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99>환도 (環刀)

구름위 2017. 1. 11. 19:52

역사속 신무기<99>환도 (環刀)

조선 대표적 군도…날이 휜 외날 검
2009. 01. 05   00:00 입력 | 2013. 01. 05   04:20 수정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장수(將帥)의 상징은 바로 칼이다.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위대한 장수들의 무기 중 칼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칼이나 예식용(禮式用) 혹은 장식용(裝飾用) 칼과 구분하기 위해 군도(軍刀)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하며 역사적 인물들이 사용했던 칼은 보물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지만 이순신 제독이 직접 전장에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쌍룡검(雙龍劒) 역시 세계 어느 장수들의 칼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칼이다. 이순신 제독의 쌍룡검을 비롯해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외침이 있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서 외적과 맞싸운 조선의 위대한 장수 및 의병장들의 무기 역시 환도(環刀·사진)가 주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 군도인 환도는 고려 후기 몽골 환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칼날이 휜 곡도(曲刀)가 조선 고유의 도검양식을 바탕으로 발전한 것으로 길이가 비교적 짧은 외날 검이다. 앞서 소개한 쌍수도(雙手刀)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한시적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된 칼이라면 환도야말로 조선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군도라 할 수 있다.

사실 환도 외에도 운검(雲劒), 패도(佩刀), 패검(佩劍) 등의 외날 검이 만들어져 사용됐으나 국왕을 호위하는 무사들이 사용한 운검의 경우 환도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패도와 패검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에 1∼2회 짧게 언급될 정도로 널리 보급되거나 보편적으로 사용된 칼은 아니다. 예도(銳刀), 쌍검(雙劍), 왜검(倭劍) 등은 칼의 명칭이 아니라 검법의 명칭이며 조선시대 만들어진 긴 외날을 가진 단병기는 물론 외국의 도검들도 모두 환도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환도의 가장 큰 특징은 시대와 역사적 상황에 따라 표준 규격이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 형태만 같을 뿐 소환도, 중환도, 대환도 등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환도의 규격을 통일하고자 시도했던 최초의 왕은 문종(文宗·재위 1450∼1452년)으로 조선 전기 기병과 보병용 환도 규격을 65.6㎝와 73.6㎝로 각각 정했다.

그러나 실제 사용된 대부분의 환도는 나라에서 정한 규격보다 더 짧았으며 임진왜란 이후 문제가 된 환도의 짧은 길이를 보완하고자 조선 중기 환도의 규격은 90㎝ 이상으로 길어졌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조선 말기, 무기로서의 의미가 점점 퇴색하고 의장품처럼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환도의 길이는 더 짧아져 50㎝ 내외의 것도 등장하게 됐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다양한 무기를 휴대하고 동시에 사용하다 보니 띠돈을 이용해 칼자루가 등 뒤를 향하도록 하고 칼끝이 앞으로 향하도록 환도를 패용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잘못된 고증에 익숙한 현대인의 시선에는 매우 낯설게 느껴지지만 실제 활을 쏘거나 움직일 때 방해가 되지 않고 매우 실용적인 패용법이다.

특히 필요할 경우 띠돈으로 손쉽게 칼자루를 몸 앞으로 돌릴 수 있고 세계 각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패용법을 찾아 볼 수 있어 조상들의 지혜가 녹아 들어가 있는 부분이라 말할 수 있다.

역사속 신무기<100>연대포<regimental gun>

작고 가벼운 스웨덴군 ‘4파운드 포’
2009. 01. 12   00:00 입력 | 2013. 01. 05   04:21 수정

독일 라이프치히 북쪽 8㎞에 위치한 브라이텐벨트에서 1631년 9월 17일 신성로마제국과 구스타부스 아돌푸스(Gustavus Adolphus·재위 1611∼1632)가 지휘하는 스웨덴군이 역사적 전투를 벌였다.

30년 전쟁의 분수령으로 평가받는 이 전투 결과로 인해 예수회와 합스부르크 가문은 북유럽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으며, 구스타부스는 위대한 군사전략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전투로 인해 대포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은 물론 대포가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전투에서 활약한 연대포(regimental gun)는 전투에 참가한 모든 스웨덴군 연대 선두에 배치돼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연대포의 원래 명칭은 4파운드 포로 당시 사용된 여느 대포들에 비해 작고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전체 무게 280kg, 포신의 길이는 1.2m에 불과하고 고작 1.3kg 무게의 포탄을 발사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발사 속도나 기동성은 이전의 야포들에 비해 월등히 향상됐다.

실제 머스킷을 6번 발사할 때 산탄(canister)이나 포도탄(grape shot)을 8번 발사할 수 있었으며 말 한 마리 또는 포병 3명에 의해 대포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것은 포병의 일제사격에 의한 탄막의 형성과 전투 중에도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진지 전환이 가능해 포병이 보병을 근접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대포의 등장은 구스타부스가 시행한 일련의 군사개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구스타부스가 행한 일련의 군사개혁을 통해 대포는 0.8∼3.2톤 내외의 포위 공격용 공성포와 야전전투에서 사용되는 0.9∼1.4톤 내외의 야포로 명확하게 구분되기 시작했다. 특히 야포 중에서도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 4파운드 포가 새로 등장했다.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더 짧고 더 가벼운 포신으로 변화됐지만 구경을 축소함으로써 사정거리와 발사 속도는 계속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4파운드 포는 항상 보병연대 선두에 배치돼 적 보병이 일정거리 이상 근접하기 전까지 사격을 계속했고 보병이 전진할 경우 함께 이동하며 지원했기 때문에 원래 명칭 대신 연대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물론 이전에도 연대포에 해당하는 가벼운 대포가 다수 존재했지만 기동성과 화력을 동시에 갖추고 대량으로 사용된 야포는 스웨덴의 4파운드 포가 최초다. 특히 구스타부스는 대포의 화력만을 중시하던 당시 경향과는 반대로 화력 못지않게 대포의 기동력을 중시함으로써 연대포와 같은 경포가 활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브라이텐벨트 전투를 통해 처음 등장한 연대포는 이후 이름과 형태가 조금씩 변화되긴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보병을 직접 지원하는 야포로 계속 발전해 왔다. 다만 새로운 형태의 보병용 로켓무기와 박격포가 속속 등장함에 따라 그 자리를 물려주고 현재는 일선에서 자취를 감췄다. 현대의 연대포는 최소 105㎜ 이상의 야포를 지칭하므로 최초 등장한 연대포와는 명칭만 같을 뿐 그 의미와 형태는 완전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