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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왕조 체제의 필요악

구름위 2012. 12. 1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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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은 중국 역사에서 누차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의 육체만큼이나 추악한 역할을 했다.
본래 환관의 활동 범위는 내조(內朝, 황제의 사생활의 장)에 한정되어 있고, 외조(外朝, 정무의 장)에 말참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황제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황제 권력의 대변자가 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중상시라고 불렸던 후한의 환관은 정권을 농단하고 거기에 반대하는 사대부나 학생을 탄압했던 것이다. 이것을 '당고의 화'라고 부른다. 후한의 국력은 환관이 잠식하여 그 쇠망을 앞당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당나라 때 환관의 권력을 수중에 넣을수 있었던 것은 금군(근위병)을 장악하고 군정 기관인 추밀원을 그 관할하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 강대한 권력을 배경으로 당나라의 환관은 황제의 폐립과 시역을 제멋대로 했다.
어느 시대이든 환관의 해독을 가장 크게 입은것은 서민이다.
백거이의 신악부 매탄옹(賣炭翁)은 고생해서 구운 숯을 황제의 분부라고 하면서 겨우 비단 손수건 1장을 주고 빼앗아 가는 환관의 횡포와 서민의 고통을 폭로한 사회 비판시이다. 이러한 광경은 당나라 때뿐 아니라 중국의 모든 시대에 보인다.
명나라의 태조는 후한이나 당나라가 환관의 발호 때문에 쇠퇴했던 역사를 교훈 삼아, 환관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엄금했다. 또 환관의 위계를 4품 이하로 정해서 환관의 세력이 신장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정통 적자인 조카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제위를 빼앗은 제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는 태조나 건문제와 관계있는 선비의 등용을 경계한 나머지 환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더욱이 영락제는 수도 북경에 반체제 지식인의 동향을 탐지하거나 체포하는 권한을 가진 동창(東廠, 비밀경찰)을 설치했는데, 여기에도 환관을 많이 임용했다. 영락제 이후, 명나라의 모든 황제는 자신의 충실한 주구로서 환관을 중용하고, 군주 전제의 독재 정치 강화에 부심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신하에 대한 불신의 마음에서 출발한 명나라의 정치 기구가 환관의 발호를 허용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물론 그중에는 삼보태감(三寶太監, 환관의 최고 관직) 정화(鄭和)와 같이 환관 신분이면서도 거대한 군선을 거느리고 아라비아까지 원정한 강직한 사람도 있었지만, 명나라의 환관은 거의 예외없이 천하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였다. 홍치제(弘治帝)의 환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광(李廣)에게 문무 대관들이 황미, 백미 각 천백 석을 뇌물로 주었다. 황치제가 '이광은 어째서 그렇게 쌀을 많이 먹는가?' 라고 묻자 한 신하가 '그것은 은어입니다. 황미는 황금, 백미는 백은을 의미합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명사(明史)에 실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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