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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헨발트의 마녀

구름위 2012. 12. 25.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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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코흐 (Ilse Koch Born) 1906~1967

 

 

부헨발트의 마녀

 

일제 코흐는 성격이 잔혹하고 음란하여 부헨발트의 마녀 혹은 암캐라고 불렸다.

그녀는 SS 장교였던 남편을 이용해 유대인 수용소에서 1941년부터 3년간 근무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유대인의 피부에 그려진 문신을 도려내어 기념품으로 팔았으며

전등갓 및 기타 장식품을 만들어 직접 집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남편이 다른 유대인 수용소장이란걸 잘 이용했다.

유대인 희생자들의 문신을 수집하여 기념품으로 만드는데에 취미를 가졌고

가족이 사용하는 저녁식탁을 두개골로 장식하기도 했다.

이런 그녀의 잔학하고 음란한 행위들은 주위 사람들까지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독일 드레스덴 출신으로 부친은 농부였으며 초등학교 시절에는 얌전하고 착한 아이로 알려졌다.

15살때 학교를 나와 공장에 취업했으며 나중에는 도서관 사서를 했다.

이때 독일에서 급성장하던 나찌즘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몇몇 SA 대원들과 관계를 맺었다.

 

1936년 베를린 근처의 샤흐젠하우젠 수용소에서 비서 겸 경비원으로 일하던 중,

수용소장 칼 오토 코흐를 만나 결혼했다. 1937년 부헨발트에서 수용소장 아내로 부임했으며

남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수감자들을 고문하는 일을 즐겼다.

1940년, 수감자들로 부터 횡령한 25만 마르크를 들여 실내 운동장과 수영장을 건설했으며,

1년 후에는 수용소의 여간수들을 통괄하는 지위에 올랐다.

 

 

1941년, 코흐와 남편은 수용소에서의 횡령과 기타 죄목으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1944년에 바이마르에 투옥되었으며 남편은 다음 해 4월 처형되었다.

이후 일제 코흐는 석방되었으나 두 달 후 미군에게 체포되었다. 

 

1947년,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4년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고,

1951년 석방되자 수많은 피해자들의 탄원으로 독일 법정에게서 다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복역 중 아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60세의 나이로 형무소에서 목을 메어 자살했다. (1967년)

 

일제 코흐는 한 때 나찌 잔학상을 알리는 아이콘이 되었으며 사람 피부로 만든 전등갓,

독특한 문신이 그려진 피부를 비롯한 각종 신체부위(장기 포함), 인골로 만든 체스말,

식탁 장식용으로 압축한 인간머리 등등, 그녀의 수집품에 대한 풍문은 계속 살이 붙어서 유포되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의 논쟁에서 사실 여부가 심각한 논쟁이 되었다.

 

그녀는 정말 마녀였는가?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인 아더 버즈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제 코흐에 대한 혐의를 다음과 같이 부정하였다.

 

"문신이 되어 있는 피부는 부헨발트에서 행했던 의학적 실험 때문에 남은 것이다.

부헨발트에서 수감자가 죽으면 수용소의 의사들은 그의 신체를 검사하고 무언가 흥미로운 것이 있으면

그걸 보관했는데, 남은 것들은 바로 그런 의학적인 표본으로 남겨진 것이다"

 

"1948년 미국 법정에서 심리했을때, 코흐는 피부로 만든 전등갓과 기타의 물품들은

부헨발트의 사령실에서 1945년 발견된 것이며 당시 코흐는 1943년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과 함께 살지 않고 있었다. 사람 피부로 장정되었다고 알려져있는 가족사 책은

그곳에서 발견되지도 않았으므로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부인론자들은 인피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그 인피가 희생자들이 자연사 한 다음 의학적인 이유로 채취된 샘플이고

또 연합군이 그런 물품들을 수집해서 의도적으로 모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Vankien tatuointikokoelma 

증거물로 제시된 신체와 장기                                       증인을 바라보는 코흐 

 

코흐를 변호하는 사람들

 

클레이 장군은 독일이 항복한 이후, 1940년대 후반에 독일의 미국 점령지역을 관리한 인물로,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코흐의 종신형을 4년으로 단축한 바 있다.

 

1990년대까지 코흐의 문제에 관한 논쟁은 난항을 거둡하기 시작했으며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연합군이 코흐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의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또 오키프의 "수용소 해방. 사실과 거짓말"이라는 팜플렛은 클레이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당국이 제시한 증거물들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연합군에 의하여 조작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본디 코흐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던 재판도 클레이 장군의 책임하에서 이루어졌는데

무엇때문에 클레이 장군은 그것이 인간의 피부로 만들어진 전등갓이 아니었다고 수정하였을까.

대답 자체는 간단하지만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기록들을

보다 세밀하게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1945년 당시의 모습                 인피로 만든 전등갓의 문신

 

코흐는 시대의 희생양인가?

 

1948년, 클레이 장군은 실제로 코흐가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코흐 사건의 형기를 4년으로 단축시켰으며 그에 관하여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코흐가 문신된 피부를 얻기 위해서 수감자들을 살해하거나 그것을 지시하거나

사람 피부로 만들어진 물건을 실제로 소지하고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말했다.

 

이 내용이 기사화되자 그 다음날 국방장관 케네스 로열은

"그 사건에 대한 문제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고 발언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하여 일체 관여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것은 클레이 장군과 미국방부의 입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클리에 장군은 그녀의 유죄를 입증할만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법정에서 제시된 증언들에 의하면, 사람의 피부로 만들어진 가족앨범이 있었다는 증언은 있었으나

코흐 본인은 그냥 검은 천으로 싸여있었다고 했지만 정작 그 앨범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이후 코흐는 법정에서 "독일인에 대한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이전의 재판은 독일인이 아닌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었으나

두 번째 재판에서 그녀는 다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얻도 받았다. 

 

첫 번째 재판에 비해 두 번째 재판에서는 많은 증거들이 추가되었다.

한 미국 검사는 그런 이유를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첫 번째 재판에서 인피와 관련한 내용들이 증거로 채택되지 않은 이유는

그녀의 범죄들이 1943~1945년 까지의 일 만을 심사 대상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코흐가 종전 4년 전에 부헨발트에서 행했던 범죄에 관해서는

사건의 심사 대상 기간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두 재판의 결과가 다르게 된 것이다"

 
클레이 장군은 이 일에 관하여 "내가 법률가들에게서 받은 자료에 의하면,

코흐에게 부과된 혐의들 대부분에 명확하고 실제적인 증거들을 찾기 어려웠다"고 발언했다.

 

"나는 코흐에 대하여 동정심을 품지는 않는다.

그녀의 행위들은 비난받을만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독일법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코흐에 관하여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일 이외의 것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 범죄에 관한 일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수용소 도면 앞에서 증언하고 있는 코흐 (1947)

 

여기서, 클레이 장군이 사건관련 자료들을 직접 조사한 것이 아니라

그에 관련된 자료들을 법률가들에게서 받았다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48년말, 코흐 심리는 불과 4일만에 종결되었으며 보고서의 요약본이 타임즈지에 실렸다.

 

1. 문신된 피부들은 죽은 희생자들의 신체에서 예리하게 도려내어졌으며

무두질 되고 기술적인 방법을 통해서 장식목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2. 이 기술적인 방법으로 피부들이 부헨발트에 보관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증인들이 이런 기구들의 실재를 증언했으며 압축된 인간 두개골이 증거로 제출되었다.

그러자 증언대에 오른 코흐는 자신에 관한 증언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항변했다.

이에 따라 국방장관 로열은 문신한 인간의 피부를 얻기 위해서 살인을 했다는

기소사항에 대해서는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첫 번째 재판에서 형량의 단축에 관하여 미국방부 관계자는

"형기 단축이 선의에 의한 것이며 적절한 결정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당시 책임자였던 클레이 장군이 두 명 이상의 증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서에 의한 심리" 만으로 "증거불충분" 결정을 내린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전했다.

 

증언대에 오르고 있는 코흐

 

클레이 장군은 수 년이 지난 후, 그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코흐에 관해서 나는 그녀가 수감인들을 대상으로 성도착적인 행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곳에서 있었던 범죄에 대해서는 특별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녀의 형량을 단축시켰고 그에 대한 반응도 예상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잘못판단했을 지도 모르지만, 당시 누구도 그 문제에 관해서 조언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코흐는 나중에 독일 법정에 서게 되었으며 그에 관하여 클레이 장군은 "대단히 공정한" 법정이었다고 인정했다.

그곳에서 "살인죄, 살인교사죄, 5건의 학대 교사, 2건의 학대"로 종신형이 언도되었는데,

그는 "부헤발트에서 그녀가 문신을 얻기 위해 살인을 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인피로 만들어진 전등갓과 압축된 두개골을 비롯한 혐오스러운 물건들이

캠프에 보관되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범죄를 부인하고 있는 코흐

 

이쯤에서 밝혀진 내용들


1. 인피로 제조된 전등갓이
부헨발트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

다만 문제는 코흐 자신이 그런 제조과정에 관여했는지에 관해 이의를 제기했을 뿐이다.
2. 심리 위원회는 증거물로 제출된 다양한 샘플 3건이 실제로 인간의 것임을 인정했다.
3. 코흐가 인피로 만들어진 기념품들을 소지했음을 두 명의 증인이 증언하였다.
4. 클레이 장군은 보다 중요한 사건들 때문에 이런 증언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클레이 장군에게 이 사건에 대해 정보를 제공한 것은 비서진이었으며 당시 그는 기록에 의해서만

그 사건을 접했고 수천건의 다카우 관련 범죄들에 대하여 심의해야했다.
5. 독일 법정도 코흐가 인피를 얻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음에 대한 증거를
획득하지는 못했으나

"인피로 제조된 전등갓이 만들어졌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하고 있다.

클레이 장군의 고백

 

코흐는 1967년 수용소에서 자살했고 9년 뒤인 1976년에 클레이 장군은 생의 막바지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는 그 시점에서 몇가지 후회되는 사건에 대하여 진술했는데 그 내용중에 포함된 것이 문제의 인터뷰다.

 

"우리는 코흐를 조사했다. 그녀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3년으로 단축시켰다.

하지만 언론과 많은 관계자들이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당시 코흐는 "부헨발트의 암캐"라는 칭호를 하사한 기자들에게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집에서 하얀 전등갓을 발견하자 그것이 인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적었다.

사실 그것은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재판에서 그것은 여전히 인간 피부로 만든것이 되어버렸다.

그 재판은 공정하지 못했다"

 

클레이의 기억에서 특이한 점은, 25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인데,

인터뷰에서 몇가지 세부적인 사항들에 관해 주목해보자.

 

클레이 장군은 램프갓이 염소 가죽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관련 증거물들을 직접적으로 접해볼 기회가 없었으며 그에 관련된 보고를 받았을 뿐이다.

또한 클레이 장군은 코흐의 형기가 4년으로 단축되었음을 3년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코흐의 재판을 수 많은 재판 중의 하나로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흐 사건은 당시 언론매체에서는 큰 사건으로 다루어졌지만

클레이 장군은 미국의 독일 재건 계획 전체를 책임지고 있었다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당시 1,672건의 재판들의 최고 책임자가 그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흐는 유죄일 확률이 높다.

 

1976년의 인터뷰는 말하자면, 정확하지가 않고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정리하면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의 주장이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되는지 돌아보자.

 

1.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클레이 장군이 담당했던 재판에서는

코흐가 캠프에 있었던 시기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는다.
2. 클레이 장군은 비서들에게 불완전한 정보를 얻었을 뿐이며

1950년에 자신의 저서에서 그런 기록에 의존해서만 일했다고 말한바 있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3. 클레이 장군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인피 샘플 3건에 관해,

나중에 조사 위원회가 육안으로 존재를 직접 확인했음을 거론하지 않는다.


4. 나중에 지금은 미국 보건성에 보관중인 인간 피부 제품들을 정밀 조사하여

조직 일부를 현미경 검사한 결과, 인간의 피부임을 확인했음도 언급하지 않는다.

5. 문신한 이를 살해했다는 죄목에 관해 무죄를 선고한 독일 법정이 동시에

인피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제조하는데 관여했음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6. 당시에 직접 작성된 공식 문서들은 28년 이후에 기록에 의존한 인터뷰보다

신뢰성이 높다는 것 또한 언급하지 않는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Ilse_Koch

[출처] http://www.jewishvirtuallibrary.org/jsource/Holocaust/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