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그림속 조선남자 ""약간 딱딱한 글"""

구름위 2012. 9. 2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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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속 조선남자 찾아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

 

역사학자 곽차섭 부산대 교수는 국내에 몇 안 되는 이탈리아사 전공자이고 주요 연구 영역은 16세기 피렌체의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다. 그가 흥미로운 책 한 권을 펴냈다.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 역사 전문 출판사 푸른역사가 기획한 ‘히스토리아’ 시리즈의 첫쨋권으로 나온 이 책은 역사 속의 작은 소재를 실마리 삼아 역사적 진실과 의미를 밝힌다는 이 시리즈의 ‘틈새 읽기’ 전략을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우선은 대중적 관심사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16세기 초 처음으로 유럽에 간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이 이탈리아의 한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가 10여년 전부터 신문·잡지 따위에 오르내렸고, 이내 사실로 굳어져 소설로 쓰이기도 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동시대의 플랑드르 화가 루벤스(1577~1644)의 드로잉 <조선 남자> 속의 그 조선인이 누구냐는 것과 관련된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인의 귀를 솔깃하게 한 이 두 이야기는 안토니오 코레아가 루벤스 그림 속의 그 조선인일 것이라는 추정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그 막연한 추측이 진실일 가능성이 아주 높음을 입증해가는 책이다.

“안토니오 코레아가 루벤스 그림의 주인공이냐 아니냐를 단정하는 것 자체는 학문적으로 무의미합니다. 그것이 역사학의 대상이 되려면,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책은 그 결론을 이용 가능한 모든 자료를 다 모아 논증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자평합니다.”

곽 교수 이전에 이 문제가 막연한 추정과 대중적 흥미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구체적인 사료로 입증하는 과정이 생략돼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안토니오 코레아에 관한 한국·일본의 역사학적 연구와 루벤스의 드로잉에 관한 서구 쪽의 미술사학적 연구가 서로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운 좋게도’ 이 양쪽의 연구 성과를 종합할 수 있는 자리에 곽 교수가 있었다.

“1992년께 처음 이 문제에 관심을 느끼고는 닥치는 대로 자료를 모았습니다. 2000년에 1년 동안 미국 방문학자로 갈 기회를 얻었을 때 일부러 루벤스의 <조선 남자> 원화가 있는 폴 게티 미술관 가까이에 있는 캘리포니아대를 택하기도 했죠. 거기 대학 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런 발품을 판 연구 끝에 그는 루벤스가 로마에 머물던 1606~1608년 사이에 그곳에 있었던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를 직접 만나 초상화에 담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미술사·복식사·국제관계사의 도움을 받아 그런 추정에 특별한 하자가 없음을 설득하고 있다. 책의 구성만 따로 이야기하면, 학자가 탐정이 돼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연구자의 고민과 추론 과정을 독자에게 다 알려주는 미시사 서술 방법론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결론이 유일한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작업이 의미가 있다면, 이 문제를 무책임한 ‘이야기’의 영역에서 끌어내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반론을 기대합니다.”

 

 

 

 

[LA GETTY : 루벤스] 한복 입은 조선인 (출처 : 한복을 사랑하는 우리 옷 연구실)

 

 
루벤스의 드로잉「조선 남자」를 둘러싼 말

161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드로잉 원작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그것이 '서양인 예술가가 그린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점과 '주인공이 누구이며 어떻게 그려졌는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는 것에 모아진다. 이 그림이 그려진 400여 년 전 '당시는 양국간의 교류가 없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의 제작 배경을 따져보는 것은 과연 흥미로운 일이다.
-『조선일보』2004년 1월 6일자

드로잉에는 루벤스가 생전 처음 만난 동양인에 매혹돼 정신없이 그렸던 감흥이 그대로 살아 있다. 머리는 작게, 몸집은 좀 크게 그렸는데 이는 루벤스가 특히 복장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까지 선이 소용돌이치듯 내려오며 옷감의 반짝임까지 살렸다.
-『조선일보』2003년 12월 10일자

「조선 남자」는 1983년 11월 29일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드로잉 경매 사상 최고가인 32만 4000파운드(약 6억 6000만원)에 팔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루벤스는 이 드로잉을 회화를 위한 습작이 아니라 독립적인 완성작으로 제작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림 속 주인공과 어떤 경위로 접촉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동아일보』2003년 12월 3일자
 

그런데 의문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 한국인으로 보기에는 쌍꺼풀이 지고 굴곡이 심한 서양인 얼굴형이며, 복장도 조선시대 무관복장인 철릭(天翼)인지, 중국풍의 의상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의 전당의 큐레이터는 ?원래 제목이 써 있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붙인 것?이라며 크리스티 경매장에서는「한복입은 남자(A Man in Korean Costume)」였으나, 폴 게티 미술관으로 옮기면서 제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2003년 12월 9일자

가로 23.5cm, 세로 38.4cm 크기의 드로잉은 조선시대 무관이 입던 공복(公服)차림의 사내를 묘사한 것으로, 루벤스는 콧잔등과 두 뺨, 귀 등에만 부분적으로 붉은색 터치를 해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하지만 작품 속 인물이 정말 한국인인지에 대해서는 평론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연합뉴스』2003년 12월 2일자

「조선 남자」의 주인공은 안토니오 코레아
이 책은 루벤스의 드로잉「조선 남자」의 모델이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규명하였다. 결론만 보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같은 주장을 해왔지만, 누구도 구체적이고 정확한 증거에 입각하여 그것을 논증하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이 책의 저자 곽차섭 교수는 18세기 이래의 서양미술사학계의 자료와 해석들, 이탈리아 및 일본과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들, 그 외 신문, 잡지, 문학 예술작품, 그리고 인터넷 자료까지를 망라한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루벤스 드로잉의 주인공이 조선 남자이며, 또한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는 어떻게 루벤스와 만나게 되었을까?
500년 전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와 조선 청년의 만남을 암시하는 한 점의 드로잉,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았을 듯한 이 두 사람 어떠한 경로로 만나게 되었을까? 이 의문에 답을 내리기 위해서 저자는 루벤스의 드로잉은 물론 두 사람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수많은 이야기의 타래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
1979년 국내 한 일간지에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렸다. 이탈리아 남부 카탄차로 인근에 위치한 인구 1천여 명 남짓의 알비(Albi)라는 작은 마을에 코레아 성씨들로 이루어진 집성촌이 있는데, 이들의 조상이 바로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에게 노예로 팔려 로마에 와 정착한 ‘안토니오 코레아’란 이름의 조선인이라는 내용이었다. 

 

민족의식이 남다른 한국인들에게 이 기사는 흥미롭고도 놀라운 사실로 다가왔다.
그로부터 4년 뒤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의 드로잉「한복 입은 남자」가 경매에서 고가로 팔린 사실이 국내에 보도되면서, 사람들은 이 그림의 주인공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하였고, 자연스럽게 안토니오 코레아와의 관련성이 언급되었다.

 

두 갈래 이야기
이야기 하나 : 서양의 미술사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문제의 드로잉이 언제, 누구를 그린 것인지 밝히려고 노력했으나 자료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이들은 한국의 학자들과는 달리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카를레티와 안토니오 코레아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연구를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이야기 둘 : 그 동안 한국의 신문과 잡지들은 사실의 정확성보다는 ‘알비 코레아 씨들의 시조 안토니오’를 내세워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었다. 학자들 역시 관련 사료를 세세히 검토하기보다는 그때 그때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의견만을 제시했을 뿐, 그 누구도 안토니오 코레아와 루벤스의 드로잉과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사실 관계에 대한 수많은 오류들이 생겨났고, 이는 즉각 해석상의 오류로 이어졌다.

 

합쳐지는 이야기
저자는 서양의 미술사가들은 카를레티와 안토니오의 존재를,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은 루벤스의 드로잉에 대한 연구 성과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서로를 잘 모르는 이 두 세계를 만나게 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드로잉 속 인물의 생김새와 복장을 들어 그가 조선인임을 규명하고, 또한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의 『나의 세계일주기』와 같은 여러 기록 및 정황을 토대로 루벤스가 만난 조선남자가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소창 아사달-

 

 

 

 

사우디 '알윤'마을 한국인 후예 집단촌 가능성 



1천2백여년전 중동지역으로 흘러간 한국인 후예들이 집단촌을 형성해 살고 있다면…. 이는 지난 80년대 화제를 낳았던 임진왜란 당시인
4백여년전 이탈리아로 건너가 현재 로마 북부 '알 비' 마을에서 '코레아' 라는 성 (姓) 으로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는 사례보다 무려 8백여년이 앞서는 것이 된다.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 동북부 후푸프 지역 인근의 '알 윤' 마을이 한국계 집단촌이라는 지적이 나와 국내 문화인류학계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는 중동.이슬람문화 전문가 이희수 (46.한양대.문화인류학) 교수가 지난 2월 현지 답사를 통해 1차 확인을 한 것인데 올 겨울 2차 확인작업이 진행될 예정이어서 궁금증은 더하다.

이 교수는 "아랍전문가 이원삼 (42.선문대 선교학부) 교수 및 현지 사업가 김정남 (63) 씨와 동행한 현지조사에서 모계혈통으로 한국인 핏줄을 이어왔다고 주장하는 카릴 이브라힘 부자를 만나 증언을 들었다" 며 "마을 이름이 '윤' 인 것은 16세기말 오스만 투르크가 페르시아를 공격할 당시 '윤 (尹) 장군' 으로 불리는 한국인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데 대한 보답으로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봉토를 받은 것에서 비롯한다" 고 밝혔다.

이 교수는 또 "1천2백여년전이라면 751년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수 고선지 (高仙芝.755년 사망)가 사라센제국과 중앙아시아 탈라스강(키르기스스탄 서북부)에서 치렀던 탈라스 전쟁에 패할 당시 무려 2만명에 가까운 포로를 남겼는데 그 중 고구려 병사가 포함돼 있다가 지금의 중동지역에 정착했을 공산이 높다" 고 분석하면서도 "현지 '알 윤' 마을 사람들에게 민간신앙화한 '윤장군' 의 활동 근거지 카라동굴의 실체확인과 콩을 발효시킨 음식을 먹고 한방요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는 증언 외에 구체적인 자료나 유물이 없어 최종확인에는 이르지 못했다" 고 언급했다.

답사에 동행했던 이원삼 교수는 "한국인 혈통을 직접 이었으면서 아직도 생존해 있는 이브라힘의 노모 (老母)에 대해 직접적인 조사와 인터뷰가 선행돼야 하는데도 이슬람문화의 특성으로 접근조차 여의치 않았다" 고 아쉬움을 표했다.

이와 관련, 이희수 교수는 "이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인 한국얼굴학회장 조용진 (서울교대.미술교육) 교수와 이 학회 내 유전인자분석팀의 협조를 얻어 올 겨울 현지로 갈 예정" 이라고 전제, "순조로운 사실규명을 위해선 사우디 내 유력 왕립대학 측과의 공동조사 및 연구가 불가피하다" 고 밝혔다.

 

기고자 : 허의도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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