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적으로 사단급 부대의 경우 3개의 보병연대와 포병연대를 예하부대로 거느리고 있고 한국군도 그러합니다. 한국전 이전에 창설되었던 1, 2, 3, 5, 6, 7, 8, 수도경비사령부 ( 한국전 도중 수도사단으로 개편되며 현재의 수도방위사령부와 직접 관련이 없음 ) 의 8개 사단은 각각 2 ~ 3개 연대를 예하부대로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대는 이후 창설된 여러 사단급 부대와 비교 할 때 예하연대의 예속변경이 많았습니다. 아래의 표는 사단 창설시와 한국전 종전시의 예하연대의 변경 내용입니다. 이런 이유는 창군 당시의 여러 사정과 전쟁 중 작전상 필요에 의해서였습니다. 때문에 앞전에 언급한 8개 사단의 경우도 사단의 역사가 예하 연대의 역사와 반드시 일치 하지는 않습니다.
자료를 살펴보면 숫자가 아닌 기갑이라는 단대호를 가진 연대를 볼 수있습니다. 바로 기갑연대였는데 지금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전통의 부대입니다. 단대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K-1 전차와 K-200 장갑차로 대표되는 ( 차후 XK-2 와 NIFV 로 무장되겠죠 ^^ ) 세계적 기갑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는 대한민국 육군 기갑 ( 기계화 ) 부대의 시작과 관련이 있는 부대 입니다.
1948년 12월 10일 서울 서빙고에서 독립수색단으로 창설된 이후 여러 차례의 배속 및 독립의 과정을 거쳐 수도사단 예하 연대로 월남전까지 참전한 기갑연대의 역사는 바로 한국군 기갑 ( 기계화 ) 부대의 역사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빈약한 출발 이었고 한국전 당시 북괴군 105땅크여단과도 비교 되지 않는 빈약한 장비를 무장한 상태로 참전하여 많은 손실을 입기도 하였지만 막강 한국 기갑전력의 선구자로서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용맹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음은 기갑연대의 예속 및 참전기록 입니다.
1948년 12월 10일 독립수색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기갑연대 창설
1949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 ( 현 수도기계화사단 ) 를 창설시 예속
1949년 11월 15일 육군본부 직할의 독립연대로 예속 전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 발발과 동시에 참전
1950년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 시 각 혼성사단에 분산 예속
1950년 8월 28일 수도사단에 예속되어 종전 시까지 주로 동부전선에서 전투
1965년 10월 23일 수도사단 예속부대로 월남전 참전
1974년 이후 월남 철군 후 기계화사단으로 개편 시 기갑여단으로 변경
다음은 창설 당시와 현재의 편제 비교입니다.
창 설 기
장갑대대 - 예하 3개 중대 / 기병대대 - 예하 2개 중대 / 도보대대 - 예하 2개 중대
현 재
수개의 전차대대와 기계화보병대대로 구성 됩니다. 이 이상은 군사기밀 사항이기 때문에 아쉽게 생략합니다 ^^
그러면 국군 기갑 ( 기계화 ) 부대의 시초가 되는 기갑연대의 창군초기 모습, 한국전 당시 이들이 흘렸던 피눈물 그리고 이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전선에서 적과 맞섰던 투쟁의 역사에 대해 각 예하 대대별로 나누어 알아보겠습니다
장갑대대의 주력
기갑연대에서도 핵심전력은 3개의 중대로 구성 되었던 장갑대대입니다. 미군정이 물러나면서 약간의 장갑차량을 인수하여 창설된 부대로 당시 최강의 전력을 갖춘 대대로 평가를 받지만, 반면 당시 한국군 무장이 얼마나 빈약하였는지 반증 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장갑대대는 M-8 정찰장갑차 27대, M-2 반궤도차량 24대과 약간의 Jeep 차를 보유 하였습니다. 이런 빈약한 세력으로 한국군 기갑 ( 기계화 ) 부대의 역사가 쓰여 지게 된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기갑연대 주력이었던 장갑대대, 그 중에서도 핵심전력이었던 M-8 장갑차의 활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1949년 광복절 시가행진당시 ]
M-8 정찰장갑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정찰용으로 개발된 경장갑차입니다. 그나마 건군 초기 육군이 유일하게 운용한 중장비여서 시가행진 등 공개 행사에서 국군의 위용을 국민에게 어필하는 주요 무기였습니다.
제 원
무게 - 17,400 lb / 길이 - 16' 5" ( 포신 포함 ) / 높이 - 7' 5" / 넓이 - 8' 4" / 최고 속도 - 60 mph / 야지 속도 - 30 mph / 작전반경 - 350 miles / 주무장 - 37 mm M6 ( 80발 ) / 부무장 - 12.7 mm 기관총 ( 1,500 발 )
[ 시가지 행진의 또다른 한컷 ]
그런데 M-8 장갑차들은 집중 운용되지 않고 소대별로 분할하여 전방의 각 사단에 배속 운용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화력지원이 주 목적이 아니라 바로 통신 때문 이었습니다. 지금이야 통신강국 KOREA 이지만, 해방 후 우리나라의 통신사정은 몹시 열악하였고 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M-8 장갑차에 장착된 SCR-506 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에 적합하였고, 이런 이유로 서울 남산의 기갑연대 통신소를 키스테이션으로 하여 육본과 전방 각 사단의 통신에 유효 적절히 사용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강원도 강릉의 8사단에 배속한 M-8 장갑차에서 송신한 육성이 서울 남산의 기갑연대 통신소에서 수신되었다고 전합니다.
[ 당시에도 지상군 페스티벌이 ? ]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M-8 장갑차도 정찰과 통신용으로만 운용될 수는 없었습니다. 북한군의 전차에 속수무책으로 전방의 부대들이 유린되자 M-8 은 T-34 전차를 막기 위해 출동 합니다. 명령을 내린 상부나 이를 운용하던 병사 모두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망설임이 없이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출동하였습니다.
[ 7사단 지원을 위하여 출동하는 모습 ]
의정부 축선을 방어하던 7사단을 도우기 위해 출동하였던 M-8 의 37mm 주포가 불을 뿜어 수많은 철갑탄을 적 전차에 명중하였지만 대부분 튕겨 나가는 참담함과 함께 차례차례 적 전차의 희생양이 되어 갔습니다.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M-8 장갑차는 김포와 영등포 일대에서 북한군 6사단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칠 때 큰 활약을 하였고, 옥천 지연전에서는 T-34 전차의 캐터필러를 명중시켜 기동 불능 상태에 빠뜨려 전차 공포증에 빠져있던 아군에게 용기를 불어 넣기도 하였습니다.
[ 1960 년 동일 차체를 쓰던 M-20 의 모습 * 출처 : 4.19민주혁명회 ]
이렇듯 개전 초 성능 이상의 활약을 펼친 M-8 장갑차는 여러 전투에서 차례로 파괴되었고, 북진 시 청진부근에서 전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흥남철수 적재품목에서 발견 되지 않아 결국 1950년말 한국군 전력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4.19 당시의 사진을 보면 M-8 과 동일한 차체를 쓰던 M-20 정찰장갑차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쉽지만 사진으로나마 M-8 부대원들의 무용담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갑대대의 기타전력
장갑대대의 주력은 물론 M-8 이었지만 그 보조전력으로 약간 수량의 반궤도 차량과 정찰용 Jeep 을 운용하였습니다. M-8 이 오늘날 MBT 역할을 하였다면 반궤도 차량은 APC, Jeep 은 기갑수색대 역할을 하였다고나 할 까요 ? 혹시, 기갑 부대를 전역한 예비역이나 현역 장병들께서는 기가 찰 정도의 빈약한 장비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한국군 기갑 ( 기계화 ) 부대의 역사는 이렇듯 빈약하게 출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초창기 우리 선배들은 이런 빈약한 장비에도 굴하지 않고 적들과 용감히 맞서는 호국의 첨병으로써 역할을 다 하였습니다.
M-2 ( Half Track Truck ) 반궤도 차량
[ 제2차대전 당시 미국이 사용하던 M-2 Half Track Truck ]
장갑대대는 미군이 사용하던 M-2 / M-3 반궤도 차량 24 대를 운용하였는데 한국군은 이들을 반장갑차라고 불렀습니다. 반궤도 차량은 전차부대의 호위를 받는 보병들을 신속 정확하게 전선으로 운반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제2차대전 당시 독일의 하노마그나 미국의 하프트랙들은 야지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반궤도를 장착한 일종의 트럭이었지만 우리는 이를 장갑차로 여기고 귀하게 운용하였습니다.
[ 실미도 사건 당시의 수경사 M-16 Half Track Truck ]
중무장한 기갑부대의 호위를 받아야 그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수송용 장비를 우리는 일선의 전투용 장비로 운용하였던 것 입니다. 사실 이런 반궤도 차량으로 이동하는 보병을 호위 할 기갑세력도 없었지만요. 하지만 말만 장갑차이지 장갑 능력과 화력이 빈약하였던 관계로 전쟁전 여순반란사건같은 작전 시 병력수송 용도로만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기갑연대가 보유했던 반궤도 차량은 경북 청송에서 북한군 12사단에 포위당했을 때 적들의 진격을 기갑연대가 10일 이상 막으면서 분투하던 도중 장열하게 전멸합니다. 아쉽게도 당시 사진은 구 할 수 없고 한국군이 이와 비슷한 M-16 차량을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운용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실미도 부대원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였던 수경사대원들의 사진들 중 일부 입니다.
Jeep 전투지원차량
약간 댓수의 Jeep 에 기관총을 장착하여 정찰 및 수색용으로 사용 하였습니다. 사진으로 보면 Browning M1919 기관총 같습니다만 (?) 이동 중 사격은 정확도 등을 고려 할 때 별다른 효과가 없어 보입니다. 아마도 정차 중 사격이나 목표까지 이동 후 탈착하여 사격하는 전술을 사용 하였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미군이 운용하는 험비 고기동차량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되나 험비와 비교한다면 말도 안 되는 빈약한 장갑 및 기동능력의 열세가 보인다는 것을 추측 할 수 있겠습니다.
전쟁 전 미군군사고문단 보고서에 따르면 전격작전 훈련시 Jeep 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적의 배후를 우회 포위하는 전술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고 기록 되었으나 비정규전 같은 상황에서나 효과가 있었을 것 같고 전쟁 같은 전면전에서는 별다른 전과를 올리기 힘들었다고 추측 됩니다.
비록 빈약한 장비였지만 M-2 반궤도 차량과 Jeep 전투차량은 당시 기갑연대 주력부대인 장갑대대의 보조전력으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그 맡은 바 임무이상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
영광의 기병대대
기갑연대에는 기마 300필을 보유한 2개 중대 규모로 이뤄진 기병대대가 있었습니다. 요즘 일부국가의 산악부대외에는 전투부대로 기병대를 별도로 운용하는 나라는 더 이상 없으리라 생각 됩니다만 당시에는 엄연한 전투부대였습니다. 장갑대대가 전쟁초기 서서히 각개 격파 되었던 것에 비한다면 기병대대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전쟁초기 기갑연대의 제 부대들 중 최고의 전과를 올린 부대였습니다.
[ 전설의 지휘관 장철부 기병대대장과 미군사 고문단 ]
7월 말 경북 청송까지 후퇴한 기갑연대는 그 병력이 미약했습니다. 도보대대는 김포전투에서 상실되었고 장갑대대는 각 전선에서 거의 격파되어 M-8 장갑차 4대만이 청송으로 이동하였는데 비하여 오직 기병대대 200 여명의 병력은 그 전력을 보존하여 기갑연대의 주력으로써 활약 하였습니다.
오늘날 제1사단을 한국군 최고의 常勝부대로 손꼽는 이유 중 하나가 한국전 내내 편제를 유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부대들이 전쟁 중 해체 및 재창설의 과정 등을 겪고는 하였는데 제1사단만큼은 전략적 후퇴 시에도 대부분의 편제 및 장비를 보존하였고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훌륭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같은 이유로 기갑연대 중에서도 최후까지 전력을 보존하여 방어전을 펼쳤던 기병대대의 영웅적 노력은 두고두고 신화가 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 북진 중인 기병대대의 모습 1950년 10월 ]
50년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 후 한강도하를 감행 합니다. 이때 시흥전투사령부를 구성하여 한강 남쪽에서 북한군을 방어하던 부대 중 기병대대가 있었는데 천호동에서 한남동 대안에 이르기까지 넓은 정면을 방어하였고 후퇴 시 기병대의 기동능력을 이용하여 아군의 최후 철수부대로 후퇴하는 아군을 엄호하는 작전을 했습니다.
특히 미군전사에 따르면 7월 초순 경북 구미부근에서 미 제 24사단 63포병대대 B포대가 1개 대대병력의 북한군에 포위되어 몰살 당 할 위험에 처 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기병대대의 2개 소대가 적의 배후를 급습하여 이들을 구출한 전과가 상세하게 나옵니다. 이후 북진 작전에도 참여하였던 것으로 기록이 나와 있지만 1.4 후퇴 후 더 이상의 기록을 발견 할 수 없습니다. 아마 기병대가 전장 상황에 필요없다고 판단되어 해체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 전쟁 전 기병대의 모습 ( 재 창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
기병대는 오늘날 전장에서 필요 없는 전력이기는 하지만 전통을 단절하기에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구처럼 의장용 부대라도 일부 운영하였으면 합니다. 기마경찰대는 보았는데 국군 의장대에서는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말 값이 차 값 보다 비쌀지 모르겠군요.
도보대대의 옥쇄
도보대대는 경무장의 2개 중대 규모로 오늘날의 수색대대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던 부대였습니다. 전쟁개전 시에는 기갑연대의 본부 및 남산송신소등을 방어하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여 김포지구방어사령부 소속으로 방어전에 나섭니다.
[ 전쟁초기 후퇴 중 노상에서 잠시 휴식 중인 국군의 모습 ]
한국전 초기 당시 북한군중 최고의 기동을 보여주었다는 북한군 6사단의 김포반도도하 작전으로 한강이남에서 방어전을 펼쳤던 국군의 배후가 포위 될 위험에 노출하자 도보대대는 열악한 전력으로 약간의 M-8 지원을 받아 부천 및 오류동 방향으로 진출합니다.
그들은 병력과 화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쟁초기 북한군 최강이던 6사단과 혈전을 벌였고 놈들에게 상상외의 타격을 입히게 되나 결국 부대가 해체 될 만큼의 반격을 입게 되고 지휘관은 자결을 합니다.
님들의 전설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전쟁초기 산화한 부대였지만 그들의 용맹으로 시흥전투사령부의 각 부대가 수원 이남으로 후퇴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됩니다. 도보대대의 용맹함은 오늘날 국군 수색대대나 수색중대와 같은 첨병부대들이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소년전차병의 잊혀진 기록
무늬만 기갑이었고 말로만 장갑차인 어수룩한 장비를 갖추어, 사실 기갑부대라고 칭하기 부끄러운 기갑연대를 보유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국군은 제105땅크여단을 주축으로 하여 T-34 200 여대를 앞세운 북괴군의 기습에 개전초기 일방적으로 밀려서 후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 제105땅크여단 소속 T-34 ]
탱크를 막을 제대로 된 무기도 없었고 대전차 전술 또한 부재하였기 때문에 설령 기습이 아니고 선전포고를 한 후 시간을 가지고 전면전을 개시하였어도 밀물처럼 내려오는 북괴군 기갑부대를 막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울분에 찬 병사들이 춘천의 말고개 전투를 비롯한 여타 전투에서 비록 육탄으로 적전차를 막아내었으나 이 또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 육탄용사들의 추모동상 ] 이런 이유로 국군은 극심한 전차 공포증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전차를 비롯한 기갑장비의 보유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미군의 참전으로 아군에게도 기갑지원이 가능하게는 되었지만 국군이 본격적인 기갑장비를 갖추게 된 것은 좀더 시간이 흐른 이후 입니다.
[ 전쟁초기 아군의 기갑전력은 미군의 지원에 의존 하였습니다 ] 1950년 11월29일 미군의 원조로 M-36 잭슨 경전차 6대가 훈련목적으로 최초로 도입되고 동래에 위치한 육군종합학교에 전차병과가 설치됨으로써 국군이 그렇게 소원하던 전차중심의 기갑부대의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드디어 1951년 10월5일 제51, 제52전차중대가 창설되어 국군은 제대로 된 전차부대를 편제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M-36 은 비록 90mm 대구경 포를 장비하였지만 Open Top 구조를 가진 빈약한 방어력의 경전차로 미군에서는 보병 화력지원용 이동포로 구분하던 전차가 아닌 전차였습니다. 당시 국군은 부족한 포탑 방호력을 보강하기 위해 철판을 포탑에 덧대거나 심지어 샌드백을 쌓아 놓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 M-36 Jackson 경전차 - 국군 최초의 전차로 이용 되었습니다. ] 하지만 M-2, M-3 Half Track 를 반장갑차로 칭하였고 M-8을 국군 최고의 중화기로 여겼던 창군초기처럼, M-36은 국군 기갑사에 있어 최초의 전차로 귀하게 여겨지고 운용되기 시작합니다. 참전용사의 증언에 따르면 “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M-36 을 몰고 가서 90mm 주포를 사격하면 보병들의 사기가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고 하였을 정도로 전쟁초기 북한 전차에 일방적으로 치욕을 당할 밖에 없었던 한국군의 사기앙양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M-36 운용과 관련하여 戰史에 공백으로 남은 학도병 전차부대 이야기가 있습니다. 1952년 4월 약관의 16~18세 학생출신 120여명으로 구성되었던 제57전차중대의 소년전차병들이 바로 주인공들입니다. 이분들은 소년전차부대 창설에 선발된 인원은 하사관 신분으로 일본에서 6개 월 동안 기술교육을 시켜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대하였으나, 일반병 신분으로 논산훈련소와 전차교육대에서 3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곧바로 최전방 연천지역에 투입되었습니다.
[ 전방으로 출동하는 제57전차중대의 모습을 담은 귀한 사진 입니다. 출처 : 오명섭 선생님의 http://myhome.naver.com/boy_tank ] 제1사단과 함께 연천 지역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현재 대한민국 軍史 어디에도 이 분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있습니다. 노병의 증언에 따르면 “고지에서 밀려 퇴각할 땐 탱크 뒤에 아군의 시체를 십여구씩 매달고 내려왔다”고 당시를 회상하였을 정도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그들의 피눈물은 단지 학도병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어 잊혀진 이야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 소년전차병 참전 추모비와 생존 노병들의 헌화 출처 : 오명섭 선생님의 http://myhome.naver.com/boy_ta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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