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프랑스가 지원했고 조선의 독립을 중국이 지원했듯이, 인도의 독립을 지원한 것 역시 영국과 전쟁을 하고 있던 독일과 일본이었습니다. 이중에서 인도 국민군과 찬드라 보스의 사례는 유명하지만, 별로 유명하지 않은 다른 사례가 또 있더군요.
처음 이야기할 것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있었던 지원사례입니다.
1차 대전 당시, 해외에 있었던 인도인들의 상당수는 영국이 전쟁을 하는 것은 인도가 혁명을 일으켜 독립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는 아직 간디가 전국민적인 비폭력 운동을 벌이기 전이었거든요. 그중 독일에 있던 인도인들은 비렌드라나트 챠드바티야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조직을 결성, 무기를 반입하여 인도 내에서 혁명봉기를 기도합니다. 이들은 독일정부로부터 무기, 탄약, 자금 원조를 받아 이것들은 매버릭(SS Maverick, 1,749t)호라는 유조선에 싣고 인도로 반입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매버릭호는 1890년에 미국 볼티모어에서 건조되어 뉴욕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 of New York)에서 처음 인수해 운영했었고, 1899년에 폭발사고를 한 번 겪은 후 수리되어 운용하다가 매버릭 기선회사(Maverick Steamship Company)에 팔렸습니다. 그리고 1915년 4월, 매버릭 기선회사는 이 배를 독일제국해군(Kaiserliche Marine)의 장교인 F. 젭센(F. Jebsen)에게 임대했는데, 젭센은 또 다른 독일의 비밀보급함인 마자틀란(SS Mazatlan)호의 지휘관이기도 했습니다.
독일측의 계획은 이 배에 무기를 실어 인도로 반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독일 무기를 싣고 독일에서 인도로 가는 건 아니었어요. 그런 짓을 했다간 바로 영국 해군에게 나포당합니다(웃음). 크루프 사의 미국내 대리인인 한스 타우셰어(Hans Tauscher)가 프란츠 폰 파펜(히틀러와 함께 활동했던 그 파펜 맞습니다. 1차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정보업무를 담당했죠^^)의 지시를 받아 미국에서 무기를 확보했고, 이 미제 무기가 인도에 원조될 예정이었던 겁니다. 사실 1915년 당시에는 미국이 중립국이었으므로, 독일인이 미국 배를 용선하거나 미국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었지요.
매버릭호에는 무기 외에도 인도의 혁명운동가인 하리 싱(Hari Singh)과 4명의 동료들이 "페르시아인 선원"으로 위장하고 본래 승무원 25명과 함께 타고 있었고, 이들은 인도에서의 정치선전을 위하여 자신들이 속한 가다르 당(Ghadar Party)의 선전물도 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버릭호는 직접 무기를 싣지는 않았습니다(유조선이 무기를 싣는다면 누구나 의심하겠지요?). 이들은 바다 중간에서 다른 배와 만나 그쪽이 싣고 온 무기를 인계받을 예정이었지요. 미국에서 직접 무기를 실어내는 이 역할은 애니 라센(Annie Larsen)호라는 스쿠너 선이 맡았습니다. 애니 라센호는 당시 내전중이던 멕시코에 무기를 밀수하러 가는 것으로 위장해서 미국과 영국 정보당국을 속이고 무기를 반출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그만 매버릭호와의 랑데뷰에 실패하고 맙니다. 본래 두 배는 1915년 3월에 멕시코 근해의 소코로 섬(Socorro Island)에서 만나 애니 라센호에 싣고 온 무기를 매버릭호로 옮겨실을 예정이었는데, 매버릭호가 그만 로스앤젤레스에서 드라이독에 들어가 수리를 하는 바람에 약속에 한 달 넘게 늦어버렸거든요. 결국 애니 라센호는 한 달 동안이나 하염없이 상대를 기다리다가 매버릭호를 찾으러 짐을 실은 채 샌디에이고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매버릭호는 하필 그때 약속장소에 도착했죠. 하지만 애니 라센호는 이미 소코로 섬에 없었고, 결국 매버릭호는 홀로 하와이를 향합니다. 기다리다 지친 라센호가 먼저 호놀룰루로 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중간에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는데, 이미 보셨다시피 상대는 정 반대로 가고 있었죠. 애니 라센호는 여기에다 폭풍까지 만났고, 결국 워싱턴주의 호퀴암(Hoquiam)에 입항하는데 여기서 영국 정보기관의 귀띔을 받은 미국 세관으로부터 임검당해 모든 화물을 뺐기고 맙니다.
한편 매버릭호는 별 탈 없이 호놀룰루를 거쳐 자카르타에 도착합니다만, 무기를 가져오지 못했으므로 선전물을 인도에 들여보내는 임무만 수행하다가 1917년에 침몰했다고 합니다. 이때 외에도 작전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므로, 독일이 인도인들에게 제공한 소총은 총계 7만 5천정이 넘는다고 하네요. 그 외에 막대한 양의 탄약과 권총 및 기관총도 상당수가 제공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역시 독일, 이번에는 2차대전 당시의 일입니다.
이번 전쟁에서도 영국은 독일의 적이었으므로, 이번에도 독일은 인도에서 혁명을 일으켜 영국을 약화시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이 초기부터 영국 편을 들었으므로 1차대전 때처럼 미국에서 무기를 조달해 인도로 보내는 식의 작전은 펼 수 없었죠.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합니다. 독일 내에 있는 인도인들로 군대를 편성해서 연합군과 싸우게 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 인도군단(Legion Freies Indien)이었습니다. 사실 이 부대는 정말 제대로 된 전투부대라기보다는 정치선전을 위한 선전도구로서의 역할이 강했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일단 부대로 편성이 되긴 되었는데, 사실 정상적으로 독일에 체류하는 인도인의 수가 그렇게 대규모가 되기는 곤란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다수의 인도인, 그것도 군사훈련을 받은 다수의 인도인을 확보하고 있었지요. 바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포로로 잡은 영국군 소속의 인도 병사들이었습니다. 일단 선발된 27명의 장교가 베를린으로 불려갔고, 그 뒤에 포로들 중 자원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6천명 규모로 편성이 됩니다. 포로들 외에 독일에 유학하거나 기타 이유로 체류하고 있던 인도인들이 영국을 타도하기 위해 자원해서 입대한 경우도 있다고 하고요.
이 독일군 부대에는 영국군 소속 인도인 부대와는 확연히 다른 원칙이 하나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종족별/종교별로 단위부대를 편성한 데 비해서 이 부대는 모슬렘, 힌두, 자트, 마라타, 라지푸트 등 제민족을 혼합편성했거든요. 이는 인도 독립운동에서 무투파의 영도자였던 찬드라 보스의 강력한 주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만 전 인도인의 단결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부대원의 2/3는 모슬렘이었고, 나머지가 힌두교도 및 기타 소수민족이었다고 합니다. 시크교도의 비중이 꽤 컸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들 인도 출신 독일병사들은 실제 전투임무에는 거의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일부 분견대(보병 2대대 소속의 제9중대)가 이탈리아에서 파르티잔 소탕에 투입되어 종전시까지 버티다가 항복한 것 외에 주력은 노르망디 상륙 이전에는 국방군 소속으로 대서양방벽의 요새선 구축작업에 주로 동원되었고, 미영 연합군이 상륙한 후에는 친위대로 전속(44년 8월)된 후 약간의 전투를 겪으면서 내륙으로 후퇴하여 1944년 겨울에는 독일 본토로 들어갑니다. 사실 본래 예정되어 있던 이들의 임무 중에는 동부 이란에 낙하산으로 강하하여 지금의 파키스탄인 발루치스탄에 잠입, 선동과 테러, 사보타주를 벌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만 이것 역시 제대로 되진 않았지요.
하지만 다음해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이들은 갈 곳이 없어집니다. 자유 인도 군단의 장병들은 논의 끝에 2.6km의 알프스 산길을 돌파하여 중립국인 스위스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미군과 프랑스군에게 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 소속 모로코 병사들이 포로가 된 상당수의 자유 인도 군단 병사들을 학살했는데 그 숫자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네요. 자기들도 식민지 출신이면서 왜 그랬을까...프랑스인 장교들이 사주했을까나요. 이후 영국군에 인수된 장병들은 인도로 송환, 반역죄로서 재판에 회부됩니다.
세 번째 사례는 2차대전에서 일본군 편에 선 인도 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입니다.
이쪽도 뭐 독일군 쪽과 비슷합니다. 이 부대 역시 말레이 전선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된 영국군 소속 인도 병사들을 대상으로 자원자를 모집해서 편성했거든요. 이쪽은 독일군 쪽보다 규모가 커서 총 43,000명 규모의 부대가 편성되었고, 임팔 전투에도 투입됩니다.
자, 그럼 이들 일본군과 인도국민군이 인도 국경에 근접했을 때 인도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먼저, 네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파시스트의 침략에는 저항한다! 일본군이 쳐들어오면 모든 것을 초토화하고 게릴라전을 수행하라!"
그 외에도 네루는 일본과 싸우는 중국 공산군을 위해 모금을 하거나 의료반을 조직하는 등 전쟁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조를 했습니다.
다음,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에는, 적에게 사용되지 않도록 곡물이나 가옥을 파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남겨놓도록 하시오. 그래서 만일 우리들이 공포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누구도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 말하자면 인도적인 동기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들이 가옥이나 곡물을 남겨놓는 것은 이성 있는 행위요, 희생이요, 또 용기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챤드라 보스까지 합하면 세 가지 스타일의 독립 지도자의 모습이 나온다고 할 수 있겠지요 :)
하지만 결국 일본은 인도에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패했고, 인도국민군도 잔존인원 약 16,000명이 다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중에서 꽤 많은 숫자를 차지했던 버마인이나 말레이인 지원병들은 바로 석방되어 민간인으로 돌아갔지만 12,000명의 인도인 장병은 전원 인도로 실려가서 수감됩니다. 영국군은 이들 반역자를 피부색깔별로 분리해서 수감했는데, 이중 약 2400명의 "백인(white)"(?!?!)은 석방하고 나머지만 재판에 회부했다고 하는군요. 독일에서 끌려온 자유인도군단 장병들도 인도국민군과 함께 수감,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들 장병들은 물론 영국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자입니다. 하지만 인도 민중의 의견은 전혀 달랐죠. 이들은 방향은 좀 잘못되었을지언정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운 영웅들이었거든요. 이들 장병들이 유죄판결을 받는데 항의하는 시위가 주요 도시를 휩쓸었고, 결국 흥분은 군대 내에까지 파급되어 1946년 2월 18일에는 봄베이(오늘날의 뭄바이)에 주둔하던 함대에서 인도인 수병들이 차별대우 반대를 외치며 스트라이크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영국인 장병을 하선시키고 농성을 벌이자 군 당국은 해산을 시도했지만 진압명령을 받은 인도인 병사들은 발포를 거부했고, 끝내 21일에 영국인 헌병대가 출동하여 7시간에 걸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결국 봄베이 시 전체가 혼돈 속에 떨어졌고, 카라치, 캘커타, 마드라스 등 다른 해군기지로까지 반란이 파급되었지요. 결국 지나친 희생이 나는 것에 공포를 느낀 회의파가 중재에 나서서 3일만에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을 투항시켰습니다(3일간의 전투로 인한 공식적인 사망자 숫자는 187명). 반란을 일으킬 수병들도 더 이상 싸울 능력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영국이 아니라 인도에 항복하는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무기를 내렸지요. 결국 인도의 독립 의지를 확인한 영국은 1947년 8월 15일자로 인도를 독립시키게 됩니다.
덧 : 참, 위에서 이야기한다는게 까먹었던 거.
인도국민군 병사들의 재판 있잖습니까? 그때 그 병사들 변호한 변호사가 말입니다.
자와할랄 네루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변호사 업무 그만둔지 근 30년 만에 다시 법정에 선 거였다고 하더군요^^;
일본군의 침입에 그토록 강경하게 거부반응을 보였던 네루가 인도국민군 병사들의 변호에 나섰던 것만 보아도 인도국민군에 대한 인도인 일반의 감정이 어땠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자료 출처 :
위키피디아(영) -
Christmas Day Plot
Franz von Papen
Indian National Army
Indische L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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