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설명: 전국시대 당시의 다이묘 세력도. 전국시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니까 옆에 띄워놓고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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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순서로 1467년 오닌의 난으로 시작된 일본 전국시대가 1616년 도꾸가와 막부의 시대로 막을 내리기 까지, 일본 전국의 영웅과 전투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Osprey의 War in Japan 1467-1615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위키의 내용을 보충했습니다.
전국시대를 잘 모르시는 분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과 지명 투성이일텐데, 붉은 강조체의 이름은 꼭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일본 전국시대가 이 영웅들을 중심으로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 1467년 오닌의 난 시작
오닌의 난(?仁の?)은 쇼군 후계자 문제를 명분으로 지방 슈고 다이묘들이 1월 2일 교또에서 벌인 항쟁이다. 오닌·분메이의 난(?仁?文明の?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문제는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까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일관성 결여(애초에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정했는데 뒤늦게 아들을 얻자 이를 번복한 점)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다이묘 호소까와 가쓰모또(요시미를 지지함)와 야마나 모찌또요(요시마사의 아들을 지지함)의 대립이 표면화되고 지방의 다이묘들도 속속 어느 한쪽에 가담하였다.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다이묘들의 의도와도 맞물려 1467년 교또에서 대대적으로 대결한다.
이를 통해 무로마치 막부 체제는 전국시대로 분열되고 150년 동안 각지에서 다이묘들이 권력투쟁을 벌인다.
- 1476년 오닌의 난 종료. 다이묘들의 세력다툼으로 확산
- 1480년 호조 소운(北?早雲)이 이마가와(今川)를 지지
- 1493년 호조, 이즈를 장악
- 1495년 호조, 오다와라를 장악
- 1506년 가가지역에서 잇꼬잇끼(一向一揆, 불교의 한 분파로 다이묘와 분쟁) 발생
- 1512년 호조, 가마꾸라를 장악
- 1518년 아라이 성 봉쇄
- 1524년 호조, 에도를 장악
- 1536년 다께다 신겐(武田信玄, 당시 다께다 하루노부晴信) 운노꾸찌에서 전투데뷔
- 1537년 호조, 고노다이 전투
- 1540년 아끼 고리야마 전투
덴분 10년(1541년), 아마고 하루히사(尼子詮久)가 이끄는 아마고 군이 모리 가문의 본거지 아끼국 요시다 고리야마 성을 3만의 대군으로 공격하였으나, 모리 군 3천과 오우치 가문의 원군에 의해 격퇴당했다.
- 1542년 도다 전투
갓산도다 성 전투(일본어: 月山富田城の?い )는 아마고 가문(尼子氏)의 본거지인 이즈모 국 갓산도다 성(현 시마네 현 야스기 시)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1542년~1543년의 제 1차 갓산도다성 전투와 1565년~1566년의 제 2차 갓산도다 성 전투로 나뉜다.
제 1차 전투에서는 오우치 가문(大?氏)과 모리 가문(毛利氏)의 연합군이 아마고 가문에 침공해 들어왔으나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오우치 가문이 멸망한 뒤에 벌어진 제 2차 전투에서는 모리 모또나리(毛利元就)가 전투를 재개하여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켰다.
- 1543년 유럽인 일본에 상륙
- 1545년 가와고에 야간전투
가와고에 성 전투(河越城 の? い)는 일본 전국 시대에 일어난 전투로 간또(關東)지역의 정세를 뒤바꾼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이다. 호조 우지야스(北?氏康)군 대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 우에스기 도모사다(上杉朝定), 아시까가 하루우지(足利晴氏)등의 연합군이 무사시국(武??)의 가와고에 성(河越城)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호조군이 대승리를 거두었다. 오께하자마 전투(桶?間の?い), 이쓰꾸시마 전투(?島の?い)와 더불어 일본 3대 야전(日本三大夜?)으로 손꼽히며, 가와고에 야전(河越夜?)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 1545년 우에다하라 전투
우에다하라 전투(일본어: 上田原の?い)는 3월 23일에 시나노 국 우에다하라(上田原, 나가노 현 우에다 시)에서 벌어진, 가이 국의 다케다 하루노부(후의 신겐)와 기따시나노(北信濃)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와의 전투이다. 가독 상속 이후, 시나노 제압을 목표로 연승을 이어가고 있던 다께다 하루노부는 이 전투에서 중신과 많은 장병을 잃고, 처음으로 대패했다.
- 1549년 가지끼에서 화승총 사용
시마즈 다까히사 (島津貴久)가 화승총을 처음으로 사용
- 1553년 가와나까지마 1차전
가와나까지마 전투(川中島の?い)는 가이노꾸니(甲斐?)의 다께다 신겐(武田信玄)과 에찌고노꾸니(越後?)]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사이에서 북시나노(北信濃)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 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지꾸마가와(千曲川)와 사이가와(犀川)가 합류하는 삼각지대의 평지인 가와나까지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가와나까지마' 전투라고 불리고 있다.
- 1554년 무라끼 포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화승총을 대규모로 사용
- 1555년 미야지마 전투/가와나까지마 2차전
이쓰꾸시마 전투(일본어: ?島 の? い)의 일환으로 10월 16일에 아키 국 이쓰꾸시마에서 스에 하루까따(陶晴賢)가 이끄는 오우찌 군을 모리 모또나리(毛利元就)가 소수의 병력으로 야간에 기습해 격파한 전투를 말한다. 모리 모또나리가 꾸민 모략에 스에 하루까따가 보기 좋게 걸려 참패한 전투로 일본 주고꾸 지방의 판세를 결정지었던 전투 중 하나였다. 또한 오께하자마 전투와 가와고에 성 전투와 더불어 일본 3대 야전(夜戰)중 하나로 불리고 있다.
- 1557년 가와나까지마 3차전
모지성 전투 1차전
모지 성 전투(門司城の?い,), 오또모 소린(大友 宗麟)이 포르투칼 배 3척의 함포사격 지원을 받고 성을 공격했으나 결국 모리 가문이 성을 방어해냈다. 외국선박의 첫 번째 일본함포 사격으로 기록된다.
- 1560년 오께하자마 전투
오께하자마 전투(桶?間 の? い)는 6월 12일에 25,000이란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국을 침공한 이마가와 요시모또(今川義元)를 오다 노부나가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야간 기습을 감행해 이마가와 요시모토을 죽이고 이마가와군을 패퇴시킨 역사상 가장 화려한 역전극이라고 일컬어지던 매우 유명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도까이 지방(東海地方)에 세력을 확대하던 이마가와 씨는 몰락하고 거꾸로 승리한 오다 씨는 이후 기나이(畿?) 제패를 향해 급성장하게 되어 전국시대의 중요한 전기가 된다. 이쓰꾸시마 전투, 가와고에 성 전투와 더불어 일본 3대 야전(夜戰) 중 하나라고 불린다.
- 1561년 가와나까지마 4차전/우에스기, 오다와라 성 포위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이 호조의 본성인 오다와라까지 진출하여 포위하지만 공략에는 실패한다.
- 1564년 호조, 고도다이 2차전/잇꼬잇끼 상대의 아즈끼자까 전투
아즈끼자까 전투(小豆坂の?い,) 또는 바또가하라 전투(馬頭原の?い,). 당시 마쓰다이라 모또야스(松平本康, 도꾸가와 이에야스 ?川家康로 개명)가 잇꼬잇끼 반란을 진압
- 1567년 오다 노부나가, 이나바야마(기후) 장악
- 1569년 오다와라 포위
다께다 신겐의 오다와라 포위, 3일 후 포위를 푼다.
- 1569년 미마세또게 전투
미마세 고개 전투(三?峠の?い )는 1월 8일에 가이의 다께다 신겐과 스루가의 호조 우지야스 사이에 벌어진 전투다. 고도 차이가 크게 작용한 전국시대 최대 규모의 산악전으로 알려져 있다. 다께다 군의 승리.
- 1570년 아네가와 전투
아네가와 전투(姉川の?い )는 8월 9일에 오미 국 아사이 군 아네가와 부근에서 오다 노부나가·도꾸가와 이에야스 연합군과 아사이 나가마사(?井長政)·아사꾸라 요시까게(朝倉義景)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오다/도꾸가와 연합군의 승리.
- 1570년 이마야마 전투/호조 우지야스(北?氏康)의 사망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오또모 소린의 군대를 이겨 류조자 다까노부(龍造寺隆信)가 히젠 지역에 진출한다.
- 1571년 노부나가, 히에이 산 파괴
오다 노부나가, 아사이/아사꾸라 연합군을 지원한 천태종 본산을 파괴
- 1572년 미까따가하라 전투
미까따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い )는 1월 25일에 도또미 국의 미까따가하라(현 시즈오까 현 하마마쓰 시)에서 다께다 신겐이 이끄는 2만 7천의 군세와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1만 1천의 군세(그 중 오다 노부나가의 원군 3천 포함) 사이에 벌어진 전투다.
다께다 신겐의 상경 작전 도중에 벌어진 전투로,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역사적인 대참패이자, 유일한 패전으로 유명하다.
- 1573년 다께다 신겐의 사망
- 1574년 나가시마 전투
오다 노부나가 일향교도 진압
- 1575년 나가시노 전투
나가시노 전투(長篠の?い, 나가시노 합전(長篠の合?) 포함)6월 29일 미까와노꾸니 나가시노 성(현재 아이찌 현 신시로 시 나가시노)를 둘러싼 오다 노부나가, 도꾸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3만 8000명과 다께다 가쓰요리(武田勝?)군 1만 5000명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고 다께다 가문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 1576년 노부나가, 아즈찌(安土) 축성/이시야마 혼간지 전투
이시야마 전투(石山合? )는 일본 아즈찌모모야마 시대의 전투로, 1570년부터 1580년까지 10년 간에 걸쳐서 잇꼬슈(정토진종 혼간지, 잇꼬잇끼)와 오다 노부나가 사이에 벌어진 전투다. 혼간지 문주 겐뇨가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농성전을 벌였기 때문에 이시야마 전투라고 불린다. 이시야마 전쟁(石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1578년 우에스기 겐신 사망/미미가와 전투
미미가와 전투(耳川の?い )는 규슈 제패를 노리던 분고(豊後)의 오또모 소린(大友宗麟)과 사쓰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가 휴가(日向) 다까조가와(高城川, 현재의 미야자끼 현 기조 정(木城町)) 부근을 주 전장으로 격돌한 전투. 다까조가와 전투(高城川) 또는 다까조가와라 전투(高城川原の?い)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오또모 군이 궤멸된다.
- 1579년 미끼 전투
미끼 전투(三木合? )는 1578년 3월부터 1580년 2월 2일에 걸쳐 하리마 국 미끼 성(현 효고 현 미끼 시)에서 오다 가문(織田)과 벳쇼 가문(別所氏) 사이에 벌어진 공선전이다.
오다 가문의 무장 하시바 히데요시의 반슈 정벌(播州征伐)의 일환으로, 히데요시는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가 농성하는 미끼 성을 포위공격했다. 특히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가 3년 간의 장기전을 펼치며 성의 군량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병량공격(兵糧攻め)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여, 미끼의 말려죽이기(三木の干殺し)라고 불린다.
- 1580년 이시야마 혼가지, 노부나가에 항복
- 1581년 돗또리 전투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돗또리 성의 보급로를 끊고 200일간 포위한 전투, 깃까와 쓰네이에(吉川?家)가 항복하고 자살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 1582년 다께다 가쓰요리의 사망/오다 노부나가 사망/야마자끼 전투
야마자끼 전투(山崎の?い)는 6월 혼노지의 변(本能寺の?)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죽인 아께찌 미쓰히데(明智光秀)를, 다까마쯔 성 공성전에서 되돌아온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도요또미 히데요시?臣秀吉로 개명)가 7월 2일 셋쓰노꾸니(?津?)와 야마시로노꾸니(山城?)의 경계에 위치한 야마자끼에서 궤멸시킨 전투로,. 이 전투에서 이긴 히데요시가 전국의 패권을 잡는다. 야마자끼합전, 텐노잔(天王山) 전투라고도 불린다.
- 1583년 시즈가따께 전투
시즈가따께 전투(일본어: 賤ヶ岳の?い)는 오미 국 이까군(伊香郡) 시즈가따께 부근에서 벌어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와 시바따 가쓰이에(柴田勝家)간의 오다 가문 내에서 노부나가 유산상속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투다. 히데요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노부나가가 쌓아 올린 권력과 체제의 계승자가 되었다.
- 1584년 고마끼, 나가꾸떼 전투
고마끼·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い )는 도요또미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까쓰·도꾸가와 이에야스 진영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유산을 상속하려는 노부까쓰와 히데요시를 견제하려는 이에야스의 연합군이 작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히데요시의 상속을 인정하게 된다.
- 1585년 히데요시, 시꼬꾸 정벌
히데요시 연합군이 조소까베 모또찌까(長宗我部元親)가 지배하던 시꼬꾸(四國)을 장악한다.
- 1586년 히데요시, 오사까 축성/헤쓰기가와 전투
헤쓰기가와 전투(?次川の?い )는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의 전초전으로, 1월 20일에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가 이끄는 시마즈 군과 조소까베 모또찌까(長宗我部元親)·노부찌까(信親)부자, 센꼬꾸 히데히사(仙石秀久), 소고 마사야스(十河存保), 오또모 요시무네(大友義統)가 이끄는 히데요시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모리 군이 대승을 거둔다.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이 잠시 미뤄졌을 뿐 권력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 1587년 히데요시, 규슈정벌과 도검소지 금지
왕실 섭정의 자리에 오른 히데요시는, 민란과 반역을 막기 위해 귀족과 사무라이를 제외한 승려와 평민의 무장을 금지시킨다.
- 1590년 오다와라 성 포위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성(小田原城)에서 호죠 우지마사(北?氏政) ? 우지나오(氏直) 부자를 공격해 멸망시킨 전쟁. 이로써 히데요시의 전국제패가 완성된다.
- 1591년 구노에 전투/히데요시, 일본 통일/히데요시, 신불분리령 선포
히데요시가 구노에 마사자에(九?政?)의 구노에 성을 함락시킨 전투. 히데요시 정권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 1592년 임진왜란 발발
- 1593년 일본군, 조선에서 철군
- 1597년 정유재란 발발
- 1598년 도요또미 히데요시 사망/조선에서 완전 철군
- 1600년 세끼가하라 전투
세끼가하라 전투(?ヶ原の?い)는 도요또미 히데요시 사후 그 권좌를 두고 벌어진 도꾸가와 이에야스파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파의 다툼이었고, 일본 전국의 다이묘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싸운 결과 도꾸가와 측이 승리했다. 대규모 전투였음에도 단 하루 만에 승패가 결정되어 군사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전투로 이어지는 과정과 전후 처리 과정과 연관된 정치적 의미는 매우 크다.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사실상 확고부동한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라 에도 막부를 세우는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이 전투를 끝으로 일본의 전국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 1603년 도꾸가와 이에야스, 쇼군으로 즉위
- 1614년 오사까 겨울 전투
오사까 전투 혹은 오사까의 역(大坂 の役 )은 1614년~1615년에 에도 막부(江戶幕府)가 도요또미 가문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전투이다. 이 전투는 오사까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와 오사까 여름 전투(大坂夏の陣)로 나뉘어 벌어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오사까의 진(大坂 の陣 )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다. 오사카의 난(大坂の?)으로 불리기도 한다.
- 1615년 오사까 여름 전투
- 1616년 도꾸가와 이에야스 사망
- 1638년 시마바라 반란진압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亂)은 1637년 일본 규슈 북부의 시마바라에서 기독교를 믿는 (기리시단) 농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항쟁이다.
- 1639년 쇄국정책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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