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양차 세계대전 당시의 위장전함들

구름위 2012. 12. 2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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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는 정면으로 맞붙는 정공법도 있지만 갖은 책략과 속임수로 상대방을 멋지게 속여넘기는 기만책도 종종 큰 효과를 보이곤 합니다. 그 때문에 트로이의 목마부터 걸프전쟁의 목제 전차에 이르기까지 전장에서는 다양한 기만수단이 존재해왔죠. 해상에서도 이런 기만책은 유용하게 사용됐는데 근세의 해적 & 사략선들은 국적기를 바꿔달거나 승조원들을 일반인으로 위장하여 그들의 표적들을 방심시키곤 했습니다. 이런 기만책도 해적의 쇠퇴와 사략행위의 금지 등으로 인해 19세기말 경에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부활하게 되었죠. 중립국 상선으로 위장한 독일의 통상파괴함, 그 통상 파괴함을 잡기 위해 상선으로 위장한 영국의 무장상선, 적 잠수함의 기만을 위한 Q-Ship 등등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한번쯤 들어보신 적이 있을겁니다. 하지만 이런 기만책들이 어디까지나 배의 일부분을 개수하거나 동일 함종 내에서의 변화를 꾀한 것에 불과한 반면, 이번 글에서 다루는 “위장전함”은 아예 상선을 전함처럼 보이도록 배 자체를 뜯어고치는 황당하고도 엉뚱한 방법이었습니다.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영국과 독일은 북해를 사이에 두고 막대한 건함경쟁을 벌여왔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이제 양국은 상대방의 주력함 숫자, 배치상황, 위치 등등을 파악하거나 혹은 상대방을 기만하기 위해 서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영국 해군은 독일해군을 기만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민간 상선과 대서양 항로 여객선을 개조하여 전함처럼 보이게 한다는 계획을 수립했죠. 총 14척(유조선 2척, 여객선 12척)의 선박이 징발되었고 각각의 배들은 특정한 전함/순양전함의 외관과 유사하도록 개조되었습니다. 갑판에는 합판으로 만든 포와 포탑이 설치되었고 그 외에 연돌이나 부포, 기타 장비들도 목재와 캔버스 천으로 실물과 유사하게 만들어져 설치되었죠. 실제의 무장은 일체 설치되지 않았고 한 두 척의 배에만 소구경 속사포 정도가 설치되는데 그쳤을 뿐이었습니다.







이들 위장전함들의 목적은 독일해군을 혼란시키고 이쪽의 함대세력을 오판하게 하여 실수를 하게끔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들을 취역시키고 난 후에는 ‘과연 독일해군이 얼마나 속아넘어갈지 의문스럽다’는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죠. 그도 그럴 것이, 우선 위장전함은 갑판 위쪽의 외관은 제법 그럴 듯 했지만 상선 특유의 높은 건현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거리에서는 쉽게 위장함임이 들통나기 쉬웠습니다. 둘째로는, 위장함들이 있건말건 독일해군은 애초부터 영국해군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수세적으로만 행동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쓸데없는 짓에 귀중한 선박들을 투입하기 보다는 병력 수송 등이 더 절실하다는 이유로 위장전함들은 1916년 봄에 이르면 대부분 원래의 역할로 복귀하게 되었죠.



개조된 14척중 단 1척만이 위장전함 임무 수행 중에 격침되었는데, 그 배는 순양전함 타이거로 개조되어 다다넬즈 해역에 투입되었다가 어뢰에 피격되었죠. 이때, 배가 침몰한 후에도 포탑은 여전히 바다에 둥둥 떠다녀서(나무로 되어 있으니^^;) 터키측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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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에 사장되었던 위장전함은, 2차대전이 발발한 직후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지시에 의해서 다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 초에 낡은 상선 3척이 각각 항모와 전함 2척으로 개조되었으며 이들은 독일 해군을 기만하기 위해 팀을 짜고 북해와 영국 북부 해역을 돌아다녔죠. 다만 이들의 역할은 1차대전 때처럼 단순히 독일측에 탐지되기만 하면 되는게 아니라 좀더 복잡한 방식으로 변화했습니다. 이를테면..

1) 스카파 플로에 대기하여 독일의 항공정찰시 이쪽의 전함 숫자를 부풀리거나 출동중인 전함이 정박중인 것처럼 기만.
2) 위장함을 선단에 포함시켜 부족한 호위함 숫자를 부풀려 보이게 함.
3) 위장함들로 이루어진 가상 함대를 조직하여 실제 함대세력의 위치, 작전 목표 등등을 교란.
4) 위의 가상 함대를 일부러 미끼로 던져놓아 유보트나 독일 항공기의 공습을 받도록 함 (미끼를 노리고 달려들 유보트 등을 매복하여 습격할 수 있도록)


특히 4번 같은 경우는 임무의 성격상 일부러 적의 시선을 끌어 위험을 자초해야 하는데다가, 위장함에 반격 수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한 임무였습니다. 이 배의 승조원들은 반쯤 체념하는 기분으로 배에 올라탔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도 이들 가상함대가 독일군의 습격을 받은 일이 없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죠. (위장함임이 간파되었기 때문일지도...;;)

또한 위장함들을 단순히 외관만 그럴싸한 것이 아닌 실제의 전함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1940년의 어느 날 처칠이 스카파 플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유독 위장전함 주위에만 갈매기가 전혀 없어서 부자연스럽다는 점을 지적했고 (실제 함선에서는 각종 생활 쓰레기가 배출되므로 갈매기가 꾀입니다) 그 덕분에 함대 사령부에서는 매일 위장전함 주위에 갈매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음식물들을 흩뿌려야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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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2차대전중 가장 주된 위장전함은 HMS 센츄리온일 것입니다. (관련 글은 ???님의 블로그를 참조. ---> 글 보러가기)

전함 센츄리온은 1911년에 건조된 킹죠지V 급 2번함이며 (2차대전 때의 KGV급과는 다른 녀석들) 워싱턴 조약으로 인해 무장이 철거된 후 표적함으로 사용되던 상태였습니다. 1941년, 표적함 센츄리온을 아직 건조가 진행중이던 KGV급 4번함 앤슨의 위장함으로 사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센츄리온은 완벽한 KGV급으로 보이기 위해 나무로 된 4연장 포탑이 부착되었고, 나무로 된 가짜 연돌도 세워졌으며 마스트나 도색 등도 당시의 KGV급과 거의 동일한 형태로 설치되었죠. 이제까지처럼 상선을 전함으로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전함이었던 것을 개조하는 것이었므로 완성된 결과물은 만족스러운 수준이었습니다.


[HMS 앤슨 : 위장함 형태와 원본과의 비교]

이렇게 해서 다시 태어난 센츄리온의 임무는 완벽히 앤슨으로 위장해서 독일의 눈을 완전히 돌리는 것이었고, (그동안 실제 앤슨은 건조를 마친 후 스카파 플로로 이동하여 티르피츠 사냥 대열에 합류할 예정이었습니다) 마치 동양함대에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게 지브롤터-서아프리카-케이프타운-인도양을 거쳐 봄베이로 이동했습니다. 목적지에는 무사히 도착했으나 지브롤터에서는 기관고장을 일으키고 서아프리카의 프리타운에서는 수송선과 접촉 사고를 냈으며, 희망봉 부근에서는 폭풍을 만나 목제 포탑이 모두 유실되는 등 자잘한 사고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1942년 6월에는 몰타 수송선단에 참가했는데, 이때 독일의 급강하 폭격기로부터 투하된 폭탄 1발을 맞고 손상을 받았습니다. 보통의 배라면 손상을 입는 것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지만 이런 위장함에서는 적의 공격을 받는다는 것이 밥값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의미이므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죠.

이후 센츄리온은 알렉산드리아에 정박하며 부유포대로 활용되다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임시항구인 멀베리의 방파제로 사용되기 위해 좌초되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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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전함 그라프 슈페 : 1번 포탑 위에 보이는 2개의 포신과 포탑의 재질은 모두 합판-_-;]

영국만이 위장전함을 운용한 것은 아니며, 독일도 그라프 슈페의 통상파괴 활동중 영국해군을 기만하기 위해 합판으로 된 포탑과 연돌을 설치하는 등의 위장활동을 했으며 1942년 경에는 브레스트에 정박중인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을 영국의 공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 노획한 구식 장갑순양함의 선체를 프린츠 오이겐처럼 개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이후로 위장함의 계보는 다시 끊어졌다고 보입니다. 레이더나 정찰위성 등 각종 감시장비가 발달한 현대에 와서는 이미 저런 고전적인 위장수법이 잘 먹혀들기 힘들고, 이라크 등이 써먹은 목제 전차 등에 비하면 위장함선은 크기도 커서 제작이 번거로우니 말이죠. 오히려 요즘 같아서는 영화나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위장전함 혹은 모크업이 활용됐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영화 ‘남자들의 야마토’ 촬영 현장에서도 1:1 스케일의 야마토 세트장이 제작됐고 이후 관광명소 등을 활용한다고 하니 어떤 돈 많은 사람이 비스마르크나 후드 같은 전함들의 1:1 모크업을 만들어서 테마파크나 기념관이라도 열어주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Charles Cruickshank, 손광진 譯, 『기만작전』,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 http://www.gwpda.org/naval/dummybbs.htm
- http://p069.ezboard.com/falltheworldsbattlecruisersfrm1.showMessage?topicID=1741.topic
- http://users.skynet.be/Gallipoli/fooling/fooling.htm
- http://www.winstonchurchill.org/i4a/pages/index.cfm?pageid=397
- http://www.grainger.de/dbe/sbs/gref0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