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명 삼국이 참전한 동아시아 국제전쟁이었다. 전쟁은 참혹한 것이다. 전쟁이 발생하면 당연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간다. 조선 역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수만 명의 조선인이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종결 후 조선조정은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들의 송환을 대 일본관계에서 중요 과제의 하나로 간주하고 일본에 사절을 파견할 때 쇄환(刷還)활동을 명령하였다.
조선은 1607년, 1617년, 1624년, 1636년, 1643년 다섯 차례 걸쳐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파견하였는데 그 중 1607년, 1617년, 1624년의 사절은 피로인 쇄환을 사명으로 하는 ‘쇄환사(刷還使)’라는 직책으로 모집을 위한 사전준비를 충분히하여 일본 국내에 있는 피로인을 모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했다. 특히 조선은 ‘예조가 발급한 교유문’(禮曹諭文)에서 “정미년(1607)에는 (일본에 파견된) 사신이 피로인을 데리고 돌아와, 한결같이 (그들의) 죄를 사해주고, 부역을 가진 자는 역을 면제해주고, 공사(公私)의 천민이면 천민(신분)에서 해방시켜주고, 원조를 완벽하게 해주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만약 일제히 (사신이 있는 곳에) 출두하면, 왕년에 출두한 자의 예에 따라 천민(신분)에서 해방시키고 부역을 면제하며,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특전을 하나하나 실행할 것이다”라 하여 피로인들의 쇄환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수많은 고난을 거쳐 본국으로 귀환한 피로인들은 위와 같은 대우를 받았을까? 실제로 김학성, 김덕봉, 오흠일, 막금을 포함한 39명은 귀환 후 부역과 잡역 면제 조치를 조정으로부터 받았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자력으로 일본에서 탈출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쓰시마의 소씨가 파견한 사선으로 송환된 피로인들에게는 이러한 특전이 보이지 않는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을 보면 피로인의 대우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선장들은 피로인 남자들과 여자들을 맡자 우리들 앞에서 포박했다. 선장들은 그들을 모두 노비로 삼았다. 피로인이 미인이면 그 남편을 묶은채 바다에 던져넣고 그 여자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게다가 조선사절의 경우, 피로인들의 본국 귀환 후의 사후 처리 과정에서 충분한 배려의 자취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부산에 도착하자 피로인 1,418명을 인근 민가에 묵게한 다음 조정의 조치를 기다려라 하고는 그냥 두고 가버렸다. 사절의 부사(副使)였던 강홍중이 “만약 일본에 있는 피로인들이 귀환한 자들의 낭패함을 이후에는 쇄환하려고 해도 반드시 용이하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당시 조선이 피로인들의 쇄환에만 급급했지 정작 이후의 대책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특전을 주겠다는 조정의 약속은 쇄환을 실현시키기 위한 단순한 방편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조선은 피로인의 쇄환에 이상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음에도 왜 귀화한 피로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을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예조유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문에서 피로인에게 조선조정이 “하나같이 죄를 면해준다”라고 서술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죄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본군의 포로가 된 도의적인 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조헌의 『중봉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너희는 선대 이래 백성이었는데 배반하고 왜인과 한패가 되어 사람들을 살육한 것이 저 적들보다 심한 자도 있다고 한다. 너희 죄는 죽어 마땅하다 (중략) 적의 머리를 하나 베어 오는 자는 이전의 생업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다. 적의 머리 둘을 베어 오는 자는 서림(徐林)과 같은 대우를 하겠다. 적의 머리 셋을 베어 오는 자는 자손이 (일반민과) 통혼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허용하겠다. 장교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는 공적을 기록하고 등용하겠다”
이 사료는 1592년 8월 의병장 조헌이 일본군에 잡혀있던 조선포로들에게 귀순을 호소한 고유문이다. 앞부분에 피로인이 일본군과 함께 악행을 저지른 것은 죽어 마땅한 죄라 서술하면서 그들에 대한 잠재적 불신감을 보여주었다. 그는 피로인이 국가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일본군과 싸워 적의 머리를 헌상하고 귀순해야 한다고 호소하는데, 이 고유문에서 볼 수 있는 피로인관은 조헌 개인이 아닌 당시 조선 지배층이 공유했던 사고였을 가능성이 높다.
오희문이 남긴 쇄미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씌여 있다. “적중에 들어가더라도 왜적을 베고 (우리쪽으로) 온 자는 특히 그 죄를 면할 뿐만 아니라 그 공로를 기록한다”, “왜인을 베지 못하더라도 제일 먼저 (왜군의) 성에서 도망쳐 온 경우는 죄를 용서하고 포상한다”라 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이 가지고 있던 ‘면죄될 수 있는 피로인’이란 일본군에게 잡혔더라도 적군의 머리를 베어 아군 진영에 온 자이며, 그것이 불가능하면 가장 먼저 적진에서 도망쳐온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자력으로 일본에서 탈출해서 조국으로 생환한 자야말로 ‘바람직한 피로인’으로 간주된 것은 아닐까? 조정으로부터 면역 등의 특전을 부여받은 자가 모두 자력으로 귀환한 경우로 한정된 것은 이런 견해가 배경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조선이 피로인 쇄환에 집착했던 것은 그것이 국가의 체면과 관계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이 피로인에 대해 차가운 시선을 보인 것은 그들이 적군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참고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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