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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저주-16세기 스페인의 몰락(2)

구름위 2012. 12. 1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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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스페인으로 흘러 들어온 귀금속에 의해 스페인 내부의 물가가 상승하고 이에 따라 스페인 산 물품의 가격경쟁력 하락함으로써 인한 전반적인 제조업 및 농업의 쇠퇴하였고 "영구 이자 공채인 후로"로 인해 스페인 국민들의 연금생활자화가 진행되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그에 따른 스페인 내부의 귀금속 유출과 이러한 현실에 대한 당대 스페인 인들의 인식과 반응에 대해 써보려 합니다.

 제조업과 농업등 생산과 관련된 경제활동이 쇠퇴한것. 스페인 국왕이 외국 상인들에게 막대한 채무를 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국민들이 금융이자로 놀고 먹는 연금생활자가 된것. 이 3가지 요인에 의해 스페인의 귀금속은 스페인 내부에서 돌지 않고 대거 외국으로 빠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지금부터는 과연 어떤 식으로 스페인의 부가 밖으로 유출이 되었는가 에 대해 알아보려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스페인 식민지의 귀금속은 스페인으로의 유입부터 2가지 종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스페인의 귀금속은 그 유입 과정에서 2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스페인 국왕에게 귀속된 귀금속과 개인 혹은 사적인 회사에 귀속된 귀금속. 이 2가지 입니다. 이 두 가지로 구별되는 귀금속은 그 유입과 유출 과정부터 차이를 보이는데 과연 이 두 가지로 구별되는 귀금속들은 그 양이 각기 어느정도이고 그 유입과 유출과정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요?

-스페인 국왕에게 속한 귀금속.

 해밀턴의 "아메리카의 재보"에서는 스페인으로 도입된 귀금속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왕에게 속한 귀금속, 또하나는 개인에게 속한 귀금속입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1503~1660년 사이 총 도입량은 4억 4700만 페소. 왕에게 속한 귀금속이 1억 1700만 페소. 개인에게 속한것이 3억 300만 페소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왕에게 속한 귀금속이 26.1%, 개인에게 속한 귀금속이 73.9%로 왕에게 속한 귀금속의 양이 더 적음을 알 수 있지요. 왕에게 속한 귀금속은 그 양이 더 적기는 하지만 스페인 외부에 미치는 영향은 더 컸는데 스페인 국왕의 채무 때문에 들여오는 즉시 외국 상인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미 전 편에서 "스페인 국왕의 채무가 대단한 액수이고 그러한 채무는 대부분 스페인 식민지의 귀금속을 담보로 한다"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채무는 귀금속을 담보로 하나 그 식민지 이전시대, 그러니까 귀금속이 대량으로 유럽으로 들어오기 이전 르네상스 시대때와 마찬가지로 환어음으로 상당량 결제가 되었습니다. 허나 환어음으로 결제가 불가능한 경우, 즉 *"환어음간의 수치 차액"(밑에 다시 설명하겟습니다),"용병의 급료 지불"등은 실제 귀금속의 지불이 불가피 하였지요. 이럴 경우 외국 상인들은 스페인 국왕의 귀금속이 도착하는 즉시 이를 가져가거나 심한경우 귀금속이 세비야로 들어오기도 전에 인수하여 다른 곳을 가져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양은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1520~1556년 사이에만 총 3310만 2304 두카트로 그 시기 국왕이 벌어들인 귀금속 수입과 비슷했습니다(국왕의 귀금속 수입 총액 약 3500만 두카트) 즉 스페인이 벌어들인 귀금속의 1/4은 스페인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외국으로 송출된 상태였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남은 3/4는 어떨까요?

-개인에게 속한 귀금속.

 개인이 들여오는 귀금속은 크게 상업적 투자의 결과물과 군사적 약탈의 결과물로 나뉘는데 초기에는 군사적 약탈의 결과물이. 후기에는 상업적 투자의 결과물이 더 많은 양을 차지 하였습니다. 군사적 약탈의 결과물은 정복자들과 그들의 군사,이주 노동자들에 의해 들어오는 귀금속으로 그들의 목적은 식민지에서 부를 창출하여 스페인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기에 그들이 획득한 귀금속은 스페인 내부에 투자 되었습니다. 이들이 들여오는 귀금속은 스페인을 살찌우고 부유하게 만들었지요. 물론 아무런 대가 없이 획득한 이들의 귀금속들은 그로 인해 귀금속의 가치가 하락하고 스페인 인들의 소비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결과적으로는 스페인 경제에 악영향을 미칩니다만 당장은 식민지에서 이익을 본 사람들이 지출을 확대하고 그에 따른 경제의 활성화를 통해 스페인 민중들을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상업적 투자에 의한 귀금속도 마찬가지 였는데 이는 대부분 서인도로 보낸 상품들의 대가 였고 이들은 초창기 2가지 방식으로 스페인을 부유하게 만듭니다. 하나는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인들의 수입이 늘어 남에 따라 이들의 지출이 확대 되어 경제를 활성화시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인도로 보낼 상품들을 생산하기 위해 스페인 내부 제조업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초창기에는 군사적 약탈의 결과건 상업적 투자의 결과건 스페인의 귀금속은 스페인 인들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스페인이 강국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크게 이바지한 것이지요. 허나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스페인 내부의 막대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이러한 부의 창출이 빠르게 소멸되어 갔다는 점입니다. 스페인 내부에서 귀금속의 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귀금속으로 축척되었던 그들의 부는 소멸되어 갔으나 이미 올라간 그들의 소비수준은 내려가질 못하였고 점차 값싼 외국의 상품에 의존하는 측면을 보입니다. 그 결과 스페인에 축척된 막대한 부는 외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스페인은 내부에서 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지요. 결론을 내리자면 국왕에게 속한 귀금속은 국왕의 채무로 인해 빠른 시일내로 외국으로 유출되었고 개인에게 속한 귀금속은 스페인 내부를 돌고 돌다 스페인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무역수지의 불균형으로 외국으로 유출되었습니다. 스페인의 부가 지속적으로 스페인 외부로 유출되었고 스페인은 점차 가난해 져 간겁니다.

-스페인 내부의 비판과 그에 대한 조치.

 스페인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무역수지 불균형으로 스페인의 부는 외부로 빠져나갔고 그들의 정부는 항상 빚더미에 올라 있었으며 생산활동은 둔화되었고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돈을 받아 놀고 먹으며 사치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인 들도 이러한 그들 내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상당수의 신학자들과 학자들은 귀금속에 대한 도덕적 관점에서의 대립에 대해 성서와 고전 작품속 가르침을 가지고 격론을 벌이는데 그쳤지만 크리스토발 데 비야론,사라비아 데 라 카예,코르테스(Cortes)-스페인 궁정의 귀족 ·고위성직자 ·도시대표들로 구성된 의회-
의 의원들,루이스 오르티스,엘 메르카도등등의 학자들은 분명 그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1500년~1540년 사이, 식민지의 귀금속들로 인해 스페인이 부유하게 되고 상업이 활성화 되던 시절이자 아직은 귀금속으로 인한 문제들이 발생되기 이전 시절엔 귀금속으로 인해 발생될 문제들에 대한 비판이 적었습니다. 그 시기 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문제와 국왕의 채무에 대한 비판은 존재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스페인 인들은 그들의 미래를 장미빛으로 예상했고 귀금속으로 인한 부를 즐기던 시대였습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인플레이션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고 코르테스(Cortes)에서는 그에 따른 인위적인 가격 통제 조치를 발행합니다. 1515년,1525년 1532년 1534년 1542년 1544년 1548년에 조치가 취해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더 자주 그러한 조치가 이루어짐을 알수 있습니다. 이는 그러한 조치들이 사실상 인플레이션을 막지 못했다는 것인데 코르테스에서의 조치는 권장사항에 불과하였고 이마저도 당시 인플레이션으로 재미를 보던 제조업자들의 반대로 흐지부지 되었던 것입니다. 

 1540년대 말, 시간이 흐르면서 스페인 상품들과 가격 경쟁에서 비교우위에 있는 외국산 상품들이 스페인 내부시장을 잠식하자 스페인 인들은 이러한 수입 확대에 우려감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이탈리아,독일,프랑스 상인들이 스페인으로 건너와 유리,피혁,가구,견직물,모직물등의 각종 직물 등의 공산품과 *향료,비단 등의 동방물산등을 넘기고 대규모의 은화를 가져가자 당시 스페인인 인들은 "그들(외국 상인)은 우리를 서인도(아메리카 식민지) 사람처럼 다룬다"라고 푸념했지요. 스페인이 서인도에 공산품을 수출하고 귀금속을 수입한 것과 같은 현상이 스페인에 벌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가속화 되자 코르테스(Cortes)는 개인의 귀금속 유출을 금지시킵니다. 외국 상인들은 스페인 내부에서 귀금속을 가지고 나갈 수 없고 돌아갈 때는 돈이 아니라 상품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법으로 정한 것 이지요. 스페인 내부의 부의 유출을 막고 스페인 내부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강압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나 허나 이들의 조치는 상태를 호전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돌아갈 때 "귀금속"이 아닌 "상품"으로 가지고 가야한다는 법률이 제정되자 외국 상인들은 세 가지 방식으로 스페인의 부를 외부로 유출 시켯는데 하나는 그동안 주요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환어음"을 이용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상품"을 가져가되 대부분 원료와 식량등 1차 생산물을 가져가는 것, 마지막으로 "밀수"를 하는 것이 었습니다. 

 이들중 밀수는 항상 존재하여 왔으나 단속의 강화로 인해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았고 그로인한 파급효과도 미미하였습니다. 스페인 경제에 영향을 미친것은 다른 두 가지 방식인데 환어음은 귀금속을 스페인 외부로 유통시키지 않으면서 유통시키는 기발한 수단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상업활동량에 비해 부족한 화폐량을 대체하기 위해 대량의 환어음을 유통시키고 있었는데 외국 상인들은 상품을 넘기고 환어음을 받은후 이를 정기시에서 결제해 은으로 바꾸는 수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정기시에서 은으로 바꾸어 간다면 실질적으로 결국 은이 스페인 외부로 유출되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만 여기서 등장하는게 국왕의 채무 입니다. 외국 상인들은 상품을 넘기고 받은 환어음을 정기시에서 국왕의 공채와 바꾼후 이를 은으로 변환 시킨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외국 상인들은 스페인의 법망을 피해 합법적으로 스페인의 귀금속을 밖으로 유출시킬수 있었습니다.  다른 방법인 방법을 준수하여 상품을 가져가는 방법 역시 스페인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는데 외국 상인들은 자국의 공산품을 스페인에 넘기고 양모,꿀,기름,과일 밀랍,철,수은,소금,염료등등의 원료와 식량을 가져갔습니다. 피혁,나사,비누등의 약간의 공산품역시 수입해 갔으나 전체적으로 이러한 공산품을 팔고 원료를 사가는 외국상인들의 구매 양상은 스페인 내부 산업의 활성화를 가져다 주기 보다는 원료의 가격을 상승시켜 스페인 자국 공산품의 원가와 임금만 상승시키는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코르테스(Cortes)의 조치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플랑드르 전쟁"이 발발하여 스페인 정부에 돈이 급해지자 상황이 변하는데 "화폐 수출 허가증"이 바로 그것입니다. 돈이 급해지자 스페인 정부는 외국상인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고 외국 상인들은 스페인 정부에게 그 당시 스페인에 있는 가장 매력적인 상품. 즉 귀금속의 수출 허가증을 발급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국가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을때 허가증을 발급하였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허가증 발급은 점차 빈도가 높아집니다. 국가로 써도 막대한 채권자인 외국 상인들의 요구를 무시할수 없었는데다 발급 수수료로 받는 세금(8~10%)의 짭짤한 수입도 챙길수 있으니 화폐 수출 허가는 점차 관행이 되어갑니다. 결국 스페인 정부에서 취한 강압적인 조치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1570년대 대량의 귀금속 수출이 바스크 지방과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행해지게 됨에 따라 식민지에서 스페인으로 들어온 귀금속은 다시금 스페인에서 전 유럽으로 유출되는 구도가 굳어지게 됩니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고 식민지의 기존에 있던 귀금속 광산이 고갈됨에 따라 금과 은의 유입이 줄어들자 1550년대 말 부터 스페인 정부는 대단히 휘청거리기 시작하는데 결국 57년 스페인 정부는 일종의 파산신고를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국왕의 최대 후원자인 푸거가문이 파산을 하게 되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국왕의 자문관이며 회계관인 루이스 오르티스는 개혁을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은 후대에 유행하는 중상주의와 흡사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현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간의 격차를 줄여 무역 수지를 개선시킬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위해 그는 나태한 영주,병사,하인,떠돌이,학생,문인,법률가 등등 당시 "후로(juro)"로 먹고 살던 대표적인 사람들을 생산적인 노동에 투입할것과 운하와 관개사업개선. 생산 설비에 대한 투자. 스페인 주화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기를 줄이기 위한 화폐의 은 함유량 감량. 방적 속도를 높이기 위해 방추를 버리고 물레를 도입할 것 등등을 주장했지요. 이러한 그의 주장은 현대 학자들에게 당시로써는 매우 근대적인 "안정화 계획"이라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스페인 내부의 개혁적 움직임은 얼마안가 사그러 들고 맙니다. 1560년대 중반 이후, 멕시코 포토시 등의 새로운 대규모 광산이 발견되고 "수은 아말감 법"이 광산에 도입되어 그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게되 이러한 스페인 내부의 문제점들을 다시 잠식 시켰기 때문입니다. 식민지로 부터의 폭발적인 귀금속 유입은 다시금 스페인을 부유 하게 만들었고 스페인 내부의 경제적 문제들로 인한 스페인 인들의 불만을 가라 앉게 만들었지요. 이후 스페인은 급속한 인플레이션에 놀란 코르테스 내부의 몇몇 비판적 의견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 이전 50년대에 이루어 졌던 개혁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스페인 내부의 문제들은 점점 더 커져만 가다 펠리페 2세 말기부터 스페인은 몰락해 가고 맙니다.

-후기.

당대의 스페인을 보면 오늘날 모국과 참 유사한 것 같지 않습니까? 제조업 기반이 취약하나 식민지의 귀금속이라는 노다지를 바탕으로 막대한 군사력을 육성해 막대한 제국을 꾸려나간 스페인. 귀금속을 달러로만 치환하면 오늘날 모국이 스페인을 답습해나가는것 같아 좀 기분이 묘하네요. 실질적인 산업 기반이 없는 금융업은 허황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달러라는 노다지에서 부를 창출하는 모국가도 이런 과오가 없기를 기원하네요.


*"환어음간의 수치 차액"-당시 유럽은 활발한 상업거래에 비해 화폐의 수량이 충당되지 못하여 환어음을 만들어내고 몇몇 특정 정기시에서 환어음들을 모아 상호 결제를 통해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니까 A,B,C라는 상인이 있었다고 가정을 합니다. A가 B에게 100원어치의 물건을 팔고 환어음을 받습니다. 이때 환어음에는 "X날 X 정기시에서 결제를 하겠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B가 C에게 물건 100원 어치를 팔고 환어음을 받습니다. 이때 환어음에도 "X날 X 정기시에서 결제를 하겠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후 C는 A에게 100원 어치 물건을 팔고 똑같이 "X날 X 정기시에서 결제를 하겠다"라는 환어음을 받습니다. 즉 A는 C에게 100원의 빚을 지고 C는 B에게, B는 A에게 빚을 져서 환어음을 끊어 준겁니다. 이후 이 세장의 환어음은 X날 X정기시에 모여 소멸이 되는것이지요. 이렇게 A,B,C는 실제 화폐를 주고 받는 거래없이 환어음만으로 3가지 거래를 완료시킬수 있게됩니다. 당시 유럽에는 이런식의 거래가 매우 활발하였고 리옹,메디나 델 캄포,제노바,베네치아,밀라노,안트워프 등등 각지의 정기시에선 유럽 각지의 환어음들이 모여들고 서로가 서로를 소멸해주는 결제가 이루어 진후 최종적으로 남은 잔액만 실제 금속 화폐로 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환어음간의 수치 차액은 실제 금속 화폐가 필요로 하고 귀금속의 지불이 불가피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