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임진왜란의 왜성에 대해서... 너무 장편,,????

구름위 2012. 10. 2. 10:29

경상도 울산부터 전라도 순천에 이르기 까지 수십 개의 왜성이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 산천에 일본의 문화재가,

특히 일본의 城들이 위치 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특이한 사실이다. 교류라는 말이 무색 할 만큼 일 방적인 문화전파만 있는 한일 역사에서 이런 일본의 문화유적이 있다는 사 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산에 위치한 산성과 평지에 있는 읍성과 수원 에 있는 화성에 익숙해 있던 우리로써는 남해안과 동해안에 위치한 왜성 들의 모습에 상당히 낯설게 느껴진다.

한국의 땅에 일본의 성들이 왜 있는 걸까? 누가, 언제, 왜 이런 성들을 건설했을까?

필자는 이런 왜성에 궁금해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왜성에 대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 비록 내가 지식이 얇고, 문장실력이 저조하여 형편없는 글이 되겠지만, 글을 쓰는 노력에 가상하게 생각하여, 많이 보기를 바란다. 그리 고, 내가 글을 쓰는데, 많은 인용을 한 부분은 KBS 역사 스페셜이란 프로그 램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1592년 4월 중순 일본이 파죽지세로 조선을 침략하여 20일 만에 한양을 점 령하고, 2달 만에 평양을 함락하고, 3달 반 만에 함경도 국경지대를 접수 하 면서 동시에 두 왕자를 붙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항복하지 않고, 의주로 임시수도를 정하고 계속 항쟁을 하였다. 그렇게 하여 전쟁은 장 기간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병이라고 불리는 조선 민병대가 제 고장을 지키고자 스스로 일어나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거기에 밀리기만 했던 조선육 군도 점차 재정비를 하면서 7월부터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해왔다.

그렇지만 가장 일본군에게 많은 타격을 준 쪽은 바로 조선수군 이였다. 조선 수군은 전쟁초반부터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어, 무력으로 조선을 정복 할 수 없다는 것을 적군에게 철저하게 가르쳐 주었다.

특히 한산도 해전과 안 골포 해전, 부산포 해전 등으로 일본군은 완전 해상활동이 불가능하여 오르지 육로를 통한 보급선만이 간신히 유지되었다.

 곧 이것은 작전의 차질로 가져왔다. 특히(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평양의 고 니시군은 보급의 차질로 평양에서 진퇴양난이 되었다고 하니, 그 여파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보급이 안 되서 전선을 확대해 보았자 실패는 뻔하고, 물러서 면, 그에 따른 상급자의 처벌이 두려워하여 평양성에 머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조선수군에 의한 완전 해상 봉쇄였다. 조선군이 본토하고의 연락을 완전 차단시키면 어찌 되는가!

본토의 보급은 물론 이요, 나중에 철수를 할 때도 문제였다. 그럼 어찌 해야 하는가???
그래서 , 부산포 패전을 겪고 난 일본군은 본토와 부산과의 바닷길을 유지하기 위해서 김해, 부산포, 동래 등지에 성을 쌓았고, 가덕도와 거제도등 주변의 여러 섬에도 성을 쌓았다. 이것이 왜성을 처음 쌓게 된 기원이다. 이렇게 성을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전라도에서 부산포로 진격하는 해상로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시 는 대양항해가 발전되지 않아서, 대부분 연안 항해를 주로 하였다. 그래서 조 선수군도 바다를 항해를 할 때, 먼 바다로 나가지 않고 해안가를 중심으로 하 여 그 근방을 벗어나지 않는 채 나아갔던 것이다.

조선 남해안은 크고 작은 섬 들과 암초들이 많아서 그것을 헤쳐 나가는데 애를 먹었다. 시일도 오래 걸려서 해안이나 섬 등지에 배를 정박하며 쉬면서 갔던 것이다. 이런 조선 수군의 문제점을 파악한 일본군은 육지에서 바다로 공격 할 수 있고, 정박할 수 있는 주요한 지역마다 성을 쌓은 던 것이다.

그래 서 조선수군이 부산포로 다시 진격해 들어간다면, 정박할 장소마다 왜 성이 있어서 정박 할 수 없었고, 또한 쉽게 공격당하므로 쉬지 않고 진 격해야 할 상황으로 된 것이다.

이런 상태로 부산포로 간다면, 아무리 슈퍼맨이라도 피로로 인해 못 간다. 1597년 칠천량 해전이 좋은 예이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까지도 조선수군은 부산포에 출현하지 못 했던 것이다.
그 후, 조선군이 전쟁에 참전한 중국군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여 탈환하였고, 한강이북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불리하기만 했던 전세는 더욱 어려워졌다. 어렵게 벽제관에서 일본군은 조명 연합군을 막았지만,

행주산성에서 조선군한테 크게 패하고, 여기저기에서 조선군 의 공격으로 피해를 많이 보았다. 거의 서울과 그 주변을 못 벗어나서 조선군에게 포위를 당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아군의 공격으로 서울에 있던 식량창고도 불타서 비축 식량도 2달도 채 안 남은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사기가 뚝 떨어진 상황에서 보급은 잘 안 되고, 출몰하는 조선군을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대로 서 울에 주둔한다면, 멀지 않아서 조선군에 의해서 서울은 탈환 될 것이고, 일본군의 태반이 손실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철수를 한다고 해도 조선군에 의해서 추격과 습격을 당해 많은 병력을 손실 당할 것이다.

이래나 저래나 똑같은 상황에서 일본군은 (조선군을 배제한) 명군과의 협상으로 간신히 조선군의 반격을 받지 않는 채, 부산으로 안전하게
철수했다. 철수를 한 일본군은 재정비를 한 다음, 작년에 패전한 진주성 전투의
치욕를 갚기 위해서 10만을 동원, 공격하여 10일 만에 함락시키고, 진 주성이 관할하는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는 그들이 주둔하는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이미 서울에서 일본군과 명군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어 조선군의 추격 도 받지 않는 채 철수를 하였지만, 일본군은 휴전의 약속을 어기고 진주성을 공격했다. 이것은 분명한 약속위반이지만, 중국은 그것에 대 해서 눈을 감아주었다. 참으로 통분한 일이다.
어째듯, 이 전투 끝으로 본격적으로 휴전상태가 되었다. 휴전 기간내내 전혀 전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휴전상태임은 틀림없었다.
그 휴전 기간동안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장기간 주둔을 하면서 왜성 을 본격적으로 쌓았다. 예를 들어, 울산의 서생포 왜성은 가토 기 요마사가 쌓고, 진해의 웅천왜성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쌓았다.
일본군은 휴전기간에 왜성에 장기주둔을 하면서, 재침의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수시로 왜성의 밖을 나가 주변을 약탈했다. 이런 일본군의 공격에 조선은 한산도에 수군을 주둔시켜 견내량에서 바다에서의 출
몰을 막았고, 왜성 곳곳에 군대을 주둔시켜 그들의 약탈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런 소극적인 방어뿐만 아니라 직접 조선군이 왜성을 공격했다.
특히 거제도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과 곽재우가 이끄는 육군이 연합하여 공격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휴전 기간 동안, 왜성은 재침준비의 거점으로, 조선수군을 견제 하는 역할을, 약탈의 중심지로 이용되었다.
이런 휴전상태가 깨지고 다시 일본군이 재침을 하여 정유재란이 발발하였 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육군까지 동원하여 조선수군을 괴멸시키 고 북상하였다. 당시 원균의 조선수군은 부산을 공격하러 가는 도중에 이런 일이 발생했는데, 이때 왜성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전라도를 완전히 점령하고, 충청도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은 명랑해전으로 고비를 맞는다. 당시 수백척의 일본 수군이 겨우 13척의 조선수군한테 패전하여 수천의 병사들이 수장되었던 것이다.

그 전투로 일본군의 작전인 수륙양병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특히 전라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더욱 불안한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남해에서 서해로 가는 길목이 차단되니, 다시 1차 전쟁의 악몽 이 재현될까 걱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철수하지 않고 전쟁을 수행 한다면, (비록 전라도를 점령했지만,) 보급이 안정적이지 못해서 실패를 보는 것은 당연했다. 해결책은 남쪽으로 철수하여 재정비하면 다시 북진
하는 일밖에 없다. 그래서 일본군은 분산하여 남쪽으로 철군하였다.

철군 도중에 조선군의 공격을 당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남해안으로 철군한 일본군은 정유재란 이전에 건설한 왜성에 주둔을 하거나, 새로이 성을 쌓기도 했다. 이때 건설한 왜성 중에 대표적인 성이 순천왜성과 사천왜성, 울산왜성이다.

 순천왜성은 우끼다 히데이와 도오다 다까오라등이 전라도의 재정복의 전진기지 겸, 최후의 방어기지를 만들기 위해서 건설한 성이고,

 고니시군과 명랑해전에서 패한 일본수군이 주둔한 성이다. 울산왜성은 가토 기요마사 가 서울로 북상하기 위해서 그들이 점령한 지역 중에 (서울까지) 최단거 리에 위치한 울산 학성에 쌓아 올린 성이다.

사천왜성은 남해바다에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경남 사천만에서 시미즈군이 쌓아 올린 성이다. 이 성을 쌓은 목적은 진주과 남강을 통해서 내륙 깊숙이 들어 갈 수 있는 교도보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왜성들을 중심으로 일본군은 남해안 과 동해안에 총 28개의 왜성을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건설했던 것이다.
그럼, 왜성은 재기를 노리는 목적으로 건설한 것 외에도 다른 목적은 없을 까? 왜성의 일본군은 장기간 주둔하면서, 현지인의 동화책을 쓰기도 했다.
더구나, 조선에서 약탈한 문화재나 포로들이 왜성에서 수용했다가 일본으 로 보내지면서 문화약탈의 역할도 하였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욕 구 충족에 이용되기도 했다. 즉 호랑이와 그의 건강에 좋다는 조선 약 재들이 왜성에서 머문 일본군 장수들에 의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처럼, 왜성들은 철수하기 위한 안전한 방어시설이 아니라 기회를 봐 서 다시 북상하거나 재기를 노리는, 그리고 오래 오래 장기주둔 하면 서 점령군의 성격을 띠려는 성격을 가진 것이다.
울산왜성은 40일 만에 건설되었고, 순천왜성은 3개월 만에 건설되는 등 많은 왜성들이 짧은 시간 내에 건설되었다.

이처럼 단기간 내에 왜성이 건설된 요인은 무엇일까? 바로 일본의 특유의 축성술과 조선군의 공격 에 빨리 대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렇게 빨리 건설하게 된 이유는 왜성이 위치한 자리에 이미 조선의 성이 구축되었거나, 허물어진 상태이므로 그것을 토대로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급히 만들어진 왜성이지만, 쉽게 점령할 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서다.
첫째, 왜성 자체가 난공불락이기 때문이다.
왜성은 4면 중에 3면은 육지에 있고, 한 면은 바다에 위치한 해안가의 성이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했다. 성 하나를 완전 포위를 하려면, 수군까지 동원해야 하는 등 공격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벽이 평평한 90도 각도로 된 조선의 성벽과 달리 가파른 60도로 위치에 있어서 성 위에서 방어하는데 편했다. 그리고 성벽위에 아무 것도 없는 조선의 산성과 달리 왜성은 성벽위에 목조건물을 건설하여 그 곳에서 구멍을 뚫어 조총을 발 사하거나, 성 아래에서 날라 오는 대포나 화살, 총알을 피했다.

 공격과 방 어가 동시에 편리한 구조로 된 것이다. 왜성은 또한 지그재그 식으로 나 있어서 직선으로 성문을 들어가지 못한다. 몇 번 깎여져 있는 입구에 도착 하려면, 최소한 세 방향에서 협공을 받는다. 이러 요소들로 인해서 왜성 자체를 점령하는데 애를 먹는다.
둘째는 왜성들 사이의 신속한 연락망과 역할분담이다.
왜성 28개성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성을 짓기 때문에 서로 긴밀하게 연락
을 할 수 있다. 즉 한 눈에 상대방의 성이 무슨 일이 당하고 있나 알아 볼
수 있게 만들었고, 걸음으로 쉽게, 금방 갈 수 있는 거리마다 성을 쌓아서
쉽게 연락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봉수대의 봉화 체계도 체계적으로
했고, 해안가에 성이 위치해서 해상교통도 편리했다. 이런 왜성들의 편리한
연락망으로 인해서 옆의 성이 위협을 당하면, 곧 바로 다른 왜성의 일본군이
일사처리하게 도와주게 가능했다. 울산왜성의 싸움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이러한 연락망외에 성들 간의 기묘한 역할부담도 한몫했다. 예를 들면
부산왜성이 대표적인 경우다. 부산왜성은 母성과 子성을 두어 子성이 모성을
보조해주는 역할을 한다. 서로의 문제점을 보완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공격을 당해도 쉽게 함락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서 왜성은 1년 가까이 조선군의 공격에도 막아 낼 수 있
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군의 공격으로 이미 북진의 꿈을 깨지고,
한시 빨리 철군만 기다렸다.
특히 임진왜란을 출세의 호기로 여기면 참전했던 주전파 가토 기요마사도
제 1차 울산 싸움이후 전쟁에 대한 열정을 버리고 말았다.

그는 축성의 대가로
알려진 만큼 , 전쟁이 끝난 이후 구마모또로 돌아가서 울산 왜성의 패전을 본
보기로 삼아 7년 동안 성을 쌓았다.

그 성이 그 유명한 구마모또성이다.이 성
은 일본 3대 성의 하나로 속하면서 울산왜성과 많은 점에서 닮았지만, 그 왜
성의 단점도 많이 보안했다.

울산 1차 전투때 식수가 끊겨져서 단수로 인해서
많은 고생을 한 것을 보고 도처에 은행나무를 심고 우물도 많이 만들어서 장
기간 포위 공격에도 갈증으로 고생하는 것 막았다. 또한 먹을 수 있는 흙을
만들어 울산 전투로 인해 생긴 배고픔을 되풀이 되지 않게 했다. 어째듯,
지금도 울산왜성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구마모또성을 참고로 하여 성을 연구
한다고 한다.
1598.8월에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그의 유언을 명분으로 삼아 철군을
했다. 동부 전선의 일본군은 쉽게 철수를 하였지만, 서부의 일본군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해군에 의해서 철수가 쉽게 되지 않아 시미즈군은 순천에 주둔한
일본군을 구원하기 위해 출정하여 싸웠지만, 철저하게 패배를 당한다. 그러
나 고니시군은 어렵게 철군을 하여 임진왜란은 막이 내린다.
일본군이 남겨놓고 간 왜성은 이윽고, 조선군과 중국군에 의해서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황폐화 된다. 전쟁이 끝난 직후, 조선 조정에서 일부 신료들이
조선의 성이 문제가 많다고 보고,왜성의 방식으로 성을 쌓을 것을 건의했지
만, 받아들이지가 않았다.

그 후, 왜성은 한동안 역사의 장면으로 사라졌다.
조선은 왜성이 일본군이 쌓아 올린 치욕의 성이라 여기면, 제대로 활용도
하지 않는채 버렸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의 축성술의 장점을
받아 들여서 자기 영지에서 성을 쌓을데 활용을 하여 참으로 대조적인
장면이다.

어째듯, 이렇게 왜성이 활용되지 않다가 조선말기에 이르러
조선정부는 이 왜성의 일부를 활용했다.

1872년에 그려진 그림에는
옛 왜성에 수군부대가 주둔한 것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조선이
적어도 조선말기에 왜성을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왜성이 양반처럼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였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남겨놓은 왜성을 신주단지처럼 여기
고 국가 문화재로 등록하고 보존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복원 공사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왜성은 곧 된서리를 받는다. 광복된 후 한국정부는 이 왜성을
국가 문화재에서 지방 문화유적지로 격하시키고, 제대로 가꾸지도 않아
기 때문이다.
그 후, 최근에 와서야 다시 보존을 하기 시작했다. 웃긴 점은 일본 관광객
들이 이 왜성을 찾아와 문화재 관람을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 일본인
들이 자기네 조상들이 이국땅에서 쌓아 올린 왜성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이제까지 나는 왜성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했다. 많은 점에서 부족하지만,
재미있게 읽었길....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