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신무기<97>진천뢰(震天雷)
- 최초 석류모양의 폭탄 부비트랩
- 2008. 12. 22 00:00 입력 | 2013. 01. 05 04:19 수정
살상 효과는 크지 않지만 심리적 압박과 공포를 주기 위해 설치되며 베트남전쟁 이후에는 그 의미가 더욱 확장돼 병사의 목숨을 위협하는 모든 종류의 함정을 부비트랩이라 부르고 있다.
흔히 폭탄을 사용한 부비트랩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수세기나 앞서 중국 명나라에서도 폭탄 부비트랩이 사용된 기록이 있다.진천뢰(震天雷)의 일종인 격적신기석류포가 바로 그것으로 눈에 잘 띄도록 현란한 색을 칠하고 석류모양으로 만들어 놓아 적군이 이것을 집어들면 폭발하도록 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최초의 폭탄 부비트랩이라 할 수 있는 이 무기는 석류를 닮은 철제 용기에 작약과 독약을 함께 채워 넣고 폭발하는 순간 파편과 독가스로 주변의 적을 살상할 수 있었다. 어떤 원리와 구조로 폭탄을 집어드는 순간 폭발하도록 돼 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폭탄 부비트랩이 이미 명나라 때 만들어져 사용됐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진천뢰는 중국 대륙에서 사용된 작렬탄의 하나로 현대식 수류탄의 먼 조상쯤 되는 무기다. 도자기나 무쇠로 만든 작은 그릇 안에 폭발성이 강한 화약을 채워 넣고 도화선을 연결한 다음 여기에 불을 붙여 폭파시켰고 크기는 지름 16∼20㎝ 내외, 무게는 4∼16㎏으로 다양했다.
폭발하는 순간 우레와 같이 큰 소리를 낸다고 해 ‘하늘을 뒤흔드는 벼락소리’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으며 중국식으로 ‘첸티엔레이’라고 발음한다. 표주박처럼 생긴 것, 공처럼 생긴 것, 밥그릇을 위 아래로 붙여 놓은 듯한 것(合碗型), 항아리처럼 생긴 것(罐子型) 등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손으로 던지는 것이 기본이나 큰 것은 대포를 사용하기도 했다. 금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며 구조나 원리가 간단해 당시 적대관계에 있던 남송(南宋)과 원(元)에서도 노획한 진천뢰를 모방한 무기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천뢰의 위력을 높이 평가한 남송은 진천뢰를 철화포라고 불렀으며 매달 2000개 이상을 생산해 주요 요충지를 방어하는 수성(守成) 무기로 비축했는데 그 수효가 수만이었다고 한다.
원나라 역시 진천뢰를 철포라는 이름으로 대량 생산하고 전쟁에 사용했는데 두 차례에 걸친 일본원정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병사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최초의 진천뢰는 전쟁에서 인마를 살상하기 위한 무기가 아닌 여우를 잡기 위한 사냥도구였다는 사실이다.
금나라 대시인 원호문(元好問)이 쓴 속이견지(續夷堅志) 중 호거수(狐鋸樹)에 따르면 한 사냥꾼이 화약을 넣은 화관(火罐)을 폭발시켜 그 소리로 여우를 기절시켜 잡았다고 한다. 노벨이 만든 다이너마이트처럼 어느 이름 없는 사냥꾼이 여우를 잡기 위해 만든 사냥도구가 훗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로 사용됐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속 신무기<98>쌍수도 (雙手刀)
- 明 쌍수장검·日 야태도서 유래
- 2008. 12. 29 00:00 입력 | 2013. 01. 05 04:19 수정
바로 현충사에 전시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유품 중 전체 길이 197.5cm로 거의 2m에 달하는 두 자루의 장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오해 아닌 오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현재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유품 중 보존되고 있는 칼은 모두 여섯 자루인데, 그 중 귀도 두 자루와 참도 두 자루는 명나라 황제가 선물한 것이고 장검 두 자루는 우리 선조들이 직접 만든 것이다. 이름은 장검이지만 실제로는 양날 칼인 검(劍)이 아니라 외날 칼인 도(刀)로 조선시대 군사훈련 서적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기록된 쌍수도(雙手刀)의 한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손잡이 길이가 여느 쌍수도보다 길다는 점 외에는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쌍수도의 주요 특징과 현충사에서 보관 중인 이순신 제독의 장검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가 발행한 ‘한국무기 발달사’에서는 이순신 제독의 장검이야말로 조선식 쌍수도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대표적 유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쌍수도는 가깝게는 중국 명나라의 장도(長刀) 즉 쌍수장검(雙手長劍)에서, 멀게는 일본의 야태도(野太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당시 명나라는 중국 남부지방에 대한 왜구의 빈번한 약탈과 해적행위로 민심이 어지러웠는데, 특히 왜구가 휘두르는 커다란 왜검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공포 그 자체였다.
왜검의 장점을 인정한 명나라 장수 척계광은 이를 모방해 쌍수장검을 만들고 조총수들에게 휴대토록 해 왜구들이 근접하면 조총을 버리고 쌍수장검으로 싸우도록 했다.조선 역시 임진왜란을 겪으며 강력한 왜검에 대항하기 위해 명나라를 통해 쌍수장검과 검법을 받아들였는데, 조선 환도의 특징이 그대로 녹아들어간 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쌍수도다.
그러나 명나라와 달리 조선에서는 쌍수도를 대량으로 제작해 사용하지는 않았고 유물도 이순신 제독의 장검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에서는 쌍수검법만이 쌍수도·평검(平劍)·용검(用劍)이라는 이름으로 전수됐으며, ‘무예도보통지’에도 이름만 남았을 뿐이라고 기록돼 있다.
한편 현재 현충사에 전시된 이순신 제독의 장검은 갑오년(1594) 4월 일초 태귀련(太貴連)과 이무생(李茂生)이 제작한 것으로, 길이는 각각 197cm와 196.8cm이며 칼집을 뺀 칼날의 무게는 4.32kg과 4.21kg이다.
각각 ‘세 척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도 빛이 변한다’라는 뜻의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과, ‘크게 한 번 휩쓰니 피로써 산과 강을 물들인다’는 뜻의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일각에서는 이순신 제독의 장검을 당시 명나라에서 전해진 쌍수장검과 왜검, 그리고 조선 고유의 환도 양식이 융화돼 탄생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국보급 보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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