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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면 30겹으로 대포에 맞선 조선군

구름위 2012. 9. 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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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30겹으로 대포에 맞선 조선군>

 

30겹으로 누빈 면갑(綿甲)

신미양요 전투에 350여명 몰살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미국은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국내가 안정됨에 따라 '동인도지나함대'를 '아시아함대'로 개편하고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을 꾀했다.

1869년 제18대 대통령에 취임한 그랜트는 이듬해 1월 북경 주재 미국공사 로우를 조선 전권공사로 임명해 조선과 협정을 체결하라는 교서를 내리고,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1812-1882)에게 그를 수행토록 했다. 이에 1870년 5월 뉴욕을 출발한 아시아함대 콜로라도호 로저스 제독은 싱가포르를 거쳐 상해로 가서 로우와 합류한 다음, 다른 군함 2척을 대동하고 일본 나가사키항에 집결했다.

로저스가 이끄는 조선 원정대는 군함 5척에 대포 85문을 탑재했으며, 수병과 해병 1천230명으로 구성됐다. 이 조선원정에는 종군사진기자 F. 비토(Beatto)가 승선했다.

5월16일 조선을 향해 나가사키를 출발한 미국 함대는 6월1일에는 강화도 손돌목에 이르러 첫 교전을 시작한다. 이를 침입으로 판단한 광성보(廣城堡)와 덕포진(德浦鎭)의 조선군 진영에서 미 군함에 포격을 가하고, 미군 또한 이에 맞서 대포로 응수했다.

이렇게 시작된 신미양요는 결국 6월11일 조선에는 비참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이날 새벽 맹렬한 함포 사격으로 덕진진(德津鎭)을 초토화한 미군은 곧이어 어재연(魚在淵)이 지휘하던 광성보마져 함락하고는 이날 정오쯤 조선 장수 깃발인 '수자기'(帥字旗)를 내리고 성조기를 걸었다.

신미양요로 인한 미군 피해는 전사자 10명에 부상자 10명이었던 데 비해 조선은 전사자만 어재연을 포함해 무려 350여 명을 헤아렸다. 당시 조선군 참상은 종군기자 비토가 생생한 사진으로 남겼다.

미군이 처음으로 점령한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사진을 보면, 죽은 조선군 병사는 면옷을 입고 있다. 한데 그 배경인 나무는 비록 흑백사진임에도 한창 녹음을 자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기야 이날은 한여름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6월11일이다.

이 때 조선군이 착용한 면옷은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실물이 남아있다. 이름하여 '면갑'(綿甲)인데 솜으로 누빈 갑옷이라는 뜻이다. 한데 이 옷은 자그마치 30겹이나 되는 면을 누벼 만들었다. 조선군은 솜이불을 방불하는 갑옷을 여름철에 껴 입고 전투에 임한 셈이다.

면갑은 둥근 깃에 양 겨드랑이 부분은 깊이 팠다. 나아가 어깨 좌측을 트고 매듭단추를 달았다. 나름대로는 활동하기에 편리함을 추구한 패션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조선군이 사용한 조총(鳥銃)

그럼에도 여름철 전투에 임하는 군복이라고 보기에 솜옷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137년만에 미국에서 고국으로 귀환한 '수자기' 특별전에 이 면갑을 찬조 출연시킨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 김연수 과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 면갑은 병인양요(1866) 이후 대원군이 명령해 총탄으로부터 군사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갑옷이라고 합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왜 면을 30겹이나 넣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총을 쏘아 시험해 보니, 면 30겹은 총알이 뚫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솜으로 누빈 갑옷을 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솜 갑옷이 남북전쟁을 막 끝낸 세계 최정예 미군 화력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당시 조선이 미국 군사력 실정에 어두웠던 것은 고사하고, 그나마 면 갑옷의 방어력 시험 대상으로 삼은 무기는 당시 조선군이 사용하던 조총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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