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17>그리스의 ‘헬레폴리스’

구름위 2017. 1. 9. 20:14

역사속 신무기<17>그리스의 ‘헬레폴리스’

높이 43m… ‘움직이는 거대한 요새’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Cambyses II·재위 기원전 530∼522)는 고양이를 방패로 사용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이집트의 철옹성 펠리시움(Pelusium)을 무혈점령했다.

당시 이집트인에게 동물, 특히 신성한 고양이를 함부로 죽이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였기 때문에 고양이를 들고 전진하는 페르시아군을 향해 화살을 쏘거나 무기를 휘두를 수 없었다.

당시 페르시아는 공성무기나 대규모 공성전 없이 훌륭한 전술과 적절한 계략만으로도 요새화된 도시를 점령할 수 있다는 훌륭한 선례를 남겼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화살과 돌을 날리고 병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는 원시적 공성방식을 더 선호했고 헬레폴리스 같은 괴물 공성 탑을 만들어 전쟁에 사용했다.

기원전 305년 로도스 포위공격 당시 등장한 헬레폴리스(helepolis·사진)는 아테네의 에피마코스가 디미트리오스를 위해 만든 거대한 공성탑이다.‘도시 포획자’라는 뜻의 헬레폴리스는 무게 150톤, 높이 43m에 9개 층으로 이루어진 움직이는 거대한 요새였다.

단단한 철판으로 장갑을 두른 헬레폴리스는 최하층 82㎏급 노포 2문과 27㎏급 노포 1문, 1층 27㎏급 노포 1문, 나머지 다섯 층에 각각 다트 발사기 2문을 설치해 막강한 공격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헬레폴리스의 포문들은 기계장치에 의해 열리고 닫혔으며 투석 공격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가죽과 양털이 덧씌워졌다.

주요 들보들은 전나무·소나무로 만들어졌고 바퀴·수평봉은 오크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적의 화공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주요 이음매와 후면을 제외한 3면에 철판을 덧씌워 보강했다. 직경 4.6m 바퀴 8개로 움직이는 헬레폴리스는 대략 200명의 인원이 내부에 배치돼 캡스턴을 돌리면 연결된 벨트를 통해 구동력이 전달되는 방식으로 전진했다.

여기에 병사들이 헬레폴리스를 뒤에서 밀어 부족한 추진력을 보강했고 실제로 헬레폴리스를 운용하기 위해 동원된 병사의 수는 3000명이 넘었다.공성탑 기원은 아시리아였지만 당시에도 높이가 10m를 넘는 탑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공성탑은 헬레폴리스의 절반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로도스에 대한 공격에서 헬레폴리스는 기대 이하의 위력으로 제작자들과 디미트리오스를 실망시켰다.

그 치명적인 위력을 십분 발휘하기도 전 로도스인들이 만든 함정에 빠져 꼼짝할 수 없었고 결국 디미트리오스는 헬레폴리스의 철수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요새화된 성에 대한 포위공격 기술은 아시리아에 의해 공성망치와 공성무기가 개발된 이후 기원전 450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까지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공성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리스인들은 삼부카(sambuca)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공성무기를 개발했다. 다양한 공성무기 등장은 헬레폴리스의 개발에 영향을 미쳤고 비록 전쟁에서는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헬레폴리스는 공성무기 발전사에 있어 한획을 그은 중요한 무기다.

역사속 신무기<18>아이톨리아의 투창

50∼100m 목표 타격… 최적 투척 무기
2007. 05. 14   00:00 입력 | 2013. 01. 05   02:59 수정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26년, 당시 그리스 전장을 지배했던 장갑보병 120명이 전투 한 번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전멸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더 놀라운 것은 창과 방패·갑옷으로 중무장한 아테네 장갑보병을 전멸시킨 상대가 무장·훈련 정도가 빈약한 아이톨리아 농민들로 구성된 반란군이었다는 점이다.
비정규군이 장갑보병과 일전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였지만 아이톨리아군은 아테네 장갑보병과의 직접 전투 대신 투창으로 승부를 걸어 아무도 예측 못했던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훗날 펠타스타이 또는 펠타스트로 불린 아이톨리아 투창병들은 아테네 데모스테네스 휘하의 정예 장갑보병을 격파하고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투창은 고대부터 사용돼 온 가장 기본적인 무기 중 하나이며 예리한 창날과 가벼운 무게로 50∼100m 목표를 타격하는 데 최적화한 투척 무기다. 당시 그리스에서 사용된 투창은 길이 1.1∼1.6m, 무게 1.2∼1.8㎏이었고 고대 유적의 벽화나 부조, 각종 유물을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최적의 투척 방법을 찾기 위해 그리스인들은 창대를 잡는 방법에서 보조기구를 사용하는 방법까지 다양한 투척법을 연구했다. 더 멀리 던지기 위해 한쪽 끝에 손가락 크기에 맞는 고리가 달린 줄을 감거나 나무조각으로 된 전용 창 투척도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적절한 투척방법은 창을 던지는 병사가 더 큰 힘을 쓸 수 있게 해 줬고 날아가는 투창에 힘을 더해 관통력을 배가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투창·투창병이 등장한 것은 페르시아 침공이 끝난 기원전 4세기께로 군사적 발전이 뒤처져있던 그리스에서 다양한 병과·전술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보통 척후병 또는 유격병으로 운용된 투창병들은 몇 개의 투창으로 무장하고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적 장갑보병의 대열을 교란하기 위해 창을 던졌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적과 직접 맞붙어 싸울 필요가 없었지만 칼·단검은 기본적으로 휴대하고 다녔다. 그리고 투창병을 포함한 경무장 보병의 활약은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육중한 방패와 창, 각종 방호구로 중무장한 장갑보병이 더 이상 전쟁의 주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한편 투창을 의미하는 재블린(Javelin)은 16세기 초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한 자블린(javeline)에서 유래한 것으로 시대에 관계없이 현재까지 사용된 모든 투창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