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금의 저주-16세기 스페인의 몰락(1)

구름위 2012. 12. 11. 14:04
728x90


 16세기 스페인이 몰락했다? 라고 말한다면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많으실겁니다. 16세기는 스페인이 잘나가던 시기였으니까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산출되는 금과 은, 구리등 광석, 목재, 수지, 가죽, 곡물, 와인,식료품 등등의 막대한 자원과 막강한 "테르시오"군단을 앞세워 중유럽과 서유럽,남유럽, 아메리카 대륙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세운, 그야말로 팍스 에스페냐를 이룬 시기가 16세기 이지요. 카를로스1세(1500년~1558년) 시기 1520년 신성로마제국 황위를 차지(이후 카를 5세로 불림)하고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를 눌러 명실공히 유럽 최강국으로 자리매김 한데다 펠리페2세 시기엔 카톨릭의 수호자로 불리며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제국을 격파한. 그야말로 빛나는 영광의 시기가 16세기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스페인이 몰락했다? 분명 의아한 말입니다. 허나 분명 스페인은 16세기 부터 몰락해갔습니다. 경제적으로 이미 16세기부터 몰락하기 시작했지요. 겉으로는 부강하고 강대해 보일지 모르나 내부 사정은 이미 쇠퇴해가던 시기가 16세기 입니다.
 

16세기 중반, 스페인에선 이런 말이 나돌았습니다. "스페인은 유럽의 서인도(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칭)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서인도 사람들 처럼 다룬다. 우리가 마치 서인도 사람인것 처럼.." 이 말에 당시 스페인의 상황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당대 유럽이 스페인인 인들을 식민지인들 처럼 학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스페인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막대한 이득을 가져간 것처럼. 다른 유럽 국가들이 스페인에서 막대한 이득을 가져갔다는 말이지요. 스페인이 타 유럽 국가들의 "아메리카 식민지"가 된것입니다. 그렇다면 스페인은 어떻게 다른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 노릇을 하게 된것 일까요? 가장 큰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스페인이 그토록 탐내던, 스페인이 최강국가가 된 원동력인 식민지의 "금과 은" 때문입니다.
 
- 아메리카의 금과 은.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은 막대한 양의 귀금속을 획득하였습니다. 그 양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인데 시기 별 스페인으로 유입된 귀금속 량을 산출해 보면


(스페인으로 유입된 귀금속의 각 년대별 총량)


1500년대-> 금 4,965 kg   은             0 kg
1510년대-> 금 9,154 kg   은             0 kg
1520년대-> 금 4,889 kg   은          148 kg
1530년대-> 금 14,466 kg  은      86,193 kg
1540년대-> 금 24,957 kg  은    177,573 kg
1550년대-> 금 42,620 kg  은    303,121 kg
1560년대-> 금 11,530 kg  은    942,858 kg
1570년대-> 금 9,429 kg   은  1,118,592 kg
1580년대-> 금 12,101 kg  은  2,103,027 kg
1590년대-> 금 19,451 kg  은  2,707,626 kg


으로 나타납니다. 이 수량은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 이전 유럽으로 유입된 금의 양을 감안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양임을 알수 있습니다. 아메리카 식민지 시대 이전 1490년대 유럽 내의 귀금속 생산량이 연간 평균 은 47,000 kg 금 580 kg(90년대 총 생산량은 은 470,000kg 금 5,800kg)이고 포르투갈에 의한 북아프리카의 금 유입이 1500년대 연간 평균 430kg, 10년간 총량 4,300kg 임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양이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막대한 양의 귀금속 유입은 스페인이 강대국이 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문제는 이러한 엄청난 양의 귀금속의 유입이 스페인 내에 막대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 스페인내의 물가는 그 동안 거진 정체되어있던 유럽내의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굉장히 급격히 오르는데 해밀턴에 의해 연구된바에 의하면


(16세기 스페인 내부의 물가 상승률.)


1506-1510 16%
1511-1515 -8%
1516-1520 5%
1521-1525 17%
1526-1530 7%
1531-1535 0%
1536-1540 4%
1541-1545 6%
1546-1550 12%
1551-1555 6%
1556-1560 10%
1561-1565 15%
1566-1570 1%
1571-1575 8%
1576-1580 0%
1581-1585 9%
1586-1590 2%
1591-1595 3%
1596-1600 12%


로 나타납니다. 16세기 전반적으로 스페인의 물가상승은 꾸준히 지속되었음을 알수 있지요. 여기서 가져볼 의문은 과연 이러한 물가 상승이 식민지의 귀금속에 의해 창출된 결과인가? 다른 요인에 의한것은 아닌가? 일겁니다. 물론 이러한 물가상승이 전반적으로 스페인으로 유입된 귀금속에 의해서만 의존하여 이루어 진것은 아닙니다. 물가상승의 상당부분은 스페인 내부의 흉작때문에 기인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1506,1507년 스페인 전역에 흉작이 들었을때 밀의 가격은 전년에 비해 96%상승하여 물가 상승을 주도 하기도 하지요. 허나 흉작에 의한 물가상승은 다음 흉작을 벗어나면 물가가 다시 복구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비해 위의 수치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1505 1530년대 본격적으로 금과 은이 유입된 이후에는 이러한 물가 복원력이 둔화됨을 보입니다. 1506,7년 흉작이 들었을때 스페인의 물가는 굉장한 물가 상승률을 보이지만 다음 5년동안 마이너스 상승률을 보이며 물가가 다시 복원됨을 보이나 1529년,1563,4년 흉작이 들었을때에는 다음년도 물가상승률이 낮아지기는 하나 그 하락폭이 이전과는 대폭 적어짐을 보입니다. 즉. 16세기 전반에 걸쳐 스페인의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됨을 볼 수 있지요.


16세기 스페인의 물가 상승이 식민지 귀금속에 의한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한가지 더 확인해야 할것은 그 이전 시대의 물가 상승률일 겁니다. 식민지 시대 이전 물가가 안정적으로 고정되어 보임과 비교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 이전 15세기 스페인의 물가는 전반적으로 꾸준히 하락세였습니다. 아니 유럽 전반적으로 물가는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보이는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특히 에를 하밀턴의 연구에 의하면) 1420년대 발렌시아의 물가를 기준으로(이때 물가지수를 100으로 잡으면) 물가지수는


(15세기 스페인 발렌시아의 물가지수)


1400~1420 104.6
1420~1440 100
1440~1450 102.9
1460~1470 94.5
1490~1500 89.2


로 나타나 꾸준히 하락됨을 보입니다. 고로 식민지 시대 이전의 물가지수와 16세기 전반적인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이는 식민지의 귀금속이 스페인으로 대거 유입됨에 따라 스페인의 물가가 상승 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귀금속에 의한 스페인의 물가 상승은 스페인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첫째 스페인 내부의 제조업과 농업의 몰락을 초래하였고 둘째 스페인 국민들의 '대부생활자화'를 가져다 주었으며 셋째 스페인의 '서인도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스페인으로 유입된 귀금속은 스페인 내부의 물가를 상승 시켰습니다. 이렇게 되자 스페인의 물가는 전반적으로 인근 다른 국가들에 비해 높은 수치를 기록하는데 이러한 스페인의 높은 물가에 대해 1556년 스페인의 신학자 '메르카도'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돈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모든 것, 심지어는 노동력 까지도 돈이 풍부한 나라에서 보다 적은 돈으로 팔린다. 스페인보다 돈이 적은 프랑스에서는 빵, 포도주, 나사, 인력등 모든 것이 저렴하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도 서인도의 발견으로 금과 은으로 덮이게 된 때보다도 돈이 적었을 때 물건과 노동력이 더 저렴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당시 스페인이 다른 나라에 비해 물가가 높았으며 그 이전에 비해 이후가 더 물가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고 당시 지식인들도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높아진 스페인 내부의 물가로 인해 스페인 내부의 제조업과 농업의 몰락을 초래 하였습니다. 초창기 물가가 상승하던 시절 스페인의 제조업과 농업은 인플레이션의 효과로 인해 오히려 활성화를 띄는 양상을 보이나(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으로 생산자들의 생산욕구를 고취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스페인의 물가 상승이 외국의 물가 상승보다 급속해진 후 스페인의 제조업과 농업은 외국과의 가격경쟁력에서 패배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후퇴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에 대해 1550년대 당시 스페인 국왕의 자문관이며 회계관인 오르티스는 "스페인은 손쉽게 귀금속을 얻어 부를 축척하는 방법을 배운 이후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부를 축척하는 2가지 방법. 땅을 경작하고 쇠를 두드려 쟁기를 만드는 법을 모두 상실하였다. 스페인 인들이 필요한 모든 물품은 전부 외국에서 만들어져 들여 오고 있다." 라고 평하였습니다. 또한 경제사적 입장에서 당시의 또다른 주요 인물인 신학자 메카르도는 "교역 및 계약 개론"에서 이렇게 적고 있지요. "톨레도와 세고비야 같은 산업도시들은 산업 생산자 들의 견해를 표현했는데 이들은 가격의 점진적인 상승은 환영했지만 원료의 수출과 외국 산업제품들의 수입에 맹렬히 반대했다. 또한 부르고스, 북 카스티야, 나바라등 주요 농업지역들은 그들의 농업 경쟁력 쇠퇴에 한탄했다" 스페인이 손쉽게 얻은 귀금속은 스페인이 강국으로 되는 원동력이 됨과 동시에 스페인의 제조업과 농업을 망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이 쇠락하게되는 원인이 되지요.

 

식민지의 귀금속 유입으로 생성된 또다른 단점은 스페인 국민들의 '연금생활자화'일 것입니다. 이는 위에 언급한 스페인 내부의 제조업과 농업의 몰락과도 연관이 있는데 스페인의 물가가 타국에 비해 높게 책정됨에 따라 스페인 내부의 제조업과 농업의 경쟁력 하락을 부름과 동시에 외국 노동자들의 스페인 유입을 초래 하였습니다. 높은 스페인의 임금의 유혹에 외국에서 대거 노동력이 유입되었고 이들은 기존 스페인인들이 행하던 각종 힘든 농업,광업,공업일을 도맞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존 스페인인들은 "연금생활자"같은 존재들이 되어 놀고 먹기 시작하지요. 기존 스페인 인들의 '연금생활자화"는 스페인 국왕의 거대한 채무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국왕. 그러니까 우리의 위대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신 카를5세 께서는 지속되는 전쟁과(이탈리에서 지속된 캉브레 전쟁과 각지에서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쟁, 투르크와의 신경전등등) 신성로마제국의 차지하기 위해 벌인 프랑수아1세와의 경쟁등으로 막대한 재화를 소비하였는데 이러한 재화는 식민지 귀금속의 불규칙하고 불안정한 유입으로 인해 상당량 채무로 충당되었습니다. 카를 5세가 빚진 채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1520~32년 원금과 이자를 포함한 채무액 632만 7371 두카트.
1533~42년 원금과 이자를 포함한 채무액 659만 4365 두카트.
1542~51년 원금과 이자를 포함한 채무액 1073만 7843 두카트.
1552~56년 원금과 이자를 포함한 채무액 1435만 1591 두카트.
카를 5세가 진 전채 채무액 3801만 1170 두카트.

 

 이 기간동안 카를5세가 식민지로 부터 벌어들인 귀금속의 가치가 3500만 두카트 정도 임을 감안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를 빌렸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빚의 대부분은 당시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국제 상인들. 제노바,플랑드르,독일,프랑스,베네치아등지의 상인들에게 빌렸는데 카를 5세가 외국인들에게 빌린 액수만 무려 3310만 2304 두카트 입니다. 채무의 대부분을 외국인인들에게 빌림을 알 수 있지요. 카를 5세는 이러한 채무를 식민지의 귀금속으로 "후로(juro)"라고 불리는 이자가 고정된 영구 공채의 발행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들 외국인 상인들은 이 "후로"를 받고는 거기에 이익을 붙여서 스페인 국민들에게 되팔았습니다. 스페인 인들에게 이 "후로"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데 누구나 일하지 않고 이자로 편히 먹고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지요. 성직자,귀족,농민,수공업자,학생 할것 없이 이 "후로"를 구하기 원했고 "후로"의 이자율이 10%에서 7%로 하락함에도 불구하고 후로는 여전히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연금과도 같은 국왕의 공채증서인 "후로"는 스페인 국민들을 연금 생활자로 만들게 됩니다. 스페인 국민들은 노동력은 외국인들에게 의존한 채 자신들은 놀고 먹기 시작한것이지요.

 

 스페인 내부의 물가상승으로 인해 스페인 내부의 수공업과 농업이 무너진것과 스페인 국민들이 "연금 생활자화"된 것의 결과 스페인의 귀금속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스페인 외부로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다음편에서는 스페인의 귀금속이 어떻게 외국으로 빠져나갔는지와 그 결과. 그리고 당시 스페인 인들이 이러한 자국의 상황을 어떻게 인지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써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