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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막장 황제입니다. 역사는 돌고 돌겠죠? 지금까지 올라온 자료 짜집기 해서 만든겁니다.(스압)

구름위 2012. 10. 8.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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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을 몰랐던 황제

 

명나라 천계제. 그가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나무를 깎아 장난감을 만드는 것 밖에는 없던 저능아였다. 일명 목공 천계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무능한 황제가 있으면 환관들이 분탕질을 하는 것은 중국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환관 위충현은 9천세를 받았다나...

후조를 세운 석륵. 일자무식의 천민 출신이다. 그러나 정치는 박력 있게 잘했고 인종차별을 철폐하는데 이게 의외로 잘 먹혀 들어갔다고 한다.

 

백치 황제 서진의 혜제. 콩과 보리도 구별 못했고, 말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남자가 띨빵하면 마누라가 또 설친다. 중국역사가 그렇다. 시커먼 추녀 가남풍의 공작과 음행은 그치지 않는다. 결국 8왕의 난이 일어나 나라를 말아 잡숫는다.

 

동진의 안제 , 춥고 더운 것도 모르는 그야말로 정신박약아였고 저능아였다.

 

당나라 순종. 원래 총명했는데, 중풍을 한번 앓고 일어난 뒤 바보가 되어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2. 그야말로 안습황제

 

한나라 상제 유융. 한살에 황제가 되어 두 살에 죽었다.

 

한나라 창읍왕 유하. 즉위기간 한 달 동안 무려 천 가지가 넘는 범죄를 저질러 폐위되었다.

 

동진의 효무제 사마요. 잠자던 도중 같이 잠을 자던 후궁(장귀인)이 이불로 질식사시켜 죽였다. 게다가 그 후궁은 둘러대어 죽음을 면했다.

 

금나라 말제 완안승린. 황제 자리에 오른 지 반나절 만에 몽골군에게 척살 당했다.

 

명나라 홍희제. 비만으로 죽었다.

 

남송 고종 조구. 금나라 군대에 쫓기면서도 끝까지 여자들을 침실에서 놓지 않았는데, 금나라 군대가 야간기습을 해오자 놀란 나머지 음경이 위축되었다. 이후 자식을 낳지 못했다.

 

서요의 천희제 야율직로고. 그는 "여자 공포증" 환자였다. 어려서는 고모에게 , 나이가 들어서는 황후에게 휘둘리고, 마지막에는 딸에게 휘둘렸다. 결국 사위에게 찬탈당하고 냉궁에서 굶어죽었다.

 

양나라의 성군인 소연. 초창기에는 어느 정도가 아니라 잘나갔다. 그러나 후경의 반란으로 굶어죽고 백성들은 맷돌에 갈림을 당하였다. 남북조 시대 너무 무섭다.

 

명나라의 유명한 무종 정덕제 주후조는 독실한 라마교빠였으며 심지어 산스크리트어를 할줄

알았다. 스스로 관직을 주는 아바타 놀이를 즐겼고 이슬람 하렘을 모방해서 만날 궁녀들과 난잡한 짓거리를 하기도 한다. 결국 익사할 뻔 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서거한다.

 

 

3. 사이코 황제

 

남조 송나라의 폐제 유자업. 친 고모를 겁간해 황후로 삼고, 친누나와 친척 여자들을 궁중에 끌어들여 음탕하게 즐겼다. 한마디로 이런 또라이는 없다고 여겨진다.

 

반대로 남동생들은 모두 죽여버렸다. 거부하면? 당연히 죽였다. 근친에 하드고어에 골고루 충족하는 참으로 적절한 18금 게임 소재다.

남조 제나라의 동혼후 소보권. 그는 귀축 마니아였고 힘 또한 장사였다. 미녀를 보면 사지를 잘라 개목걸이를 채워 강아지처럼 사육하고,

궁녀를 모아놓고 개와 수간을 시키고(요즘으로 치면 김태희 같은 여자의 팔다리를 잘라 개목걸이를 채우고 개와 수간을 시켰다고 보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기를 즐겼던 미친 사이코.

특히 스님을 싫어해서 스님을 보는 즉시 화살을 쏴서 죽였는데, 이유는 대머리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살의 나이에 허리가 잘려 죽었다. 그것도 발가벗은 상태로.

 

후조의 황제 석호. 그의 행적을 보면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고 불릴 정도였다. 아름다운 궁녀를 보면 목을 벤 후, 접시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았으며, 몸은 양고기와 쇠고기를 섞어 끓여 먹었다.

그리고 남의 여자를 빼앗아 첩으로 삼았으며, 수도 업성에 사냥터를 만들어 그곳의 동물을 잡거나 돌을 던지면 이유를 불문하고 처형하고 가산을 몰수했다.

 

석호는 여자를 많이 보내온 지방 관리들을 후작에 봉했다.

그러나 그 지역 사람들이 도망을 치자 석호는 미녀를 너무 많이 보냈다며 후작에 봉한 그 관리들을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장남 석선은 황태자로 봉하고, 차남은 왕에 봉했다.

 

348년 석선이 석도의 궁전을 받치는 대들보가 너무 길다고 시비를 걸어 석도를 죽여버렸다. 이에 내친김에 아버지 석호까지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문 킬러였던 석호의 반격은 매우 신속해 석선을 금방 잡았다.

그리고 석호는 처첩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높은 대에 올라 석선의 머리카락과 혀를 뽑고 장작더미 위를 기어오르게 했다.

그리고 손발을 자르고, 눈알을 파낸 다음 불을 놓아 태워 죽였다.

 

그리고 석선의 처첩들과 자식들은 자신의 며느리들과 손자들이었는데도 모조리 참수해버렸다.

태자궁을 지키던 위사들은 모두 1200리 밖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석선 밑의 환관들과 관원들도 사지를 찢어 죽였다.

 

당시 석선의 5살 난 아들 즉 석호의 손자는 석호가 무척 귀여워해서 낮이고 밤이고 안고 살았으나 이 아이도 죽였다.

사형집행관이 아이를 잡자 아이는 온힘을 다해 할아버지 석호의 옷을 잡고 울었지만 석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떼어냈다.

그 바람에 옷이 찢어질 정도였으나 결국 아이를 끌고 가 죽였다.

 

이 죽인 방법이 믿을 수가 없는데 손자를 갈아버렸다고 한다. 거의 악마와 쌍벽을 이루었다. 아니다 그는 악마였다.

 

도무제는 태자를 낳은 어미는 무조건 자결하라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황후들이 후궁에게 아이를 낳게 하고는 자신이 키웠음.)

 

북제 무성제: 문선제(밑에 나오는 북제 황제 고양이 문선제)의 황후와 잠자리를 같이 하였고(아마.. 이것은 북조의 있었던 왕조들은 북쪽 선비족 계통이었기 때문에 형사취수의 풍습이 어느 정도 남아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됩니다..).. 형의 자식을 모두 다 죽임.

 

북제 후주: 사람을 놀이용 장난감으로 취급하였고 엽기적인 형벌들을 동원해 많은 사람을 죽임.

 

북주 선제: 아버지의 후궁을 모조리 차지하고 지나가다가 즉석에서 관계를 맺어 후궁제도 개편 간언하는 신하는 모조리 죽였고 상복을 입은 지 이틀 후에 상복을 벗고 아버지가 총애했던 후궁을 먼저 덮침.

북제의 황제 고양. 형수를 잠자리에 동침시켰고 북위의 황손들을 연에 매달아 날린 후 연을 떨어뜨리도록 해 모두 추락사 시켰다.

술에 취하면 사람을 무조건 죽이는데 시종 사형수 일반 죄수 등등 죽이고 죽여서 나중에는 죽일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친어머니를 두들겨 패기도 했는데 친어머니를 보고 "네 년은 뭐하는 년이냐"하고 했다고 한다.

양제 양광은 문제를 죽이고 나서 양견이 총애하던 선화부인을 겁탈한다. 이 장면은 사료에서 이렇게 나타난다. “其夜太子蒸” 해석하면 그날 밤 태자는 찜질했다. 이게 아니다 그날 밤 태자는 (선화부인을) 범했다. 이게 정확한 해석이다. 蒸자는 찜질했다는 뜻도 되지만 윗사람 범할 증도 된다. 이 양반 고구려를 치려다가 진짜 박살난다. 그리고 수는 망한다.

 

명나라 세종 가정제 주후총은 스스로를 도인이라고 여겨 궁궐에 틀어박혀 단약제조와 불로불사 개발을 위해 힘썼다.

뭐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사람 때는 충신들이 많아서 그나마 버텼는데, ( ex) 장거정, 척계광 )

임인궁변때 '궁녀들한테 잡혀 맞아 죽을 뻔'했다가 황후덕에 간신히 살았다.

왜? 불로장생의 재료라고 단약 만들면서 궁녀들한테서 월경수 짜냈기 때문이다.

근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황후가 늦게 왔다고 꼬투리 잡아서 황후를 방화 살해한다.

그 후 다시 결혼을 하는데 자기가 만든 단약을 먹지 않았다고 임신한 황후 배를 걷어차는 만행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어느 돌팔이가 바친 단약 먹고 요단강 건넜다.

 

 

3. 아들 혹은 딸에게 죽은 황제

 

북위태조 탁발규. 아들들이 공모하여 궁중에서 참살했다.

 

수나라 문제. 병문안을 핑계로 찾아온 아들 양제가 죽였다.

 

당나라 순종. 백치가 되어 사리분별을 못하게 되자 옳다구나 하고 아들 헌종이 죽였다.

 

당나라 중종. 딸 안락공주가 독이 든 만두로 독살시켰다. 위황후와 모의했다. 그러나 이융기가 일으킨 쿠데타로 둘 다 저승 가서 여자 왕초 해먹는다.

 

오대십국 후량의 주전충. 병상에서 아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주전충은 색마로, 며느리들을 건드려 아들들에게 평소 원한이 자자했다. 그는 경국지색의 미녀를 보면, 그 미녀의 남편을 양자로 삼고 며느리로 만든 뒤 미녀를 궁중에 끌어들여 즐기는 변태성욕의 소유자였다.

 

서하 경종 이원호. 가장 믿고 사랑했던 아들이 죽였다.

 

 

4. 기타

 

가장 못생겼던 황제는 남조 양나라의 소역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애꾸눈에 피부가 검어 후궁들이 그와 잠자리를 서로 안하려고 순번을 바꿨다.

 

반대로 가장 잘생겼던 황제는 삼국시대 위나라 열조 조예다. 중국 역사 정사 문헌에 얼굴에 빛이 났다고 기록된 인물은 그 뿐이다. 조예의 어머니 견황후는 경국지색이었다. 또한, 영혼 결혼식의 시초는 조예가 일찍 죽은 딸과 외사촌의 아들에게 영혼결혼식을 올려준 것부터 시작되었다.

 

당나라 현종의 아들과 딸을 합치면 60명이다. 이 당나라 이씨는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이다. 이치는 아버지 후궁을 황후로 삼고 이융기는 자기 며느리를 귀비로 삼고 집안꼴 참으로 예쁘장하다.

 

요나라 세종은 하루 24시간 중 23시간을 술을 먹고 자서 수왕(잠대왕)이라 불렸다.

 

명나라 홍치제는 사생활이 가장 깨끗했다. 그는 후궁이 한 명도 없이 황후에게만 충실했다.

그러면 뭐하는가? 그 다음에 등장하는 황제들이 개막장 찌질의 극치를 보이는데 뭐...

 

명나라 정덕제는 호수에서 보트놀이를 하다가 보트에 구멍이 나서 물에 빠져 죽었다. 그는 라마 교도였다. 아니 라마교빠가 맞지 싶다. 이슬람의 하렘을 모방해서 주구장창 그 짓거리나 한다. 그게 뭐냐고? 알잖아 붕가~ 붕가~

 

명나라 가정제는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황후에게 직접 폭력을 행사한 황제로, 임신한 황후의 배를 걷어차 유산시켰다. 이미지 검색해 보시라 강호동이 용포를 입고 있다. 궁녀들의 월경액과 이상한 것을 섞어서 비약을 만드는 게 취미였고 이것을 견디지 못한 궁녀들이 황제를 죽이려다 몰살당한다. 소위 임인궁변이라고 한다. 늦게 왔다고 임신한 황후의 배를 걷어차지를 않나 말이다. 이 양반은 전대미문의 개막장 폐륜아이다.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은 죽은 뒤에 황제가 되었다가 죽은 뒤에 폐위되었다. 그는 형사취수 제도를 몸소 실천한 유일한 사람이다.

청나라 순치제의 사랑은 순애보적이다. 그는 사랑하던 동악비가 죽자 오대산으로 출가해 죽을 때까지 그녀의 명복을 빌다 죽었다. 중국 소설 녹정기에 아주 상세히 묘사하였다.

 

청나라의 철혈 대군주 옹정제가 자살한 이유는 애첩 교인제가 알고 보니 친딸이었기 때문이었다.(옹정제 병사하지 않았네)

청나라 가경제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 우리나라에도 벼락에 맞지는 않지만 벼락 때문에 경기 먹어 죽은 임금도 있다 고려 3대왕 정종 왕요이다. 아마 왕요는 왕소한테 독살당한 것이 맞지 않나?

 

진나라 사마염. 어쨌거나 초창기의 정치는 아주 잘나갔다, 사치를 멀리하고 선정을 베푸는 듯 했는데 개구리 올챙이적을 모른다던가? 삼국시대를 통일한 인물이긴 하나 하는 짓거리가 거시기하기 그지없는데, 예쁜 여자란 여자는 몽땅 모아서 후궁이 1만 명 급인데다가 하도 여자가 많으니까 고르기도 귀찮아서 작은 수레를 양이 끌게 하고선 그 수레에 타고 양이 가는 대로 가서 즐겼다고 한다. 어떤 총명한 후궁이 양이 대나무 잎과 소금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기 방 앞에 놓자 양이 그곳만 갔다. 이때 소금과 대나무 가격이 폭등했다.

황제와 기타 귀족들의 사치도 어이가 없을 수준이었다고 한다. 석숭과 왕개는 지금으로 말하면 삼성과 현대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 돈지랄을 한 것과 비견될 수 있다. 속설로 이 두 양반의 집안의 개새끼 밥그릇도 금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도 들리니까 뭐~ 영가의 난이 왜 일어난 지를 상기해보면 알 것이다.

 

명나라 만력제는 파업을 한 황제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업무상 배임, 그것도 국가를 상대로

25세 이후 만력제는 국가적 소임을 방치하고 1589년에서 1615년까지 무려 4반세기 동안 조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관들과 외국 사절들은 빈 옥좌를 향해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1591년 이후로 만력제는 공식 의례를 수행하지 않았고 1614년에는 생모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러나 만력제는 각신들과 거리를 두었으며 1590년(26세)에서 1620년(사망)까지 30년 동안 만력제는 그들을 딱 5번 보았다. 그리고 환관이 장주를 황제에게 올리면 황제는 기분 나쁜 문제는 무시했고, 재정과 방위 등 가장 긴급한 사항 이외에는 결제도 하지 않았다.

정치는 정체에 빠졌다. 관직의 공석은 채워지지 않았고 승진도 없었다. 1603년에 도찰원의 관직은 2/3이 공석이였고 1612년에는 각신이 단 한 명뿐이었는데 그나마 그도 병석에 있었다. 모든 주현의 관직은 50%가 공석이었다. 죄수들은 재판을 받지 못해 옥중에서 고생하다가 죽었으며 황제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했으며 어떤 반대도 참지 못했다.

 

부당하게 가혹한 판결을 받았다고 항고하면 역으로 가중 처벌하고, 간언하는 관료들은 장형이나 유형에 처했다. 비밀 업무를 수행하는 환관들은[동창] 불신과 분파주의의 온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 아들도 조회에 나가서야 30년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보았다고 한다.

그나마 장거정과 척계광의 개혁으로 어느 정도 숨은 쉬었으나 이 두 양반이 없어지고 난 뒤의 명나라는 뭐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런데 우리나라 서원중 화양동 서원의 만동묘는 이 희대의 개막장 찌질이를 숭상하고 있다. 왜? 임진왜란때 도와줬다고 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천국의다단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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