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도요토미 히데요시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1865~1917) 씀/

구름위 2012. 10. 2. 10:27

"그 무렵 조선은 도저히 일본 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660쪽)

일본의 역사가이자 평론가인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1865~1917)은 1908년 출간한 이 책에서 임진왜란(이 책에선 '조선정벌')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했다.

↑ [조선일보]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08년은 이미 일제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됐던 시절. 당시 일본 지식인들이 그로부터 300년 전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자신들의 조선 침략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짐작케 하는 책이다.

이름 없는 하급무사로 '원숭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략과 권모술수뿐 아니라 특유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일본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하는 과정은 흥미롭고, 책 후반 3분의 1을 차지하는 임진왜란 관련 서술은 우리 입장에선 치욕스럽다. 일본 자료뿐 아니라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과 중국 의 '명사(明史)' 등 외국 기록도 꼼꼼히 살폈기에 더욱 그렇다.

선조(宣祖)를 '조선 왕 이연'으로 부르는 이 책은 "조선은 원래 소국이 아니었지만 온 나라가 태평세월에 젖어 실전의 경험이 없었다"고 말한다. 또 나라의 분위기 역시 일본은 평민적, 조선은 귀족적이어서 상하가 따로 놀았다는 것. 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한 당시 일본은 '황금의 나라'였다. 서양의 광산 개발법 등이 도입되면서 금과 은의 생산량은 급증, 히데요시가 제후 등에게 나눠준 금은이 36만5000냥에 달했다. 전비(戰費)는 충분했고 전국시대를 거친 백전노장(百戰老將)도 넘쳐났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침입한 일본군이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다시 40일 만에 평양까지 점령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러자 명나라가 참전한다. 조공을 착실히 바친 '모범생' 조선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저자는 명나라 입장에선 전라도를 빼앗기면 서해를 사이에 두고 바로 일본과 마주해야 하는 전략적 위험성을 방치할 수 없었던 점에 더욱 무게를 둔다. 전쟁은 이후 소강상태에 빠진다. 저자는 "국민적 대전쟁이라 부를 만한 것은 처음 12개월뿐", 이후로는 "왜구와 별다를 바 없었다"고 말한다. 전투가 지지부진해지자 히데요시는 "모든 부대는 부산포로 출발(후퇴)하라"고 명령한다. "조선인과 말이 통하지 않아 빠르게 지배하기 어렵다"는 핑계였다.

현대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화의(和議), 즉 종전(終戰) 협상과정이다. 명나라와 일본은 종전 조건을 협상하면서 조선 8도 중 4개 도를 나누는 것을 논의했다. 물론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400년 전에 조선은 남북으로 분단될 뻔했던 것이다. 더욱 참담한 점은 임진왜란 종전 협상 당사자는 명나라와 일본. 제 땅에서 벌어진 전쟁을 끝마치는 협상에 정작 조선은 빠져 있었다. 6·25전쟁 휴전 협상 때 우리나라가 당사국으로 참여하지 못한 사실이 저절로 떠오른다.

다만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 대한 평가는 박하지 않다. "조선 정벌 전쟁은 실로 군국의 일대 귀감이다. 해권(海權)을 갖지 않은 나라는 결국 반드시 실패한다."(702쪽)저자는 이어 "대략 조선 정벌전은 결국 등에도 파리도 잡지 못하고 종잡을 수 없는 상태로 끝나 버렸다"며 "사실은 이길 수 없는 자연을 이겨보려고 한 데 (실패의 원인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올해는 다시 돌아온 임진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을 일본인의 시각으로 돌아보는 것은 현재 국제정세의 '맥'을 짚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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