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철포와 마방책(馬防柵)의 나가시노(長篠)전투

구름위 2012. 12. 25. 20:08
728x90

신켄(信玄)사망

 천정(天正)원년(1573)4윌12일 타케다 신켄(武田信玄)이 향년 53세로 사망했다. 노부나가로서는 최대의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원구(元龜)2년(1571)의 겨울까지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原寺), 아사쿠라(朝倉), 아사이(淺井), 엔랴쿠지(延曆寺), 마쯔나가(松長), 록카쿠(六角), 나가시마(長島)잇키(一癸), 모리(毛利)를 포함한 反信長포위망을 이루고, 원구(元龜)3년에는 미카다가하라(三ケ原)에서 오다·도쿠가와연합군에게 완승했을때의  신켄은 노부나가를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당시는 노부나가의 천하통일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신켄 사후 노부나가는 신속하게 행동했다. 천정(天正)원년 7월18일에 장군 요시아끼를 추방하고 8월18일에는 아사쿠라, 27일에는 아사이씨를 멸망시켰다. 신켄의 죽음으로 노부나가를 고립시켰던 포위망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의문이 가는 것이 있다. 포위망에 대한 공격속도를 비교해 보면 신켄 사후 타케다가를 상속한 가쯔요리(勝賴)에의 공격의 속도가 너무 늦는다는 것이다.

 이어 천정(天正)2년 정월에는 가쯔요리가 아케찌(明智)성을 포위하고 6월19일에는 동 토토미(遠江) 최대의 요지인 타카텐진(高天神)성이 함락되기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여기에 신장의 전략이 숨어 있는 것이다. 신켄의 죽음을 알고 곧 아사이, 아사쿠라를 멸망시키고 가쯔요리를 긴장시킨다. 가쯔요리가 본거지에서 나오면 두려워 하는 척하여 과신, 자만하게 만든다. 미카다가하라(三ケ原)에서 압승했던 다케다(武田)군단의 강력함을 아는 가쯔요리를 자만심의 함정에 빠뜨리고 무리한 전투로 이끌어 내는 것이 노부나가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만약 다케다군단이 정면충돌을 피한다면 노부나가군에게 패전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노부나가가 생각했던 것이 철포(鐵砲)부대의 새로운 이용법이었다. 노부나가는 철포에 대해서 조예가 깊었다. 천문(天文)18년(1549) 사이토 도산(齋藤道三)을 대면했을 때 철포 500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보듯 어린 시절부터 철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사카이(界)와 오미(近江)國友의 대량생산지를 가지고 있어 다른 다이묘에 비해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다케다군단의 총포는 가신부담이었던 것에 비해 노부나가는 아시가루(足輕)에게 지급한 것을 보면 이 차이는 실로 큰것이다.  

 

나가시노(長篠)포위되다

 천정(天正)3년 4월 가쯔요리가 움직였다. 미카와(三河)의 나가시노성을 공격한 것이다. 나가시노는 미카와의 산악지대에 있고 원래 도쿠가와씨의 세력하에 있었으나 원구(元龜)2년(1571)에 다케다령이 되고 천정원년(1573)에 다시 도쿠가와령이 되었다. 전년 6월 신켄이 사망한 곳인 타카텐진(高天神)성을 함락시켰던 가쯔요리는 자신만만해 있었다. 노부나가군을 얕잡아본 젊은 무사 가쯔요리는 노부나가의 덪에 걸려 들기 시작한 것이다. 다케다군중에서도 가쯔요리의 자신감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코사카 단죠(高坂單正)와 나이토 아키토요(內藤昌豊)가 진언을 했지만 승리에 취한 가쯔요리는 노신들의 진언을 무시했다. 전황이 유리한 때의 진중론은 통하지 않았다.

나가시노 합전도1

  천정3년 4월11일 가쯔요리는 나가시노성을 포위공격하고 5월6일 二蓮木, 牛久保공격후 이에야쓰가 있는 요시다(吉田)성을 공격했다. 한편, 노부나가는 5월13일에 대 다케다전에 급히 출진해 筒井順慶와 細川藤孝등에게 철포를 공출시키고 출진, 5월18일에는 나가시노성 서쪽의 지다라(志多羅)에 포진하고 極樂寺산에 본진을 배치했다. 그 수는 3만, 도착한 노부나가는 기마대에 대비해 마방책을 설치했다.

 한편, 가쯔요리는 오다·다도쿠가와군이 접근하자 19일 밤 나가시노성의 포위공격을 풀고 일부를 토비노즈(鳶ノ菓)산에 배치하고 주력은 칸사가와(寒狹川)을 넘어 시다라가하라(設樂ケ原)북쪽의 淸井壓부근에 본진을 설정했다. 총 병사수는 1만5000명, 여기서도 다케다군 내부에서는 결전회피론이 있었다. 馬場美濃守, 內藤修理, 山縣三郞兵衛등이 간곡히 가쯔요리에게 전투를 피할 것을 진언하지만 노부나가를 이기려는 생각만으로 가득찬 가쯔요리는 아도베 오오이노스케(跡部大炊助)의 주전론을 택했다.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괴멸

 5월20일 밤 오다·도쿠가와의 별동대 사카이 타다쯔크(酒井忠次), 金森長近들이 토비노즈(鳶ノ菓)산(다케다군의 후방교란)으로 향하고 전투는 시작되었다. 5월21일 오전6시 다케다군단과 노부나가군은 蓮子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고지에 위치한 다케다군은 그 유명한 기마부대로 돌진해 내려가 노부나가군을 분쇄할 작전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 초상화한편, 오다·도쿠가와연합군은 각각 3중의 마방책을 蓮子川부근에 나란히 설치하고 3천정의 총포대를 5개로 나누고 마방책의 후면에는 1열로 배치시켰다. 사람간의 간격은 총포를 안전하게 발사할 수 있는 거리인 1.8m로 정했다. 노부나가의 작전은 「적의 기마대가 들어오면 1町의 거리까지 와도 총포를 발사하지 않고 가깝게 다가오면 총포 천정으로 연속사격하고 1단씩 교대로 발사하라, 적이 더욱 강하게 밀고 오면 조금 물러나고 적을 끌여 들여 사격하라」라고 말한 것과 같이 3천정도의 철포를 천정씩 3단으로 준비해 총포의 장막을 친 작전이었다.

나가시노 합전도2

 오다·도쿠가와군은 좌익의 佐久間信盛와 우익의  오쿠보(大久保)부대를 다케다군을 꾀어내기 위해 책(柵)밖으로 나왔다. 이것을 본 다케다군의 선봉 야마가타 아키카게(山縣昌景)가 3천여기로 산을 내려왔다. 전투의 불이 당겨진 것이다. 산을 내려온 야마가타가 본 것은 높다란 마방책과 엄청난 수의 철포부대였다. 책에 놀란 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철포 3천정이 불을 뿜고 야마가타의 기마대도 하나씩 쓰러져 갔다. 당황한 야마가타는 마방책의 우측으로 돌격을 시도하지만  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에게 밀리고 만다. 이 야마가타의 선봉대가 나가시노전투의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2번대 다케다 노부스미(武田信兼), 3번대 오바타 노부사다(小幡信貞), 4번대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晴)등의 이름난 다케다의 명장들이 이름도 없는 아시가루(足輕)의 총포에 쓰러져 갔다.  

 오후2시경, 노부나가의 총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瀧川一益을 1번대로 한 노부나가군과 맹위를 떨친 도쿠가와배하의 미카와무사단이 차례차례 다케다군단을 쳐부수었다. 이윽고 가쯔요리 본진도 무너지고 따르는 기는 6기정도 였다. 이로써 다케다군단은 불과 8시간만에 괴멸되엇고 맨파워(man power)의 치명적 소실은 두번다시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무형(無形)

 나가시노 전투에 있어 승리의 이유는 무엇일까? 전략적으로는 마지막까지도 가쯔요리를 자만에 빠트려 반정도의 병력으로 무리한 결전을 감행하게 한 것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전술적으로는 마방책을 사용한 철포의 활용이 컸다. 총포의 집중사용이 승리의 요인이 되었다. 총포의 집중사용은 그 이전에도 볼 수 있다.(雜賀무리나  根來무리)하지만 마방책과의 절묘한 사용은 역사상 처음 시험해 본 곳이다.

 전국(戰國)최강의 돌파력을 가진 다케다기마대와 전투를 하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기마대의 돌파력을 어떻게 무력화 시키는 것인가다. 말은 장애물이 있으면 놀라서 서버린다. 이 성질을 이용해 실전에 교묘히 응용한 작전, 이것이 마방책이었다. 돌파력이 없어져 버리면 총포로 쓰러트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하나 노부나가군의 승리를 찾아 보면 「형태가 없는」오다·도쿠가와군이 형태를 가진 다케다군을 무찌른 것이다. 다케다군은 기마돌진(백병전)이라는 필승의 패턴을 가지고 있던 것에 반해 노부나가의 신전법은 적이 예측하지 못하게해 상황에 따른 전술의 전환을 하지 못한 것이 다케다군의 패인이었다. 이에 반해 오다·도쿠가와군의 무형전법은 노부나가의 신전법에 적용이 가능했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전투는 아군의 약점을 강하게 바꾸기 위한 전투였다. 기습의 오케하자마, 대군을 이용했던 백병전의 아네가와가 모두 그렇다. 그리고 이 최고의 걸작이 나가시노전투에 집약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