 막히자 산으로 올라가서 유격대가 되어 공산군의 후방을 공격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대구로 보냈다.

서울에서 철수한 경찰대는 그런대로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런대로 숙식을 해결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시경 경찰대는 정부와 같이 부산으로 가지 않고 대구에 남은
내무부의 치안국 소속 경북 도경, 강원 도경 일부 병력과 함께 대구시 주변에
배치되었다. 7,000 여명의 병력이었다.

대구 사수를 외쳤던 내무부 장관 조 병옥 박사의 호언은
빈 말이 아니라 이들 서울 경찰 병력이 대구 방어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전과 동시에 뿔뿔이 흩어져 후퇴했던 전투 경찰들이 어떻게 마산 진동 전투에 파견된 미 해병에
배속되었는지 그 연유는 확실치가 않다.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전투 경찰들이 직접 찾아 가서 자발적으로 배속되었거나,
또는 군경의 상층부가 미 해병이 곧 파병 될 것을 알고 정예 전경 중대를 대기 시켜 놓고 있다가 이들이 상륙하자 바로 파견했을 가능성 두 가지 중 하나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