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3년 4월 21일, 프랑스의 왕 루이 13세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의 다섯 살 난 어린 아들이 죽어가는 아버지 곁으로 이끌려왔다. 쇠약해진 국왕은 자신의 옆에 다가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물었다.
“누구냐?”
다섯 살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루이 14세입니다.”
이것은 근대 유럽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이 군주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지위를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군주로서의 투철한 자의식, 그리고 의무감은 루이 14세의 전 생애를 특징짓는 말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이 왕국을 비추는 태양이라고 여기며 살았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절대군주의 대표격인 루이 14세이지만 그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무소불위의 권력만을 누렸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프랑스의 왕이 될 무렵, 프랑스는 백여 년에 걸친 중앙집권화와 왕권강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루이 13세의 통치기에 프랑스는 대외적으로 마침내 숙적인 합스부르크 스페인을 제압하고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여전히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뛰어난 정치가였던 리슐리외 추기경과 그를 계승한 마자랭 추기경에 의해 전통적인 귀족들은 차츰 세력을 상실해가는 추세였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이 유명한 프롱드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반란군에 의해 쫓겨 다니며 어린 루이 14세는 단지 귀족 세력들에 대한 불신뿐 아니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군주에 의한 통치만이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 불우한 시기는 그의 긴 통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루이 14세가 어리석고 지성이 부족한 왕이라는 것은 후세의 악의적인 왜곡이다. 물론 프롱드 반란 때문에 정규 교육은 많이 방해를 받았지만 그는 최소한의 교육이라도 받을 기회가 온다면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달리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그는 아무리 사소한 정보라도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또한 그는 프랑스어 외에 모후의 모국어인 스페인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말할 줄 알았다.
그래도 나름 3개 국어를...
1661년, 스승이자 섭정 마자랭의 사망과 함께 국왕은 마침내 국가의 통치를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었다.
국왕과 사랑
매사에 정력적이었던 국왕은 평생 수많은 애인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많은 애인들 중 진심으로 국왕이 사랑했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채 20세가 되기 전에 루이는 자신보다 2살이 어린 마리 만치니라는 소녀에게 끌린 적이 있었다. 그 소녀는 다름 아닌 추기경 마자랭의 조카였다. 교양이 풍부한 마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왕은 곧 깊이 사랑에 빠졌다. 루이는 마리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고 이것은 모후와 마자랭을 당황하게 했다.
국왕의 결혼은 어디까지나 정치의 연장이다. 모후는 루이가 자신의 모국인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자랭에게 있어서도 이 결혼은 자신이 어렵게 유지해온 유럽의 균형 상태와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조치였다.
결국 마자랭의 결정에 의해 마리 만치니는 궁정을 떠나 이탈리아로 보내져 콜론나 공작의 아내가 되었고, 루이는 1660년에 스페인 공주와 결혼했다. 이렇게 해서 루이 14세의 생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진정한 로맨스는 막을 내렸다.
이후 국왕은 수많은 애인들을 거느렸지만 그들은 애인들이었을 뿐 그 이상의 지위는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애인들이 국정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영역이었다.
국왕과 정치
루이 14세.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즉위한 해에 그려진 초상
"L'état, c'est moi.(국가, 그것은 곧 나다)" 이 유명한 말(정말로 그가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은 루이 14세의 절대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이 말은 종종 계몽전제군주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나는 국가 제일의 종복이다(Ich bin der erste Diener des Staates).”와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태양왕의 정치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는 그 어떤 왕보다도 “국가 제일의 종복”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사생활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에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의 생활은 오락과 식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정치였다. 그는 예술과 문화의 애호가로 유명했지만 그 못지않은 정력을 국사에 쏟아 부었다. 그는 동시대의 어떤 국왕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성실함으로 국사에 임하였던 것이다. 그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대신들을 접견하였으며 5개의 국가 회의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어떠한 문서도 국왕의 결재 없이 통과될 수 없었다. 그가 보내는 시간 중 대부분은 이러한 문서들을 들여다보는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통치에 있어서 그의 손발이 되었던 관료들은 대부분 신흥 부르주아 출신들이었다. 이들 전통적인 귀족 계급과 달리 국왕에게만 충성하는 사람들이었다. 중앙집권과 왕권 강화에 따른 귀족 계급에 대한 불만에 대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베르사유 궁은 그것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차츰 ‘푸른 피가 흐르는’ 옛 기사들의 후예들은 시골의 영지 대신 베르사유에 모여 국왕이 베푸는 각종 여흥과 파티를 즐기며 살게 되었다. 또한 국왕은 몇 가지 타협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봉건 귀족들은 전통적인 면세 특권을 계속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세 부담은 농민층에 가장 과중해질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절대군주 루이 14세의 권력은 생각보다 절대적이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절대군주’라는 용어는 사실 후에 만들어진 것이며 이 시기 국왕의 ‘절대적 권력’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 관념이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국왕과 궁정
젊은 국왕의 궁정은 생기에 넘쳤으며 방탕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운 예식으로 가득했는데, 왕의 궁정에 자리를 얻은 귀족은 일단 그 예절은 외우는 데에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소모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왕의 노림수는 여기에 있었다. 귀족들이 그것에 전념하는 한은 자신에 대해 반란 음모를 꾸미지는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국왕 자신도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평소에 화내는 것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왕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 중 하나는 왕이 평생 단 세 번 자제심을 잃고 화내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국왕의 예절은 심지어 하녀에게도 경어를 쓸 정도였다.
궁정 예절의 까다로움은 후세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나중에는 이 예절을 제정한 루이 14세 자신이 견디지 못할 정도였다. 한 예로 왕궁에서는 문을 두드리는 것이 큰 실례였다. 그 대신에 새끼손가락으로 문을 가볍게 긁어야 했다. 그 때문에 궁정인들은 모두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길게 기르고 다녔다. 또한 주방에서 왕의 식사가 운반될 때에 그 길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왕 자신과 마주쳤을 때처럼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야 했다. 왕의 궁정에 참석하는 것은 궁정인의 의무사항이었다. 가까운 가족의 초상이 났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궁정으로 복귀하지 않는 사람은 왕의 총애를 잃어버리게 되어있었다. 이미 시대는 옛날처럼 시골에 거주하는 전통귀족들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루이 14세의 통치 후반기에 궁정 문화는 크게 변하게 된다. 특히 베르사유 궁의 완공 이후 그곳으로 옮겨간 궁정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변했다. 통치 전반기의 화려하고 생기 있는 문화와는 대조적이었다. 왕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위세가 조금씩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국왕과 프랑스의 영광
루이 14세 뿐 아니라 17세기의 군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국가적인 영광’이었다. 국제무대에서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의 위신을 드높이는 것만큼 군주들에게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루이 14세는 이 목적을 온전히 이루었다. 프랑스어가 유럽 궁정의 공용어로 정착되는 것도 이 시기였고, 프랑스식이 거의 모든 유럽 국가의 귀족들에게 유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국가적 위신을 드높이는 방법은 역시 전쟁이었다. 루이 14세의 긴 통치도 끝없는 전쟁으로 얼룩지게 된다.
흔히 잘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루이 14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군제개혁이다. 그의 즉위 전만 해도 프랑스군은 강력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봉건적 귀족 사병들의 연합체였다. 공통된 편제도 없었으며 대귀족들 중 유력인물이 지휘를 맡았다. 이러한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고 프랑스군을 유럽 최초로 근대적인 군대로 만든 것이 루이 14세 개혁의 핵심이었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통일된 군복이 제정되었고, 군대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위관과 영관 계급은 혈통이 아니라 철저히 능력 위주로 선발되었다. 물론 당시 군대는 아직 과도기적 군대였다. 한 예로 총검이 발명된 1680년대까지 루이 14세는 보병의 3분의 1은 창병으로 두었던 것이다. 이 군대가 루이 14세와 프랑스의 영광을 드높이게 될 도구였다.
루이 14세의 첫 상대는 오랜 숙적인 합스부르크 스페인이었다. 한때 전 유럽을 지배하며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이 국가는 1648년 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한 이후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스페인령 저지대(Low Countries)의 일부 지역이 자신의 아내인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사에게 상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튀렌 자작 지휘 하의 프랑스군은 신속히 진격하여 여러 도시들을 포위 공격했다. 별다른 저항도 없이 프랑스군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전승전쟁 중 참호를 방문한 루이 14세
그러나 여기서 프랑스군의 성공에 두려움을 느낀 네덜란드가 영국, 스웨덴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가 현재까지 획득한 영토에서 전쟁을 멈추도록 했다. 루이 14세는 네덜란드의 배신에 격노했다. 스페인 제국으로부터의 오랜 독립 투쟁에 걸쳐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전통적 동맹이었다. 그러나 약화된 스페인 제국은 더 이상 네덜란드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까지의 동맹이던 프랑스가 더 큰 위협이었다. 어쨌든 전승전쟁(War of Devolution)이라고 이름 붙은 이 전쟁은 프랑스의 손쉬운 승리였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만족하지 못했다. 1672년에 그는 네덜란드의 배신을 징벌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네덜란드는 오랜 적수이던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대항했으나 프랑스군은 연달아 적군을 격파해 나갔다. 이 전쟁에서 명장 튀렌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으나 이 전쟁의 결과 프랑스는 상당한 영토를 획득했다. 비슷한 시기에 북아메리카의 루이지애나 식민지의 개척도 크게 진척되어 루이 14세와 프랑스의 영광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두 전쟁의 승리는 역효과도 가져왔는데, 루이 14세가 자신을 군사적 천재로 확신하게 되었고 궁정에 앉아서도 충분히 전쟁을 지휘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절정기의 루이 14세(1684년)
쇠퇴의 시작
1685년을 기점으로 루이 14세의 위세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국내적으로 그의 가장 큰 실수는 조부인 앙리 4세가 내린 낭트 칙령을 철회한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위그노들은 소수였지만 상업과 수공업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낭트 칙령의 철회 이후 루이 14세는 신교도에 대해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그 결과 상당수가 프랑스를 떠나게 되었고, 일부는 아메리카 식민지로, 나머지는 신생국 프로이센으로 이주하였다. 이것은 프랑스 경제에 작지 않은 타격이었다.
대외정책에서도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 두 차례의 승리 이후 그는 전쟁을 그만두지 않았고, 그 결과 리슐리외와 마자랭이 고심해서 만들어 놓은 동맹 체제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자신의 힘에 도취된 태양왕은, 프랑스의 힘을 두려워한 유럽 국가들이 반 프랑스로 뭉치는 것을 허용해 버렸던 것이다. 이제까지의 동맹이었던 영국도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명예혁명으로 적국인 네덜란드 오랑예 왕가의 빌렘 공이 윌리엄 3세로 즉위했기 때문이었다.
1688년에서 1697년까지 지속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에서 이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프랑스군은 더 이상 신속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전황은 지지부진했다. 전쟁은 결국 프랑스에 유리하게 끝나기는 했지만 루이 14세는 많은 것을 얻지 못했다.
그에게 가장 큰 재앙은 그의 마지막 전쟁이었던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2-1713)이었다.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은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고, 합스부르크 스페인은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상속자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루이 14세의 아내 마리아 테레사는 카를로스와 이복남매간)과 같은 합스부르크가인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이었다. 복잡한 외교공작 끝에 카를로스는 앙주 공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곧 펠리페 5세였다.
물론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했다. 영국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와 쇠퇴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국가 둘이 결합하는 사태를 좌시할 수 없었다. 결국 프랑스, 스페인, 바이에른 동맹은 거의 전 유럽 동맹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동맹군 쪽에는 두 명의 탁월한 장군이 있었다. 사보이의 에우제니오 공작과 영국의 말버러 대공 존 처칠이었다.
원래 우리 집안이 싸움 좀 하거든
(존 처칠, 1대 말버러 대공)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말버러와 에우제니오는 프랑스군을 완벽하게 대파했다. 프랑스군 사상자가 2만 여 명에 달하는, 루이 14세 즉위 이후 프랑스군이 당한 최대의 패배였다. 전 유럽을 떨게 했던 무적 프랑스군의 명성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루이 14세와 루부아의 개혁을 통해 만들어진 프랑스 병사들의 자질은 여전히 우수했다. 문제는 루이 14세의 초기 승리를 지탱했던 명장들이 하나 둘 사라진 것이었다. 블렌하임 전투 후 말버러 대공은 한 프랑스군 포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모든 프랑스군이 자네와 같다면 분명 루이 14세는 전 유럽을 정복할 것이다.”
프랑스 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 같은 병사는 많습니다. 당신 같은 지휘관이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명장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루이 14세의 마지막 남은 명장인 빌라르 원수는 1709년 말플라케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적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뒤에 1712년 드냉 전투에서 에우제니오 공의 군대를 격파해서 자칫 프랑스에게 엄청난 재앙으로 끝났을 전쟁을 간신히 구해냈다. 루이 14세는 간신히 체면을 지킬 수 있었다.
드냉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이끄는 빌라르 원수
그러나 전쟁의 대가는 엄청났다. 무엇보다도 전쟁 비용은 국가재정을 거의 파산 상태로 몰아넣었다. 루이 14세의 사망 당시 부채는 28억 리브르에 달했다.
죽음
말년의 태양왕은 어려움 속에서 지냈다. 국가적인 어려움, 재정난 외에도 개인적인 비극이 그를 괴롭혔다. 그가 너무 오래 살았던 탓인지 후계자들이 모두 먼저 죽었고, 왕위는 결국 증손자가 물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오랜 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루이 14세의 제위 말년을 단순히 쇠퇴기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은 완전한 패전은 아니었다. 앙주 공은 스페인의 왕위를 지켰으며 프랑스 국토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궁정문화는 전 유럽의 궁정에 확실히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1715년 8월 30일. 국왕은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자신의 긴 생애와 통치가 머릿속을 지나갔을까. 국왕은 갑자기 회한에 찬 고백을 내뱉었다.
“나는 전쟁을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 그는 마지막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오, 신이시여, 저를 도우소서. 이 고통으로부터 구해주소서.”
다음날 아침, 태양왕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77세의 삶, 54년에 걸친 통치였다. 54년에 달하는 통치 기간 동안 34년이 전쟁이었다. “국가, 그것은 곧 나다.”라고 자신 만만하게 선언했던(혹은 했다고 믿어진) 절대군주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떠난다. 그러나 국가는 언제까지라도 남아있을 것이다(Je m'en vais, mais l'État demeurera toujours).”
비록 말년에는 조금 휘청거렸지만 루이 14세의 군사적 업적과 그것이 유럽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물론 국왕의 역할이 컸지만 그가 거느렸던 뛰어난 지휘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수아-미셸 르 텔리에, 루부아 후작 (1641-1691)
군인이라기보다는 행정가에 가깝기 때문에 루부아를 올리기가 좀 망설여지긴 하지만 이 사람을 빼놓고 루이 14세의 프랑스군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근대사에서 가장 탁월한 군제개혁가로 봉건적 사병들의 집합체였던 프랑스군을 통일된 근대적 군대로 전환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튀렌 자작 (1611-1675)
당대 제일의 전략가이자 엄격한 규율가로 병사들의 깊은 존경을 받은 프랑스의 대원수. 그의 전술은(아직 영국이 동맹이던 시절) 젊은 말버러 대공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프롱드 반란 때에는 왕당파 군을 이끌어 반란군을 대파했다. 루이 14세의 초기 두 전쟁, 전승전쟁과 네덜란드 전쟁을 지휘하여 맹활약했다. 네덜란드 전쟁 중이던 1675년, 전투 중에 날아온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루이 14세에게는 뼈아픈 손실이었다.
루이 드 부르봉, 콩데 공작 (1621-1686)
루이 14세의 사촌으로 30년 전쟁의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대파하여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그 이후로 대 콩데(Le Grand Condé)라고 불리게 된다. 프롱드 반란때는 반란군에 가담하여 루이 14세의 적이 되었으나 튀렌에게 패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그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루이 1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뒤 전승전쟁과 네덜란드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1686년에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세바스티엥 르 프레스트르, 보방 후작 (1633-1707)
역사상 가장 탁월한 군사 기술자 중 하나. 1703년에 프랑스의 원수가 되었다. 성채의 포위공격과 방어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고안한 이른바 '보방 식 성채'는 너무나 유명하여 달리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 루이 14세의 군인 중 현재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다. 1707년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공작 (1653-1734)
튀렌과 콩데가 루이 14세의 통치 전반기에 활약했다면 빌라르는 그들 밑에서 경험을 쌓은 2세대격 인물이다. 튀렌과 함께 프랑스의 대원수로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 특히 튀렌과 콩데가 죽은 이후 루이 14세에게 남은 몇 안 되는 명장이었다. 그는 앞장서서 싸우는 타입의 장군이었으며 특히 1712년 드냉 전투에서는 4열 보병종대의 선두에 서서 빗발치는 사격을 뚫고 적군의 참호로 뛰어들었다. 이 전투의 대승리로 그는 프랑스 본토로 적군이 진격해 들어오는 것을 저지했다. 루이 14세 사후에도 왕성히 활동하다가 1734년 사망했다.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방돔 공작 (1654-1712)
루이 14세의 조카로 빌라르와 함께 루이 14세의 통치 후반기에 활약한 장군. 대단히 용맹하여 '군인 중의 군인'으로 불렸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활약했는데 그의 승리는 앙주 공이 스페인 왕위를 보장받는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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