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포위
1950년 6월부터 그 이듬해 6월까지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정신이 없던 전쟁이었습니다. 낙동강에서의 피 말리던 두 달간의 공방전을 제외한다면 자고나면 전선이 바뀔 정도로 반복되는 진격과 후퇴가 일상이었습니다. 미 2사단도 해체의 위기를 딛고 재건이 되었지만 이 같은 전쟁의 양상으로 말미암아 사실 미 2사단외에도 피아의 많은 부대들이 무너졌다 다시 만들어지기를 반복하였습니다.
[ 개전 1년 동안 많은 피아 부대들이 무너졌다 재건되고는 하였습니다 ]
그렇다보니 어렵게 재건된 부대에게 암묵적으로 요구된 사항이 있었는데 그것은 치욕을 능가하는 복수였습니다. 그런데 전황이 롤러코스터 같았던 한국전쟁 초반기는 의외로 복수의 기회가 빨리 찾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사창리 패전을 극복하고 용문산-화천호 대첩으로 멋지게 복수에 성공한 오래전에 소개한 청성부대의 사례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재건에 박차를 가하던 미 2사단에게도 반격의 기회가 곧바로 다가왔습니다.
[ 재건된 부대에게는 복수의 의무가 암묵적으로 부여되었습니다 ]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중공군에게 다시 한 번 내주고 아군이 37도선 이남으로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할 무렵에 재편 중에 있던 미 2사단은 흥남으로 철수하여 중부전선으로 작전 구역을 변경한 미 10군단 예하로 새롭게 편입되어 방어전에 임하였습니다. 공산군은 서울을 재점령한 기세를 발판삼아 남쪽으로 돌파구를 계속 확대하려 공세를 가하였는데 이를 흔히 정월공세 혹은 중공군 제3차 공세라고 합니다.
[ 서울을 점령한 공산군은 공세를 재개합니다 ]
이때 공산군은 미군의 화력 때문에 서부전선으로의 돌파가 용이하지 못한 점을 감안하여 주로 국군이 담당하던 동부전선을 공격로로 예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아군 후방인 안동 일대에 북괴군 2군단을 은밀히 침투시켜 게릴라 활동을 실시한 후, 북괴군 3군단으로 하여금 단양-안동 방향으로 공격하여 전후방을 동시에 교란시키려 하였습니다. 이때 2, 9, 31사단으로 구성된 북괴군 3군단이 돌파하려 몰려든 곳이 원주 지역이었습니다.
[ 요충지인 원주 지역으로 북괴군의 공세가 집중되었습니다 ]
당시 원주를 담당한 부대가 미 2사단이었는데 군우리에서의 부상을 털고 신속히 재건을 막 마친 상태였습니다. 1월 5일 북한군의 돌파가 시도되었는데 압도적인 병력으로 세 곳으로 동시에 진격하여 미 2사단을 전면에서 압박하여 원주에서 몰아냄과 동시에 배후를 차단하여 일거에 섬멸하려 하였습니다. 압도적인 적에게 결국 미 2사단은 한국전쟁에서 기록된 두 번째로 포위를 당하였습니다. 그것도 군우리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당한 위기였습니다.
[ 세 군데로 동시에 공세를 가한 북괴군 3군단은 미 2사단을 포위하였습니다 ]
하지만 '인디언 헤드'들은 군우리에서의 교훈을 잊지 않았습니다. 단지 포위되고 사방에서 총탄이 날아온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응집된 저항을 못해보고 무너져 내린 경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북위 37도선 일대에 강력한 주저항선을 구축한 상태로 전략적으로 실행된 1.4 후퇴는 아무대책 없이 무너져 내리던 청천강교두보와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미 2사단은 포위당하였지만 당황하지 않고 저항에 나섰습니다.
[ 미 2사단은 당황하지 않고 극렬히 저항하였습니다
(원주전투 당시에 고지를 선점하려 눈 속을 진군하는 미 2사단 장병들) ]
원주는 아군 방어선의 정중앙으로 이곳이 돌파당하여 북괴군이 안동까지 남진한다면 전선 전체에 후퇴를 강요시켜 또다시 아군을 낙동강교두보까지 밀어 붙일 수도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미 2사단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북괴군의 공격을 신속히 배치된 제37포병대대, 프랑스대대, 네덜란드대대 그리고 공군의 지원으로 하나하나 격퇴하여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 미 2사단은 포위망을 허물고 반격에 나서 원주를 탈환하였습니다
(원주전투 당시 공세로 나가는 미 2사단 장병들) ]
일주일간 계속된 미 2사단과 북괴 3군단간의 공방은 보급과 화력에서 열세를 보인 북괴군이 먼저 무너져 내렸고 이때 포위망이 풀린 미 2사단은 여세를 몰아 1월 13일 적을 격멸하고 원주를 재탈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후퇴를 거듭하던 시련기에 미 2사단의 이런 분투는 공산군이 37도 이남으로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도록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복수극이 인디언헤드들에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배가 고팠습니다. ( 계속 )
'전쟁..... > 한국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전쟁 신화를 만든 6사단 2연대 1대대 장교들 (0) | 2013.01.03 |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7 ] (0) | 2013.01.03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5 ] (0) | 2013.01.03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4 ] (0) | 2013.01.03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3 ] (0) | 2013.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