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세계 4대 해전과 이순신 장군""`비온다는 주말 천천히읽고시간 보내세요!!""

구름위 2012. 10. 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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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해전과 이순신 장군

 

 

 '이순신 제독의 한산대첩'이 4대 해전에 들어가느냐? 라는 의문이 많나 봅니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건 '전 세계 해군사관학교에서 과연 저런 것을 배우는가?'하는 것이죠. 우리가 사는 곳이 한국이라는 곳이라서, 한국의 전신인 '조선'의 장수에 대한 승전이야기라서, 부풀려지고 곡해된 것은 아니냐? 라는 의문인 것이죠.

더군다나 '도고 제독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그저 '일본'에게 우월감을 나타내기 위한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유언비어'가 아닌가? 에 대한 의문이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를 설명키 위해서는 '사관학교'의 교육시스템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겠죠.

참고로 우리나라의 사관학교는 '교육'에 관해서는 '대학'과 같은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46점의 '학점'을 이수해야 학사학위를 받는 것이죠. 그리고 '전공'도 세분화 되어있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저는 '군사전략학과'였습지요. 찾아보니 전기, 정보통신공학, 기계조선, 경영과학, 해양학, 전산과학, 국제관계학, 군사전략학, 외국어학이 전공으로 존재합니다.

허나 전공이 다르더라도 '해전사'는 공통필수 과목입니다.

'해전사'에서 흔히들 얘기하는 '세계 3대 해전'이 바로 살라미스, 칼레, 트라팔가 해전입니다.

네, 이는 '서양사'의 시각에서만 다루어지는 3대 해전이죠.

 

트라팔가 해전 설명도



여기서 3대라 함을 3가지 큰 해전이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수많은 해전이 있었으나, 해전의 '역사적'흐름, 즉 '변환점'에 속하는 해전의 '축'을 의미합니다.

살라미스 해전은 함선끼리 가까이 다가가 선원들의 육박전을 이끌어내던 기존 해전에서 함선의 앞 부분을 강하고 뾰족하게 만들어 상대의 함선에 충격을 가하여 전복시키거나 선원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전술을 펼쳤고, 칼레 해전은 함포를 사용하여 '집중포화'를 쓰는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해전사의 또 다른 변혁점을 보여주었고, 트라팔가 해전은 넬슨 제독의 함대 운용술의 극치를 보여준 해전이었습니다.

커다란 해전이 아닌, '역사적 해전 패러다임 변환 사건'들을 뽑아낸 것이 흔히 얘기하는 '세계 3대 해전'입니다.

그런데 여기 슬그머니 '한산대첩'이 4대 해전으로 들어간 이유는 뭘까요?

학익진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상대의 '사령선(명령을 내리는 선박)'에게 선공일점사를 하며 상대의 예봉을 꺾고, 무척이나 변화 무쌍한 함대 운용을 벌이며 '집중포화'를 사용한 화려한 전술이었기 때문입니다.

최무선 함대가 1300년대 이미 우리의 선박에 자신이 개발한 함포를 설치했고, 그리하여 우리 수군은 서양보다 200년 앞선 선박함포운용기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칼레 해전 보다 200년이나 이전에 말입니다.

칼레 해전이 적과의 조우 이후, 무차별적 개별함선 포격전이었다면 한산대첩은 완벽하게 조직되고 통솔이 기가막힌 최고의 해전이라는 것이죠.

이미 오래전부터 서양학에서나 내려온 3대 해전에 우리 한산대첩이 뒤늦게 4대 해전으로 들어서게 된 이유는 순전히 일본덕입니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해군력은 막강했고(항공모함이 꽤나 있었지요 --;), 이순신 제독의 학익진을 개량한 T형 진으로 러시아 함대를 박살내 버렸습니다.

물론 그 후에 미국에게 깨지고, 결국 미 군정에 놓여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만.

일본이 미국의 통치하에 놓이면서 미국은 늘 하듯 일본을 통해 일본과 주변국의 정보(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모두 습득합니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미국의 해군을 괴롭혔던 일본의 해군사에 대한 연구중에 '이순신'이 발견 된것이죠. 그리고 그의 전쟁성과가 '불패신화'라는 어처구니 없는(에스파냐 무적함대도 결국은 박살났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이유는 그의 함대는 무너진 적이 없다는 얘기지요) 기록에 놀라고, 그의 전술과 16세기에 그런 '함포술'과 함대운용술을 갖춘 해군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치를 떱니다.


우리는 역사시간에 '세계 4대 문명'이라 배워왔습니다. 이 사관이 요즘은 세계엔 스무개가 넘는 문명이 존재했었다라고 바뀌어 가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세계 4대 해전'이라는 것은 '해전사'를 연구하는 교수들의 주장 중에 하나입니다.

아직도 '세계 3대 해전'을 배우는 국가도 있고, 영국과 독일, 미국, 우리나라 같은 경우엔 '세계 4대 해전'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엔 제가 알기론 가르치는 교수마다 '다르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우 저렇게 '3대'니, '4대'니 그런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터닝포인트'를 짚을 때, 3군데를 짚는가 4군데를 짚는가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심지어 위에서 밝힌 일본이 러시아 함대를 쓰러뜨린 '쓰시마 해전', 혹은 '일본해 해전'(아쉽게도 아직도 전 세계 전쟁관련 학술서적에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문물을 더 빨리 받아들였기에 'Sea of Japan'이 많습니다)이라 불리는 해전을 넣어 '세계 5대 해전'이라 짚는 교수도 있습니다.

네, 3대고, 4대고, 5대고 중요한게 아닙니다.

말그대로 세계 '해전사'에 '한산대첩'은 그야말로 '백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사람이라고, 한국인 교수라고, 저 '한산대첩'을 목숨걸고 홍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양의 '전사(戰史)'를 모두 꿰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교해 볼때, '한산대첩'의 가치가 훨씬 드높기에, 잘 알지 못하는 서양인들에게 알리려 하는 것입니다.

독도가 우리 땅인거, 동해가 우리 바다라는 거, 우리만 알고 있으면 안되듯이, 국제 사회에 인정 받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도고 제독의 발언은 '기자'들 사이에서 확인할 길이 없기에, 우리나라에서만 도는 낭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허나 분명 존재하는 일제강점기의 기록들은 일본 해군들이 '이순신 제독'을 천황 다음으로 숭배하고, '軍神'의 예를 갖추며 기렸던 영웅입니다.

그러했기에 일본 군관학교를 나온 우리의 마사오 끈(다카기 끈인가? 박정희)도 100원짜리 동전에 우리 순신이 업빠를 넣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이순신' 해대면서 교과서엔 별 쓸데없는 말타다가 떨어진 '쪽팔린'이야기만 집어넣는 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한국'이라는, 60만 대군중 40만이 넘는 '육군'을 가진 나라에서 사는 비운이기도 합니다. 물론 북한 때문이지요.

박정희가 아무리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 병참운용을 좋아했더라 할지라도 육군 별 개수랑, 해공군 별 개수랑 합쳐보면 게임도 안되는 군의 권력구도에서, 해군의 최고 장수가 해군력을 화려하게 다룬 것 보단 '군인의 의지'라는 이미지로 부각되는 것이 '군대의 윗분'들에게 기분이 거슬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젠 시대가 바뀌었지요, 해상왕 장보고가 TV드라마로 제작되고,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가 대작으로 방영됩니다.

심지어 기존에 잘 보여주지 못했던, '이순신의 함대 운영'이 아주 세밀히 묘사되는 '지루한'장면들이 나옵니다.

육군군부독재에 휘둘린 '이순신'의 모습이 이제야 제대로 구현됩니다.

병약했던 이순신, 군대의 4대 주요요소인 인정작군(인사, 정보, 작전, 군수)를 모조리 커버해내던 그 뛰어난 지략이 지금까지 가려져 왔던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과거 KBS의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고증은 주로 해군사관학교에서 해주었습니다. 임원빈 중령(지금은 대령 진급하셨을라나?, 전 이 분에게 철학의 이해 들었는데 무척이나 졸려 죽을 뻔했죠 --;)님을 중심으로 교수진들이 지금까지 연구해온 것들을 제작진이 원하는 정보마다 세밀히 가르쳐주는 모양입니다.

물론 중간 중간 있었던, 이순신이 선조를 알현한다던가, 거북선이 침몰 된다던가 하는 것은 '고증'이 된것이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순신의 이미지가 '육군에 의해 왜곡된'것이었음을 부숴주고 있는 드라마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어.

이순신의 해전들이 전 세계 그 어떤 해전 보다도 뛰어난 해전이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사료'가 말해줍니다.

반만년 역사위에 제대로 '사료'가 없어서 떳떳하게, 중국과 신경전 할 필요없이 세계에 내세울 민족의 영웅이 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세운 전공들의 '사료'가 무척이나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이 말하는 배후의 '논리적 추론 가능한 사건들'은 우리가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우리의 영웅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도고 제독의 비교평가 따위도, 혹여나 의심갖는 '민족주의로 인한 선입견'도 필요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지배한 것은 '유연한 포술'이었습니다. '대포'의 운용이 기가막혔던 것이지요.

허나 그 나폴레옹 보다 200년전에. 그것도 육지가 아닌 바다 위에서, 함대의 포술을 자유자재로 구사케 하고, 7년 조일전쟁 기간동안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역사적 진실.

그것만으로도 우리 민족의 '해전사'에 대한 자부심은 충분합니다.

'도고'의 이야기가 유언비어든 아니든.

우리의 이순신은 그런 유언비어론 자체가 필요없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제독'입니다.

 

 

 

#이순신 Vs 넬슨

 

넬슨

호레이쇼 넬슨 제독에 대하여 알아보자

영국은 각자가 임무를 다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불멸의 메시지 남겨

신화남긴 '넬슨 터치'

영국 국민들이 전설에 가까우리만큼 받드는 영웅은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다. 그의 일생은 여자 관계만 빼놓으면 한국의 이순신 장군과 비슷하다. 높이가 58미터나 되는 넬슨 탑과 동상은 런던의 최고 번화가인 트라팔가 광장에 세워져 있다. 런던의 동서남북 좌표와 주소는 이 트라팔가 광장을 중심으로 표시된다.


같은 시대에 산 웰링턴경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물리쳤지만 그는 나중에 수상에 오른 다음 아집의 정치를 펴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잃었다. 우선 넬슨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숨졌다는 점에서 그와는 다르다. 그뿐만이 아니다. 넬슨은 세인트 빈센트 전투(1797)에서 부하들을 진두지휘, 적의 배에 올라 육박전을 벌이다 한쪽 눈을 잃었는가 하면 테네리페 전투에서는 오른 팔을 잃었다. 애꾸눈에 외팔이 제독이 된 그는 재혼과 동시 은퇴했으나 나폴레옹이 영국을 침공하려하자 기꺼이 군복무 재소집에 응했다.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이 시작된 그 즈음 영국은 용장인 그를 절대로 필요로 했었다.


넬슨의 작전은 특이했다. ‘넬슨 터치’로 불리는 이 전술은 적 함대의 가운데를 뚫고 들어가 상대방을 분열시킨 다음 궤멸시키는 것으로 장병들이 일치단합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공격방법이었다. 넬슨은 부하를 자기 몸처럼 돌보고 사랑해 그가 나타나는 것 자체만으로 영국군은 사기충천했다. 넬슨이 트라팔가에서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기함 ‘빅토리’호(사진)로부터 부하들에게 내린 메시지는 두고두고 영국인의 정신훈화로 물려져 내려오고 있다. “영국은 여러분 각자가 자신의 의무를 다해 줄 것을 기대한다.”


평범하지만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영국식 표현이다. 당시는 무전이 없어 깃발수화로 각 함정에 전달했다. 트라팔가는 스페인 남부해협으로 프랑스 연합함대 33척, 영국함대 27척이 이 곳에 집결해 세기의 대해전을 벌였다. 영국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프랑스 병사의 저격에 사령관인 넬슨 제독(47세)을 잃는 비운을 당했다. 트라팔가 해전(1805)을 계기로 영국은 대서양과 지중해를 지배하게 되었고 나폴레옹은 바다를 건너 영국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다시는 꿈꾸지 않게 되었다.


넬슨은 주나폴리 영국대사 해밀턴경의 부인 엠마와 열렬한 사랑에 빠져 부인과 이혼했다. 그는 작전회의실 벽에 엠마의 사진을 걸어 놓을 정도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으며 트라팔가 전투만 끝나면 런던 교외에서 그녀와 여생을 보내겠다고 약속 했으나 그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47세를 일기로 숨졌다. 12세에 갑판 사병으로 시작해 제독에까지 오른 호레이쇼 넬슨 - 그는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군인에게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다

 

트라팔가르 해전에 대하여...

 
 

 

넬슨이 사용한 전술을 이해 하려면 당시 주력함인 전열함의 특성과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해전전술이 뭔지 아셔야 이해가 가실듯합니다만.

큰 질문3가지

1. 어떤 점에서 넬슨의 저런 전술이 훌륭한 것인지

2. 왜 프랑스는 12시 00경부터 12시 30분경까지 30분이나 허비했는지

3. 다른 해적선단이나 임란때의 일본 수군 전술과의 차이점


 

 당시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전술은 단종진이라고 해서 전열함들이 대열을 유지한 상태에서 적함대에게 포격을 가하는 방식이었죠.  보통 1열로 긴 대형을 유지해 포격을 하는 방식입니다만.  전열함의 화력을 최대로 사용할수 있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전술은 화력이 우세한쪽이 절대적으로 우세하기 마련이죠.

 

 결국 영국에서 단종진을 파훼하는 전술을 고안해 내었는데 적함대의 대열을 분단하여  둘로 분단된 함대의 한쪽을 각개격파하는 방법이었죠.(깊이 들어가면 더 복잡합니다만.)

 

 트라팔가해전에서 사용한 전술도 저것을 응용한것입니다만. 이순신장군과는 달리 프랑스쪽에서 대응을 못한 이유는 전열함의 특성때문입니다.  조선의  판옥선은 전투시에는 노를 사용하기 때문에 진형을 쉽게 변형하는게 가능했고 민첩한 움직임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일본함대는 장거리공격을 할만한 무기가 거의전무했고 그래서 한산도해전에서는 일본수군을 발라버립니다만.

 비슷한 상황에서 이것을 프랑스함대가 하지 못한 이유는

 

첫번째 전열함의 동력원이 바람이었기 때문에 노를 이용해서 진형을 변형할구 있었던 판옥선과는 달리 다시 바람을 받아서 반전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는겁니다. 일반적으로 단종진끼리의 전투는 어느쪽이 풍상을 장악하는가가 승패를 좌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만.

 

두번째 전투중에 발생한 포연으로 인해 각 함선이 기함의 신호기를 인식하는게 어려웠고 이때문에 각함장은 알아서 싸워야 했습니다. 전통적인 단종진이라면 그냥 냅다 포만 갈기면 끝나는 일이었지만 이런 경우라면 함장들이 상황을 판단하여 적절하게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함선간에 간격을 줄일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유지할것인가. 넬슨또한 함장시절에 같은 상황에서 대열을 이탈하여 적함대의 움직임을 차단함으로써 승리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만.  능동적으로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가진 함장들을 보유한 나라는 영국뿐이었죠.  이건 같은 전술을 프랑스도 사용했지만 프랑스는 성공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번째  당시 포의 명중률이 낮았기 때문에 전투는 근접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명중률을 보장받을수 있는 사거리안에 적함이 들어오기전까지는 포격을 하지 않았죠.  또한 영국과 프랑스는 포격전술에서도 달랐기 때문에(프랑스는 적함대의 마스트를 공격하는 방식인데 비해 영국은 함체를 공격하는 방식입니다.) 차이가 납니다만.

 

네번째 전열함들은 포를 보통70문에서 많은 배들은 100문까지 탑재합니다만 포한문당 10명의 승무원이 배치되었고 전투중에 배를 조종하는 인원들과 갑판에서 전투하는 인원들을 제외하면 배가 보유한 함포를 모두 사용하는건 불가능했죠. 이때문에 전투중에는 한쪽에 탑재되어 있는 포문만을 사용했고 반대쪽은 병력이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단종진이 분단당하고 앞뒤로 포위당하면 포위당한쪽은 포위한 쪽에 비해 절반의 포만을 사용하게 되기 때문에 패배로 이어지게 됩니다.

 

범선시대의 최후의 해전 중 하나인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은 프랑스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리하여 넬슨은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지상작전에만 한정시키도록 하여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했으며,영국은 내내 세계의 바다를 장악함으로써 영원히 해가지지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했다

 

두영웅의 능력 진실과거짓

어떤 이들이 말씀하십니다.어떻게 나라를 위해 싸운 인물들을 비교할수있냐고...

다른분들은 넬슨의 대양함대가 한국의 굴곡과 조류차가 심한데서 일본군과 싸우고...
이순신의 거북선/판옥선 함대가...대서양에서 프랑스,스페인과 싸우는 것도 비교를 해야 한다
물론, 스페인/프랑스 해군은 함포를 가지고 있었다.

글쎄요 1500년대 후반에 활약하신 이순신장군과 1700후반에서 1800년초 까지 활약한 넬슨을 비교하시고,함포를 운운 하시면 정당한 비교가 될수 없습니다. 과연 넬슨이 영국의 1500년대 해군력으로 이순신장군과 싸워서 승리할수 있었을까요? 물론 두영웅을 비교우위를 정한다는 것부터 문제가 있지만 객관적인 능력비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넬슨의 최고 해전중 하나라는 트라팔가르 해전은 33척의 연합함대와 27척의 넬슨함대의 전공만 보다라도 이순신장군과 비교가 되지않습니다.카디스 남방 트라팔가르곶의 앞바다에서 연합함대 33척은 넬슨의 함대 27척의 습격을 받아, 침몰 5척, 포획당한 함선 17척, 전사자 8,000명이라는 참패를 당하였다. 영국측의 전사자는 넬슨 이하 1,663명이었다.여기서 적을 얼마나 죽였는가는 볼필요 없이 넬슨의 아군쪽 피해상황만 봐도 넬슨의 전략전술의 능력을 알수 있습니다.적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군의 피해를 얼마나 줄일수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능력을 비교할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세계사학자들 역시 학자라고하지만 그들의 민족주의없이 역사를 평가하진않죠.누구나 자국의 역사를 좀더 빛내고 싶어합니다

일본이나 중국처럼 왜곡의 형태로도 나타나고 아님 조금 과장 시키는 방법이 있겠죠

넬슨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힘없고 이름없는 동양의 영웅 보다는 자신들 과 같은서양사람 혹은 자기나라의 영웅을 좀더 부각 시키고 싶었겠지요

객관적으로 세계3대 해전이라고 하는 모든것들이 이순신 장군의 3대해전 보다 뛰어난 해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순신장군을 비하시키는 일부사람들은 장군께서 전략전술에 능하신것 보다는 적들보다 해전에서 뛰어난 무기 체계가있었기에 가능했다 판옥선.귀선,천자총통,신기전(해전에도 사용했나?),요즘대함미사일과같은 대장군전.크레모아에대당되는 비격진천뢰 등 뛰어난 무기체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전략전술이다...음~ 어느정도 공감하는 말이다. 하긴 원균같은 인물은 같은 무기를 줘도 삽질하는걸 보면 장군님이 얼마나 뛰어난 분인지 상상도 하기 어렵지만...

 

넬슨은 자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전쟁에 임했지만 성웅께서는 국가의 지원없이 다른이들과 임금의 태클을 받아가며 전쟁에 임하셨지요.이순신 장군은 혼자서 체계적인 군운용과 군수물자 확보등 전쟁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착실히 다지고 계셨지요 그리고 뛰어난 장군의 능력이 합쳐져서 23전 23승이라는 신화를 만드셨다. 다른 이들은 성웅은 방어전 위주의 전략이라며 깍아내립니다.하지만 넬슨같은 경우는 오직 해전에만 신경을 쓰면되는 상황이고 적과도 병력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진않았죠  성웅께서는 적육군 공격에다가 적보다 훨씬적은 병력으로 싸워야되는 상황이었다는걸 알고있을까요?. 이것이 얼마나 큰 차이라는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습니다.

 

 

 

 

#신화에서 역사로 거북선

 

 

 

지휘실 - '장대'라고도 하는데 거북선의 선장(장군)이 머물며 작전을 지시하는 공간

 

부관실 - 거북선에 승선한 장교들의 공간

 

식수, 방화수 - 나무배의 특성을 고려한 화재 대비 및 식수용 물통

 

의료실, 취침실 - 일반 병사들의 휴식 공간인 동시에 전함의 특성을 고려하여 부상자를 위한 치료 공간으로도 활용

 

도깨비머리 - 당파와 주술적인 의미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으나 보통 물길을 갈라 배의 전진에 도움을 주는 장치로 활용

 

누수칸 - 배에 스며든 물을 퍼내는 시설

 

병사 취침실 - 일반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

 

대창고 - 배의 중심과 복원력을 감안하여 무거운 무기들을 보관하던 장소

 

무기고 - 화살과 총통 방사체 등 2층과 3층 갑판에서 주로 사용하는 무기들을 보관하는 시설

 

조리실 - 배안에서 기본적인 취사가 가능하도록 구성한 시설

 

화장실 - 바다에 곧바로 배설물이 떨어질 수 있도록 설계

 

총통 점화 화로 - 총통의 심지에 불을 쉽게 붙일 수 있도록 화포 주변에 설치

 

돛줄 지지대 - 거북선 돛줄의 경우 방패연과 같이 여러 줄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들을 한꺼번에 고정하는 시설이 필요

 

돛 지지대 - 돛 지지 기둥과 더불어 돛대를 고정하는 장치

 

돛 지지 기둥 - 돛을 세울 경우 돛대를 지지하는 장치

 

 

 

 

화약

중국에서는 12세기 북송시대에 전장(戰場)에서 사용되었고, 우리 나라에서 화약의 폭발력이 알려져 중요한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전반 고려 공민왕 이전으로 추측되고 있다.

고려 말에 자주 있었던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화약과 화포는 당시 최무선(崔茂宣)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발전되었다. 이에 대한 관심은 권력집중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 태조와 세조에 의하여 위험시되어 억압되었으나, 태종·세종 및 문종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개발이 추진되었다.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무경총요武經總要 :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1040년에 명하여 만들게 한 병서兵書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64214 )


북송(北宋)의 증공량(曾公亮) ·정도(丁度) 등이 찬술하여 1044년에 완성한 군사상의 기술서(技術書)로, 40권으로 되어 있다. 당시 서하(西夏)의 반란이 일어난 뒤 인종은 병법에 뛰어난 인재를 구하여 작전 ·군사기술 등의 지식을 정리시키고, 병기류의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전집(前集) ·후집(後集)으로 나누어 전집은 제도 15권과 변방 5권으로, 후집은 병전(兵戰)의 고사(故事) 15권과 점후(占候) 5권으로 기술해 놓았다. 송나라 때인 1230년에 초간되었으나, 현재 전하는 판본으로는 명(明)나라의 정통(正統) ·만력(萬曆) 간본이 있고, 《사고전서진본초집(四庫全書珍本初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내용 중 화약에 관한 기록은 이채를 띠고 있다.


일본의「소우기」

(출처 : KBS 역사스페셜 20회 & 145회 기타등등) 

 

「소우기」기록에 따르면 고려의 배, 그 중에서도 과선은 철로 뿔을 만들어 적을 부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거북선이 바로 고려 군함을 원형으로 하여 개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배에는 세계최초로 대포를 설치하였다.

'1019년 고려 전함이 화약을 넣어 공격한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 일본「소우기」

이미 한국이 원조이자 종주국으로 밝혀진 인쇄술과 더불어 '화약'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일찍 한국이 사용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밝혀진 셈이다.

 

 

 

역사스페셜20 영상복원 - 해상왕국 고려의 군함

 

 

고려는 아직까지 많은 부분에서 베일에 쌓여 있는 나라이다. 하지만 고려에 대해서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가지는 고려가 우리의 마지막 해상 왕국이었다는 사실이다. 백제, 가야, 발해, 통일신라의 장보고를 잇는 우리 역사상 마지막 해상왕국 고려. 고려가 해상왕국이었다는 단적인 증거는 바로 고려 군함이다.

 

세부설명

 

1. 700년 전 일본의 기억

일본의 하이타마현 박물관에서 전시된 '몽골습래회사' 라는 그림에는 700년 전 일본에게 패배를 안겨 준 고려, 몽고 연합군과의 전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차 원정 때 연합군은 단 하루 만에 큐슈 일대를 휩쓸어 버리며 일본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이듬해 일본은 고려, 몽고 연합군의 침략을 대비해서 방루를 쌓는데, 그 이름도 몽고방루이다. 그런데 유목 민족인 몽고가 어떻게 바다를 건너 일본을 원정할 수 있었을까?

2. 전북 부안군 구진 마을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발견되는 통나무와 마을 뒷산에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 전북 부안군 구진 마을에는 조선소가 있었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춘 구진마을은 고려인들이 군함을 만들며 일본 원정을 준비했던 마을이다.

3. 신의 바람 카미카제를 이긴 고려 군함

1281년 여몽연합군은 일본 2차 원정에서 대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당시 여몽연합군을 물리친 주역은 일본이 아니라 신의 바람이라 불리는 카미카제였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원사에는 ‘원나라 전선들은 모두 돌풍에 깨졌으나 고려의 배는 대부분 무사했다.’고 전하고 있다.


4. 고려군함 복원

고려의 군함 복원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고증된 사실을 토대로 정확한 설계도를 그리는 일이다. 먼저 과선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과선은 실제 해전에서 그 위력을 톡톡히 발휘한 고려의 대표적인 군함이다. 이어 완성된 과선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운동장에 실제크기의 대선을 세웠다. 고려에 대선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배위에서 말을 달릴 만했다고 하는데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5. 고려군함에 사용된 무기들

일본 고기록 소우기는 '고려전함은 돌에 화약을 넣어서 적선을 부순다'라고 적고 있다. 고려 군함에서 사용된 강력한 무기 중에 적선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는 불화살 주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화살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화포였다. 고려는 까다로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세계최초로 군함에 화포를 설치했다.

6. 해군사령관 왕건

고려가 동북아 최고 수준의 군함을 보유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과학적이고 뛰어난 조선술 외에도 다른 배경이 존재한다. 바로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왕조를 건설한 왕건이다. 왕건의 조상은 대대로 해상무역을 벌인 해상 호족세력이었다. 따라서 해상 호족출신인 왕건은 철저하게 바다를 이용할 줄 알았다.

7. 해상무역이 가져다 준 풍요

고려는 성능이 우수한 군함을 바탕으로 바다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힘을 통해 여러 나라와 교역을 벌이며 국제적으로도 우세한 지위를 확보했다. 고려는 동북지역, 일본, 중국의 북,남부, 그리고 동남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항로를 가지고 있었고 이 해상무역은 고려에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근처 바다에서 많은 해산물을 채취해서 주요한 식생활의 하나로 이용해왔다. 그래서 바다에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부터 배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사용하기 시작한 배가 점차 문명이 발달하고 기술이 진보해짐에 따라 이러한 고기잡이배에 그치지 않고 나라의 해안을 지키거나, 이웃나라와 교역을 하거나, 조세나 물건을 옮기는 운송수단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다카시마박물관에 전장 40미터로 복원하여 전시되어 있는 여몽연합 함대

 

 

백제시대에는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잦은 왕래가 있었고, 신라 말기에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세력을 형성한 후에 남해안 해상제해권을 장악하고, 이웃 나라와의 해상무역을 독점하였는데, 이것으로 당시의 배를 건조하는 주조기술이 얼마나 발달하였는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건조기술의 축적을 되물림 받은 고려에서는 과연 어떠한 배가 건조되었을까?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된 고려는 지방호족출신과 해상세력의 영향으로 건국된 나라로, 이 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바로 해양력이었다. 사실상 왕건의 조상과 그의 가문도 해상무역을 담당한 해상세력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해군을 지휘했으며 직책도 백선장군 해군대장이었고 당시의 해군력 또한 막강했는데, 909년에는 해군을 이끌고 나주를 공격하여 화공전법으로 승리함으로써 서남해 일대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면서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해 가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나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호족의 딸이기도 한 장화왕후는 왕건이 해상활동 중에 맺어진 사랑이기도 하다.

기록에 의하면 왕건이 건조한 대선은 그 길이가 각 방 16보(36.6m)에 무게만도 250∼280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15∼16세기경 콜룸부스가 항해한 배의 규모인데 이미 5∼6백년 전에 고려에서 건조된 것으로 이를 통해서 당시 고려의 해상세력의 배의 건조기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큰 규모이다 보니 배 위에서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할 만하다.

((서양 과학이 동양을 앞선 것은 1730년대 - 서양 학자들의 주장, 1730년대 이전 곧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동양과학이 서양보다 높았다))

당시 고려의 배에는 대선, 과선 등의 군함에서부터 순찰선인 순선, 행정지도선인 관선, 소나무로 만든 큰 배인 송방, 막선, 지방의 조세를 서울로 옮기는 조운선 등 매우 다양하였다(고려사에 대선·과선 등에 대한 기록이, 1123년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순선·관선·송방·막선 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대선은 현재까지 밝혀진 고려의 배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함이며, 과선은 고려의 대표적인 군함이다. 일본의 《소우기》 기록에 따르면 고려의 배, 그 중에서도 과선은 철로 뿔을 만들어 적을 부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거북선이 바로 고려군함을 원형으로 하여 개발된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려배에는 세계최초로 '과포'라 하여 포를 설치하였다. '1019년 고려전함이 화약을 넣어 공격한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일본 《소우기》). 이렇게 보면 중국이 4대 발명품으로 자랑하는 것 중에 이미 한국이 원조이자 종주국으로 밝혀진 인쇄술과 더불어 '화약'도 한국이 최초로 발명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밝혀진 셈이다. 특히 고려가 일본원정시 화약성 폭발무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객관적 정황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백련초》에서는 997년 고려가 일본이 계속적인 통상요구를 거절하자 3차 요구 이후에는 큐슈를 침공했다고 하며, 5백여 척을 앞세운 고려군의 침공 기록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중세고려 이후로 근세조선시대에 나온 거북선도 3층 구조인데, 고려 배의 건조 방식과 대포 설치를 이어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려 배는 한선(韓船 - 한국배) 기능 보유자인 이원식이 밝힌 대로 바닥이 평평하며 배의 앞뒤가 부드러운 유선형으로 굽어져 올라간 형상이다. 그리고 밑바닥에 돌을 두어 15˚의 기울기에도 원상회복이 가능하게 했으며 배나무 펌프를 설치하는 등 고도의 과학을 동원했다.

 

 

고려의 전함에는 평전선(平戰船)과 누전선(樓戰船)이 있다.

 

 

 

 

1985년에 완도 근해에서 인양된 10-11세기 경의 도자기 운반선

 

 

 

 

 

 

고려 전함의 닻과 닻돌 (일본 나카사키 현에 보관)  닻과 닻돌 2개를 합쳐 무게가 1톤에 육박한다.

   

이러한 해양국 고려의 면모가 있었기에 활발한 해상교역이 가능했고 문화와 예악, 보화, 각종 물자 등이 늘 오갔으며 화려하고도 풍요로운 사회가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서긍은 고려의 객관(여행객이 묵는 여관)이 궁궐만 했다고 하여 활발했던 국제무역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이규보는 자신의 시(詩) 가운데 고려 배가 베트남 등은 물론이고 대식국(아라비아), 마팔국(인도), 섬라곡국(태국) 등지까지 오갔다고 했다.
사실 오늘날 한국을 가리키는 영문자 'KOREA'도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보고 부르던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해상제국 백제의 해양활동과 장보고의 청해진 시대를 이어받은 고려인 것이다.
그래서 고려 배도 그 조선술과 전통을 이어받는다.

이에 힘입어 해상왕국 고려는 3개월만에 9백척을 건조했다고 한다.
지금도 전하고 있는 고려의 청동거울 중에는 항해 중인 고려 배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렇듯 갈래갈래 있는 파편들과 앞서 언급된 기록들을 모으고 연구하여, 고려 배에 관한 기록과 원형복원 작업을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고려의 해상력을 다시 밝히는 한편 해양대국을 꿈꾸는 21세기 한국의 미래의 본보기로 삼아 나가야 할 것이다.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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