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靑星 砲兵의 神話

구름위 2013. 1. 8. 10:33
728x90

하숙집 주인 반동이 되다

 

1950년 6월 28일 춘천이 북한의 수중에 떨어지자 한 무리의 북괴군들이 시내의 어느 허름한 하숙집에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하숙집 주인을 " 국군 포병대대장을 하숙시켰다 " 는 죄목으로 반동으로 몰아 체포하였는데 ( 후에 다행히도 탈출하여 피신하였습니다. ) 이때 북괴군들이 이구동성으로 " 그 놈( 포병대대장 ) 때문에 1개 연대가 전멸 당하였다 " 고 하면서 치를 떨었다고 합니다.

 

[ 김성 제 16포병대대장 ]

 

굳이 비유를 하자면 신호위반해서 경찰에 단속된 운전자가 애꿎은 자동차를 두들겨 패는 꼴이라 하여야 할까요 ?  얼마나 북괴군의 피해가 컸으면 말도 안돼는 죄목을 뒤집어 씌어 하숙집 주인을 체포 하였을까요 ?  하여튼 두고두고 북괴군을 분노하게 만든 그 놈은 바로 국군 제 16포병 대대장이었던 김성 소령 ( 1923 ~ 1993 ) 이었습니다.

 

김성 소령은 지금과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북괴군 포병과 비교하였을 때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빈약한 장비로 무장한 포병대대를 지휘하였지만, 결코 이를 탓하지 않고 철저한 사전 훈련을 통하여 빛나는 승리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바로 유명한 춘천-홍천전투 ( 1950. 6. 25 ~ 6. 29 ) 의 기록입니다.

[ 춘천전투 전적비 ]

 

6월 29일 청성부대는 그 동안 철벽같이 방어하여 오던 춘천과 홍천지역을 포기하고 충주를 향하여 전략적 후퇴를 단행합니다.  이로써 한국전 초기 국군의 일방적인 패퇴에서도 춘천대첩이라 불리는 군계일학 같은 전과를 기록한 춘천-홍천전투가 막을 내립니다.  춘천-홍천전투는 방어지역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고 철저한 사전 훈련으로 군기를 강화한 국군 청성부대가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이룬 대승으로 그 찬란함이 더합니다.

[ 군기가 확립 된 청성부대 ( 제 7연대 - 1949 년 ) ]

 

하지만 춘천-홍천 전투의 의의가 큰 이유는 글의 앞에 쓴 것처럼 단지 북괴군 1개 연대를 괴멸시킨 전술적인 승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분노한 김일성이 이 전투에서 망신을 당 한 북괴군 제 2군단장, 예하 제 2사단장과 제 7사단장을 7월초에 즉각 교체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청성부대의 승리는 북한의 개전 초기 전략을 완전히 틀어버린 엄청난 전과로 전체 전선에 걸쳐서 막대한 영향을 주었던 전투였습니다.   

[ 전쟁 직전의 춘천 시가지 ( 1950년 5월 ) ]

 

6월 28일 북한의 서울 점령 후 한강도강 까지 3일간 지체하였던 미스테리같은 이유가 바로 동부전선에서 청성부대에 대패한 북괴군 제 2군단의 작전차질 때문이었다는 연구결과가 최근에 나왔습니다.  즉, 춘천대첩은 북한군 주력이 서울을 공략하는 동안 조공을 춘천-홍천-수원으로 우회 남진시켜 국군의 퇴로를 차단한 후 대 포위 섬멸하려 하였던 그들의 기도를 산산조각 나게 만들었고 이후 국군이 낙동강 교두보를 안정적으로 구축 할 수 있는 전기를 만든 전사에 길이 빛날 승리였습니다.  

[ 춘천전투와 백마고지전투의 승장 김종오 사단장 ]

 

이런 청성부대의 승인으로는 앞전에 설명한 것처럼 북한강, 소양강, 말고개등 방어에 유리한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한 것 외에도 사단장 김종오 대령을 비롯한 예하 사병들의 철저한 준비태세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중 청성부대 예하 제 16포병대대의 활약은 춘천-홍천전투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북괴군이 하숙집 주인을 반동으로 몰아 체포하도록 만들었을 만큼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였던 이들의 활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빈약한 전력 그러나

 

현재 국군은 서방세계 최대의 포병전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MLRS 외에도 우리의 자랑인 K-9 자주포 및 각종 국산화된 자주포 및 견인야포를 보유중입니다.  군단 직할의 포병 여단 외에도 각 사단별로 수개 포병대대로 구성 된 포병연대를 편제하고 있는 막강 전력입니다.  상대적으로 북한의 포병전력이 엄청나지만 사실 국군의 포병전력 또한 상당한 수준입니다.

 

[ 한국전 초기 국군이 장비한 M-3 ]

 

그러나 1950년 한국전 발발 당시 국군의 포병전력은 M-3 105mm 견인곡사포 91문만을 보유 하였을 뿐입니다.  수량으로 따져도 현재 1개 포병연대의 보유 야포수보다 조금 많은 정도이고 화력은 비교조차 못 할 정도로 작은 규모였습니다.  더욱이 M-3 곡사포는 당시 미군이 표준으로 사용하던 M-2 105mm ( 현재 M-101 105mm 곡사포의 원형임 ) 를 축소 제작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미공수부대가 운용중인모습]

-3 곡사포는 공중에서 투하할 수 있도록 가볍게 제작한 야포로 1942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미군 공수 부대에 의해 2년 정도 운용됐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M-3 곡사포는  크기도 작고 포신도 짧아 가벼웠습니다.  때문에 비록 이동에는 편리하지만 그만큼 사거리 ( 유효사거리 6,500m 로 M-2 의 2/3 정도 수준임 ) 가 짧고 화력이 작은 것이 약점이었던 곡사포였습니다.

 

[ 북한군의 주력 122mm 곡사포 ]

 

지금과 비교하여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겠지만, 문제는 당시 북한이 보유한 야포는 동구권 표준의 최신 122mm 곡사포였습니다.  당연히 화력과 사거리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열세였고 거기에다가 북한은 SU-76 자주포 등 각종 야포로 무장한 강력한 포병세력을 가지고 있어 보병사단에 포병연대를 편제 할 만큼 수량 또한 충분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군은 1개 사단에 1개 포병대대를 간신히 편제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누누이 설명 드린 것처럼 청성부대는 사단장이하 전 장병들이 철저한 훈련과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였습니다.  전쟁직전 대부분 국군이 경계 상태를 해제하고 휴가를 가거나 모내기 지원을 나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청성부대 전쟁직전 귀순한 북괴군 자주포부대 병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 한국전 초기 남침의 선봉이었던 SU-76 자주포 ]

 

또한 이 글의 주인공 제 16포병대대는 김성 소령의 지휘 하에 비록 객관적인 화력이 적보다 열세에 있었으나 사전에 준비태세를 확고히 하여 적의 전투력이 모일 주요 접근로상에 화력을 집중하는 연습을 반복하였습니다.  평상시 대대 장병들로부터 너무 가혹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주야간 훈련을 강행하며 사격술을 연마하였는데 대대 군의관까지도 포사격을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1950년 38선을 경계로 하여 춘천 북방에는 북괴 제 2사단, 제 7사단, 제 15사단, 독립전차연대로 구성된 3만5천제 2군단이 포진하고 있었고, 반면 이를 방어 할 아군은 6월 20일 서울에서 인제로 이동한 제 2연대, 춘천에 주둔하였던 제 7연대, 50년 5월 1일 남원에서 공비토벌 후 원주로 이동하여 사단 예비로 있던 제 19연대 및 제 16포병대대로 구성된 약 1만청성부대였습니다.

 

병력은 물론이거니와 장비까지도 절대 열세인 상태에서 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하지만 3 배가 넘는 ( 화력까지 계량화 한다면 5~7 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 됩니다 ) 적들의 공격을 위대한 청성부대 용사들은 용감히 막아내었고 효과적으로 격퇴하여 나갑니다

'전쟁..... > 한국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펠러 기로 미군 최신 전투기를 격추한????  (0) 2013.01.14
靑星 砲兵의 神話 [ 2 ]  (0) 2013.01.08
3.7 DMZ 포격 사건.  (0) 2013.01.08
국군 6사단 맹활약  (0) 2013.01.03
영광의 國軍 機甲史  (0) 2013.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