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일본의 조선반도 점령의 의지를 보인 왜성....

구름위 2012. 9. 2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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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왜성에 대해 논해 봅시다. 일단, 왜성에 관해 토론을 할려면, 임진왜란 말 당시의 정세와 임진왜란-정유재란 사이의 시기, 일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목표의 변경과 전략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참고로, 실제로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동북쪽/여진족의 요지를 공략할 동안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함경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준비, 즉 조세, 대지 측량, 폐도령을 시행하기 시작합니다.

이 동북쪽 중 해주란 곳에서 구로다 나가마사가 조선인들에게 세금을 걷으려 할 때 반란군과 의병이 일어나서 후퇴하기 시작하죠. 강원도도 몇달동안 일본군이 조용히 지배하다, 게릴라 활동이 일어나면서 지배가 힘들어지게 됩니다. 이때 명군이 참전하면서 평양을 잃고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일본군의 직접적인 지배는 부산포 왜성 주변으로만 국한되게 됩니다.

 

 

1. 임진왜란 직후의 정세

 

 

애국심 뺀 1593-1597년 정세: 조선반도 내 일본의 영토 (빨간 빗금이 있는 경남 일부지역)

(사실, 애국성 교육은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도 빈번하며, 그 예중 하나는  중2국사에서 원의 고려 통치시대 원의 영향권을 그리면서 고려만 쏙 빼놓은 것입니다)

이 당시 부산 주변의 왜성에 주둔한 일본군의 총 숫자는 4만 3천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왜성-와조-라고 불리는 성들은 일본 분로쿠의 난 1차 임진왜란 말기 및 2차 정유재란에 경남의 해안선을 따라 일본군이 지은 성채들을 말합니다. 왜성들은 일본식으로 지어진 성으로, 1593년 명나라의 진격에 맞춰 방어 및 조선내 영토 확장을 위한 전진기지 및 강이나 해안가에 보급로로 지어진 성입니다. 따라서 윤관이 설치한 동북 9성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일본군이 조선에 장기간-그 기간이 몇년인지는 잘 몰랐겠지만- 눌러앉아 있을려고 지은 성입니다. 비록 부산포 서쪽의  근해 제해권이 조선 수군에게 있었고 명군의 참전 및 임진왜란후 명국과의 평화협상 등으로 왜성 근처에서 소규모 교전및 약탈행위만이 있었을 뿐이었지만, 재침공을 계획하고 지은 것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1593년 6월 14일 명측에서 온 사신에게 내 건 조건의 4번째는 "조선의 4북도는 조선에게 반환하고 4남도는 일본이 유지할 것이다" (물론, 당시 조선내 일본의 영토는 부산근교 거제도 동쪽까지였습니다 -_-ㅋ)

 

일단, 명의 진과 행주산성에서의 패배로 한성에서 일본이 경상도 지역으로 퇴각하기 시작합니다. 명과의 벽제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몇번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질병과 사상자가 많아짐에 따라 (개전시 15만명중의 전투가능 병력수가 거의 4개월쯤에 이르러서는 5만3천명으로 줄어듭니다) 경상남도로 퇴각하기 시작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은 전술로는 많은 승리를 했지만 행주에서 한번 커다란 패배를 했으며, 전략에서 패색이 짙어갔다는 것이었죠. 또한 급작스런 진격은 보급로를 지나치게 길게 했으며, 조선 수군의 부산포 서쪽의 제해권 장악으로 서해 인근해역을 통한 보급과 서해 인근마을의 약탈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의병 및 반란의 빈번함과 특히, 가장 중요한 요쇼였던 명의 참전은 일본군으로 하여금 전략을 재수정할 필요성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조선침공 및 점령에 관한 전략은 수정을 가하게 되어, 그 수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의 사신에게 요구한 7가지 사항 4번째에 나타납니다.

 

그후 명의 진격으로부터 방어겸, 재침공시 전진기지로 활용 (실제로, 정유재란시, 일본 좌군은 경상도 남서쪽에 있는 왜성에서부터 출발하여 전라도를 공략하여 전라도에 위치한 조선 수군기지의 공략 및 2군데로부터 한성을 공략하기 위해 남원과 전주를 거치며, 나중에는 여수와 거금도 근처까지 진격하게 되고 사천, 순천과 고성과 남해 4개에 새로운 왜성을 설치하게 됩니다) 하기 위한 왜성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953년 말에 이르러서는 지어진 30개의 왜성 중에 18개가 완공을 했습니다.

 

일단, 일본 수뇌부들이 조선식 성 (읍성/산성) 의 형태를 고려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비록 대부분의 성들이 허무하게 털리긴 했지만, 행주산성과 진주읍성 예외도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부산성들을 비롯한 너무 쉽게 무너진 조선 성들의 약점들이, 자신들이 쓰기 시작하자 오히려 자신들에게 약점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두번째이면서 가장 큰 이유는, 명군의 참전으로 조선식 성인 평양성에서 수성전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명군의 움직임에 대비하고, 자신들이 보루이자 대피처, 보급처, 재침공시 전진기지로 일본식 성인 왜성들을 짓게 됩니다. 즉, 왜성의 축성에는 명의 참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지휘관에게는 (당연하게도) 정유재란에서 주적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제외하고는 명이었거든요. 정유재란시 일본군 전략의 핵심이 되는 왜성은 명군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구요.

 

왜성들을 지은 위치는, 동래(현재 부산 광역시의 모태)처럼 기존에 지어진 조선의 읍성(도시성)이나 산성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고, 웅천처럼 처음부터 지어진 곳도 있습니다. 

 

 

 

웅천왜성: 성마을로 변보해 갔고, 무역도 활발했고 시장도 있었으며, 굉장히 번창했습니다.

 

2. 왜성의 중흥과 일본의 일시적인 경남 지배

 

 

왜성들은 짓는데 드는 시간과 노동력이 아주 많이 드는 성으로, 이를 최대한 빨리 짓기 위해 일본/조선 출신 잡역꾼이 굉장한 혹사를 당했으며, 이는 정유재란때 직산을 거쳐 수원 근처까지 갔던 우군의 종군 승려였던 케이넨의 조센 니치니치기에서 "인간이 마치 죽을때 까지 혹사시키다 잡아먹는 소처럼 다루어지는 짐승의 땅" 이라던가 "지옥이 이랬을 것이다" 라고까지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왜성은 군사적인 거점으로만 지어졌지 거주를 위한 조선/중국의 읍성, 즉 행정을 위한 성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반만 맞습니다. 반이 틀린 이유는, 일본에서 성곽도시의 발달이 조선과 중국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단, 조선과 중국에서는, 성을 짓고 도시를 성내에 개발하는 순서로 갑니다. 조선의 읍성인 동래성, 진주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참고로, 다른 읍성들은 다 허무하게 공략되었는데 다른 읍성과는 별로 다를 바 없는 진주 읍성만이 공략에 실패해 여기에 분노한 한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따라 2차 진주 전투가 벌어집니다). 일본군이 임진왜란 동안 점령한 동래-대구-한성-평양 다 읍성이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교토같은 도시는  방책과  토루 (방어용으로 쌓았던 둑) 로만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먼저, 왜성은 군사적인 거점으로 발달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왜성 뿐만이 아닌 일본의 성곽도시는, 일단 성이 먼저 지어지고, 지리점인 이점과 공략의 어려움으로 경제적인 측면과 안정적인 측면으로 인해 성 주위에 마을이 생깁니다. 대표적인 예는 잇코잇키의 독립적/자치적이었던 지나이마치(사원마을)들입니다. 김해의 경우도 김해 왜성이 생긴후 왜성벽 바로 바깥에서 조선인들이 600호가 넘는 가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성왜성, 동래왜성 (동래읍성에는 군민이 당시 2만명 거주하고 있었습니다)이나 부산왜성처럼 규모가 크고 특히 동래왜성처럼 원래 성곽도시(읍성)인 점을 생각하고, 부산 읍성은 특히 16세기 초부터약간의  일본인들이 살던 지역으로, 나중에는 조선 상인들을 위협할 정도로 번창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김해를 비롯한 몇몇 왜성은 성곽 마을을 형성했다는 것은 매우 안전한 추측일 것입니다.  특히 일본군의 한성퇴각후 조선내 일본군의 근거지가 된 부산포 왜성에는 300호가 넘는 흙집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케이넨의 조센 니치니치기에 기록된 바로는 울산은 만명의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고, 한국인 노예상인도 배를 타고 왔다고 기록합니다. 특히, 케이넨이 울산-서생포-부산-대마도로  안전하게 오갈 수 있었다는 점을 들더라도, 정유재란시 칠천량해전 이후 조선수군의 제해권은 부산에 미치지는 못했으므로, 부산-쓰시마간의 해상활동은 비교적 활발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에서 성들은, 다이묘의 요새이기도 하면서, 행정의 중심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중측되었으며, 도쿠가와 쇼군가의 행정과 군사의 중심이 된 에도성입니다. 에도성도 처음에는 군사적인 요새로 1457년 오우타 도칸이 지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로부터 6개국을 받은 후 에도 성을 자신의 본부로 삼게 됩니다. 이것이 점차 중측되어 1636년 도쿠가와 이에미츠에 이르러 인구가 15만명으로 늘어납니다.

 

즉, 일본식 성인 왜성도 이와 같은 형태를 지녀, 초기에는 군사적인 요새의 형태를 띄지만, 점차 세력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성곽마을로 변모하게 됩니다.

 

물론, 저는 일본 전국시대 직후의 조세법, 토지 측량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김해처럼 세금을 낸 기록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임진왜란 때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몇달간 일본군이 이미 조세와 토지 측량, 폐도령을 시행한 것을 봐도, 왜성 주변의 마을에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 할 지라도 행정적인 지배는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숫자가 작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실 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만 300호+알파 600호+알파. +다른 왜성의 마을들.

하지만, 세종 당시 김종서가 행한 1434년 북방 개척시 함길도에서 영북진 (나중에 경흥군으로 승격)으로 옮긴 농민의 수가 2,200명인 것을 생각하면,  무시할 숫자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정유재란 말기까지 왜성들에게 점령된 지역들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일본의 영토라 여기는 것이 타당합니다. 특히, 부산과 동래 근처의 왜성과 인근지역들은 노량해전 후 일본인들이 부산에서 모두 철수할 때까지 계속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2. 왜성과 조선식 읍성/산성의 가장 큰 차이점

 

제가 위쪽에 왜성은 짓는데 시간과 노동력이 많이 드는 성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주요 이유중의 하나는, 한국의 읍성은 대부분 비교적 단순한 구조-성벽이 한줄-로 되어 있었고, 산성은 기본적으로 대피처로 활용되고 있었고 유성룡왈 중국과 비교해 성벽의 방어구조의 짜임새나 질이 떨어졌었고, 이는 왜구를 방어하는 데 충분했을 지 모르나, 일본군을 상대하는 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주성 공략 실패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분노하게 되고, 이것이 제 2차 진주 전투로 가게 됩니다).

 

그에 비해, 일본의 성을 만드는데, 주요 공구는 삽 (-_-ㅋ) 이었습니다. 단지 땅을 파는데 쓰이는 것만이 아니라, 흙을 다른 곳으로 옯겨서  마치 하나의 거대한 조각물처럼 만들어서 겹층 구조 및 공격측의 진군을 방해하고 함정을 놓습니다. 신기한 예 중의 하나는 호루(호랑이의 입, 도라노구찌)이라고 불리는, 90도로 꺽여 있는 성문과 그 길이며, 서생포와 웅천에 그런 구조물이 있었습니다.

 

 

서생포 왜성. 중간의 빨간 동그라미 부분이 호구입니다.

 

 

구포성 건설모습: 복잡하고 다충 구조가 특징입니다.

 

 

조선의 읍성과  일본의 성을 만화 킹덤으로 간단비교 하자면,

 

 

조선의 대체적인 읍성 형태: 성벽이 한줄로 마을이나 도시를 감싸는 형태였습니다.

 

 

킹덤에서 몽무가 염파를 잡기 위해 함점을 설치해 놓은 다중구조의 요새: 일본의 방식.

 

여러 가지 일본 만화를 접하시면, 장수의 능력을 논하는 이야기에서 축성술이란 단어가 많이 언급되며, 킹덤에서는 "축성술을 가진 육장은 백기정도 밖에 없었다~" 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축성술을 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위에 제가 언급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축성의 기술은 상당히 고도화된 셀계를 써야 하므로,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장수가 대접받습니다.

 

 

2번째 차이점으로는, 성벽의 구조를 들 수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시 조선 성벽의  보편적인 구조. 사진은 복원된 진주산성.

 

 

일본 성벽 위의 보편적인 구조 잘 보시면 사수가 아주 잘 보호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좀 더 단순한 형태의 일본 성벽위 복도 구조. 울산왜성이나 순천 왜성의 성벽위는 이러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1592년 부산 해전 상상도. 벽의 구멍을 통해서 조총수가 사격하는 것을 보실 수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선박 100여척을 격침하는 성과를 보이지만, 의외로 강력한 왜성의 해안 방어력을 실감하고, 육군과 수군의 합동 작전이 없이는 부산의 공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철수합니다. 하지만 1597년 조선 수군의 전멸하다시피 한 배패와 사천, 순천, 웅천 등지에서 생긴 왜성을 견제하느라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부산은 조-명군의 어떠한 공격도 받지 않은 철옹성으로 남게 되며, 임진왜란 시작부터 정유재란의 끝까지 일본의 소유로 남아있게 됩니다.

 

토탈워 게임식으로 비교하자면, 롬토/메디벌 2 성벽위쪽의 구조가 조선의 구조라면 일본의 성벽구조는 쇼군 2의 성벽구조이죠.

 

 

3. 왜성의 효력

 

 복잡한 구조와 잘 보호된 사수는 정유재란시 조선-명 연합군이 울산, 사천, 순천을 점령하는데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며, 조선 수군으로부터의 해상포격으로부터 잘 보호되 웅천같은 경우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4번에 걸쳐 공격에 나서지만 이렇다할 전과는 얻지 못합니다. 1592년 부산포 공격도, 생각보다 견고한 왜성의 해안 방어와 조선군으로부터 탈취한 화포로 비교적 성공적으로 부산포를 방어하는 데 성공합니다. 사천 같은 경우, 3만 6천의 조-명 연합군을 1만으로 막는 것은 물론, 구원군과 합세하여 3만명을 죽이는 데 성공합니다. 순천같은 경우 육군-수군의 합동 작전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고, 부산-울산의 제해권은 여전히 일본군에 있었으며, 부산-동래를 위시한 왜성들은 여전히 견고하게 방어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1953년-1957년 사이에 보급이 원할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고, 카톨릭 선교사가 본 모습들은 보급선이 2달 동안 오지 않아 굶주린 모습이었습니다. 그동안 주변의 조선인 마을을 약탈하고는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물자가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정유재란이 발발한 후 보급상태가 극악하던 부산 서쪽의 왜성에서 좌군에 가담하던 일본군으로 인해 케이넨이 지옥이라고 평한 일본 좌군의 조선 약탈/방화 행위가 시작되며, 이는 직산에서 회군하여 경주에 이르러 울산으로 오기까지 계속됩니다.

 

 

 

4. 2차 정유재란의 일본군의 전략 평가와 간단한 전쟁과정

 

 

정유재란시 일본군 좌익과 우익의 진군도.

일본군의 잔학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케이넨은 좌익군에 종군. 좌익군은 부산에서 직산에 이르기까지는 물론이고 직산에서 회군후 충주, 영천에서 경주를 거쳐 울산에 이르기까지 약탈/살인/방화 등의 잔혹행위를 계속합니다. 1593-1597년 기간동안 조선수군에게 막혀 보급이 극악했던 일본군의 화풀이를 좌익군의 진군 경로에 있던 조선인들은 그대로 받아야 했죠. 또한 직산에 막혀 한성 공략이 불가능해져 회군해야 했던 가토 기요마사의 분풀이를 임진왜란 도중 2번의 전투에도 비교적 온전히 본모습을 유지했던 경주가 받아 불국사와 경주가 완전히 전소됩니다. 이는 강경지배를 하기는 했지만 지배를 위해 비교적 온건했던(?) 임진왜란때의 일본군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본군의 약탈행렬에 조선군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수성전을 해도 질 확률이 높은데 (남원성-황곡산성 털림) 평지에 나가서 회전을 하게 되면 십중팔구 지고, 그렇다고 본거지인 왜성을 공략하기는 더 힘들고 ㅅㅂ -_-ㅋ 정유재란 후기에 경주는 부산포-동래-울산의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한 명군의 본부로 쓰이게 되며, 사천/순천에서 패한 명군은 경주로 퇴각하게 되어 한달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게 됩니다.

 

 

임진왜란때 빠른 진격으로 인한 허점 노출과 보급/부대간의 연락이 힘든 점, 방어력이 약한 조선의 성을 이용한 수성전의 전략에 실패하고, 전라도에 위치한 이순신의 수군에 부산의 서쪽 바다의 제해권을 완전히 빼앗긴 것을 첫번째 침공의 실패의 원인으로 보고, 조선식 성보다 방어에 뛰어난 일본식의 왜성을 지어 방어적인 요지 및 보급지와 전진기지로 삼아 점차 최소한 조선 남부 4도를 일본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 2차 침공인 정유재란의 목적이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목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에 보낸 요구조건 7개중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2차 침공에서 일본군의 오산 2가지는, 명-조선 연합군의 생각보다 빠른 대응, 일본 우군을 수군으로 한강으로 보내 한성 공략을 일본 좌군과 동시에 공략하려 한 계획이 노량 해전으로 인해 실패한 것입니다. 1차 임진왜전과 마찬가지로, 육지에서의 전술적인 승리는 획득했으되, 전라도의 제해권을 확보하는데 실패하고, 명의 빠른 대응 때문에 전략에는 실패했다고 할까요. 뭣보다, 일본의 조선 점령의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명군이었습니다.  1차 임진왜란에서 보았듯이 조선의 읍성/산성은 몇몇 예를 제외하고는 일본의 공성전에  쉽게 당했고 (정유재란 때에도 남원 읍성-황속산 산성의 전투에서 승리) 회전에서의 조선군은 일본군과 상대가 될 여력이 없었으며, 당시 조선군의 주요 전략인 읍성-산성에서의 방어전은, 조선군으로써는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전투를 할 수 있지만, 다시 말하자면 진격하는 일본군에 대한 요격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화왕 산성에 위치한 곽제우가 이끄는 군대를 가토 기요마사는 무시하고 그대로 전라도로 진격하여 임진왜란 때 점령하지 못한 전라도의 수도 전주에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화왕 산성에서 주둔중인 곽제우의 군대. 가토 기요마사는 이를 그대로 지나치고 전라도로 진군합니다.

 

 

그러나 직산에서 명-조선 연합군의 공격에 진격이 주춤해지고, 우군이 합세하지 않는 것을 깨달으면서, 회군하여 울산에 도착, 우군은 사천과 순천 등지에서 주둔하며 겨울을 날 준비를 합니다.  이때 조-명군이 울산을 공격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히데요시 사망후 일본군의 철수가 결정됩니다. 이때 조-명군이 사천과 순천을 공략하지만 실패하고 전쟁이 교착상태로 가는 시점에서  경주에 있던 명의 본부는 울산등지에서 일본군이 부산으로 움직이는 정보를 얻고, 얼마 안 있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전쟁에 지친 명군은 일본군을 그대로 돌려보내주기를 희망하지만 (실제로 부산-울산-동래-김해 등지의 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아무런 제약 없이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며, 권율등이 조선군을 이끌고 공격하려고 하자, 명의 제지를 받아 그만두게 됩니다) 그 당시 조선군 장군중 가장 발언권이 높던 이순신의 반대로 조선-명 수군은 순천에서 부산으로 탈출하려는 고니시 유기나가의 함대를 요격하기로 결심하고 노량에서 일본함대를 격파해 500척중 50척의 함선만 부산으로 탈출합니다.

 

 

전라남도 사천에 위치한, 조-명 연합군 3만명의 주검이 뭍힌 무덤.

 

5. 일본군은 완전히 물러나... 전쟁의 끝?

 

1598년 12월 일본군은 부산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됩니다만, 조선으로써는 또다른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조선에 남아 있는 명군의 존재였습니다. 명군의 존재가 문제가 된 것은, 이들이 일본군보다 적어도 같은 수준으로나 훨씬 더한 수준으로 약탈, 살인, 방화, 강간들을 자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약탈과 살인행위에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군도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명군은 참빗 왜군은 얼래빗 " 이라는 말까지 돌았을 정도로, 명군의 약탈행위는 심했습니다.

 

명 도독 첸린(진린)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소식을 들은후, 고니시 유기나가가 순천을 탈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이때 첸린은  고니시 유기나가로부터 뇌물을 먹은 상태이고, 괜히 자기들이 알아서 돌아가는 일본군을 공격해 보았자 손해 보니 차라리 귀국하기 전 공적을 챙기고 고니시의 부탁을 들어줄 겸 이순신에게 소 요시모토가 지휘하고 있던 남해 왜성을 공격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미 주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고 전략적으로 별 가치가 없는 남해 왜성을 공격하라는 것에 심한 모멸감을 느끼고, 만약 공격시 명군이 일본인과 강제노역용으로 붙잡혀 있는 많은 수의 조선인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무차별 살상하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이 염려는 첸린이 그런 조선인이라면 일본인과 협력자이며 죽어도 마땅하다는 말에 입증이 되어 분노하게 됩니다.  이순신이 염려하던 이 일은, 일본의 조선 철수 후 연합군이 울산, 서생포,  사천과 순천을 다시 수복하는 과정에서 첸린이 남해에서 낙오자 무리를 발견해 머리를 효수하고 한성으로 보내게 되는 시점에서 현실이 되는데, 몇몇 조정의 대신들은 첸린이 전공을 구하려는 과정에서 일본인 뿐만이 아닌 조선인들까지도 죽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명의 조선반도 약탈과 잔혹행위는 정유재란 후부터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가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시점까지 계속되며, 전쟁이 끝난지 1601~1063년 조선이 쓰시마섬의 다이묘였던 소우 요시모토의 중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화친을 도모하는 계기도 명군을 조선반도에서 철수시킬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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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왜성에 초점을 둔 간략한 정유재란 이야기였습니다. 더 원하시면 울산 전투, 사천 전투, 순천 전투등을 다루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정유재란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자주국방이 불가능한 나라는 절라 서러움

-일본 철수의 1등 공신은 명, 2등 공신은 히데요시의 죽음, 3등 공신은 이순신.

-조선 육군의 무력함 (일본군도 정유재란 당시 최대의 적은 명군이었습니다)과 당시 동아시와 최고 수준의 보병을 지니고 있었던 일본군. 전술로는 이기고, 전략으로는 짐.

-권율도 명군 원수에게는 기는데 명도독을 상대로 개기며 아예 지휘봉을 빼앗아 버리고 나중에는 뇌물까지 먹어서 싫다고 하는 신린도 끌고 나와 조-명 연합 수군으로 일본 수군을 노량에서 요격한 이순신 그대는 역시 킹왕짱. 현대의 예를 들면, 남한 제독이 미국제독에게 대들고 미국 제독이 기가 죽어 지휘봉을 넘기는 셈. 헐.

-일본에 뜯기고 명에 뜯겨 전 국토 경작 가능한 농지의 5/6이 황폐화됨. 이건 거지만 이긴 게 아님.  30년후 만주/청에 빈집털이식으로 2번 털리는 조선. 역사에 단 한번 한반도 출신의 왕이 대륙 출신의 왕앞에 직접 꿇음.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진정한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일본 도자기 산업.

- 나중에는 청일전쟁의 전쟁터가 되고 러일전쟁후 열강이 인정하여 일본의 나와바리가 됨. 1945년후 또다시 강대국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됨. 어째 1592년부터 계속 얻어맞는... ㅅㅂ  -_-ㅋ

 

가정을 하다가는... 시끄러워 질 수 있기 때문에 삼가겠습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은 아주 큰 재해였습니다. 일본군이 철수하기는 했지만, 엄청난 피해로 30년후에 만주족의 침입을에 맞써 싸울 능력을 잃어 버려 참패하고, 9년 후 한번 더 침공을 받아 복속하게 됩니다. 이때도 만주족군/청군에게 2번 약탈을 당하게 됩니다.

 

 

침략으로 파괴당한 국토의 참상을 보고 우는 "승자" 조선의 한 관리를 그린 그림을 올리며 이만 마칠까 합니다.

 

 

그럼 이만 꾸벅~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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